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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처 김애란이다.
어느 단편은 처음인 듯 새롭고, 어느 단편은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오기도 한다.
‘벌레들‘ 과 ‘물 속 골리앗‘ 은 한동안 나를 가위눌리게 만들었다. 꿈 속에서 화자가 되어 황톳물에 잠긴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앉아있거나, 벌레들에 둘러싸여 있고는 했다.
오늘 밤도 그럴지 모른다.





여름옷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어쨌든 장례식에 입고 갈 옷을 골라야 했다. 바지와 스커트 사이에서 고민하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에이라인 치마를 택했다. 다행히 같은 색 블라우스가 있어, 간절기 조문 복장으로나쁘지 않을 듯했다. 검은 옷이라면 사실 얼마든지 있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 P11

번식기의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싱싱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거기, 어두운 인문학관 통로에 선배가 있었다. 복도 끝 굽이진곳에 길고 흐린 실루엣으로 화장실에 들른 건지, 사물함을확인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 P13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수(數)를 향한 내집중력을 흩뜨려놓던 순간을 기억한다. 조바심과 짜증이 일면서도 짝의 기분이 상할까 내색 못 하고, 선생님께 혼나면어쩌나 불안해하던 복잡한 찰나를 말이다. 문제는 그 뒤로 내산수 점수가 계속 바닥을 쳤다는 건데, 살면서 셈을 망칠 때마다 왠지 그게 다 병만이 탓인 것처럼 느껴져 억울하곤 했다. 어쨌든 우리는 자주 모여 놀았다. 대부분 장사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해거름까지는 어떻게든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가야 했다. 당시 신나는 폐활량을 떠올리면 지금도개운한 기분이 든다. 편을 가르고, 규칙을 익히고, 보잘것없는 어휘력으로 열심히 말싸움을 하고, 토라져 집에 가기도 했지만 언젠가 최대한 멀리 나가려 도움닫기 해 올라탄 그네위에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깨달았더랬다.
‘자란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구나.‘ - P25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조용히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물속에서 느낀 아주 기이한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가까스로 물 밖에 머리를 디밀었을 때 매미 소리가무척 시끄럽게 들려왔던 것도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순간 누가 보고 싶다거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그리고 좀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면 위로 아른아른 조용하게 빛나는여름 햇빛이 보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유혹하듯 화사하게 출렁이던 차안(此岸)의 얇고 환한 막 나는 그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 P41

환한 봄날 한가운데에 어두운옷을 입고 서 있던 내게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 좋아‘라고 말하던 선배의 아름다운 옆얼굴도·그러자 고향의 병만이가 떠올랐다.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이…………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감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결국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천장 위 형광등은 여전히 꺼질 듯 말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여름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고 있었다. - P44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피로, 남편의 한숨, 남편의 짜증 같은게 느껴졌다. 비슷한 전화를 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사람 사는 집에 늘 있기 마련이라고 우리 몸 안에도 사실 수많은 벌레들이 산다고.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돈벌레며 애벌레며 그도 몸서리친 경우를 상기시켰다. 부엌에도, 천장에도 나타났던 벌레들이 이불이나밥그릇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있냐고.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이래서야 안심하고 키울 수 있겠냐고. 그는 미납금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미안했는지 조그맣게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인 걸 알았다. 하지만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나만큼 벌레를 자주 보지 못했다. 그는 집에 올 때마다 숙면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처참히 곯아떨어졌다. 그가 유심히 보는 건 벌레가 아니라 통장 잔고였다. 배가 고프다거나 졸립다거나 하는 일상의자잘한 욕구와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아내의 배, 

----벌레들 - P64

가을은 왔지만 가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치지 않고 번식하는 계절, 이 지나치게 싱싱한 여름은 먹성좋은 괴물처럼 뚱뚱해져갔다. 때 아닌 열대야가 지속됐다. 우리는 녹조류 가득한 호수 아래의 물고기들처럼 이불을 걷어차며 허우적댔다. 더위에 뒤척이다 겨우 잠들 즈음엔 귓가를맴도는 모기 소리에 소름이 돋아 일어날 때도 많았다. 폭염이, 장마가 지속됐다. 큰비는 세계를 집어삼킬 듯 열흘이나계속됐다.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 P65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쩌면 A구역 전체로 뻗어 있을 뿌리가 워낙 깊고 완강해서인지도 몰랐다. 나무는 자신이 쥐고 있는 걸 놓으려 하지 않았다. 굴착기는 계속나무를 공략했다. 나무는 질기게 저항하다 결국 쩌억 소리를내며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흡ㅡ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런 뒤 창가에 놓인 수납장을 붙들고 심호흡을 했다.
식은땀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이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꿈틀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인 움직임이었다. 한 손으로 배를 감싼 채 벽을 짚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굴착기가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겨우 숨을 고른 후 창밖을 바라봤다. 나무는 전쟁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 P67

이 시간에, 그것도 혼자,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 날 터였다. 게다가 절벽 아래 풀숲이라면절대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벌레를 떨어뜨린곳이기도 하고, 그 속에 또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반지. 그 안에 담긴 남편의 노동과 우리의 한 시절.
그 추억과 의미는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 P76

멀리, 아직 헐리지 않은 건물 서너 채가 남아 있었다. 가로등은 그곳에 하나, 그리고 그 반대편에 멀찍이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손전등과 희미한 가로등불빛에 기대어 한 발 한 발 어둠을 헤쳐 나갔다. 걸음마다 쩌억, 바스락,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무거워 이동이 쉽지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고 숨이 찼다. 그래도 가로등불빛이 묘한 안도감을 줬다. 불빛에 얼비쳐 노르스름해진 가림막의 윤곽은 A구역과 바깥세상의 경계가 아주 얇다는 걸상기시켜줬다. 여긴 정글이나 미로가 아니라 도시라고. 조금만 발 디디면 저기 모텔이 있고, 교회가 있고, 패밀리레스토랑이 있는 서울 한복판이라고 불빛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듯했다. A구역의 땅은 건물 잔해 때문에 평편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처럼 솟은 곳이 있는가 하면, 움푹 꺼졌거나, 중간에 발이 푹푹 빠지는 데도 있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걸음을옮기며 목적지를 향했다. 흙 속에서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났다. 비위가 상해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 P77

단단하고 우둘투둘한 피부, 구조를 요청하는 손처럼 길게 뻗어 있는 가지, 나무였다. 어느고기처럼 떼로 죽어 있는 잎사귀들·여염집 마당 한가운데 억척스럽게 솟아 있던, A구역의 유일한 나무. 몇 살을 먹었는지 모르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았을 게 틀림없는 고목. 바람이 불때마다 신령스럽게출렁이던, 오늘 아침 잘린 나무………… 께름칙한 기분 탓이었을까?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를 싸고도는, 조용하고 알 수 없는 이동의 에너지 같은 게. 손전등으로 땅바닥을비춰봤다. 발등 위로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보였다. 개미는 어딘가로 이동하다 불빛에 노출되자 우왕좌왕했다. 손전등을 풀숲에 비춰봤다. 무성한 잡초들만 눈에 들어올 뿐 상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 P78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지점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등을 쥔 손이 바들바들떨렸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벌레들이 행로를 바꿔일제히 내게 몰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양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사타구니에서 오줌처럼 뜨듯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가터진 거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 P79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깨진 콘크리트조각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봉긋한 무덤 같은 곳에서였다.
그 봉분에 허리를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그리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소리는 허공 위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새벽 1시에, 아무도 없는 재개발지역의 건물 잔해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을 임산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아랫배가 얼얼하고 현기증이 났다.
너무 아파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죽을힘을 다해외쳤다.
"살려주세요." - P80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물 속 골리앗 - P85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ㅡ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그것은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지 낀 유리 너머로소리가 삭제된 채 보이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 P86

장맛비가 내린 그 며칠은 내 생애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 마음이 그랬다는 게 아니다. 집에 전기가 나가서였다. 이곳은 시골처럼 날이 빨리 저물었다. 이름만 대안도시일뿐, 오래전 수도(首都)에서 밀려난 이들이 허허벌판에 둥지를 튼 곳이니 그럴 만했다. 전기가 원만하게 들어오는 날이라도, 땅거미가 지면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몇 개의빛으로는 물릴 수 없는 유구하고 원시적인 어둠, 우리가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심박동에 홀려 신을 벗고 길 떠나는 꿈을 꿨다. 또는 알 수 없는 초조를 어쩌지 못해 옷을 벗고 아내 위에 올라탔다. 잘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우리가 붙잡고 헤매는 실 끝에는 언제나 가는 눈을 반짝이며 웅크리고 있는 원시인이 있으니까. 그들은 늘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장마철엔살냄새가 짙어졌다.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띠었다. - P87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 - P94

돼지탁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티브이와 라디오는 나오지않았고, 양초는 되도록 아껴야 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거나이런저런 몽상에 잠기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곤 눅눅한방바닥에 누워 지구의 살갗 위로 번져 나가는 무수한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봤다. 동그라미속의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들………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일으키는 동그라미들.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고, 당장 뭘 이해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떼를 입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봉분 위에도 동심원이 고요하게 퍼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아직 떠내려간 것만아니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 P95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얼마 안 가벼락이 쳤다. 구름이 가벼워졌다 싶으면 어느새 폭풍이 왔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이고자 했다. 예상하지 말라는 듯. 예고도 준비도 설명도 말며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듯. 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너희도 하라는 듯 난폭하게굴었다. 비상용물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연신 식은땀을 흘려댔다. 장마는 한 달을 넘 - P100

어서고 있었다. 빗방울이 가늘고 성기게 내릴 때도, 뭇매를치듯 세차게 쏟아지기도,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려앉을 적도있었지만, 어쨌든 하루도 그치지 않고 내린 것만은 분명했다.
비바람이 거세질 때면 아버지의 방에 묶여 있는 물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릇 위로 동심원이 엷게 번지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어쩌면 집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끔은 물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것은 음정 없는 노래처럼 갈 길 잃은 전파처럼 웅웅웅웅 울어댔다. 한밤중 이상한기척이 들릴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 P101

어머니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파트를 떠나는 대신 세상을 떠나셔야 했다. 배는 생각보다 말을듣지 않았다. 작은 파도나 장애물 앞에서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휘청거렸다. 잡동사니로 얼기설기 만든 거니 그럴 만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많은 빗물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집을 떠난 뒤 단 한 대의 헬리콥터도, 단 한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감기에 걸릴지 몰랐다. 배가 언제까지 버티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부디 우리가 구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P113

대신 물 밖에 나왔을 땐 반드시 하늘을 봐야 한다고, 그 정도야 뭐.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여유를 부리며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온몸에 힘을 빼고 물에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여름 강물의 속살은 차고 깊었다. 부드럽고 물컹하니 아득하며 편안했다. 생경한 듯 잘 아는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 세상의 그 어떤 소음과도차단돼 짧은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나는 더이상 견딜 수없을 때까지 물속에 있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고 어느 순간, 숨을 참지 못해 수면밖으로 나왔을 때 내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물속에 있었을 때보다 숨이 더막혔다.  - P125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일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을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그걸 보니 엄마, 나무뿌리에안겨 떠내려간 엄마 생각이 났다. 녹색 테이프에 감긴 얼굴로오랫동안 내 쪽을 바라보던 모습도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어디쯤 가셨을까. 부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좋을 텐데. 젖은 옷가지가 바람에 마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밖에 나오니 물속에 있을 때보다오히려 더 추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 있다 체조를 해야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속눈썹을 깜빡이며 달무리 진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 P126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머물 수도 떠날수도 있다고. 그녀는 ‘짜이날‘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라 했다.
그 말이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그다음, 그곳에 어떻게 갈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용대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투박한 한국어 문장으로 설명해줬다.
용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말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 그럴 자격이 있는사내로 여겨지곤 했다. 이 여자, 언제나 내겐 좀 과분하다‘는느낌이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 못 할 게 없다는, 소통에 관한 한 순진할 정도의 믿음이있던 여자. 일도 참 잘했지만 공부를 했다면 더 좋았을 젊은아내. 처음, 손바닥에 땀을 닦고 악수를 건네자, 세상에서 제일 작은 부족의 인사법을 존중하듯, 웃으며 따라 한 북쪽 여자.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짜이날‘을 발음하자,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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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

2007년 가을, 김애란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전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 하고 소리 낸 뒤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 빅 사이론 오후의 빛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ㆍㆍㆍㆍㆍㆍ

----도도한 생활  - P9

피아노 건반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것은 희거나 검었고,
동일한 크기와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도의 위치를 자주잊었다. 그것이 레가 아니라 도라는 것을, 미가 아니라 파라는 것을 만져보기 전에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찾는 도는 왼쪽 가장자리 건반으로부터 스물네 손가락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건반 위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1부터 24 까지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봐야 했다. 그렇게 도를 찾아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를 다시 치는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덩치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다행히도를 찾고 나면 레를 짚기가 수월했다. 레는 도 바로 옆에 있었다. 미는 레 옆이고, 파는 미 다음이니까, 일단 도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 P10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
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누군가의 이齒]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대학에 붙었다는 말도 못한 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를 노래만 연습하고 있었다. - P21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 다급하게 깜빡이는 휴대 전화 불빛은 그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경보 같와다. 아침마다 그 작은 재난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은.
한밤중 폭우를 만나 해변으로 쏠려 온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머리맡을 더듬어 불빛을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쥔 채 죽은 듯 엎드려 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이제 막 출동하려 한손을 들고 있는 슈퍼맨과 같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녀가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주먹을 뻗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그녀가 자세를 튼다. 몸에서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침이 고인다  - P45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면바지에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가슴 한쪽엔 지구의 모양의 로고와 ‘축 개원 10주년 뉴 엘리트 학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광복절이라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다.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도, 무가지를 나눠주는가판대도 한적하기만 하다. 에스컬레이터 위로 얼굴이 부은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들 모두 어릴 때 꿈이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공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은아니었을 거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의 긴 행렬에 바싹 따라붙은 뒤, ‘내가 사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러고 있지 않을텐데‘ 탄식한다. 그러고는 이내 부끄러워한다. 학부모들이상담 때마다 하는 말 중 하나가 우리 애가 ‘공부를 못 해서‘가아니라 ‘욕심이 없어서‘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49

버스가 출발한다. 수십 개의 소형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쏟아진다. 춥다. 그리고 우울하다. 생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공휴일의 체육 대회 탓인지, 부장 탓인지 모르겠다. 에어컨 바람과 차 냄새 때문에 멀미가 난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꼭짓점 댄스의 순서를 짚어본다. 하나 둘 셋 틀고. 하나 둘셋 전진, 그걸 좁은 원룸 안에서 연습했을 때, 후배가 배를잡고 웃던 기억이 난다. 언니! 왜? 후배는 하얗게 웃으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못 춰요? 날씨는 화창하고, 피곤한 얼굴의 선생 몇이 코를 고며 졸고 있다. 부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 팀장과 함께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 있다. 평소 국어과는수학과나 영어과에 비해 하는 일이 없다‘는 오해를 받아왔던터라 이번에야말로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건너편 자리에서는 학원 버스를 모는 기사 아저씨들이 얘기를나누고 있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았다. 좀 잘까? 훌쩍, 콧물이 나온다. 이런, 성가시다. - P62

몇 번의 알람이 울렸다 꺼지고, 고단하고 일상적인 날들이지나갔다. 후배는 여전히 목소리가 좋았지만 예전만큼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습관‘이란 게 생겨버린 탓이었다. 일상의 습관, 관계의 습관, 그 습관을 예상하는 습관까지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퇴근 후 현관에 서서 ‘지금 저안에 후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후배를 안다고 생각했다. 후배의 습관 중 부정적인 목록을 발견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그렇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 P66

그녀가 현관문을 연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이불 위에 누워 첨삭을 하고 있는 후배의 모습이 보인다. 후배가 고개 들어 반색한다. 언니 왔어요? 그녀는 ‘락앤락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야, 그거 언니가 상 탄 거예요?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아냐. 그냥 참가하면 다 주는거야. 후배는 집에 반찬통이 없었는데 잘됐다며 좋아한다. 그녀가 홀깃 원고지를 보며 말한다. 아직도 해? 후배가 싱그럽게 웃으며 자랑한다. 네, 언니 저 거의 다 했어요. 이번 주주제가 다양성인데요, 획일성은 나쁘고 다양성이 중요하다는내용을 모든 아이들이 완전 획일적으로 써냈어요. 웃기죠? - P76

샤워기를 틀자 쏴아-하고 뜨거운 물이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 P77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말썽 많은 하루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하루가 지나갔다‘는 데 있다. 후배와 지낼 불편한 날들 역시 곧 지나갈 것이다. 그녀는 귓바퀴와 배꼽에 낀 먼지를 산산이 씻어낸다. 수챗구멍 위로 그녀의 것과후배의 것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회오리친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후배가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최대한 잘해주자고 결심한다. 그녀는 몸에 수건을 감고 나온다. 그런 뒤 발판에 발바닥을 문지르며 주위를살펴본다. 이상하다. 방 한가운데 오래된 적요가 손님처럼 앉아 있다.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이 보인다. 요 껍데기는 벗겨진 상태다. 방안을 둘러본다. 항상 행거 아래 있었던후배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후배가 없다. - P78

그렇지만 이제 가슴이 아리진 않다. 지금 사내의 옆구리엔한 봉지 라면이 다정하게 바스락거리고, 오늘 밤 티브이에선틀림없이 성탄특선 영화가 나올 테니까. 저기 ‘여관‘의 간판불은 꺼져 있다. 방이 모두 나간 모양이다. ‘크리스마스니까‘ 하고 사내는 웃는다. ‘오늘 밤 어느 야쿠자 두목은 세 명이랑도 하겠지?‘ 생각하니 조금 시무룩해진다. 그러자 곧 먼곳에서 사슴뿔을 단 세 명의 아가씨들이 엎드린 채 사내를 바라보며 ‘음매에 하고 운다. ‘・・・・ 사슴이 그렇게 울었던가?‘ 생각해보지만 사내는 한 번도 사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성탄 특선 - P88

사내는 두 손 가득 보리차가 든 유리컵을 들고 아이처럼 외쳤다.
"이야! 컵에다 물 마시니까 정말 맛있다!"
오래전부터 ‘소독한 델몬트 주스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은 사내의 로망중에 하나였다. 그런 것 하나가 자기 삶을 어떤 보통의 기준에 가깝게 해주고 또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였다. 사내가 고집하는 생활 습관은 몇 개 더 있었다. 사내는 여동생에게 ‘아무리 돈이 없어도 화장실 세정제만은 반드시 사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 P101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 P117

그렇다고 뭔가깨달아버리기에도 이른 나이였던 때, 나는 장기판 위에 놓인한 마리 말(馬)처럼 대책 없고 수줍었다. 열차 안으로는 도심의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 철교와 올림확대로, 크고 작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스무 살의 나는 ‘이아 다리는 정말 다리가 많네?‘하고 신기해했다. 오후 2시.
머리 위로 고요하고 오래된 태양계의 질서가 자전하고있던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짝 조여들었던 나의 동공은 점점 크게 벌어져 하나의상 앞에서 멈췄다. 한강 너머 - 호젓하게 솟은 빌딩 한 채가보였다. 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63빌딩이다ㅡ라고, 나는 63빌딩을 보자 서울에 온 것이 실감 났고비로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 P123

여름은 재수생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삼복더위에 나는 연필 들 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식욕 같은 건 없었지만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큰일이었다. 나는 아주 젊었지만 허약했고, 날짜를 지우고 답안을 쓰다 졸곤 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체력은 바닥났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고득점자에 대한신화가 떠돌았다. 누구는 하루에 모나미 볼펜 세 자루를 쓴다더라, 누구는 목욕탕 갈 때 목욕 바구니에 영어 단어 써서 간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그런 말들이 잘 믿겼다. 나는 학원에 가고, 시골에 전화를 하고, 삐삐 진동음에 뒤척이고,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근처 사육신묘에 가서 바람을 쐬다 오곤 했다. - P138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량(梁) 자와 나루터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내 밟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있었다. - P148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창자와 내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칼자국  - P151

그런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점점한 아가리 속으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1) 만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때 전해지는 그 저격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면 햇빛의 뼈와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 P155

부엌에는 칼이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한가지 칼로만 국수를 썰었다. 나머지 칼은 과일을 깎거나 바지락을 까고, 김장 때 다른 일손에게 빌려주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눈 감고도 썰 수 있었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칼날 위에 들러붙은 반죽을 쇠숟가락으로 쓱쓱긁어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체육복 바지를 입고 잔일을 도왔다. 사춘기 땐 쟁반을 들고 배달을 가다, 길에서 좋아하는 남자 애를 만나 다리가 후들거린 적도 있다. 성질 급한 어머니는 잔소리가 심했다. 대파는 가랑이를 잘 씻어야 한다. 대걸레질하라고 했더니 홀에 물만 발라놨냐.  - P155

 손님들이 순서 뒤바뀌는 걸 언짢아하는 탓도 있지만, 오래전 한 여자가 갓 나온 국수를 그대로 들고 나가, 거리에 쏟아버린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밥장사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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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 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안에서버둥거리던 어머니는 잡을 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 - P8

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9

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 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운동중인 모든 사람이 우스꽝스러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네 공원에서 소나무에 대고배치기를 하는 아저씨나, 손뼉을 치며 걷는 아주머니들을 볼때마다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진지했고 열성적이었다. 마치 건강해지기위해서는 조금씩 우스워져야 된다는 듯이. - P10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한번도 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를 낳았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양반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늦게 왔지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주눅든 지각생의 눈빛 때문에 항상 먼저 농담을 건네던 여자였다. 아버지는 변명을 하지도, 큰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그저마른 입술과 새까매진 얼굴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상상하건대, 어쩌면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 P11

달리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한다. 달리기는 심폐계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신운동으로, 걷기와 뛰기의 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리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고도의스피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장소나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리기는강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떠난 사람이, 나를 떠난 곳에서 오래 달리고 있는 이유를, 그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생각이 든다. - P14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뛴다. 물론 아무도 박수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5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십수년 만에 우편을 타고 가뿐하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善意)처럼, 종지감 없는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낯선 억양의 인사를 건네며 돌아온 부고(告).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세계 곳곳을 달린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세계를 뛰어다닌것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계셨다. - P22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후꾸오까를 지나, 보루네오섬을 건너,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가는 아버지, 스핑크스의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거쳐,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아버지. 웃으면서 달리는 아버지. 달리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썬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가장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 - P28

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 - P29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무언가 필요해진다.

약속과 우연과 재난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3년 서울.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편의점은 기원을 알수 없는 전설처럼 그렇게 왔다. 시치미를 떼고 앉은 남편의 애첩처럼, 혹은 통조림 속 봉인된 시간처럼 수상할 것도 없이.

2003년 서울 사람들에게 습관이란 구원만큼 중요한 문제가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 서울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뭘까 항시 고민하는 창백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편의점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많이, 그리고 신속하게 생겨났다. - P32

편의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은 모두 누구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저마다 하나씩 앨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운동회 때 2등으로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1등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같이 흠칫 놀랐다거나, 형제에게돈을 꾸어 여자를 만나고, 모든 문제집의 첫장만을 풀어봤다거나, 뜻을 알면서도 국어사전에서 ‘음부‘나 ‘성교‘라는 단어를찾아봤을 사람들, 혹은 하게 될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건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다. - P33

하루에도 몇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사러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 P33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 P57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사실뿐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길게 내민 모가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아프리카 평원위에 최초로 직립하게 된 유인원처럼ㅡ고독하게. - P60

나는 한번 올라가면 다신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스카이콩콩을 잘 탔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좋아하는 가수가 십대가수상을 타도, 형이 알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놓아도 스카이 콩콩을 탔다. 언젠가 핼리혜성이 76년 만에 돌아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어대던 날도, 나는 옥상 위에서 조용히 스카이콩콩을타고 있었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또 우아했다.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들어 있었다. - P65

스카이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 P66

형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형은 과학적 소질이 전혀없어 보였다. 어쩌면 형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은 변했다. 형은 더이상 안경을 벗어던지며 "아버지, 앞이 보여요!"라고 외치던 병신이 아니었다. 형은말수 적은, 그러나 할말 있는 표정을 가진 소년이 되어갔다.
형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옆구리에 항상 과학서적을 끼고 다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 절대 멋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은 공공연히 자신이 한국과학기술원에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반에서 36등을 했다. 형은 과학자가 되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공부, 운동, 신문 스크랩, 게다가 문학동아리 가입까지. 형은 과학자가 되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천문학자들의 이론은 그 자체로완벽한 하나의 시(詩)‘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지만 그후로도 몇년 동안 형은 라디오를 고치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형에게 뭔가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스카이 콩콩을 탔다. - P72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

형이 돌아왔으니, 그리고 우리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저렇게 괜찮아져 있으니 가로등 앞에 있던 우리집 이야기는이제 그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 깜박 잊고 있던 이야기 하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은 형이 고무동력기대회에서 일등을 먹은 날로부터 일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P81

우와 하는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추락의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형은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서꼼짝하지 않았다. 창공 위로 여전히 수십개의 비행기가 고운선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에 성공한 각각의 비행기들이 약속한 듯 모두 추락하기 시작했다. 형은 두번째로 놀라며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비행기들은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며 하나둘 낙하하고 있었다. 다른 형들은, 작년에 형이일등한 비결을 알고 형을 따라 모두 비행기 꼬리부분을 손봤던 것이다. 하지만 형들도 서로 그것을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고개를 들어 낙하하는 비행기들의 춤을 바라봤다. 빙글빙글돌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행기 떼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꽃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꽤 아름다웠다. 형은 멍하니 서서 그 꽃비를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말도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어떤 재능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그날 밤 집으로돌아온 뒤 홀로· 스카이콩콩을 탔다.

----스카이 콩콩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 P83

그녀는 벌써 몇번째 자세를 뒤척였다. 바로 누웠다. 옆으로누웠다. 엎드렸다 하는 것은 기본이며 쿠션을 다리 사이 혹은다리 밑에 끼우거나 안거나 팽개치거나 함은 물론이다. 팔을둘다 올리거나 하나만 올릴 수도 있고, 팔은 구부리고 다리는펼 수도, 다리는 구부리고 팔을 펼 수도 있다. 한쪽 다리는 올리고 한쪽 다리는 내린 채 팔은 양쪽 다 머리 위로, 고개는 오른쪽을 향하게 할 수도, 왼쪽을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의자세는 모두 세분화된 신체의 경우의 수로 만들어진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아직 모르는, 어떤 예민한 사람이라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독특한 자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척임은 바로 그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가며 ‘빙고‘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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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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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복판에서 지난 겨울에 읽은 책을 떠올리면 조금 시원해질까? 철학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만 기차와 여행은 다르다. 완행열차의 삶이고 읽기, 쓰기도 그러해서 비둘기호 속도로 읽는 책은 나름 좋았다. 특히 시몬 베유, 보부와르를 같이 만나고 철학과 삶의 여정을 살펴보며 따라가는 동행은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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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옴짝달싹할 수 없는 논거는 자연 자체에서 온 것일 터다. 데이비드가 자연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 역시 그 논거를 보았을 것이다. 눈부시게 깃털을 푸덕거리고 꽥꽥거리고 콸콸 쏟아지는 반대 증거의 무더기 말이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p205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생각을 교실 밖으로도 가져가기 시작하여, 중요한 정치인들이 모인 큰 모임에 연사로 나서며 "공화국은 인간의 수확이 좋은 동안에만] 유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0그는 1898년에 우생학을 지지하는 첫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인간의 수확The Human Harvest》, 《국가의 피The Blood of the Nation》, 《당신의 가계도Your Family Tree》 등 유전자 풀pool의 정화를 옹호하는 책들을 연달아 냈다.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52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54 보일 수있는 특징들이 사실 좀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그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으며, 대다수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명과 발견, 혁명을 이루게 한 열쇠는 확산적 사고를 하는 뇌일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58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 P189

다섯 달 뒤 캐리 벅은 린치버그 수용소에 있는 땅딸막한 벽돌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수술하는 의사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춰주는 그런 방이었다.80 캐리는 수술대에눕혀졌고, 치골 바로 위의 살이 메스로 열렸다. 의사는 탐침으로나팔관의 위치를 찾아 재빠르게 양쪽 나팔관을 잡아맸다. 그런 다음 잘린 끝부분이 풀리지 않도록 석탄산으로 봉했다. 81수술 후 깨어난 캐리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 이제 다시는그녀만의 독특한 눈과 그녀의 고유한 특징들을 물려받은 아이가이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캐리의 소송은 미국 전역에서 "공공복지"82의 이름으로 6만건 이상의 불임화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당사자의 의지를 거슬러실시될 길을 닦아놓았다. 그 "부적합자들 중 다수는 잊혔지만, 연구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이야기들이 다시 어둠 속에 묻히지 않도록 분투했다 - P194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85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1 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 P195

그동안 강제 불임화는 전국에서 "조용한 방식으로 계속 시행되고 있다. 그중 다수가 (저소득층 병원이나 마약중독 클리닉, 교도소,
장애인 수용시설 등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고 행해져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큰 사건들은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때로는 본인들도 모르게 불법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는 테네시주의 샘 베닝필드라는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 드러났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골턴의 어리석음,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워싱턴의 내셔널몰을 따라 걷다가 21번가에 도착해서 북쪽을바라보면 그가 보인다. 미국 과학의 사원인 국립과학아카데미로들어가는 길목에 청동으로 새겨진 프랜시스 골턴이 있다.93 스탠퍼드대학의 주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조각상 중 하나가 루이 아가시다. 흑인은 인간보다 낮은 종이라고 믿었 - P196

던 루이 아가시가 여전히 코린트식 기둥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에는 전면 전체에 아치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점토 기와를 올린 거대한 사암 건물이 있다. 그 건물에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몰살시킬 것을 촉구하며 전국을 누볐던 남자를 기리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조던 홀Jordan Hall"이다. - P19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사람들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남자. - P201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 P207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 P208

애나는 열아홉 살 때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불임화를 당했다. 196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벽돌벽 안에 처음 들어간 것은 그보다 12 년 전인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애나와 남자 형제들이 그들의 집 뒤에 있는 우리 안에서 발가벗고 방치된 채 놀고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목격했다. 주에 소속된 복지사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기 싫어한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긴 머리와 멜빵바지를, 추운 밤이면 엄마의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애나를 받아주던 엄마를. 그러나 이웃들의 우려와 부모의 가난, 애나의 낮은 지능검사점수만으로 이 일곱 살 소녀를 "부적합자"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 P214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 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여러 해 동안 애나는 누군가ㅡ부모나 대통령이나 어디선가선을 위해 투쟁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기를 소망하며 불임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키고 싶은 한 부분, 바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단 하나의 희망의 근원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 P216

부적합,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그냥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다 1967년, 찌는 듯이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애나가 열아홉 살이 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애나에게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애나를 검사실로 데려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뒤 방을 나갔다. 그 순간 애나는 벽이 파도치듯 일렁이다 흐릿해지는 걸 보았다. 애나는 자신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애나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났죠."
깨어나기는 했다. 깨어나 붕대가 감긴 배를, 도둑질을 감추려고 대충 꿰맨 스물다섯 개의 바늘땀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제 곧 자유롭게 떠날수 있을 거라는 말만 했다. - P217

그날 그 집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했던 우생학자들의 믿음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 P221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P221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23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 P226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아는 것이다.  - P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나는 운전대를 살짝 두드렸다. 운전대에 닿는 내 손가락이 한층 더 가볍게 느껴졌고, 그 손가락이 조종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더 큰 통제력이 느껴졌다. - P228

휴, 한숨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그것은 번개도 아니고 홍수도 부패도 아니며, 큰 입을 벌려 그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도 아니다.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 P235

별들을 포기하는 일이 성직자에게는 다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방랑자에게도, 제빵사에게도, 촛대 만드는 사람에게도그러니까 물고기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캐럴 계속 윤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평생 존경해왔던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격분이 생겼다고 했다. 인간의 직관을빼앗아감으로써 일반 대중이 인간의 애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환경에 더더욱 무관심해지도록 만들 거라는 걱정이었다. 물고기의 죽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설명한 책을 썼음에도, 윤의 한 부분은단순한 언어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앞에서 얘기했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릭 윈터바텀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목적을 얻었다. 그는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포를 걷어내려는 열의에 불타올라, 이 칠판 저 칠판 위에서 이 물고기 저물고기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고, 자신이진실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문틈을 엿보도록 돕고 싶은 열의를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그는 열의가 식고 시무룩해졌다.  - P249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 P252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더 이상 나의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헤더의 아파트에, 곱슬머리 남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는 헤더의 믿음이 따뜻하게덥혀주던 그 2층짜리 둥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무리 편안하게느껴지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 P255

그 커튼들 너머,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윈이 거기 있을 것이라 약속했던 땅, 분기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땅, 어류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우리가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 B. 예이츠의 것으로 알려진 이 인용문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벽에 붙여두었다. 그 다른 세계가 바로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 세계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세계를 보려면 아무래도 스노클이 필요할 터였다. 내가 마침내 그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되려면, 플라스틱 스노클을 내 코에세게 갖다 대야 할 터였다.
한번 설명해보겠다. - P257

깨끗한 물 때문이었을까.
뭐였든.
하지만 그 물고기들이란.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러 올라갔다. - P261

이제는 침대 위 에메랄드색 눈의 아내 곁에 누워 있을 때 총이 떠오르면-그렇다. 그건 여전히 떠오르고, 아마도 언제나 떠오를 것이다-나는 총이 주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가져다줄수 있는 해방, 그날의 스트레스와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해결책, 수치의 종말에 관해.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 P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 P263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 P264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P267

삽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에 실린 삽화는 19세기에 처음 생긴, 판에 직접 새기는스크래치보드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점토로 된 흰 하드보드를 검은 먹물로 코팅하고, 무엇이든 긁어낼 수 있는 도구로 검은 부분을긁어내어 그림을 새기는 방법이다. 이 책 삽화에서 판화가는 바늘을 기본 도구로 사용했다.

변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감사의 말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은 지적인 부분에서 대모 역할을 해준 캐럴 계숙 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논의한 과학적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윤의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내가 처음 분기학이라는 토끼굴에 빠졌을 때, 그 주제에 관해 기꺼이이야기를 들려준 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고, 윤은 늘 너무나도 관대하고 자애로운 안내자가 되어주었습니다. - P272

니다.
추천할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페니키스 섬의 소년원에서 교사로 일한 시간을 담은 대니얼 롭의 회고록 《그 물을 건너다Crossing the Water》입니다. 그의 글은 페니키스 섬처럼 황량하면서도 벅차고,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강경합니다. 격리와 고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장소가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해 그가 제기한 의문들이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또 한 권은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살아야 할 이유stay: A History of Suicide and thePhilosophies Against It》(열린책들, 2014)로, 자살에 반대하는 훌륭한 비종교적 주장들을 펼쳐놓았습니다. 두 책 모두 매우 아름다운 독서경험을 안겨주었고, 나는 이 선물 같은 책들을 언제까지나 소중히여길 것입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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