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에게 건강과 체력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소설가란 임시의 직업, 과정의 지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소설가란 소설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겠다. 소설가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얘기다. 소설 쓰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결국 그는 매일 소설을 쓰게 될 텐데, 그러자면 건강과 체력은 필수이다. 이건강과 체력은 하루에 십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육체를 뜻하는 동시에, 더 깊은 의미를 가리키는 은유이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들에게 재능은 이미 오래전에, 한 - P52
권의 책으로 소진돼버렸으니까.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체력이 있어야 소설가는 이전의 모든 위대한 소설가들이한 번쯤 맞닥뜨렸을 운명을 만날 수 있다. 이 운명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은 윌리엄 포크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것을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들을 평가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만일 제 모든 작품을 제가 다시 쓸 수만 있다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새로 시도할 때마다 실패하는 것, 그게 바로 데뷔작이후, 그을린 이후, 모든 소설가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움베르토 에코가 "저는 모든 것을 후회해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하거나 이언 매큐언이 "여러 주 동안 다른 하는 일 없이 유령하고만 소통해야 하고, 책상에서 침대로,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왔다갔다해야만 한다"라고, 또 레이먼드 카버가 "한 단편에 스무 가지나 서른 가지다른 수정본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열 개나 열두 개 이하인 경우는 없답니다"라고 말한대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 P53
이 오랜 적폐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989년의 대학생들도, 채만식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이라고 일컫는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개조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3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어떤 풍요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제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 끔찍한 실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해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정부를 투표로 뽑은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 이십 년이 지나 더 많은 평형수를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한 위태로운 여객선을 계약직 선장이 운행한다고 해도, 그래서 이십 년 전의 서해 훼리호와 마찬가지로 이십 년 뒤의 또 다른 여객선이 우리의 손자들을 태우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다. - P64
결국 이런 사회밖에 못 만들어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라앉는 세월호의 모습을 보고 또 보기를, 그리하여 우리처럼 망각하지 말고 어른이 되어서도 꼭 기억하기를, 그 배에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 세월호라는 이름이 잔인하게만 들리는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세월이 약이라거나, 세월이 가면 모든 게 잊힌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지 마라.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 - P64
한 건 약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진실을 모두 알아낼 때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멈춰 있어야 한다. 가라앉는 그 배는 이제 우리가 지킬 테니, 봄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가버린 아이들은 부디 우리를 용서하지도 말고, 이 땅에 미련을 두지도 말고, 좋은 곳으로 떠나기를. - P65
사랑하는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울부짖으며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 신에게든, 권력자에게든, 부자에게든. 흔한 표현처럼 내가 대신 죽겠다고 간청하리라.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가죽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다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라도 해볼 테지만, 죽고 나면 아무 방법이 없다. 유일무이한 그 육체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대상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제 무엇이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의 유일무이함을 증명할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단원고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서서히 침몰하고 한달 보름이 지나는 동안, 보름달이 두 번 찾아오고 맹골수도의조류가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가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그 유일무이한 육체를 잃어버린 부모의 통곡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관되게 하나뿐이었다. 잊지 말아달라는 것. 거기 침몰하는 배 안에 봄꽃처럼 갓 피어난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만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부모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 P68
그러다가 리사 오노가 노래를 끝내는데, "세상만사를 헤아리니까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 가사가 잘 들리지많아 찾아보니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물 위에 둥둥 뜬 거품이라" 거품처럼 물 위를 떠다니던 유일무이한 육신이 한순간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사랑했던 그를 꽉 껴안고 또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진다. 이제 다시는 그 몸을 만날 수 없다. 우리의 무능력한 사랑으로는 이제 그를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비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몸으로는 더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어느 날, 우리에게 바람이 부는 저녁이 찾아오리라. 그때 우리는 가만히, 그저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문득 그 바람이자신에게는 단 하나뿐인 바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렇게 그 바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가 사랑했던 그 육체처럼, 그 바람의 노래는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노래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리라. - P70
이백 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역사의 눈으로는짧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길다. 우리는 그만큼 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백 년 전의 사람들을 상상하면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라는 교황의 선언은 믿기 어려운 복음처럼 들렸다. 신유박해 때 순교해 이번에 복녀가 된 이순이는 처형되기 전 옥중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하지 않던가요. 죽을 사람의 말은 그르지 않으니 눌러보세요." 오늘도 광화문에서는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세월호 유가족이 삼십여 일이 넘게 목숨을 건 단식 중이다. 교황의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면, 이제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때다. - P78
세월호는 침몰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감춰진 치부를 드러내보였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 속보를 접하며 아침을 맞은뒤, 단원고 학생들은 전원 구조됐다는 희소식과, 하지만 그것은오보였다는 뒤이은 비보에 혼란스러운 오후를 보낸 후에야 거꾸로 뒤집힌 여객선의 진실을 직시하는 밤을 맞이했다. TV 화면으로 보이는 것은 선수뿐이었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보는 것은 물에 잠긴 객실이었으니 그것은 고통스러운 직시였다. 마찬가지로 가라앉은 건 채산성을 높이기 위해 과적한 뒤 평형수를뺀 위태로운 여객선이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한국 사회가침몰했다. 불의의 사고는 인과율에 따라 흐르던 시간을 단절시킨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뜻밖의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삶을 다룬다. 가벼운 - P80
접촉사고라 당연히 깨어날 것으로 여겼던 아이가 죽은 뒤, 부부는 자신들이 이제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속의 ‘세월‘이란 이 준엄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지극히 고통스럽고 잔인한 시간을 일걷는다. 그건 원하지 않는 삶으로의 환생 같은 것이라,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남은 이들의 여생을 이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쇼크, 부인, 분노, 회상과 우울증, 용서와 수용, 재출발의 단계를 밟는다는 것은 그간의 대형 참사 유가족에 대한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지켜본 것과 같이 세월호의 침몰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6.25, 4.19, 5.16, 7.4, 10.26, 5.18, 6.10 등의 날짜들과 다르지 않은 의미가 4월 16일에 부여됐다. 세월호 참사를 해상 교통사고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강변해도이 의미는 지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지난 일 년간의 극심한 갈등과 혼란은 이해관계가 서로 상반된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쇼크, 부인, 분노, 회상과 우울증의 단계들을 밟는 과정에서 생성된 삼각파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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