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내는간행물 같은 것을 제작하기도 했고 지하 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이상현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열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며 기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신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강한 유대감으로 묶이어졌던 것이 차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 민족주의는 퇴색이 되었고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지는 판세, 만주 일대의 항일 세력이 특히 그러했다. 그런 판세에서 이상현의 입지가 미묘해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복고적 향수, 지난 시절의 생활 감정과 가치관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던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아직 적의가, 혐오감이 남아있었다. 그는 최서희와 김길상의 결합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고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조직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비조직적인 그의 생리가 조직 속에 들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한계 그것인데 그는 부친 이동진만큼의 현실주의자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의 주장, 다 좋소이다. 독립을 향해 가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인데 뭐가 문제되겠소. 독립된 후 박이 터지게 싸우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서로 손을 놔서는 아니 되오" - P80

주정뱅이 이상현, 결국 그가 도달한 것은 자신이 낙오자라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그를 편안하게 했다. 모든 불꽃은 다꺼져버렸고 갈등과 고뇌와 자책감은 가라앉았으며 차디찬 공간에다 이상현이라는 한 사내, 한 피폐한 사내를 놓았을 때 상현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고 그 객관화한 자신을 통하여 타자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이상현은 그러나 그것이 사람으로 향한 새로운 인식, 출발로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나이 탓이었는지 모른다. 기질 탓이었는지모른다. 어쩌면 그는 현재에서 미래의 시간을 닫아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시간을 그 시간 속에 흘러간사물, 그 원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록하는 행위로서 시작하는 출발점, 그의 기억은 보물의 창고였다. 이번에는 꽤 오래 참았다고 한 석이의 말은 실상 틀린 것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하여 밖에 나가서 추태를부리지 않기 위하여 의지력에 의해 참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방 안에서 책상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P81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립을 익히 알고 있는 석이는 마음속으로 홍이가 빨리 와주었으면 싶었다. 겨울을 잘 넘긴 중늙은이가 꽃샘 바람에 얼어죽는다는 말이 있듯, 요즘 석이 심정은 그러했다. 만주에 와서 십여 년 굽이굽이 잘 넘겨왔는데 요즘 들어서 석이는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라했고 매우 고무되어 있다는 두메의 말은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목표한 그 날을 맞이할 것이요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석이는 조금도 설레지지 않았다.
지구라는, 우주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밑의 인간들이, 마치 어릴적 돌을 들어낸 개미집에서 미친 듯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개미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하여 이상현이 - P87

기우하는 그런 상황을 석이도 예감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석이는진정 강두메와 같이 확신할 수 없었다. 일종의 무력감이었다. 그것은 송관수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성환이 학병에끌려갔다는 최근의 소식은 더욱더 석이를 무력감에 빠뜨렸다. 원래 과묵한 편이기도 했고 학식이 두 사람보다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예리한 칼날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하는 것 이외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만 석이는 이상현에게 잠재워두고 있는 어떤 분노가 있었고 확신에 찬 강두메는 그에게 늘 거북한 마음을 갖게 했다. 홍이가 와서 빨리 떠넘겨주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까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온다.
- P88

석이는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양필구(梁必求), 그는누구인가. 석이 처남이었다. 더 분명하게는 전처 양을례의 이복 오라비, 혼인 전부터 삼일 운동을 전후하여 사귄 친구로서 석이와 필구는 동지이기도 했다. 사악한 을례 친정어미가 석이 모친에게 작용하여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양필구는 마치 타인과 같이 그들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누이나 계모와의 관계 역시 타인과다를 것이 없었다.
석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은 있었으나 은인으로서 연상의기생, 정작 본인 기화는 석이 감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을례는 의심하여 질투하고 보복하려 했으며, 혹 석이에게 장래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핑계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석이뒤를 쫓는 나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결국 석이는 만주로 피신해올 수밖에 없었다. 송관수 양필구 이범준은 그보다 늦게, 군 - P91

자금 강탈사건에 가담했고 군자금 수송에는 도솔암의 일진이 가세하여 만주로 건너왔으며 이곳 조직과 합류했던 것이다. 그들 중 송관수는 병사했으며 양필구 또한 왜헌병 총탄에 쓰러졌다 하니, 석이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일진은 연안에 가있다는 확실찮은 소식이었고 이범준은 상해에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일제가 망할 것을, 일각여삼추로 기다렸던 석이였다. 이제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패망하는 일본을 보게 되었고 조선 독립의꿈이 확실하게 윤곽이 잡히게끔 되었는데 석이 마음속에는 일각여삼추의 기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렘이나 희망보다 이 비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석이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눈보라치던 그 벌판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영광, 독립 투사, 어설프고도 또 어설프다! 그게 아닌데 진정 그게 아닌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홍이가 온 것 같았다. 두메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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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밀수, 결코 명예롭다 할 수 없는 사건으로, 통영에 와서는 유치장 그 어둡고 캄캄했던 기억, 부끄럽고 음침하고 처참했던곳, 살벌한 그곳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상의에게 오욕, 오욕 그 자체로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하여 정다울 수없는 감정도 그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영이를위시하여 친한 친구들은 상의가 병적으로 예민하며 상처받기 쉬운성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상의에게 대하여 묘한 보호 심리 같은 것을 가지게 되는데 특히 진영이가 그러했다. 그것은 참 이상한 현상이다.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의였으니까 말이다. 사카모토 선생은 상의를 다만 평범한 학생, 희미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소심하고 온순하며 늘 선생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여 쩔쩔매는 학생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 상의의 태도는 강심장인 학생도 감히 취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사카모토 선생이 경악하는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다. 방 안의 하급생까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간 2료에서 온, 원한 찬 패거리들이 은근히 사카모토 선생을 골탕먹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간접적인 행동이었다. 결코 정면 대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으로서그 한계를 넘을 수도 없었다.
"리노이에상! 그 태도가 뭐냐? 그게 학생으로서 취하는 태도야! 고개 빳빳이 쳐들고 누굴 노려보는 거야!"
"그럼 선생님이 취하시는 태도는 어떤 것이지요? 떳떳하신가요?" - P54

얼마간 안정은 되었지만 상의는 자기 자신이 그 얼마나 망가졌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치욕감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빌었다는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의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과함께 마룻바닥에 꿇어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더할 수 없는굴욕감이었다. 요와무시! 하고 내뱉던 사카모토 선생의 비아냥거림은 아직 귓가에 쟁쟁했고, 누구 누구가 왔느냐 하고 물었을 때도사카모토 선생은 상의가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잘못했다고 비록 빌지는 않았지만 꿇어앉았다는 자체가구차스런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뭣 땜에 따지고 반항을 했는가. 상의는 물론 퇴학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떠나고 싶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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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생활사에 대한 깊고도 풍성한 기록이자 생명들의 삶과 한(恨)에 대한 극진한 연민과 사랑의 세계인 우리의 「土地」는 여기 마침내 완결편에 이른다.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그늘 속에서 민족적 삶의 의의와 가치를 풍부하게 길어올린 「土地」는 온갖 사상과 이념의 틀을 넘어서 생명세계의 소망이 가득히 깃든 거룩한 생명관과 우주관의 세계를 열어 놓고 있다.
이 완결편에 이르러 침략과 정복의 망상에 절은 일본의 패전(敗戰)은 각일각 다가오고,
이 신(新)새벽의 어스름 앞에서도 깊은 상처를 사는『土地」의 주인공들은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속에서 삶의 허무를 보듬으며, 다시금밑바닥으로부터 강렬한 생의 의욕을 자각한다.
사랑의 상처에 괴로워하는 양현과 그녀를ㅈ모정으로 거두는 서희, 명희가 보낸 자금으로조직 재건에 힘을 얻은 지리산사람들, 사상의편견과 개인적 고뇌를 아파하며 조국의 독립만을염원한 만주의 인물들, 이들 모두는, 마치지리산이 생명들의 생사(生死)와화전(和戰)의 갈등을 껴안아 주듯, 모신(母神)의 드넓은 품속에서, 저마다의 포한(恨)의 삶 깊은 곳에서 새로운 역사의 빛을, 새로운 생(生)의 빛을 예감한다. - P-1

「토지」는 소설로 시작했지만, 소설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제 끝에 다다랐다. 그 동안 작가는 끙끙 앓으면서 써왔고, 독자 또한 끙끙 앓으면서 읽어왔다. 이 땅의 바람도 앓았고 강도 앓았고 산도 앓았다. 삶이 앓는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아픔으로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이 『토지』는 단순한 대하소설이 아니다. 확장되면서 바로 그 넓이와 깊이 덕택에 또한 분산되고 지워지는 소설이다.
조선 말기에서 해방까지의 긴 시간을 통해 이야기가 확장되지만, 예정된 목적으로 몰려가고 끌려가는게 아니고 시간의 그물망 속으로 흩어지면서 퍼지고퍼지는 이야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인물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단순히 최참판댁이라는 중심에 중속된 엑스트라가 아니고 모두 나름대로 생명의 접지점이자 분기점인 그들. 많은 인물들과 사물들을창조해내면서 작가의 힘이 팽창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들 사이사이 그들의 숨결 속으로 잦아드는 작가의 소리. 배경으로서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는듯하지만, 그것에 짓눌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틈과 구멍을 내고 실핏줄을 내는 문학. 그러면서 모든 생명체의 실존에 거룩함을 주는 문학.

金鎭奭 인하대 교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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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관음탱화의 완성으로 마침내 길상의 삶은 큰종지부를 찍는다. 삶의 비극성이 탱화의 청초한 선과현란한 색채를 통한 예술성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탱화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길상에게중요한 것은 아니다. 탱화의 완성이 주는 상징성은길상의 고독한 삶의 완성이며, 나아가 궁극적으로완성에 비유되지 않는가. 이 세계를 거친『토지』는 평화롭다.
식민지적 삶의 비극성과 운명적 비극을 인내하고대결하고 부성과 모성의 사명으로 극복한 『토지』의 인물들은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환국과 윤국, 양현, 몽치 등의 삶이, 나아가 지금 우리의 삶이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토지는 현재적이다. 「토지』는 근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삶을 초극하고 완성하기 위한, 그래서 현재적 삶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길고도 긴 장정이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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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하는 정신이 든 듯 말했고 오가다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복도는 말갛게 뻗어 있었으며 호젓했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이층 창 밖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옆방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이튿날 일행은 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달리는동안에도 그랬지만 가다가 어느 역두에 머물렀을 때도 쇼지는 지치지 않고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 녹아 들어간 듯한 눈빛이었다. 척박한 철로 연변의 땅이며 대부분 남루한 차림의 조선인들이 쇼지 눈에 어떤 의미를 지니며 다가오는 것일까? 오가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조선땅 산골에다 쇼지를 풀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부성(父性)의 본능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시시각각 일본 본토에 다가오고 있는 전화(戰火)를 예감하고, 예측 불허, 만주대륙의 상황, 어떠한 대혼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것에 대한 강박이 조선땅 산골에다 아이를 풀어놓고 싶다는 황당한 생각을 유발했는지 모른다. 진실로 오가다는 쇼지를 위하여 이 불행한 시대를 절감하는 것이었다. - P302

한이 된다는 말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희망이 없는캄캄 절벽, 어디서 빛줄이 새어들어 한을 풀 새날을 기다려본단 말인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은 비단 성환할매나 박서방뿐만은 아니었다. 최서희도 지금 평사리에 내려와 있었다. 날개 찢긴 나비같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파닥거리지도 않았고 몸부림치지도않았다. 조용하게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석꾼 살림의 최서희나 나룻배 뱃삯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박서방이나 눈이 멀어버린 성환할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은 상태는 매일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평등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귀신도 달랜다는 말을 하는데그것은 거짓말이다. 산 사람도 달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하물며 서천으로 넘어가는 해를 그 누가 잡을 것이며 망망대해로 흐르는 물을 누가 막을 것인가.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 전쟁이요, 작은 섬나라 대일본제국의 야망이야말로 칼로써 귀신을 잡으려 하니, 재앙은 인간 스스로 만들고서 그 스스로도 덫에 걸리는것이 아니겠는가.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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