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신동엽 시인의 옛집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훨훨 탄다
삼십년 전 신혼살림을 차렸던
깨끗하게 도배된 윗방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시인의 아내는 옛날로 돌아가
집 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닥불 옆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굵고 붉은 낱말들이여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내것은 버려두고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며 비틀대며 너무 멀리까지 왔다
색다른 향내에 취해 속삭임에 넋나가
이 길이 우리가 주인으로 사는 대신
머슴으로 종으로 사는 길임을 모르고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소경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은 천길 낭떠러지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다
천지를 메운 죽음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바보가 되었다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는 사이
우리 몸은 서서히 쇠사슬로 묶였지만
어떤 데는 굳고 어떤 데는 썩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는 천치가 되었다
문득 서서 귀를 기울여보면

눈을 떠라 외쳐대는 아우성 그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동은 터오는데 새벽 햇살은 빛나는데
그릇된 길잡이한테 휘둘리며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는 풀잎의 이슬로 눈을 비벼 뜰 때
샘물 한 바가지 퍼마시고
크게 소리내어 울음 울 때
허둥대던 발길 우리것 찾아 돌릴 때
머슴으로 종으로 사는 길을 버리고
우리가 주인되어 사는 길 찾아 들 때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는 얼뜬 길잡이 밀어제키고
우리가 앞장서서 나아갈 때

책 뒤에

시골이나 바다를 다녀보면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열심히 산다. 나는 내 시가 이들의 삶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을 한다. 적어도 내 시가 그들의 생각이나 정서를 담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 길로 들어선 지 30년이 되었으니 길도 터득이 되었으련만 시는 내게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1988년 4월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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