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석조전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비, 백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여러 겹의 달빛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한 사람이 눈을감았다 뜨는 소리는 몇 데시벨일까. 꽃병 속에서 줄기가 짓 - P42

무르는 소리는?

몇 걸음 못 가 돌아봤을 때, 아닌 척 눈을 부릅뜨는 밤이보였다. 실핏줄이 드러나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다. - P43

자귀


오늘부로 너의 모든 계절을 만났어

신비로운 꽃을 피우고
고개를 떨군 채 차곡차곡 말라가고
앙상한 가지 위에 흰 눈을 받아 안는 너의 모든 계절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내 안에서 이야기가 될 수 있게
기다렸어

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
매일매일 건너왔고

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일 거야

내가 볼 때
너도 보았겠지

너는 걷거나 말할 수는 없지만
시간의 목격자가 될 수 있고

내가 어떤 표정으로 네 앞에 서 있었는지는 - P56

오직 너만이 알 테니까

살아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나눠 가진 것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은 것

죽지 마 살아 있어줘
조약돌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거울이 되어주는 풍경들
가라앉은 말이 더 낮게 가라앉는 동안

새잎은 말려 있다
말려 있다가 피어난다
아침, 노트를 펼쳐
펼쳐지는 영혼이라 적을 때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
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 - P57

청귤


오늘 당신은
청귤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설익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법 달다고
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

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
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 있고
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
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흰 천으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기도 하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 P68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 발 한 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 P69

기록기


나는 심전도 그래프의 바늘,
당신의 숨을 대신해서 적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다에 도착해 있군요 언젠가 당신은 흰수염고래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지요 현존하는 짐승 가운데서 가장 큰 짐승, 무리를 이루지 않고 단독 혹은 두세 마리만 산다는, 심장의 질량은 일톤에 달하며 몸 뒷부분엔 흰색 반점이 많다는 이야기.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당신을 이끌었는지 알 수 없지만 흰수염고래를 바라보는 당신의 숨은 고요한 궤적을 그리는군요 흰수염고래는 집을 향해 헤엄쳐가고있네요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가랑비에도 발이 퉁퉁 붓곤하는데 이곳에선 온몸을 흠뻑 담가도 소매끝조차 젖지 않네요 당신은 망설임 없이 흰수염고래 등에 올라타는군요 가라앉았다 솟구쳐 오르기를 반복하며 파도를 일으키는군요 멀어져가는군요 자유롭다고 살아 있다고 느끼나요 그런데 왜눈시울이 붉어질까요 왜 자꾸 창백한 창틀과 바람에 흔들리는 흰 커튼이 떠오를까요 나는 다 기억합니다 우리 함께 지나온 청보리밭 넘실대던 길, 나무둥치에 앉아 숲의 비밀을듣던 시간,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소리, 담요의 촉감과, 흰모래사장에 들개처럼 서서 바라보던 석양까지도...... 당신의 감은 눈 속에 이렇게 넓은 세상이 들어 있을 줄 몰랐어요 이 모든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보고 싶었던 걸 보았을까요 찾았을까요 - P84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켜질 시간이에요

그만 깨어나주세요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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