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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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끼의 [기사단장 죽이기 1,2(문학동네 2017)]

   '기사단장 죽이기' 2권을 줄기차게 붙잡고 있었다. 줄기차다,는 생각은 이 책을 시작할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생각이었다. 읽지 않은 채 쌓아둔 책 더미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꺼낸 것도 평소의 나로선 이례적인 빠름에 속했고. (쉽게 펼치기엔 너무 두껍다는 생각이 책을 받는 순간부터 들었다.)

열심이자 위로인 산책도 미루고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등 온갖 포지션으로 이동하면서 읽기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깊은 밤으로 옮겨 가 있었다. 나로선 참 오랜만의 집중인 셈이다. 다시 '상실의 시대'까지 마치고 나니 일주일이 훌쩍 건너가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시집 한 권, 에세이집 한 권도 읽었으니 온전히 하루끼에 빠져 지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하루끼 소설 중 읽은 것은 '상실의 시대' 와 '스푸트니크의 연인'뿐이었는데 두꺼운 책 세 권을 단숨에 읽었으니 하루끼와 함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읽기를 마치고 바로 이렇게 더듬더듬이나마 앞으로 나가려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하루끼는, 아니 하루끼 소설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본 작가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것 같다. 일본 작가나 하루끼를 싫어하는가 자문해본다면 그건 또 아니다. 하루끼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무수한 책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많기도 하다. 또한 일본 작가의 책도 엄청나서 나는 어디 가서 책 좀 읽는다는 소리는 입도 떼면 안 되겠더라는.)'먼 북소리' '하루끼 잡문집'은 좋아하고 최근에 읽은 '라오스엔 대체 뭐가 있는데요' 같은 류의 생활과 일상이 있는 글에서 읽히는 담담한 노마드의 정신과 담백한 문장들은 흠모하기까지 한다.

   '호시노 미치오' 의 책은 모두 가지고 있고 [여행하는 나무]의 많은 구절들은 수첩에 적어 놓고 겨울 나무같이 마음이 앙상해지는 일터에서 읽을 때면 다시 뛸 힘이 생기곤 하는 애정하고 위로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곁가지가 없는 생활 관찰자의 담백한 그의 글을 훔쳐 와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읽을 때마다 한다.

   '후지와라 신야'의 책도 거의 읽었고 몇 권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소설이라니.

   아직 마음이 닫혀있는 모양이다. 다 잊었다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니었나 보다. 거의 50년이 되어 가는 일인데, 그때의 문장들이 또박또박하다.

그 시절,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면 인문계 고등학교는 뺑뺑이로 정해졌는데 원하는 국공립을 다 젖히고 사립 여고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나름 명문에 속했던지라 교복값에 입학금도 차별이었으니 한숨소리 짙어지는 엄마 몰래 입학식을 포기하고 밤기차를 타고 올라와 버렸다.

언니네서 멀지 않은 집, 세간살이가 그대로 있는 작은방에 잠만 자기로 세를 얻어 녹음테이프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열두 시간씩의 주야 교대 근무 틈틈이 골목에서 골목으로, 전철에서 전철로 여행을 다녔다. 간이 조금 커져서는 왕복 차비가 허락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작은 시골 마을의 들판들, 고만고만한 동네들을 막차 시간까지 기웃거리다 돌아왔다.

   그 방에 있던 책꽂이에서 '대망大望'을 읽었다. 무려 서른두 권짜리 '大望'.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서른두 권의 무게감은 지금 '기사단장 죽이기' 이 두 권의 무게보다 가볍다. 그때의 종이들은 거칠고 두툼했으며 세로줄 쓰기는 불친절했고 여백이 많은 책이었다. 아마 직접 돈을 주고 사지는 않았을 법한 전집이었다. (그 시절에는 책 한 권 사는 일에 엄청나게 공과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까지 신중하게 선택했던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진정으로 궁금하다.) 그 집은 여자아이를 둔 언니보다는 조금 연배가 있으신 부부였는데 그 가족의 구성원 중 아마 남편분의 책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책꽂이에 다른 책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단지 '대망'만이 기억을 점유하고 있다. 정녕 '대망'만 읽은 건지, 기억이 소실된 것인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한번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大望'은 맞춰 두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교복의 다른 이름이었고, 출근하면 마주치는 순간부터 퇴근 때까지 이름 대신 "깽깽이"라 불러대는 고참 언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자신의 빠진 눈알을 주워서 삼켜버리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격적인 카리스마를, 오사카 성의 사쿠라를 굽어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영악스러운 정치적 욕망의 사다리를, 난세를 차근차근 바로잡지만 지루하고 비겁할 만큼 조심성 많은 안전주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릴 때 읽은 위인 전기 속 대통령의 과정을 묘하게 닮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촌에서 올라온 얼뜨기에게 어른들 세상의 감춰지고 위장된 욕망의 이면들을 '大望'에서 만났다.

   유일하게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에게 그런 '대망' 이야기를 써 보냈던 답장에서 번역이 엉망이어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한 줄짜리 평. 내가 서있던 땅이 기우뚱했다. 읽는 재미에 빠져 번역이니 뭐니, 오독이니 뭐니, 생각조차도 안 해본 나는 열등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 됐다. 책을 읽은 의견을 나누는 것도, 일본 소설을 읽는 것도 그때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각이 든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두 번째 읽은 오늘. 그 친구는 기억도 못 할, 어쩌면 나라는 사람도 기억도 못 할 그렇게 오래전의 그렇게 사소한 일이 나에겐 트라우마로 남았다. 매번 그렇다.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받는 상처는 깊은 상흔을 남긴다. 얼마간의 열망이 있기는 하지만 독서 후 토론이라든가 독후감이라든가 하는 일에 서투르고 서투른 탓인지 꼭 하려 애쓰지 않는다. 하긴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으니 그럴 기회도, 일도 없다는 편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리뷰식으로 끄적거리게 되는데·······. 이제는 나름 열심히 써보기로 계획했다. 그 첫 번째가 이제서라니. '그래도 뭐~! 시작이 어디인가, 써볼까? 하고 읽고 쌓아둔 책에 비하면 이제라도 꾸준히 쓰면 '호시노 미치오'를 발가락만큼은 닮게 될지도 모른다고, 혼자 끙끙거려본다.'

   무수한 책을 접했고 활자화된 거의 모든 책에 중독자처럼 선뜻 다가가지만 내게도 예외는 있다. SF 물이나 추리, 공포, 과학 쪽을 기피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 같다. 스티븐 킹, 아가사 크리스트 등 유명하고 방대한 분량을 가진 작가들의 책도 거의 접하지 않았으니 추정이 아닌 결과물로도 분명하다.

   "오늘, 짧은 낮잠에서 깼을 때 '얼굴 없는 남자'가 앞에 있었다. 그는 내가 잠자던 소파 건너편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 없는 얼굴 위 가상의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1권, 단 세 줄의 문장을 읽으며 이 두꺼운 책에게 더 두꺼운 두려움이 드리워졌다. 심지어 두 권짜리라니. 느닷없이 하루끼 소설이라니, 왜에 그동안 요리조리 잘 피해온 그를 결국은 선택해서 지르고 만 것인가라는 자책과 회한은 덤이었다. 무거운 양장본 표지를 다시 덮으니 소제목이 '현현하는 이데아'다. 목을 짓누르는 무거움에 책을 밀쳐두고 며칠, 얼굴 없는 얼굴의 눈동자가 쏘아보내는 이데아에 질려서 책을 요리조리 살펴본다. 하루끼 스타일인지 이번 책에서만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차례에 나오는 제목들이 한 단원의 문장으로 완결된다.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 다들 달에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 멀리서는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숨이 끊어지고 손발도 차가우니 / 지금으로선 얼굴 없는 의뢰인입니다/ ' 이런 식의 배열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책이 안 읽히니 별 허튼짓을 다하고 있군!' 그러나 뼛속까지 소설가인 작가가 그냥 그런 배치를 했을 리는 없다. 내가 안 읽고 즐기지 않을 뿐이지 그의 책은 일 년에도 몇 권씩 출간되고 거의 모든 책이 성공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가이고 매년 노벨문학상에 그 이름이 오르고 있다.

   이 작가의 의도, 신선하군. 글은 바로 글을 쓴 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다. 글의 종류와 상관없이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철학과 일상이 담긴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바로 글이라 생각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글조차 내 삶을 대변하는 내 문장이고 바로 나다. 오래전 [상실의 시대]를 읽던 나에서 지금의 하루끼는 소설 속에서도, 산문집의 그였다. 그 비밀 아닌 비밀을 알아버린 두근거림이 그의 소설을 새롭게 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그림이 있고, 여러 종류의 자동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과 문장들이 담겨있었다. 단지 보여주기식 독서를 하던, '大望'을 읽던 잡식의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일본을 새롭게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의 지리와 환경, 역사들을 대충은 알고 읽는 '기사단장 죽이기' 는 소설 두 권의 느낌에서 멈추기 않았다. 늘 모호하게 따라다니던 경계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직접 보고 있는 듯 재미가 보태졌다. 이렇게 독서는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혼자 고요히 뿌듯했다. 이제는 친구도, 그 친구의 편지도 내용조차 아슴아슴한 '大望'처럼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옛이야기처럼 과거형이 되었다. 더러 나쁜 기억들은 유실되어도 좋다.

   "그래도 역시 유즈 아버지의 저주는 여전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은 듯했다. 그 막연한 기척과 은근한 무게가 지금도 느껴졌다. 그리고 스스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내 마음은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속, 검에 꿰뚫린 기사단장의 심장처럼.

   이윽고 가을의 짧은 낮 시간이 지나고 해 질 녘이 찾아왔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둑해지고 칠흑처럼 매끄러운 까마귀들이 요란하게 우짖으며 골짜기 상공을 가로질러 잠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테라스에 나가 난간에 기대어 골짜기 맞은편 멘시키의 집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수은등에 벌써 불이 들어와 어둠 속에서 새하얀 외벽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테라스에서 고성능 망원경으로 밤마다 남몰래 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을 찾아보는 멘시키를 떠올렸다. 그는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자, 오로지 그 한 가지 목적만으로, 무리한 수단을 써서 저 하얀 집을 손에 넣었다. 거금을 지불하고 번거롭게 품을 들여, 너무 클뿐더러 취향에 맞다고도 하기 힘든 저택을.

   그리고 신기하게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부터 나는 멘시키라는 사람에 대해 지금껏 다른 이에게는 느껴본 적 없는 친밀함을 품게 되었다. 친근감, 아니 연대감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 꼴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내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동기는 이해할 수는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아마다 마사히코가 주고 간 싱글 몰트로 온더록스를 만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아마다 도모히코의 레코드 컬렉션에서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렸다. 일명 〈로자문데〉 라는 작품이다. 멘시키의 집 서재에서 들었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이따금 얼음이 든 유리잔을 흔들었다.

   그날 기사단장은 끝내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리부엉이와 함께 천장 위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데아에게도 역시 휴일은 필요하다. 나도 그날은 한 번도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역시 휴일은 필요하다.

   기사단장을 위해 나는 홀로 술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1권, p483~484]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가장 '하루키'스러운, '하루키' 다운 문장이라 생각되어 옮겨보았다. 읽다 보니 그간 지레짐작으로 멀리하던 '하루키' 소설의 건조함이나 모호함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했다.

아내와 이혼을 진행 중인 초상화가 화자가 친구의 아버지 집에서 만나게 된 그림 속, 기사단장. 또 맞은편 대 저택에 사는 밤이면 망원경으로 다른 집을 살피는 의문 부호로 가득 찬 남자 멘시키. 그로부터 초상화 의뢰를 받고 일어나는 좌충우돌의 상황과 복잡한 관계들 사이에서 자신과 아내, 자신과 그림, 친구 아버지의 역사가 겹치고 얽히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기사단장을 둘러싼 미스터리들이 순간순간 책을 놓게 만들기는 했지만, 저런 문장들을 만나는 느슨함이 좋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만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가 말하는 '오리지낼리티'의 신선함을 느꼈다. 동시대에 이런 담백한 소설가를 가져서 다행이다.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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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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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있었다

 

                             안희연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이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 언덕' 이 주는 생명력에 끌려서 구입한 시집이다.

   '여름 언덕'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광교수원지의 언덕이 그러한데 온갖 종류의 무수한 풀과 꽃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모습은 매번 새롭고도 신비해서 삐질삐질 한 걸음걸이도 가끔은 빠릿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들의 생명력이 워낙 치열해서 조금 무섭다 싶으면 향긋한 풀냄새를 남기고 사라진다. 아쉽다 싶으면 불과 며칠 만에 (정말 며칠 만일까. 느낌이 그렇겠지 아마도.) 다시 쌩쌩해지는 언덕, 그 여름 언덕. 그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생명의 순환이다. 하나로는 나약한 한 뿌리의 풀들의 맹렬한 결속을 매해 새롭게 배우고 감탄한다.

  안. 희. 연.

  처음 만나는 시인인데 시집의 제호에 매혹당했다면 그건 편집자의 의도에 말린 건가 ㅎ 여하튼 세상에도, 마음에도 찬바람 휭휭한 계절에 만난 '여름'은 『불이 있었다』 로 시작된다. 여름에서 단숨에 겨울로 건너왔는데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이, "호주머니 속 언 손" 을 덥히는 따뜻한 불이, 오래 멍하게 불멍을 때리게 한다.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불을 쬐고 있어도, 아무리 이불을 여러 겹 덮어도 등이 휘게 시리고 춥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애초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 먹먹한 추위와 외로움이 전달될까? 단지 "나는 지워진 사람" 이다. 아마도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아프게 인정해야 하는 천형,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슬픔이다.

  이 시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을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결의가 생기는 힘이 있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 손만 내밀어 주어도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는 호소가 떠오른다. 시인은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슬픔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 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어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깨어진 꽃병이 가장 찬란했다는 것을 모르고

심장에 기억의 파편이

빼곡히 박힌 줄도 모르고

 

 

    

  이 '여름 언덕'에서 나는 무수한 슬픔들과 외로움을 조우하겠구나. 겨우 세 번째에 실린 시인데 평생을 읽은 것처럼 시간이 흘러간다. "괜찮아 괜찮아" 시는 등을 토닥인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 --시인의 말-- 중에서

 

   기대해본다. "박소란" 시인을 만나게 해준 창비시선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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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계선
              박정대

풍경들을 지나서 왔지
지나온 풍경들이 기억의 선반 위에
하나둘 얹힐 때
생은 풍경을 기억하지 못해도
풍경은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아주 머나먼 곳에 당도했어도
끝끝내 당도할 수 없었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풍경처럼 울리며
풍경처럼 살아
풍경, 풍경
생을 노래하지

                          시집[삶이라는 직업] 중에서

 

 

이천이십년 십이월 십삼일.

코로나 확진자가 천명이 넘었다.

눈이,

눈이 내린다.

흑백의 풍경 위에 펑펑 내린다.

이 암울한 세상의 먼지처럼

펑펑~

내린다가 아니라 내렸다.

녹아 버렸다.

찰나에 가까울 시간의 변화에 느린 눈을 끔벅한다.

내일부터는 영하 15도의 한파라는데,

벌써 춥다.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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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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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시집[붉은빛이 여전합니까]중에서

 

 

걷.고.싶.다.

먼 곳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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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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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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