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를 분석하는 「바벨의 탑」이라는 글을 썼다. 데리다는 먼저 바벨이 혼란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바빌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Ba‘는 아버지를, ‘Bel‘은 신을 뜻하므로 바벨이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유명사는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속 ‘will‘ 처럼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단어 역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바벨은고유명사면서 다의어다. 바벨은 우리에게 번역을 처벌로서 강제하면서, 동시에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바벨의 자리에 숱한 의미가 겹치면서 단 하나의 적절한, 진실한, 투명한 읽기는 불가능해진다. - P31
번역은 신이 우리에게 지운 짐이자, 바벨 이전의 상태ㅡ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언어로 말하려는노력이다. 혹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여러 갈래로 흩어진 불완전한 언어의 속박을 풀고 순수한 의미를 정제해내는 행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기호도 거치지 않고 바로우리 마음에 와닿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과 오용이 없는 곳. 번역 과정에서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 곳으로.
번역에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기호를 탑처럼 쌓아 올리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피천득 시인이 ‘will‘을 ‘월(意志)‘이라고 번역한 것도 한자리에 두단어 이상을 얹으려고 시도한 작은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 [창백한 불꽃』등의 소설도 썼지만 번역도 많이 했다. 나보코프는 집필 언어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바꾸면서 언어적·문화적 차이에 민감한 언어 감각이 자랐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자기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꾸준히 번역했으며 독창적인 번역론을 펼치기도 했다.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면서 쓴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오네긴]을 원문처럼 각운을 맞춰 번역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직역하되 주석을 달아서 모든 의미와 내포와 배경과 의도와 오류를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나보코프가 번역한 [예브게니 오네긴]은 네 권으로 출간되었다. [오네긴]이 5,446행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운문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뻥튀기다. - P32
튀기다. 200년가량의 본문이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으로 한 권씩 있고, 나머지 두 권은 무려 1,200면에 달하는 주석과 역자해설이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대한 각주가 달린 번역을 원한다. 각주가 초고층 건물처럼 책장 꼭대기까지뻗어 주석과 영원 사이에 텍스트 한 줄이 언뜻 비칠 틈만 남을정도로." 나보코프는 하얀 책장 위에 탑 이미지를 그린다. 번역문에 담을 수 없는 모든 의미를 각주에 쌓아 올린다. 각주는한없이 높이, 영원을 향해 솟구친다. 주석이 설명하는 텍스트한 줄이 탑 꼭대기에 보일 듯 말 듯 비치고, 그 위는 여백무한-신의 영역이다. 각주가 모든 가능성을 다 다루고 있으니 본문은 간결한직역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런 주석과 절대적인 문자적 의미를 원한다. 어떤 삭제도 덧붙임도 없이?"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가장 서툰 직역이 가장 예쁜 의역보다 천 배는 더 유용하다"며 ‘가독성‘이 좋은 번역을 ‘범죄‘, ‘악행‘, ‘횡포‘ 등등 심한 말로 비난한다. 나보코프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는이상"을 위해서라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심지어 문법까지도" 전부 희생시킬 수 있다. 13 드높은 탑의 제단에 나보코프는 모든 것을 바친다. 번역에서 잃은것을 신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충성스럽게 탑을 쌓아 올린다. 자, 나보코프는 잡힐 듯 말 듯한 흰 고래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해서, 결국 잡았나? 탑이 높아질수록, 가능한 한많은 의미를 더할수록, 흰 고래는 점점 시커메지고, 번역이 실 - P33
패했다는 증거는 쌓여간다. 주석의 탑은 번역 불가능성의 웅대한 증거다. 번역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번역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조바심이 탑을 이룬다. 이 탑은 무한의 영역으로 뻗는다. 번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번역은 무한하다. 번역의 탑은 쌓이는 동시에 허물어진다. 주석은 원문을보충하여 벽돌로 강화하고 역청으로 단단히 만드는 것 같지만, 번역의 탑이 높아질수록 원문은 불완전하며 그 의미는 자명하지 않음이 드러날 뿐이다. 바벨 이후에 그런 자명함은 사라졌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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