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날을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 처럼 울부짓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쳐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회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난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켤레 또는 조기 한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은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작도 없는 방문을 밀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음성은 통곡이 된다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목계장터
하늘을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제 나루에 아흐레 나를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지리산 노고단 아래 ㅡ황매천의 사닷 앞에서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모르지 않으면서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눈이 가는 것은 웬일일까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을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살다 가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낮은 목소리로 작은 몸짓으로 살갗 아래 분노를 감추고 살다 가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민 노고만을 우러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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