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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 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안에서버둥거리던 어머니는 잡을 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 - P8

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9

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 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운동중인 모든 사람이 우스꽝스러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네 공원에서 소나무에 대고배치기를 하는 아저씨나, 손뼉을 치며 걷는 아주머니들을 볼때마다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진지했고 열성적이었다. 마치 건강해지기위해서는 조금씩 우스워져야 된다는 듯이. - P10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한번도 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를 낳았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양반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늦게 왔지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주눅든 지각생의 눈빛 때문에 항상 먼저 농담을 건네던 여자였다. 아버지는 변명을 하지도, 큰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그저마른 입술과 새까매진 얼굴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상상하건대, 어쩌면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 P11

달리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한다. 달리기는 심폐계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신운동으로, 걷기와 뛰기의 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리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고도의스피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장소나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리기는강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떠난 사람이, 나를 떠난 곳에서 오래 달리고 있는 이유를, 그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생각이 든다. - P14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뛴다. 물론 아무도 박수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5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십수년 만에 우편을 타고 가뿐하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善意)처럼, 종지감 없는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낯선 억양의 인사를 건네며 돌아온 부고(告).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세계 곳곳을 달린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세계를 뛰어다닌것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계셨다. - P22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후꾸오까를 지나, 보루네오섬을 건너,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가는 아버지, 스핑크스의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거쳐,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아버지. 웃으면서 달리는 아버지. 달리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썬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가장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 - P28

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 - P29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무언가 필요해진다.

약속과 우연과 재난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3년 서울.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편의점은 기원을 알수 없는 전설처럼 그렇게 왔다. 시치미를 떼고 앉은 남편의 애첩처럼, 혹은 통조림 속 봉인된 시간처럼 수상할 것도 없이.

2003년 서울 사람들에게 습관이란 구원만큼 중요한 문제가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 서울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뭘까 항시 고민하는 창백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편의점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많이, 그리고 신속하게 생겨났다. - P32

편의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은 모두 누구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저마다 하나씩 앨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운동회 때 2등으로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1등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같이 흠칫 놀랐다거나, 형제에게돈을 꾸어 여자를 만나고, 모든 문제집의 첫장만을 풀어봤다거나, 뜻을 알면서도 국어사전에서 ‘음부‘나 ‘성교‘라는 단어를찾아봤을 사람들, 혹은 하게 될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건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다. - P33

하루에도 몇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사러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 P33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 P57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사실뿐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길게 내민 모가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아프리카 평원위에 최초로 직립하게 된 유인원처럼ㅡ고독하게. - P60

나는 한번 올라가면 다신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스카이콩콩을 잘 탔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좋아하는 가수가 십대가수상을 타도, 형이 알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놓아도 스카이 콩콩을 탔다. 언젠가 핼리혜성이 76년 만에 돌아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어대던 날도, 나는 옥상 위에서 조용히 스카이콩콩을타고 있었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또 우아했다.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들어 있었다. - P65

스카이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 P66

형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형은 과학적 소질이 전혀없어 보였다. 어쩌면 형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은 변했다. 형은 더이상 안경을 벗어던지며 "아버지, 앞이 보여요!"라고 외치던 병신이 아니었다. 형은말수 적은, 그러나 할말 있는 표정을 가진 소년이 되어갔다.
형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옆구리에 항상 과학서적을 끼고 다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 절대 멋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은 공공연히 자신이 한국과학기술원에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반에서 36등을 했다. 형은 과학자가 되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공부, 운동, 신문 스크랩, 게다가 문학동아리 가입까지. 형은 과학자가 되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천문학자들의 이론은 그 자체로완벽한 하나의 시(詩)‘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지만 그후로도 몇년 동안 형은 라디오를 고치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형에게 뭔가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스카이 콩콩을 탔다. - P72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

형이 돌아왔으니, 그리고 우리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저렇게 괜찮아져 있으니 가로등 앞에 있던 우리집 이야기는이제 그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 깜박 잊고 있던 이야기 하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은 형이 고무동력기대회에서 일등을 먹은 날로부터 일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P81

우와 하는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추락의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형은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서꼼짝하지 않았다. 창공 위로 여전히 수십개의 비행기가 고운선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에 성공한 각각의 비행기들이 약속한 듯 모두 추락하기 시작했다. 형은 두번째로 놀라며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비행기들은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며 하나둘 낙하하고 있었다. 다른 형들은, 작년에 형이일등한 비결을 알고 형을 따라 모두 비행기 꼬리부분을 손봤던 것이다. 하지만 형들도 서로 그것을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고개를 들어 낙하하는 비행기들의 춤을 바라봤다. 빙글빙글돌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행기 떼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꽃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꽤 아름다웠다. 형은 멍하니 서서 그 꽃비를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말도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어떤 재능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그날 밤 집으로돌아온 뒤 홀로· 스카이콩콩을 탔다.

----스카이 콩콩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 P83

그녀는 벌써 몇번째 자세를 뒤척였다. 바로 누웠다. 옆으로누웠다. 엎드렸다 하는 것은 기본이며 쿠션을 다리 사이 혹은다리 밑에 끼우거나 안거나 팽개치거나 함은 물론이다. 팔을둘다 올리거나 하나만 올릴 수도 있고, 팔은 구부리고 다리는펼 수도, 다리는 구부리고 팔을 펼 수도 있다. 한쪽 다리는 올리고 한쪽 다리는 내린 채 팔은 양쪽 다 머리 위로, 고개는 오른쪽을 향하게 할 수도, 왼쪽을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의자세는 모두 세분화된 신체의 경우의 수로 만들어진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아직 모르는, 어떤 예민한 사람이라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독특한 자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척임은 바로 그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가며 ‘빙고‘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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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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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복판에서 지난 겨울에 읽은 책을 떠올리면 조금 시원해질까? 철학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만 기차와 여행은 다르다. 완행열차의 삶이고 읽기, 쓰기도 그러해서 비둘기호 속도로 읽는 책은 나름 좋았다. 특히 시몬 베유, 보부와르를 같이 만나고 철학과 삶의 여정을 살펴보며 따라가는 동행은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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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옴짝달싹할 수 없는 논거는 자연 자체에서 온 것일 터다. 데이비드가 자연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 역시 그 논거를 보았을 것이다. 눈부시게 깃털을 푸덕거리고 꽥꽥거리고 콸콸 쏟아지는 반대 증거의 무더기 말이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p205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생각을 교실 밖으로도 가져가기 시작하여, 중요한 정치인들이 모인 큰 모임에 연사로 나서며 "공화국은 인간의 수확이 좋은 동안에만] 유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0그는 1898년에 우생학을 지지하는 첫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인간의 수확The Human Harvest》, 《국가의 피The Blood of the Nation》, 《당신의 가계도Your Family Tree》 등 유전자 풀pool의 정화를 옹호하는 책들을 연달아 냈다.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52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54 보일 수있는 특징들이 사실 좀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그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으며, 대다수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명과 발견, 혁명을 이루게 한 열쇠는 확산적 사고를 하는 뇌일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58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 P189

다섯 달 뒤 캐리 벅은 린치버그 수용소에 있는 땅딸막한 벽돌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수술하는 의사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춰주는 그런 방이었다.80 캐리는 수술대에눕혀졌고, 치골 바로 위의 살이 메스로 열렸다. 의사는 탐침으로나팔관의 위치를 찾아 재빠르게 양쪽 나팔관을 잡아맸다. 그런 다음 잘린 끝부분이 풀리지 않도록 석탄산으로 봉했다. 81수술 후 깨어난 캐리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 이제 다시는그녀만의 독특한 눈과 그녀의 고유한 특징들을 물려받은 아이가이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캐리의 소송은 미국 전역에서 "공공복지"82의 이름으로 6만건 이상의 불임화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당사자의 의지를 거슬러실시될 길을 닦아놓았다. 그 "부적합자들 중 다수는 잊혔지만, 연구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이야기들이 다시 어둠 속에 묻히지 않도록 분투했다 - P194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85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1 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 P195

그동안 강제 불임화는 전국에서 "조용한 방식으로 계속 시행되고 있다. 그중 다수가 (저소득층 병원이나 마약중독 클리닉, 교도소,
장애인 수용시설 등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고 행해져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큰 사건들은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때로는 본인들도 모르게 불법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다. 그리고 2017년 여름에는 테네시주의 샘 베닝필드라는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 드러났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골턴의 어리석음,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워싱턴의 내셔널몰을 따라 걷다가 21번가에 도착해서 북쪽을바라보면 그가 보인다. 미국 과학의 사원인 국립과학아카데미로들어가는 길목에 청동으로 새겨진 프랜시스 골턴이 있다.93 스탠퍼드대학의 주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조각상 중 하나가 루이 아가시다. 흑인은 인간보다 낮은 종이라고 믿었 - P196

던 루이 아가시가 여전히 코린트식 기둥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에는 전면 전체에 아치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점토 기와를 올린 거대한 사암 건물이 있다. 그 건물에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을 "몰살시킬 것을 촉구하며 전국을 누볐던 남자를 기리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조던 홀Jordan Hall"이다. - P19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사람들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남자. - P201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 P207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 P208

애나는 열아홉 살 때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불임화를 당했다. 196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벽돌벽 안에 처음 들어간 것은 그보다 12 년 전인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애나와 남자 형제들이 그들의 집 뒤에 있는 우리 안에서 발가벗고 방치된 채 놀고 있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목격했다. 주에 소속된 복지사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아이들이 가기 싫어한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긴 머리와 멜빵바지를, 추운 밤이면 엄마의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애나를 받아주던 엄마를. 그러나 이웃들의 우려와 부모의 가난, 애나의 낮은 지능검사점수만으로 이 일곱 살 소녀를 "부적합자"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 P214

애나는 웃음과 온기가 가득한 활기찬 가정을 꾸리길원했다. 애나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나를 잡아 가둔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는 분명 그 사실을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에서 애나가 하던 일이 수용된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파자마를 갈아 입혀주고 흔들어서 재워주었다.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적합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일까.
여러 해 동안 애나는 누군가ㅡ부모나 대통령이나 어디선가선을 위해 투쟁하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기를 소망하며 불임화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지키고 싶은 한 부분, 바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단 하나의 희망의 근원을 넘겨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 P216

부적합,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그냥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다 1967년, 찌는 듯이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애나가 열아홉 살이 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애나에게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애나를 검사실로 데려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뒤 방을 나갔다. 그 순간 애나는 벽이 파도치듯 일렁이다 흐릿해지는 걸 보았다. 애나는 자신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애나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났죠."
깨어나기는 했다. 깨어나 붕대가 감긴 배를, 도둑질을 감추려고 대충 꿰맨 스물다섯 개의 바늘땀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제 곧 자유롭게 떠날수 있을 거라는 말만 했다. - P217

그날 그 집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했던 우생학자들의 믿음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 P221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P221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23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 P226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아는 것이다.  - P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나는 운전대를 살짝 두드렸다. 운전대에 닿는 내 손가락이 한층 더 가볍게 느껴졌고, 그 손가락이 조종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더 큰 통제력이 느껴졌다. - P228

휴, 한숨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그것은 번개도 아니고 홍수도 부패도 아니며, 큰 입을 벌려 그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도 아니다.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 P235

별들을 포기하는 일이 성직자에게는 다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방랑자에게도, 제빵사에게도, 촛대 만드는 사람에게도그러니까 물고기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캐럴 계속 윤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평생 존경해왔던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격분이 생겼다고 했다. 인간의 직관을빼앗아감으로써 일반 대중이 인간의 애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환경에 더더욱 무관심해지도록 만들 거라는 걱정이었다. 물고기의 죽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설명한 책을 썼음에도, 윤의 한 부분은단순한 언어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앞에서 얘기했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릭 윈터바텀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목적을 얻었다. 그는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포를 걷어내려는 열의에 불타올라, 이 칠판 저 칠판 위에서 이 물고기 저물고기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고, 자신이진실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문틈을 엿보도록 돕고 싶은 열의를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그는 열의가 식고 시무룩해졌다.  - P249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 P252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더 이상 나의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헤더의 아파트에, 곱슬머리 남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는 헤더의 믿음이 따뜻하게덥혀주던 그 2층짜리 둥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무리 편안하게느껴지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 P255

그 커튼들 너머,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윈이 거기 있을 것이라 약속했던 땅, 분기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땅, 어류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우리가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 B. 예이츠의 것으로 알려진 이 인용문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벽에 붙여두었다. 그 다른 세계가 바로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 세계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세계를 보려면 아무래도 스노클이 필요할 터였다. 내가 마침내 그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되려면, 플라스틱 스노클을 내 코에세게 갖다 대야 할 터였다.
한번 설명해보겠다. - P257

깨끗한 물 때문이었을까.
뭐였든.
하지만 그 물고기들이란.
물고기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무엇과도 달랐다.
노란 앵무새들과 검은 천사들과 아콰마린색 달의 조각들. 상당한 크기의 자주색 물고기 하나는 내가 강아지처럼 자기를 졸졸따라다니게 해줬다. 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감동의 소리를 낼수 없었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가야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러 올라갔다. - P261

이제는 침대 위 에메랄드색 눈의 아내 곁에 누워 있을 때 총이 떠오르면-그렇다. 그건 여전히 떠오르고, 아마도 언제나 떠오를 것이다-나는 총이 주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가져다줄수 있는 해방, 그날의 스트레스와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해결책, 수치의 종말에 관해.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 P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 P263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 P264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P267

삽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에 실린 삽화는 19세기에 처음 생긴, 판에 직접 새기는스크래치보드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점토로 된 흰 하드보드를 검은 먹물로 코팅하고, 무엇이든 긁어낼 수 있는 도구로 검은 부분을긁어내어 그림을 새기는 방법이다. 이 책 삽화에서 판화가는 바늘을 기본 도구로 사용했다.

변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감사의 말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은 지적인 부분에서 대모 역할을 해준 캐럴 계숙 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논의한 과학적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윤의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내가 처음 분기학이라는 토끼굴에 빠졌을 때, 그 주제에 관해 기꺼이이야기를 들려준 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고, 윤은 늘 너무나도 관대하고 자애로운 안내자가 되어주었습니다. - P272

니다.
추천할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페니키스 섬의 소년원에서 교사로 일한 시간을 담은 대니얼 롭의 회고록 《그 물을 건너다Crossing the Water》입니다. 그의 글은 페니키스 섬처럼 황량하면서도 벅차고,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강경합니다. 격리와 고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장소가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해 그가 제기한 의문들이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또 한 권은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살아야 할 이유stay: A History of Suicide and thePhilosophies Against It》(열린책들, 2014)로, 자살에 반대하는 훌륭한 비종교적 주장들을 펼쳐놓았습니다. 두 책 모두 매우 아름다운 독서경험을 안겨주었고, 나는 이 선물 같은 책들을 언제까지나 소중히여길 것입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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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을까? 자기가 평생 해온 작업의 파편들을 쓸어 담을 때,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물고기들을 던져버릴 때, 이튿날 밤 작은아들 에릭을 침대에 뉘일 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엄청난 양의) 번개와 세균과 지각변동이 잠복한 채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계속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의 허망함에 짓눌려 으스러지지않기 위해 그는 정확히 어떤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었을까?
나는 점점 더 필사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곱슬머리 남자가 나를 떠난 지 3년이 되었고, 세계는 계속 침묵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어느 결혼식장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포옹을 했고그의 계피 향기가 소나기처럼 내게 훅 끼쳐왔다. 그게 다였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모든 게 다 복구될 거라는, 우리의 사랑은 나의 배신에도 떨어져 있는 몇 년,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낸 몇 년 세월에도 버틸 만큼 충분히 강할 거라는 희망을 말이다.  - P118

그러나 헤더가 남자친구와 시내로 외출한 밤, 도시의 자주색불빛이 참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내가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더 따뜻이 데워줄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 P120

데이비드가 마술적 사고 탓으로 돌린 것들 중 몇 가지만꼽자면 고통, 병, 무지,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1924년에 《사이언스》에 발표한 <과학과 사이어소피>라는 글에서 그는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 P125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 P125

심지어 절제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는왜 그토록 약에 반대했을까? 그건 약이 사람을 실제보다 더 강력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이
"신경계가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몸이 차가울 때도 따뜻하게 느끼도록 하고, 아무 근거 없이 기분 좋아지게 하며, 인격 수양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한과 자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은 자기 발전에 대한 저주라는 것이다. 자신을 정체시키고 자기 발달을 저해하고 도덕적으로 미숙하게 만드는 길이자 멍청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 P126

이런 게 정말 그의 세계관이라면, 그가 그렇게 자기 과신을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집요함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사라지고 부서지고 희망이라곤 없는 최악의 날에조차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일까?
마침내 나는 가장 유의미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절망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작고 검은 책이다. 그 책에서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골치 아픈 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 P126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당신이 밟고 선 그 땅뙈기가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라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인용한 뒤, 분발을 요구하는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 외치며 독자들을 배웅한다.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다."16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 P127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19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엄청 차가운 호수에 풍덩 뛰어들었다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큰 숨을 내쉬며 수면으로 치솟는 모습을 볼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나는 왜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 수 없는걸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뭘까?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 위생과 유머, 외교, 평화주의에 관한그의 비판문과 시, 강의 노트, 알코올과 립스틱과 전쟁에 관한 논쟁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오후 나는 발견했다. 공포에 대한 해독제, 희망에 대한 처방을 말이다. - P128

그것은 그가 ‘진화의 철학‘이라 이름 붙인 강의 요강의 제일 밑에 묻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날 하루의 강의를 내가 풀고자했던 그 난제, 바로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바쳤다.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20 강의가 끝나갈 무렵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나는 경악했다. 이거였다. 내 아버지가 즐겨 쓰는 바로 그 비법. - P128

법. 오늘날까지도 아버지 책상 위 액자 속에 담겨 있는 바로 그 단어들. 다윈이 외친 투쟁의 권유. 내 아버지와는 다르게 반항적이고, 희망과 신념이 가득한 사람으로-보였던 데이비드지만, 결국그에게도 내게 알려줄 새로운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늘들어왔던 말을 또다시 상기시키는 것밖에는.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 P129

어느 날 밤 나는 로저스 공원에 있는 어느 바에서 친구 스탠지를 만났다. 우리는 흑맥주를 주문하고 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시를 가지고 방송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관념과 단어의 분열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자신이 쓴 단어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철퍼덕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주는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지닌 위험한 힘에 대해서도. 나는스탠지에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그 지진과 바늘에 대한 나의 집착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건 왜 그러는지에 관한 집착이야"라고 나는 말했다.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도록 몰아대는건 뭘까?"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흠"이 다여서 나는 맥이 좀 빠졌지만,
다음 날 오후 이메일을 통해 좀 더 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 P130

나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이로운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은 단지 내가 그것을 거역한다면 나를 부숴버리겠다고만 약속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잘 들어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파괴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이 겪는 고통처럼 보였다. 바보들,
낭만주의자들, 슬픈 왕들을 사랑하는 흉내쟁이들, 내면의 열정이라는 연료가 너무 강력하게 피어올라 현실감각이 안개처럼 흐려진 사람들. 그런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그런 사람이던가? 절대아니다. 그가 평생 전념해온 일은 그런 열정 때문에 눈앞을 가리는안개를 닦아서 없애는 것이었으니까. - P131

이 얼마나 경이롭고 분발을 요구하는 투쟁의 권유인가.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이자,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인가.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도그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그 진주알을 만든 최초의 작은 모래알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왔던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 P133

데이비드가 연구실 바닥에서 유리 파편을 쓸어 담고 있을 때,
부서진 자기 인생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는 노력을 끌어내고 있을 때 그가 자신에게 속삭인 건 거짓말이었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그동안 그가 주장해온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이 거짓말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가 결국에는자신의 컬렉션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살려냈다는 사실, 한 세기가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천 개의 표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고, 아주 다양한 기준으로 볼 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이 결국 비범할 정도로 성공적인 인생두 아내, 학장직, 상, 개를타고 다니는 원숭이와 라틴어를 말하는 앵무새, 분류학을 사랑하는 자식들이 가득한 에덴동산까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자기기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어쩌면 데이비드와 나의 아버지는 자기기만에 대해 그렇게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피해야하는 죄라고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 P137

마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메리 포핀스의 마법 가방처럼 긍정적 착각이 가져다주는 온갖 좋은(마음 깊이 느껴지는 잘 살고 있다는느낌, 일과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성공, 심지어 더 좋은 신체 건강까지8) 이야기들을 찾아 읽는 동안, 어쩌면 내가 개미보다 나을 게 없으니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느라 아버지가 나를 쓸데없이 헤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 P141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것을 보여주었다.16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 P143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높은 자존감이 모두 나쁜 건 아니라는 점도 재빨리 덧붙였다. 그들은 높은 자존감도 아주 좋은 것일수 있다며, 활짝 편 손바닥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해명해야 하는상황을 자주 겪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받아도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높은 자존감은 당사자를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그들의 표현으로는 "이례적으로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기는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쉽게 느끼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 P150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738나는 스탠퍼드에서 보았던 그 오싹한 물고기, 데이비드 스타조던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바닷물고기를 다시 떠올렸다. 서로 반대쪽에 위치한 두 면이 돌돌 말리듯 어디서 만나는지도 모르게 하나로 합쳐지는 뫼비우스 띠 모양의 그 가시 박힌 용말이다. "모서리가 없는 조던" 그가 선택한 이 물고기에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는 걸까? 그의 매력 아래 도사린 어두운 면에 대한 인정일까?
루서 스피어는 이렇게 썼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 하지만 조던은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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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의 선지자로 모시던 루이 아가시의 제자답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 했다. 아가시의 흐릿한 "퇴화" 개념에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것을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미끌미끌한 먹장어를 나태함
"이나 기생충 같은 "나쁜 버릇이 한 종을 퇴보 또는 타락시키거나,
"더 나쁜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머니 모양의 몸으로 여과섭식을 하는 멍게가 한때는 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한 쇠퇴를 초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대한 교훈담이고, 말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 - P74

찰리와 함께 해안을 훑으며 다니는 동안 데이비드는 노련한낚시꾼들이 먹이를 잡는 방법을 연구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촘촘한 그물로 엄청난 양의 다양한 생물을 훑어 올리는 중국인 어부들, 샌타바버라에서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탐지창을 찔러 넣는 포르투갈 어부들, 그리고 너무 부럽게도 정탁하게 물속으로 돌진하는 갈매기와 펠리컨까지. 그는 자기가 채택할 수 있는 방법은 채택하고, 채택할 수 없는 것은 훔쳤다. 중국수산시장을 찾아 아직 과학에 알려지지 않은 생물들을 쓸어왔고, 새와 상어의 배를 갈라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은 생물들을 찾아냈다. 데이비드와 찰리는 이 출장에서만 80가지가 넘는 새로운류 종에 이름을 붙였다. 생명의 나무에서 80개의 새로운 가지가 베일을 벗었다.  - P74

그러던 7월의 어느 늦은 밤, 우주가 손목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공기 중에 숨어 있던 이온들의 작은 주머니들을 터뜨리고, 벼락으로 전신선을 때려 데이비드의 연구실 아래층 사무실로 불꽃을날렸다. 1883년의 일이었다. 천천히 종이 몇 장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이어서 더 많은 종이들에 붙었고, 그다음에는 벽들에도 붙었다. 그러다 마침내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데이비드의 소중한 유리단지들이 쌓여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에탄올은 부패시키려는 우주의 시도를 저지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불과도 친한 사이였다. 그 유리단지들은 작은 폭탄들처럼 폭발했다. 물고기들은 증발했다. 동정되지 않은 생물들은 재가 되었고, 아마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표본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되었다. - P77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데이비드는 비밀스러운 문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에서 전에는 한 번도 본적 없는 가지들을 밝혀내는 일종의 보물지도였다. 통찰과 진화적관계를 천명하는 정신없이 복잡한 선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샹들리에 모양의 지도. 이것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피해의 규모를평가하는 일을 맡은 기자는 비탄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기자는《블루밍턴 텔레폰Bloomington Telephone》지에 "한 시간 동안 타오른 불길이 그가 평생 해온 일을 거의 다 수포로 돌려놓았다"라고 썼다. 17하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이런 재해를 겪고도 멈추기를거부했다. 자신이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재를 털고 곧바로 다시 - P77

벼락 사고와 수전의 죽음 두 가지 일에서 재빨리 회복한 것에대해 데이비드는 살면서 언제부턴가 "낙천성의 방패"를 갖추게 된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25 그는 자신의 키가 낙천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도 추측했다. 완전히 자랐을 때 그의 키는 188센티미터로, 26 미국 남성 평균 키가 167.6센티미터였던 당시로서는엄청나게 큰 키였다. 무엇 때문에 생긴 낙천성이든 간에, 데이비드의 친구들도 그의 낙천성의 방패에 대해, 일에 차질이 생겨도 전혀동요하지 않는 성질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한 동료는 아무리 안좋은 날에도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회랑을 거니는" 데이비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27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한다. 그의 어조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느낌이 배어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띠에 과학적 발견의 표시를 수백 개나새겨 넣은 이 쾌활하고 혈기 왕성한 거구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한 이야기가 캘리포니아의 한 부유한 부부의 귀에 들어갔다.  - P79

그는 폭넓은 대상들을 향해 이 주제에 관해 강연을 하고다녔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당시 링컨 행정부가 조언을 구했을 때는, 만약 흑인을 해방시키더라도 백인과는 결코 평화롭게 살 수 없을 것이므로 백인들과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말도 안 되는 척도들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등급을 거론하며, 흑인들이 생물학적으로 문명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그들의 잘못은 아니며, 그냥 본성상 너무 "아이들 같고", "관능적이며", "놀기를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성스러운 생명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칸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 중 어느 것도 데이비드의 마음에는 걸리지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과학관 입구에 아가시의 조각상을올리는 일에 환호했다. 그는 아가시가 다윈을 거부한 것을 용서했으며, 그 이유는 "아가시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정신이 ‘어떤 인간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형 루퍼스를 따라 공공연히 자신을 노예제 폐지론자로 밝혀왔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 P83

그러나 이런 비판과 모욕, 그의 목줄을 홱 잡아당겨 고통을 주는 악력이 있는 한편, 언제나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물고기가 주는위안도 있었다. 데이비드는 드넓은 물의 세계가 무한한 위안을, 그어떤 술이나 약보다 훨씬 더 나은 위안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우주에서 아직은 미지의 한 조각에 불과한 새로운 물고기를 한 마리한 마리 잡아나가고, 새로운 이름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믿을 수없는 도취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혀에 닿는 그 달콤한 꿀, 전능함에 대한 환상, 그 사랑스러운 질서의 감각. 이름이란 얼마나 좋은위안인가. - P89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있다고 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눈을 굴리며 수학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숫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파이를 품고 있지 않은 원이 있다면 어디 한번 내게 보여주시오." - P93

그가 의자를 예로 든 의도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겸손을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대체로는 이해한 것 같다. 그의 연구실-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를—에서 그와 함께 앉아 있을 때는 그 생각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캠퍼스로 걸어 나와 내 앞에서 아름답게 나부끼는 오렌지나무잎들을 보자 그 관념들이 바람에 날려 증발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의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무들도. 나뭇잎들도. 그리고 사랑도!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맞지? 맞겠지?
- P95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 이 완모식 표본들도Idas longinus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예를 들어 뤼세이데스 이다스 롱기누스 Lycaeides to나비는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작은 모자이크 펜던트처럼 생긴, 지금은 멸종한 불가사리 종인 마로카스테르 코로나투스Marocaster coronatus의 최초 표본은 프랑스 툴루즈박
"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완모식 표본들은 흔히 뒤쪽의 은밀한방에 따로 보관하는데, 당신이 경의를 표하면서 정말로 정중하게요청한다면 때때로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되어 숨죽인채 그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자체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 P96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데이비드가 물고기를 더 많이 수집할수록 우주가 더 난폭하게 반격하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그가 혼돈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주가 빼앗아간 것은 그의 아내 수전과 아기 소라뿐이 아니었다. 우주가 빼앗아간 존재 중에는 그의 친한 친구 허버트 코플랜드도 있었다. 북미의 새로운 담수어를 찾는 걸 함께하자고 그가 불렀던, 그 수염 기른 고기잡이 친구 말이다. 허버트는 어느 날 인디애나의 화이트 강에서 물고기를 수집하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배 밖으로 떨어져 동사했다.2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나의 가장 친밀한 옛 친구가, 내가 교류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정신을 지닌 이들 중 하나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버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드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 한 명인 찰스 메케이가 알래스카에서 새로운 물고기를 찾던 중 실종됐다. 뒤이어 그의 제자 찰스H. 볼먼이 조지아주 남부의 오커퍼노키okefenokee 습지에서 물고기를 수집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했다. - P100

어느 날 데이비드가 일본에서 물고기를 수집하고 있을 때 아홉살 바버라는 성홍열에 걸려 몸져누웠다. 데이비드는 서둘러 바버라 곁으로 돌아갔지만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도착했을 때 이미늦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데이비드는 이 일을 "우리가 겪은가장 잔인한 개인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나 나에게나가장 파괴적인 충격으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밝은 빛이 꺼져버린일이었다. 20년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제 겪은 일처럼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는것, 미약하지만 목적의식을 느끼게 하고 기분을 돌리게 할 수 있는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의 물고기들이었다. 그는 다시 물로, 바다로 나갔다. 더, 더 많은 물고기를 찾아서.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 P102

미지의 생물에게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는 주석 이름표에 그 성스러운 이름을 펀치로 새기고, 그 이름표를 유리단지 속표본 곁에 담그고 뚜껑을 닫았다. 우주의 또 한 귀퉁이가 포획된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높이, 더 높이 쌓아가며 전시했다. 그가 질서 속으로 끌어다놓은 혼돈의 양이거의 건물 두 층 높이로 올라갈 때까지. - P106

과연 여기에 어떤 단어들이 어울릴까?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모든 곳에 물고기들이 있었다. 바닥 위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흩뿌려져 있었다. 가자미들은 떨어진 돌에 깔려 더 납작하게 뭉개졌다. 장어들은 무너진 선반에 깔려 절단되었다. 복어는 유리 파편에 찔려 살이 터져나왔다. 에탄올과 시체 냄새가 코를 쏘아댔다.
- P111

내가 이 연극의 감독이라면 무대 디자이너에게 조금 살살 하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받아들이자. 이것이 우주가 우리에게준 것이다. 혼돈이 지배한다는 것, 나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어 보였다.
나라면 이 지점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신성이 훼손되고, 꿈이박살 났으며, 수십 년 동안 끈기 있게 해온 일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면, 나라면 지하실로 내려가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 P113

데이비드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의 신중한 과학자, 다른 무엇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하는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그 지진의 명백한 메시지라 여겨지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까?
엔트로피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며, 그 어떤 인간도 결코 엔트로피를 멈출 수 없다는 메시지에?
아니다. 바로 이때 이 불운한 작자, 이 경이로운 작자는 바늘을꺼내 우리 지배자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런데 대체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걸까? 이름을 살갗에곧바로 꿰매겠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데이비드의 내면 깊숙한 곳어디선가 솟아난 것일까? 소년 시절 해진 천을 꿰매 깔개를 만들던 기억 속에 있던 바늘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일까? 다른누군가가 제안한 것일까? 동료? 학생? 아내?
나도 모른다. 아쉽게도 이 바느질 기법의 탄생 비화를 나는 찾아내지 못했다. 표본에 곧바로 이름표를 꿰매는 것을 최초로 생각 - P113

사천번의그 답답한 마음이 그런 혁신을 불러온 것일까?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나로서는 데이비드가 최초로 바늘을 꽂던 순간을 상상해볼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가 물고기 하나를 알아본다. 멸치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인데, 내 눈에는 아무 개울에나사는 아무 물고기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는 보석 감정사처럼 그 작은 생물을 한 손에 들고 있다. 다른 손에는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바늘이 들려 있다. 데이비드가 알아본것은 무엇일까? 등을 따라 희미하게 나 있는 호랑이 같은 줄무늬였을까? 눈알을 에워싼 은색 테두리? 마치 배에 투명한 나비 한 마리가 앉은 것 같은 한 쌍의 작은 배지느러미? 그의 그물에서 탈출하려고 격렬하게 퍼덕거리며 물을 헤치던 그 셀로판지 같은 날개들을 기억해낸 것일까? 맹그로브 뿌리 사이를 날듯이 헤치고 다니고, 파도가 새겨진 모래 위에서, 그 따뜻한 아콰마린색 물에서 퍼덕이던 그 날개를? 그 물이… 어디더라… 아… 그래, 파나마! 맞아,
그거야. 그는 확신했다. 그가 들고 있던 건 파나마 망둥이의 유일한 완모식 표본이었던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Evermanniapanamensis!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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