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의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을 너무 오래 본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용기와 비겁함은 매 순간 행해지는 하나의게임이다. 우리는 어쩌면 자유를 얼핏 엿보는 숙명적인 시각을겁내는지도 모르겠다. 감옥 창살 사이로 쳐다봐야만 하는 습관, 차가운 철창을 양손으로 붙잡는 것이 주는 편안함. 비겁함은 우리를 죽인다. 감옥을 안전으로, 철창을 손이 쉴 곳으로 여기는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자유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풍경>을 다시 보고, 비겁함과 자유의 이야기임을 다시알아본다. 부르주아는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을 볼 때 통째로무너진다. 내 자유가 전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두렵다. 나는 미친 사람들 중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가능성은 보통의 부르주아 순응주의자들에겐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설명을 해줄라치면 그들은 단어에 발목이 붙들려용기를 잃고 자유를 잃을 것이다. <노란 새>는 우리에게 이해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 P355
자기비판은 너그러워야 한다. 너무 날카로우면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 어쨌든 내가글을 다시 쓴다면, 이전에 썼던 글과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뭐가 다르냐고?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나의 자기비판은 예를 들어 내가 쓰는 글에 관한 것일 때 그 글이 좋은지 나쁜지 말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이 고통과 깊은 환희가 뒤섞이는, 기쁨이 결국 고통이 되는 지점까지이르지 못하는 것에는 고민한다. 그 지점이 인생의 가시이니까. 나는 우리가 놀라서 "아!"라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의 존재가자기 자신과 최대한으로 만나는 일에 자주 실패한다. 때때로 자신과의 만남은 다른 존재와의 만남 덕분에 이뤄지기도 한다. - P361
내 직관은 글로 옮기려 할 때 더 명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글쓰기는 필수다. 한편으로 글 쓰는 일은 감정을 감추지 않는 방법이고(상상의 비의도적 변신은 다만 그것에 이르는 방식이다), 또 한편으로 나는 글 쓰는 과정 없이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쓴다. 내가 만약 신비로운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감정을 감추는 게 주목적도 아닐뿐더러 감정을 감추지 않고는 그걸 명확하게 옮길 능력도 안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감추는 것은 글쓰기의 한 가지 기쁨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타인에게서 매우 고루하다고 생각했던 신비로운 태도를 자주 취한다. 일단 글로 쓰면, 나는 냉정하게 그것을조금 더 명확히 밝힐 수 있을까? - P382
어쩌면 내가 고집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나는 자연의 신비가 가진, 다른 명료함으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명료함을 존중한다. 또 흙탕물이가라앉으면 물이 맑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물이 맑아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위험을 감수한다. 터무니없는 자유나무분별함 또는 교만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내게는 습관이 됐다. 나는늘 모험을 깊이 지각해왔는데, 여기서 ‘깊이‘라는 말은 ‘핵심적으로‘란 뜻을 의미한다. 모험의 그런 의미가 나를 무질서한 삶과 글쓰기에 대해 더 넓게,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 P3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