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일상을 여행하며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며 다시 기억을 여행하는 사람.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래 일했다.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띵 시리즈: 치즈》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하루의 취향》 등을 썼으며 현재 ‘오독오독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이 책은 ‘직장인의 틀‘에서 벗어나 내가 빚는 대로 모양이 바뀌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로망의 종착지인 파리에서 보낸 두 달간의 이야기다. 새롭게 다가온 ‘무정형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해답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은 어느새잃어버린 꿈, 낭만, 취향, 행복 등 나만의 ‘좋음‘들이 번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의 이유를 묻는 건 어리석다. 아무리 촘촘히 대답해도 말과 말이 만드는 성근 망 사이로 사랑은 빠져나갈 수밖에 없으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말과 말 사이를 헤매며 파리에 대한 나의 사랑을 설명해보려 애했지만, 그 어떤 말에도 이 사랑은 담기지 않았다.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까. 무엇을 말해야 내 사랑이 남들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운명적인지, 다시 없을 감정인지 설명하고 싶은 거다. 나만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사랑스러움은 하아... 그걸 어떻게 말로 해. 그러니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시점에도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다. 파리와의 사랑을 하아...... 그걸 어떻게 말로 해.
나는 이 사랑에 대한 설명을 포기한다. 다만 이 사랑의 역사를 말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 P10

어떤 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휴가가 아니라 여행. 여행이 아니라 삶. 한 시기의 삶. 기어이 내가마련한 삶. 20년간의 회사 생활을 저축해 얻어낸 이자 같은 삶.
거기에 합당한 삶의 모양을 취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을 잘게 잘게 쪼개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야금야금 뜯어 먹을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완벽한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파리 살기가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로망 살기의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나의 결단은 곧바로 다른 친구도 울려버렸다. 오랫동안 같이 일하며 오랫동안 같이 퇴사 후 삶을 이야기한 친구였다. 그친구도 나의 계획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눈이 부풀어 오르더니 울면서 또 웃었다. - P16

봄의 파리는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회색빛 파리는 그곳에없었다. 공항 지하철에서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쁘렝평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땅 울렸다. 주저함이 없는 햇빛이었다. 그 햇빛 아래에서 사람들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 이 도시의 본업은 쁘렝땅이었으며, 이 햇빛을 받는 것만이 모두의 의무였다. 공원 잔디밭에 사람들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색색의천을 바닥에 깔고서. 웃통을 훌러덩 벗고서. 몸의 마지막 긴장한 톨까지 다 풀어버리고서, 햇빛이 드는 노천카페에는 빈자리라곤 없었다. 테이블 위에선 와인 잔들이 쨍그랑쨍그랑 봄빛을 튕겨냈고, 분수의 물줄기도 봄빛으로 샤워하며 차르르차르르 시끄러웠다. 봄볕에 말린 이불 같은 공기가 바스락바스락 세상을 채우고 있었고, 높다란 마로니에 나무엔 분홍 꽃, 하얀 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오늘, 이 봄을따 먹지 않는 자, 유죄였다.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단어와 표현 들은 당연히 모두 바뀌었다. 이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우기 키였다. 지우기 키를 더 많이 이용할때, 즉 쓰고 지우기를 더 많이 반복할 때 어떤 소설이 완성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이 사실을 체감하면서 왜 육필로 쓸 때보다 키보드를 이용할 때 소설을 완성시킬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깨닫게 됐다. 키보드를 이용해 컴퓨터에 입력하면 쓰고 지우기를 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242

자신이 쓴 문장들을 지우는 일은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행위다. 조르조 아감벤은 「창조행위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예술에 품격을 부여하는 저항"이라는 말로 작가의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정의했다. 나는 문장들을 지우는 일이야말로 이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제목은 1987년 질 들뢰즈가 파리에서 가진 강연회의 제목과 같다. 따라서 모든 창조행위를 무언가에 대한 저항행위로 규정한 것은 들뢰즈가 먼저였다. 아감벤은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라는 게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왜 창조행위가 저항행위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잠재력을 뜻하는 ‘힘dynamis‘과 행동을 통해 표출된 에너지인 ‘행위energeia‘를 구분한 뒤, 잠재력을행동의 유보, 더 나아가 힘의 부재가 아닌 ‘~하지 않을 수 있는힘‘으로 정의한다.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는 바로 여기에 연결된다. - P243

이처럼 책 중심 시대의 독자는 혁신적 테크놀로지로서의페이지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건 학자뿐만 아니라 소설의 독자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소설의 독자는 스토리텔러가 들려주는대로 이야기를 쫓아가던 이전의 청자들과 달리 자율적인 읽기가 가능했기 때문에, 진부한 부분은 건너뛰고 난해한 부분은 되돌아가 반복적으로 읽으며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모더니즘은 바로 이런 자율적인 독자를 상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자율적인 독자와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게 바로 물질로서의 페이지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이 물질로서의 페이지이며, 이 페이지는 최종적인 것이라 불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자율적인 독자는 깊이 있는 독서를 할수 있다. - P249

사실 이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킨 실체는 지우기 키가 아니라 컴퓨터 화면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LCDliquid crystal display 창을 본 것인지는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난 일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페이지를, 텍스트를,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우려한 문자언어의 완결성과 불변성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목격한것이다. 나는 이 ‘액정 liquid crystal‘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상태에 있는 물질이라는 이 액정 속에서 책중심 문화를 유지하던 텍스트는 조각조각 나뉘어진 채 녹아내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문자언어의 예술성을 담지했던 표현력과수사력 역시 유실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문명사적 전환이라면, 아감벤의 어투를 빌려, 그것을 읽지 않고쓰지 않는 힘을 유지한 채, 이제 액정 안에서 읽고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P254

이 지체가 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개입돼 있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교한 시계장치와같이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지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결과의 시간은지체되거나,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인과율의 세계, 과학의 세계, 근대성의 세계를 학습하면서도 끊임없이우연과 신화와 운명의 세계에 매료됩니다. 이따금 저는 극지방의 겨울을 상상합니다. 몇 개월간 밤이 계속되는, 그런 세계 속에 제가 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때 제가 낮을, 빛을 희망한다면 어떨까, 언젠가 그 빛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도 긴 밤 안에서 죽는다면 또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희망은 지체되다가 결국에는 영영 실현되지 않겠지요. 소망하는 바를 가졌을 때 개인이 직면하는 것은 이처럼 희망이 유예된 시간입니다. - P295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간신히 살아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저절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사이에 인과의 다리를 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소년의, 그토록 짧은 약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 P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이 찾아오는 것, 어쩌면 그게부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자란 고향의 풍토때문이다. 만약 내가 서귀포나 청진에 살았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삼월에는 들어갈 때의 날씨와 나올 때의 날씨가서로 다른데, 이는 춘분이 지나면 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달이 한 번 차오르고 나면 부활절이다. 그래서 부활절은 삼월 하순에서 사월 하순까지, 그 한 달 안에 찾아오게 되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늦잠에서 깨어 동네 벚나무들이모두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요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동네가 온통 벚꽃의 환한 빛이라는 게, 어린 시절 내고향에서 맞는 부활절 아침의 느낌이었다. - P89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만을 볼 뿐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이 세계를 다르게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슬픔에 잠긴 마리아 막달레나와 절망에빠진 두 제자가 처음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그 상황에서 예수를 알아본다는 건 빛을 알아본다는 뜻이고,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동네 꽃들이 모두 피어나던, 내 고향의 부활절 풍경이그런 새로운 빛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짐작만 할 뿐. - P94

잠수하기 전, 소년의 옆에는 소녀가 있었다. 서로 학교에그런 학생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인 사이였지만 그 순간 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물이 복도로 세차게 밀려드는 어느 순간 소년은 소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잠수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 손을 놓은 게 너무나 미안해서 졸업할 때까지 소년은소녀의 교실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으로 소년은 이 년 만에야 소녀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를 낸 셈이다. 이용기에 소녀의 중학교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가세해 셋은 제주도로 스무 살의 졸업여행을 떠났다. 열여덟 살 무렵의 사진으로만 남은 친구들과 섭지코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며 셋은 문득 그게 자신들의 스무 살 첫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끝이 아니라 출발이라는 것을. 아울러 자신들은 스스로 일어섰다는 것을. - P97

"그런데 꿈에서는 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시점이었어요. 제가 그 아이가 되어서 그 일을 바라보는 거예요."
아이들의 시점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침몰하는 그 배를 무기력하게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본 어른들인데,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소년이 그 일을 대신한 셈이었다. 구조 책임자는 청문회에 나와서 추궁을 받자, "제가 신입니까?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합니까!"라고 항변했다.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분하다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이라면 당신도 똑같았으리라는 것,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것, 그러지 않아주니 답답하고 분하다는 것.
이건 충분히 가능한 마음이리라. 어른들이 이런 가능한 마음을 꼭 붙들고 있는 동안, 그 소년은 어떤 꿈을 꿨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으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꿈. 가능한 마음들이 저마다 자기부터 이해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런 세상에서, 소년은 그런 불가능한 꿈을 꿨다. 글쓰기에도 꿈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꿈을 꾸기 위해서 작가가 신이 될필요는 없다. 아니, 그 누구도 신이 될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P98

맹골수도에서 떠오르는 세월호의 선체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세월호의 인양은 지난 삼 년 동안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억압해온 사회적상식을 복원하고 이 나라를 정상 국가로 복귀시키는 일의 첫단계다. 박근혜 정권은 일찌감치 세월호를 인양했어야 했다. 이일을 자신의 탄핵과 연계시킨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악의적인 마음도 없이 담담하게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오네"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완성됐다. 여기에는 어떤교훈이 있을 것인가?
인양 과정을 전하는 뉴스를 지켜보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뒤의 여러 날들이 떠올랐다. 혼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과고통의 날들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도를 지켜봤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고비들을 넘기고 인양에 성공했다는 뉴스에 진심으로 기뻤다는 사실이다. 이 기쁨의 경험은 소중하다. 애당초 건강한 공동체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경험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기쁨이니까. 이 기쁨은 조금씩 우리사회가 상식을 되찾고 있다는 신호다. - P103

그러나 주장과 달리 그들은 전혀 무지하지 않았고 무능하지 않았다. 무능 안에서 그들은 많은 일을 했다. 예컨대 그들은거기 맹골수도 아래 누워 있던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았다. 이를두고 무능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가족들 앞에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를 두고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지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진상을 외면한 그들이 무엇을 알았다는 뜻일까?
그건 그들이 진상이 아닌 허상을 알았다는 뜻이다. 2014년여름, 진상을 요구하는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태도 변화는 바로 이 헛것의 감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헛것의 감각은 ‘공 - P104

통 감각common sense‘이라고 말할 때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그들과는 대화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환영을 보고 환청을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상식적인 게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생각한다. 초월적이라는 건 이 세상을 뛰어넘는다는 뜻, 그러니까인양된 배의 뒤쪽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세월‘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바다. 이 세상을 뛰어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는 때로 이성과 상식에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정치는 초월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지지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들이 적으로 보이는 환영과,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정권에 위해를 가하려는 음모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환청에 사로잡혔던박근혜 정권은 종교적 맹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초월적 감각에 의해 스스로 붕괴됐다. 붕괴된 그 자리에서 세월호가 인양되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 어젠다는이렇게 완성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 P105

새벽 세시가 아니었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일산 호수로 교차로가 보이는 내 책상에서 바라볼때, 새벽 세시는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파도 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뜸해진다.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와 있는 것과 같으니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다. 글쓰기 가장 좋을 때의 나는 가장 고독한 나다. 작가를 꿈꾼다면, 피할 수 없는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꾼다 하더라도 고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도저히 불가능할것 같은 미래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때든. 새벽 세시에 라디오를 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다고 해도 심야 라디오는 방송되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 있다면, 그게 바로 심야 라디오의 본질이리라. 한사람을 위한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보다 더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것.
- P117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올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는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 P1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에게 건강과 체력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소설가란 임시의 직업, 과정의 지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소설가란 소설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겠다. 소설가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얘기다. 소설 쓰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결국 그는 매일 소설을 쓰게 될 텐데, 그러자면 건강과 체력은 필수이다. 이건강과 체력은 하루에 십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육체를 뜻하는 동시에, 더 깊은 의미를 가리키는 은유이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들에게 재능은 이미 오래전에, 한 - P52

권의 책으로 소진돼버렸으니까.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체력이 있어야 소설가는 이전의 모든 위대한 소설가들이한 번쯤 맞닥뜨렸을 운명을 만날 수 있다. 이 운명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은 윌리엄 포크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것을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들을 평가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만일 제 모든 작품을 제가 다시 쓸 수만 있다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새로 시도할 때마다 실패하는 것, 그게 바로 데뷔작이후, 그을린 이후, 모든 소설가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움베르토 에코가 "저는 모든 것을 후회해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하거나 이언 매큐언이 "여러 주 동안 다른 하는 일 없이 유령하고만 소통해야 하고, 책상에서 침대로,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왔다갔다해야만 한다"라고, 또 레이먼드 카버가 "한 단편에 스무 가지나 서른 가지다른 수정본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열 개나 열두 개 이하인 경우는 없답니다"라고 말한대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 P53

이 오랜 적폐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989년의 대학생들도, 채만식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이라고 일컫는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개조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3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어떤 풍요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제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 끔찍한 실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해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정부를 투표로 뽑은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 이십 년이 지나 더 많은 평형수를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한 위태로운 여객선을 계약직 선장이 운행한다고 해도, 그래서 이십 년 전의 서해 훼리호와 마찬가지로 이십 년 뒤의 또 다른 여객선이 우리의 손자들을 태우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다. - P64

결국 이런 사회밖에 못 만들어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라앉는 세월호의 모습을 보고 또 보기를, 그리하여 우리처럼 망각하지 말고 어른이 되어서도 꼭 기억하기를, 그 배에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 세월호라는 이름이 잔인하게만 들리는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세월이 약이라거나, 세월이 가면 모든 게 잊힌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지 마라.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 - P64

한 건 약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진실을 모두 알아낼 때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멈춰 있어야 한다. 가라앉는 그 배는 이제 우리가 지킬 테니, 봄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가버린 아이들은 부디 우리를 용서하지도 말고, 이 땅에 미련을 두지도 말고, 좋은 곳으로 떠나기를. - P65

사랑하는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울부짖으며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 신에게든, 권력자에게든, 부자에게든. 흔한 표현처럼 내가 대신 죽겠다고 간청하리라.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가죽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다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라도 해볼 테지만, 죽고 나면 아무 방법이 없다. 유일무이한 그 육체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대상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제 무엇이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의 유일무이함을 증명할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단원고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서서히 침몰하고 한달 보름이 지나는 동안, 보름달이 두 번 찾아오고 맹골수도의조류가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가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그 유일무이한 육체를 잃어버린 부모의 통곡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관되게 하나뿐이었다. 잊지 말아달라는 것. 거기 침몰하는 배 안에 봄꽃처럼 갓 피어난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만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부모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 P68

그러다가 리사 오노가 노래를 끝내는데, "세상만사를 헤아리니까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 가사가 잘 들리지많아 찾아보니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물 위에 둥둥 뜬 거품이라" 거품처럼 물 위를 떠다니던 유일무이한 육신이 한순간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사랑했던 그를 꽉 껴안고 또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진다. 이제 다시는 그 몸을 만날 수 없다. 우리의 무능력한 사랑으로는 이제 그를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비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몸으로는 더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어느 날, 우리에게 바람이 부는 저녁이 찾아오리라. 그때 우리는 가만히, 그저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문득 그 바람이자신에게는 단 하나뿐인 바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렇게 그 바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가 사랑했던 그 육체처럼, 그 바람의 노래는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노래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리라. - P70

이백 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역사의 눈으로는짧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길다. 우리는 그만큼 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백 년 전의 사람들을 상상하면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라는 교황의 선언은 믿기 어려운 복음처럼 들렸다. 신유박해 때 순교해 이번에 복녀가 된 이순이는 처형되기 전 옥중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하지 않던가요. 죽을 사람의 말은 그르지 않으니 눌러보세요."
오늘도 광화문에서는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세월호 유가족이 삼십여 일이 넘게 목숨을 건 단식 중이다. 교황의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면, 이제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때다. - P78

세월호는 침몰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감춰진 치부를 드러내보였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 속보를 접하며 아침을 맞은뒤, 단원고 학생들은 전원 구조됐다는 희소식과, 하지만 그것은오보였다는 뒤이은 비보에 혼란스러운 오후를 보낸 후에야 거꾸로 뒤집힌 여객선의 진실을 직시하는 밤을 맞이했다. TV 화면으로 보이는 것은 선수뿐이었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보는 것은 물에 잠긴 객실이었으니 그것은 고통스러운 직시였다. 마찬가지로 가라앉은 건 채산성을 높이기 위해 과적한 뒤 평형수를뺀 위태로운 여객선이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한국 사회가침몰했다.
불의의 사고는 인과율에 따라 흐르던 시간을 단절시킨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뜻밖의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삶을 다룬다. 가벼운 - P80

접촉사고라 당연히 깨어날 것으로 여겼던 아이가 죽은 뒤, 부부는 자신들이 이제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속의 ‘세월‘이란 이 준엄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지극히 고통스럽고 잔인한 시간을 일걷는다. 그건 원하지 않는 삶으로의 환생 같은 것이라,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남은 이들의 여생을 이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쇼크, 부인, 분노, 회상과 우울증, 용서와 수용, 재출발의 단계를 밟는다는 것은 그간의 대형 참사 유가족에 대한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지켜본 것과 같이 세월호의 침몰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6.25, 4.19, 5.16, 7.4, 10.26, 5.18, 6.10 등의 날짜들과 다르지 않은 의미가 4월 16일에 부여됐다.
세월호 참사를 해상 교통사고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강변해도이 의미는 지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지난 일 년간의 극심한 갈등과 혼란은 이해관계가 서로 상반된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쇼크, 부인, 분노, 회상과 우울증의 단계들을 밟는 과정에서 생성된 삼각파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계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계와세계의 일어남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인도하는도 닦음을 천명하노라. - P7

걸어서는 결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계를 알고 슬기롭고
세계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계의 끝을 알아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 P7

자신의 밖으로는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세계의 끝을 볼수 없다는 말은, 내게 바깥을 향해서는 아무리 외쳐도 대답을들을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대답을 들으려면 세존의말씀대로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리라. 그 일이 내게는 글쓰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 P7

없는 일들이 내게 혹은 이 세계에 일어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한 일은 뭔가를 끄적이는 일이었다. 이런 끄적임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게 어떤 글이든, 쉽게 쓰여지는 글은 없다. 이런 식이다. 문장을 하나 쓴다. 그다음에는 침묵이다. 그러다가 문장 하나를 더 쓴다. 그러고는 다시침묵이다. 문장을 쓸 때마다 만나는 이 침묵은 완전한 무無처럼느껴진다. 그때 나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인식의 끝에서 더듬거리는 중이다.
그렇게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의 무와 대면한 뒤에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지난 십 년간 내가 끄적였던 대부분의 글자들은 이렇게 무를 대면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다. 끝까지 쓴 글마저도 결국 질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드물긴 했지만 마지막 문장을 쓰기도 전에 어떤 대답을 얻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최초의 끄적임에서 완성된 글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는 어떤 문장들이 저절로 쓰여지는 것을경험했다. 그 문장들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시인 백석이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쓴 것과 같이. - P8

오래전의 일이다. 대학에 입학하니 고교 시절과 달리 시간이 남아돌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나는 해결책을찾았다.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끄적이는 게 좋았다. 쓸게 있으면 그걸 쓰고, 쓸게 없으면 책에서 찾은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적었다. 그렇게 자주 쓰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는 형편없었지만, 시를 쓰는 나는 근사했다. 눈에 띄는것을 적느라 자주 길에 멈춰 서야만 했다. 알고 보니 시를 쓴다는 건 책의 문장을 베껴쓰는 일과 비슷했다. 그제야 나는 이세계가 얼마나 정교한 곳인지 깨닫게 됐다. 나는 이 걸작의 세세한 부분을 제대로 베낄 수 없었다. - P15

요컨대 카프카에게 일기란 사전에 규정된 형식이 없는 글쓰기, 따라서 완벽하게 쓴다는 강박 없이 쓸 수 있는 글쓰기였다. 사전에서는 일기를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나라면 ‘읽는 사람이 없는, 매일의 글쓰기‘라고 말하겠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백년뒤에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했다면 카프카도 이처럼 두꺼운 일기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프카 역시 자신의 일기를 지우곤 했는데, 그건 일기의 목적이 쓰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 P17

그러나 도깨비도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두 번 이상 삶을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실수투성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당연하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메모 앱인에버노트의 광고 카피는 ‘Second Brain‘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나 해야 할 일 등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대신 에버노트에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기를 상품화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 광고 카피는 ‘Second Life‘ 가 될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말한 자기이해란 바로 이런뜻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 P20

그러니 ‘작가선언 6.9‘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내 용산을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늘 도망만다녔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운이들이 철거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철거민들이 용산에만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용산‘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이는 결국 또 다른방식으로 우리의 비정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어설픈 자의식, 모든 ‘현장‘에 다 참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용산에 한번 가봤네 자위하는 것으로 끝날 거라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는 설익은 합리화. 내가 용산에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나, 한두 명 더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만성화된 패배의식과 습관화된 무관심...... 더 나열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단한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윤리의 부재. 이는 물론 "내 집, 내 가족, 내 돈과 내 일이 아니면 어디에도 마음 쓸 시간을 내지 못하게 하는"(이명원)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크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 P46

여기에는 분노도 기쁨도 없으니 「홍염」과 비교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충분한 애도에 실패한 문장들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밤의 그림자에서 이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본 작가도 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김동인은 「감자」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게 그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검은 그림자는 찌꺼기처럼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애도를속히 완결지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해 떨쳐버릴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문학의 일이다. 그러므로 영구히 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날마다 노동자와 일꾼과농부처럼, 우리에게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 - P49

그게 소설이든 시든,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면, 그건 지금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일어났다는 뜻이다. 불은 결코 홀로 타오르는 법이 없다. 그러니 그 불은 바깥 어딘가에서 그의 내면으로 번졌으리라. 하지만그 불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은 어디에서든 옮겨붙을 수 있으니까. 불은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서도, 수천 년전에 죽은 사람에게서도 전해질 수 있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천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그 불은 원래의 열기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순식간에 번져간다. 그게 불의 속성이다.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젊은이의 가슴속에서 이는 불 역시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그는 이 열기에 놀란다. - P50

그러나 이 불은 곧 찾아들 것이다. 그것 역시 불의 속성이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또 그만큼 빨리 꺼진다. 그러므로 모든소설가들의 데뷔작은 검정색이어야 한다. 그건 어떤 불이 타오르고 남은 그을림의 흔적이니까. 예민한 작가라면 첫 작품을 다쓰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늦더라도 두번째 책을 펴낼 즈음이면 누구라도 자신의 데뷔작이 검게 그을렸다는 사실을, 하지만 두번째 책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시인과 소설가의 길은 갈라진다. 시인은 계속 불을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이제 불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필요한데, 예컨대 건강이나 체력 같은것이다.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가 "긴 소설을 쓰는 것은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해요. 신체적인강함이 예술적인 감수성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라고 말한다면놀랄 사람이 많지 않겠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마르케스의 말을들을 때도 과연 그럴까?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