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알코올사용장애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참는다면 며칠이나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금주가 계기가 되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인터넷에서 중증 알코올중독자의 사례를 검색하며 조금은 우쭐한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정말 심하네. 나는 이 정도는아니지.‘ 갑자기 피부과에 가서 리쥬란힐러에 대해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 온라인쇼핑몰에서 본 스웨터가 품절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금주를 하는 동안 이미 코트와 청바지와 구두를 구매했으면서.
알코올사용장애가 고통, 욕망, 결핍을 즉각적으로해결하려는 상태라면, 지금의 나는 그 충동을 다른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상태다. 새로운 대상에 매료되 - P90

고 그 매료가 일으킨 충동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한잔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속삭임은 ‘피부 시술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저 스웨터를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로 바뀐다. 갈망이 끝없이 이어지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을 갈망할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에 새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살면 행복해질 거야.‘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내가 중독자라는 사실만 명백해진다. 캐럴라인 냅이 말했듯 소비사회의 특징적 신념은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알코올이 아니라도 ‘욕망을 쫓으라‘ 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 P91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만큼, 벤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의 말처럼 늙은이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빨리 걷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거나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기억력은 빠르게 감퇴하여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는 데 애먹을 것이다. 모든 공간을 점령한 듯 보이는 젊은이들을 관망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이 세상을 차지했다고,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고 옹색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리고 마흔여섯 살 가을 더는 젊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을, ‘속수무책으로 나이들기 시작한 첫날‘을 떠올릴 것이다. - P105

그러나 정신적 지지대만 있으면 우리는 상실과 변화 사이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까? 우리의 삶은 진정 몰락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은 끝내 노화하지 않을까? 견딤의 태도를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체념으로? 집착으로? 의연함으로?)의 차이일 뿐, 결핍은 결핍으로 남아 언제까지고 메워지지 않는 것 아닐까? 외모강박으로 표면화된 나의 두려움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 그 자체보다 내가 잃은 것으로 초래되는 균열이 아닐까?
균열은 삶의 곳곳에서 징후처럼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중심에서 밀려나는 불안으로, 시간을 유예하려는 헛된 시도로 나는 과거의 방식으로 더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면서, - P108

새로운 방식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자주 비틀거린다. 젊음의 상실에 잇따르는 것은 허방을 딛는 감각이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상태.
전신거울 앞에 서는 일은, 알고 있는 것과 겪고 있는 것 사이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다. 영혼의 노예가된 자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지적 이해와 정서적 경험이 충돌하는 모순적 내면인지 모른다. 지적인 사람도 노화와 쇠퇴, 환대받지 못하는 현실로 말미암아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 다시금 외모강박에 사로잡힌 나는 오늘도 내면의 전신거울 앞에서나의 몸과 이목구비를, 처지고 겹치고 불거지고 주름진 살을 면밀히 뜯어본다. 이 가학 행위를 통해 나이듦을 말하기에는 젊고, 젊음을 말하기에는 나이든 나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 P109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의 전환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반려동물보다 확장된 개념을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해러웨이 선언문 중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거대하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애정을 받는 동물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구성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하는 모든 유기체적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 범주는 - P156

쌀, 꿀벌, 장내 세균총까지 포함하며 공구성과 유한성, 불순성과 역사성, 그리고 복잡성을 전제한다. 20반려동물이 인간의 대용물이나 가족으로 기능한다면, 반려좋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자들 사이의관계적 생성의 장이다.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것은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난 ‘얽힘entanglement‘의 존재론적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공동으로 존재를구성해가는 ‘함께ㅡ되어감becoming-with‘의 과정이다."
나의 ‘얽힘‘은 내가 마음쓰지 않았던 것을 마음쓰게 한다. 산책을 하다가 개미를 밟지 않으려 걸음을멈추고, 호동이가 한참 냄새 맡은 나뭇잎을 집으로가져온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낸 이들에게 하릴없이 원망을 품다가, 나 또한 이 세상에서 더없이 유해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수한 생명체가 얽혀 있음을 돌연히 체감하는 ‘함께ㅡ되기‘의 순간, 어딘가에 있지만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비인간을 떠올리며, 감응하지만 개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 P157

반려인 동시에 타자인 나의 개는 양가성으로 인해수많은 질문을 불러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너의 인간적 자질인가. 나에게서 사라졌거나 사라졌다고 믿는 너의 야생적 본성인가? 내가 너와 소통한다면 나는 무엇을 소통이라 믿는가? 너의행동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인가, 비언어적 교감의순간인가? 너와 내가 닮았다면 그 유사성은 인간성인가, 짐승인가? 언제나 수긍하고 마는 것은 내가타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 알지 못하기에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또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인가,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인가? 아무에게도선택받지 못한 이 개가 나를 선택했다고 느낀 순간그 감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 P160

관계에서 선택하는 쪽은 인간이고 선택받는 쪽은비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물을 인간의 의도와 감정에 반응하는, 무력하고 순응적인 객체로만 보는 시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호동이는 사유나 담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사고방식과 삶의 형태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나를 새로운세계로 데려간다. 호동이의 입양 공고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작고 하얗고예쁜 개는 아니지만......"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이 개에게 선택받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사건 가운데 하나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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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삶의 전환점이 될 만큼 중요한 일인지몰랐지만, 돌이켜보면 개인의 역사에서 변화를 일으킨 계기가 된 일이 있다. 나에게는 체리빙수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아침에는허기를 느끼며 깨어났고, 깨어 있는 내내 허기가 가시지 않았으며, 밤에는 허기에 허덕이며 잠들었다. 나는 언제나 배고픔에 시달리는 상태인 동시에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에도 시달리는 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굶기와 먹기라는 한계선을 오가는 전쟁이었다. 절제와 충동이 대립하는 전쟁이었다. 물론 식욕을 참으려고 애쓰는 일은 일반적으로다이어트라고 표현하지, 전쟁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몸을 전장으로 삼는 전쟁이었다. 본능적 욕구를 억누르는, 절제력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허기와 욕망이 충돌하는, 음식과 관련한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는 전쟁.
그러나 (물리적 허기든 정신적 허기든) 허기를 채워주는 것은 음식이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도시락을 꺼내놓고 먹었다. 가족들이 잠들면 불 꺼진 주방으로 숨어들어 냉장고를 열고 맨손으로 반찬을 집어 허겁지겁 입안에 욱여넣었다. 피자 한 판 - P69

을 몽땅 먹어치운 뒤 토하거나, 치킨을 상자째 먹고나처 설사약을 집어삼켰다. 록산 게이는 「헝거』에서
"나는 배고프지 않으면서 배고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 허기는 마음과 몸과 심장과 영혼에 모두 깃들어 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것이무슨 상태인지 안다.
하루종일 공복감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허기라는 형벌에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배고픔이라고 여긴 것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10대 초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결핍감, 10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진 가능성,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는발레리나의 꿈, 열패감에도 불구하고 놓아지지 않는희망, 그 모든 것이 허기라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환원되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허기란 내가 가지지 못한 몸이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몸에 대한 욕망이었으며, 내가 가지지 못한 몸에 대한 욕망의 좌절이었다. - P70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네 권의 논픽션을 완성했다. 원고 마감을 어기거나 미루지도 않는다. 취재나 강연에 늦은 적도 없고, 준비를 소홀히 한 적도 없다. 나의 일상은 잘 유지되고 있다. 집은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가구와 바닥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으며, 모든 물건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 관리비나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고, 나의 능력치를 넘어서 출판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다. 외출할 때는 깔끔하게 옷을 입는다. 옅게 화장하고 질 좋은 핸드백과 구두를 착용한다. 귀가하면 구두를 신발장에 넣고, 핸드백 속의 물건을 제자리에 수납하며, 옷을 옷걸이에 건다. 나는알코올중독자의 이미지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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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 논픽션을 썼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머니의 삶을 인터뷰하고 해석을 붙여완성한 공동 회고록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이야기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 P-1

어떤 이야기는 ‘말의 결핍‘ 속에 존재한다. 말하지않음도 말하지 못함도 아닌 다만 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 아직 나의 것이 아닌 말, 미처 건너오지 못한 말, 부재하고 지연된 말이 결핍 속에 머문다. 여기는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갇힌 곳, 동시에 새로운말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여백이다. 도착하지 않은모든 부적절한 말이 이곳에 있다. 우리가 가진 문법을 부수고, 모르는 세계를 열어줄 말이.
글을 쓰는 동안 ‘무엇을 썼는가?‘보다 ‘무엇을 쓰지 못했는가?‘에 더 오래 머물렀다. 즉, 말의 충만이아니라 말의 결핍에 폭력에 대해 쓰려고 하면 몸이굳었고, 통증에 대해 쓰려고 하면 어휘가 떠오르지않았다. 욕망이나 중독은 부끄러움이어서 내면의 감시자를 잠재우지 않고는 한마디도 적을 수 없었다. 쓰지 못한 이야기는 끝내 나의 말이 되지 못했으나, 그 결핍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증명이었다. - P7

원고의 절반은 지난가을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에, 나머지 절반은 돌아온 후에 쓰였다. 치앙마이에서 지냈던 석 달 동안 나는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다. 낯선 언어의 영토에서, 모국어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언어에 대해 정확하게는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세상은 누구의말을 듣는가?
백인 남성, 영어 원어민이라는 정체성은 전 세계어디에서나 통용되는 특권이었다. 그들은 말할 수있는 자리를 차지했고, 사소한 말에도 반응을 얻었으며, 조금만 말해도 배려받았다. 아시아 여성에 주류 언어 바깥의 존재인 나의 말은 대부분 도착하지못했다. 느리고 불완전한 외국어로 말을 이어갈 때, 내 말은 들리지 않거나 기다려지지 않거나 이해받지 못했다. 발음이나 문법의 문제라기보다. 세계를구성하는 질서와 태도의 문제였다.
언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험은 말의 결핍을심화한다. 극단으로 치달은 결핍은 침묵이 되고 침 - P8

묵은 존재를 삭제한다. 이방인은 종종 입 없는 자가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 섬세하게 단어를 고르는사람, 사려 깊은 표현을 찾아내는 사람, 정확한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 경애하는 작가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어눌한 말투를가진 사람, 알아듣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는 사람, 말할 틈새를 찾느라 눈치를 보는 사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발음하려다 말이 가로채이는 사람, 끝내이해받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나는 종종 언어의 타자였기에, 두 언어의 경계에서 말을 찾아 헤매는 일은 낯선경험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기억에 목소리를 부여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오래 말을 잃었던가? 욕망의장소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지배자의 언어를흉내냈으며,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하는 관습을 의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세상이 정해놓은 문법을 내면화했던가? 세상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세상이 들어주는 말을 하려고 나는 얼마나 오래 내가 아닌 채로 살았던가? - P9

침묵은 우리를 보호한 적이 없다는 오티 로드의 선언으로부터, 여자가 욕망의 장소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면 표절을 하는 것이라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단언으로부터, 타자와의 얽힘을 통해 공동의 세계를구성하려는 도나 해러웨이의 시도로부터 자기 파괴의 서사를 해부하는 캐럴라인 냅의 탐구로부터 나는 나아갔다. 이 입 없는 자들과의 연대가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리라 믿었다.


‘말의 결핍‘이 말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라면 ‘결핍의 말은 도착하지 않은 자리에서 태어난 말이다. 침묵의 잔해에서 부서진 언어를 재건하고, 부서진 언어를 낯선 문장으로 창조하기. 말의 결핍과 결핍의말 사이에서 더디게 쓴 이 글들은 완결된 진술이 아니다. 다만 부적절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균열을 일으키려 노력한 발화다. 나는 말이 도착하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2025년 가을
하재영 - P13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 정신이 아득
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죽는구나....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며 바깥으로 달아난다. 욕
설이 들리고 뒤통수에 소지품과 옷가지가 날아
든다. 나는 반 벌거벗은 채 맨발이다.


이 문단을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책상 앞을 서성이며 일주일이 걸렸다. 아니, 그 일이 벌어진 날로부터 십수 년이 걸렸다.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아니기도 했다. 막상 쓰고 보니 이 사건이 오랫동안마음에 품고 살 정도로 대단한 비밀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여자에게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도.
이 경험이 흐름과 인과를 갖춘 ‘이야기‘였다면 글쓰기는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이야기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도 아니다. 고착된 채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일 뿐이다. 기억과 ‘외 - P19

상기억‘은 다르다. 기억은 전개하는 이야기 속에 통합된 언어적 서사인 반면, 외상기억은 맥락 없이 감각과 심상으로 각인된 비언어적 파편이다.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자네는 외상기억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사실상 기억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않은 것을 말하려는 일‘이다. 시간은 멈춰 있고 감각으로만 남은 장면
ㅡ‘얼어붙은 기억frozen memory‘ ㅡ을 언어로 옮기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 P20

침탈당한 권리를 되찾거나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는 행위는 너무나 거대하여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바는 스스로 봉인해버린 시간을 해제하는 일이다.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외상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존자의 임무를 발견하고 싶다. 생존만으로도 버거운데 임무라니, 몇 년 전의 나였다면화가 났을 것이다. 물론 어떤 외상은 평생 애도만 하기에도 검질기다. 바깥에 나가거나 다시 사람을 믿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주디스 허먼의 말처럼 피해자는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이해한 뒤에야, 외상경험에 담긴 의미를 삶에 통합시킬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염원한다. 두려움, 무력감, 고립감이 지나갔을 때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기를. - P29

육체적·정신적 침범을 겪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임무를 발견한다면, 망각을 거부하고침묵을 거부하고 은폐를 거부하고 허구를 거부하고낙인을 거부하고, 그렇게 지금껏 거부하지 못했던모든 것을 마침내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영영 숨어 있기를, 눈에 띄지 않기를,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공간을 차지하고, 장소를 차지하는 것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지않을까? 어쩌면 비언어적 감각을 언어로 옮기려는불가능한 시도 또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목이 졸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처럼. - P30

주디스 허먼이 지적했듯, 천재지변 같은 재난이일어났을 때는 자기 일처럼 비통해하면서도 인간이인간을 고통에 빠뜨렸을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느라 행동을 미루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는 것을 본다. 가해자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기에 자주 성공한다. 피해자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행동하기를 바라기에 거의 실패한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회유, 망각과 침묵을 유도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가해자의 전략은 언제나 편리하고 피해자의 언어는 여전히 불리하다. - P41

질문은 현상을 넘어 다른 차원을 향한다. 피해와생존의 이야기가 많아지는 상황은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쏟아지면서익숙한 일, 기시감이 드는 일, 그래서 감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활화산같은 이야기가 기사 몇 줄로 납작해지고 피해 경험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피해 너머, 생존 이후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을 말하는 대신 책상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언어를 내면화한 장소, 평생의 가장 큰 사치로써 마련한 호두나무 책상에 대해, 상상 속에서 나의 방은 광장이 되고 책상은 단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상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세상이 주입한 언어를 버리고, 찬양받거나 멸시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버리고, 새로운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견고하고 아름다운 단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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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병률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어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이다. - P-1

시인의 말


시집 출간 제안을 받고 바로 눈 내리는 곳으로 떠났다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돌아올 날이 지나도록 눈 속에 남았다
그때 와락 스치듯 떠오른 것이 이 시집의 제목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냄새를 맡았는데 맡는 중이었음에도 눈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시는 그런 것
사랑은 그런 것

춤을 춰야겠다는 목적을 갖고 춤을 추는 사람과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
굳이 밝히자면 내 이 모든 병(病)은 후자에 속한다

2024년 4월
이병률 - P-1

어떤 그림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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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이 나날들에 오웰은 여러 명의 여자를 "아일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전은 리처드를 사랑하지만, 리처드의 돌봄에 있어 의견 차이가 생길 때는 오웰의 뜻에 따른다. 오웰은 리처드에게 애착 장난감으로 가지고 자라고 목공 작업실에 있던 망치를 주었다. 수전이 그애에게 곰 인형을 사주자고 제안하자 오웰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날이 정말로 추워진 어느 날, 수전은 오웰이 리처드의 나무 장난감 몇 개를 난롯불에 태우고 있는 걸 보게 되고, "좀 잔인한 일 아닌가" 생각한다. 오웰은 자신이 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전에게 말하지 않는다. - P498

오웰은 늦잠을 자고 있다. 수전은 심부름꾼이 전해주고 간끈으로 묶인 꾸러미 하나를 차가 담긴 쟁반과 함께 가져다준다. 수전이 방을 나가자 오웰은 침대에서 꾸러미를 열어본다.
그토록 여러 번 거절당한 끝에 마침내 그것이 여기 있다. 우아한 회색과 녹색 표지에 싸인 《동물농장: 동화>가. 아일린은 동화를 좋아했고, 거기 깃들어 있는 심층적인 우화 구조를, 그가벼운 언어를, 그것이 가두고 있는 어두운 두려움들을 이해했다. 오웰은 책을 아무 곳이나 펼친다. - P498

아일린의 존재감에 오웰은 멍해진다. 아일린은 고개를 뒤로젖히고 새하얀 목을 훤히 드러낸 채 웃곤 했다. 아일린이 정보부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실들을 보이지 않게정리하고 공적인 기록을 변경하는 일. 오웰은 일어나 앉는다.
그러다 나무로 된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박는다. 그들은 이 침대에서 함께 작업을 했었다.
오웰은 손을 뻗어 침대 협탁 서랍을 연다. 아일린은 잠깐여기 있을 것이다. 오웰은 아일린의 마지막 편지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 시작한 참이다. 오늘은 이 부분이다.
난 당신이 다시 책을 쓰는 게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웰은 편지들을 이리저리 뒤적인다. 마지막 편지가 그를사로잡는다. 그는 그것을 몇 번이고, 끝까지, 읽고 또 읽는다.
난롯불이랑 시계도 보이고요. - P499

그들은 이 책에 관해 여러 해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 아니, 나누어 왔었다. <1984>라는 아일린의 시가 있었다. 아일린은 오웰을 만나기 전에 쓴 그 시에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투영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훨씬 더 선명해진 건 아일린이 정보부에 근무하던 시절, 세너트 하우스에서 뉴스를 삭제하던 시절이었다.
나, 다시 책을 쓰고 있어요! 오웰은 아일린에게 말해준다. 이제 그들이 소통하게 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여름의 끝 무렵, 원고는 열두 페이지가 된다. 오웰은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아일린의 무덤에 찾아가 들장미 한 송이를 그곳에 심는다.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그는 아일린대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개인적인 노트에도, 편지에도, 일기에도, 한 단어도 쓸 수가 없다. 그가 11월에 어느 에세이에 썼듯, "불행하게도, 한 사람의 감정이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구체적인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너무 늦어 있다. - P500

수전은 오웰이 필요로 하는 것 가운데 집안일과 관련된 부분을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제, 아내 노릇에 포함되는 다른 역할들도 채워져야 한다. 1945년에서 1946년에 이르는 그다음 몇 달 동안, 오웰은 적어도 네 명의 여자를 덮친 다음 청혼한다. 거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이지만, 그에게는 써야 할 책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 시도들이 거절당하자, 오웰은 자신의 아내라는 일자리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과 받게 될 보상, 일이 시작될 날짜와 예상되는 종료 날짜 등 점점 더 내밀한 세부사항을 넣어가며 설명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일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일린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일린의 이름은 오웰이 그 여자들에게 청혼하며 하는 말들 속에서, 때로는 그가 쓴 가장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오웰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동시에 직면(혹은 외면)해야만 한다. 전에 그 일자리를 맡았던 사람이 과로와 방치 속에 사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 역시 오래 살지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502

의사는 오웰이 결핵으로 "위중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길을 따라 반힐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길에 난 구멍에만 빠져도 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웰은아르들루사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플레처 부부의 아이들을비롯해 그곳에 있는 모두를 감염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거릿 플레처는 오웰이 쓰는 식사 도구 일체를 삶아 소독하고 침구류는 버리겠다고 말하며 계속 설득한다. 그날 밤, 로빈 플레처가 오웰의 방에 이야기를 나누러 간다. 방에서 나온 로빈은 마거릿에게말한다. "저 친구도 알아."오웰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오웰은 거기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환자로 지내기는 싫다는 것이다. 집이란 그 사람이 만들어가는삶이고, 자기 집에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다. 오웰을 태우고 그 끔찍한 길을 달려가는 동안 리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어진다. - P542

빌과 에이브릴이 이제 다섯 살 반이 된 리처드와 함께 오웰을 차에 태워 아르들루사의 대저택으로 데려간다. 그들이 탄 빌의 오스틴 12는 도중에 수렁에 빠지고 만다. 빌과 에이브릴은 차를 끌어낼 농장 트럭을 가져오기 위해 6킬로미터를 걸어서 되돌아간다.
리처드는 그때 아버지와 함께 차 안에 앉아 기다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우린 그냥 거기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비가내리고 있었죠. 날씨가 추웠고, 아버지가 사탕을 주신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몸이 무척 편찮으셨지만 저랑 계실 때는 아주 쾌활하셨어요.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려고 애를 쓰셨죠. 에이브릴 고모랑 빌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돌아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리처드가 기억하는 게 있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그가 문 닫힌차 안에 함께 앉아 아버지의 병든 숨결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 그사랑은 해로움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 P546

지금은 늦은 오후다. 노라는 정원에 앉아 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책 역시 끝나가고 있다. 노라는 오웰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을, 특히 <동물농장>을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불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동안, 노라는 자신이 지금껏 리스의 책을 읽고 있었던 건 아일린을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깨닫는다. 이제 두 페이지 남았다.
아일린이 언급되는 건 단 한 번이다. 노라는 페이지를 뒤로넘겨 그 부분을 찾아낸다. 여기 있다. 리스가 스페인에 있던 아일린의 직장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아일린은 "내게 그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리스는 쓴다. 그때 아일린은 "정치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노라는 무언가가 훅 밀려드는 걸 느낀다.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아니, 뜨거운 게 맞다. 하루의 열기는 이미 식었지만 말이다. 콰터스말대로라면 갱년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고개를 들자 콰터스가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주방 창문 너머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위로가 되는 그 실루엣이. - P568

노라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리스는 오웰의 "과도한 명예의식"을 거론하며 책을 끝맺고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명예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했던 오웰의 가혹함과, 어쩌면 그가 이따금 타인에게 드러냈던 배려 없는 태도까지도 설명해준다. 그럼에도 그의 배려 없는태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아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노라는 숨을 죽인다. 이게 다인 걸까?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안전에 무관심했던 그의 태도를꺾고 싶어 했던 다른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없다. 아일린은 거기 없다. - P569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며 예외적일 만큼 사심 없고 용기 있는 남자와 엮이는 일은 때로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기도한다. 남다른 성품의 소유자가 삶을 헤치고 나아갈 때, 그 과정이 평범한 사람의 무기력한 여정보다 한층 충격적인 여파를남기리라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다.
"
노라는 페이지를 넘긴다. 거기에는 오직 텅 빈 면지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은 우리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죽음이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토록 고약한 속임수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노라는 자신이 그 속임수를 뒤집어줄 말들을 기대하고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오른다. 노라에게도 그런 말들이 조금은 - P569

있다. 그 말들은 저 안에, 책상 맨 위칸에 들어 있다. 노라는 방으로 들어가 열쇠로 그 칸을 연다.


주소를 적어놓은 지도 상당히 오래됐네. 그 뒤로 난 고양이 세 마리랑 놀았고, 담배 한 대를 말았고(요즘은 담배를 말아피워, 맨손으로는 아니지만), 난롯불을 뒤적였고, 에릭, 그러니까 조지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어. 모두 사실은 무슨 말을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겠지. 늦지 않게 편지를 쓰던 습관을 결혼하고 첫 몇 주 동안 잃어버렸나 봐. 에릭이랑 너무도 끊임없이, 정말이지 격렬하게 싸워댔거든. 살인이나 별거가 성사되면 편지를 딱 한 통 써서 모두에게 보내는 편이 시간절약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아니, 노라는 생각한다. 편지를 든 손이 무릎으로 떨어진다.
아니야. 아일린이 그 대신 이뤄낸 건 삶 그 자체였어.


이제 뭘 해야 할까? - P570

이 책은 출간과 함께 오웰 애호가들로부터 여러 공격을 받기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오웰과 아일린이 실제로 했다는 증거가 없는 말과 행동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써놓았느냐고 저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애나 펀더는 그 부분들이 ‘픽션‘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사실의 큰 틀 안에서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세부사항을 창조해 낼 자유가 있다. 그리고사실상 이 책은 남성 작가 조지 오웰과 후대 여성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웰의 여러 전기 작가들과 아일린의전기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 공식화된 평가와 재평가의 싸움, 남성예술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 그 추앙 속에서 사라진 한 여성을 되살리려는 시도의 싸움에 가깝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자 빛나는 부분 중 하나는, 전기 작가들이 오웰의 과오를 덮고 아일린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문장의 시제를 바꾸고 수동태와 사물 주어를 사용해가며 무리한 서술을 이어간 지점들을 저자가 낱낱이 밝혀내는 부분이다. 그 전기 작가들은 후대에 이런 재평가가 이루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놀라움과 분노를 넘어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다. - P583

그동안 ‘여성서사‘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을 번역해 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모든 감각을 파고드는 고통을 선사하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곳에 적혀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이,
원치 않았지만 나 역시 이 괴로운 ‘이중고‘에 한데 얽힌 공범이라는 실감이 악몽처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에 맺혀 끝내사라지지 않았던 질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평범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보다는 유명작가가 내뱉는 별 의미 없는 한 마디 말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책의 말미에는 "아일린이 이뤄낸 것은 삶자체였다는 말이 나온다. 저자는 왜 이 당연한 사실을 이토록 많은페이지를 들여 말해야만 했던 걸까? 왜 작가가 아니었던, 그저 ‘삶‘을 살았던 아일린이 존중받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한 사람이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일이 불가능하다면, 한 유명인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추앙이 수천, 수만의 타인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대체해 버리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낡디 낡은 검은 상자의 흑마술은 언제까지나 끝나지않을 것이다. 부디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예리하고 의미 있고 풍성한 질문들로 남기를 바란다. - 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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