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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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박소란

 

 

   우리는 자주 다툰다

   너는 고집이 세고 언제나 나를 이긴다

 

   한 사람을 향해 갈 때

 

   한 사람으로부터 힘겹게 돌아서 올 때

   느닷없이 너는

   한 사람을 부른다 더없이 긴한 몸짓으로

   불러 세운 뒤 그 팔을 목을 끌어다 잡는다

 

   나는 당황스럽다

   너의 상스러운 행동이 지나치게 진지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한 사람은 놀란다

   마음을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재빨리 달아난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붙든다

   버림받은 자 특유의 파리한 몸뚱이를 다섯개의 가느다란 리본으로 얼기설기 포장한

   너를

 

   누군인가

   누구의 슬픈 애인인가

 

   나는 껴안은다 껴안고야 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면 그만 한 줌 꿈으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너를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너를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중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상처 부위에서 피가 나오길래 밴드를 붙이고, 그 위에 반창고까지 붙였다. 고작 손가락의 작은 상처도 이렇게 확실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내친김에 손톱을 깎고 핸드로션을 발랐다. 손가락이 휘어지고 튀어나온 관절들이 이제는 쉽게 눈에 띈다.

  누군가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상대방의 손짓이나 손 모양, 손을 쓰는 방식, 손가락 길이, 손톱 상태 등. 손은 그저 손일뿐인데도 참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이야기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의 일부분인 손 하나로 그 사람의 전부를 다 알 순 없지만 손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려는 은밀하고 나쁜 짓거리가 고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재주가 있는 손인지, 고생을 많이 한 손인지, 손을 정성스레 가꾸는 사람인지 혼자 유추해보고는 한다.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고 얇은 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어쩐지 악기도 잘 다루고 그림도 잘 그릴 것만 같아서다. 내게 부족한 예술가적 기질이 짧은 손가락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긴 손가락의 소유자는 다재다능할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내 손은 짧고 뭉툭한 손이다. 울 엄마의 손도 그랬고 살아있던 세월보다 이제는 떠난 세월이 길어버린 귀안 오빠의 손이 그랬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던 거칠고 따뜻하고 뭉툭하던 두 사람의 손이 생각난다. 오늘은 벌써 34년 전 서른에 세상을 떠난 버린 귀안 오빠의 기일이다.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사라져가는 흔적을 나라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번도 이생에서 평안하지 못했던 오빠는 그곳에서는 평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전에도 평생을 속깨나 썩이던 자식이 너무도 일찍 당신을 만나러 왔을 때 엄마가 어떻게 했을지 알 것만 같다. 등짝을 후려치면서 어쩌자고 벌써 왔냐고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또 한 번 등짝을 후려치면 단춧구멍 보다 작은 눈의 오빠는 잘못했다고 눙치며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그것도 벌써 34년 전이네. 두 사람은 그쪽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사람 안 변한다. 그래도 두 분, 평안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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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을 만나던 날부터 생각이 날 듯, 날 듯했다. 목련에 대해 연정을 품게 만든 구절을 만난 적이 있는데 뭐였지? 뭐였지? 그렇게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 마침 묵혀두고 있는 기나긴 하루도 있겠다. 그래, 이 아픈 사월,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신이 떠난 지 십 년, 멀리 두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나긴 하루,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친절한 복희씨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은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인데, 처음 읽는 새로움을 만난다. 특히 친절한 복희씨속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놀라웠다. 어떻게 10년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4월 16일. 벌써 7주기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근길에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 이 꼴은 안 보셔서 다행이라고. 그날 아침 뒤집힌 배를 보셨더라면 '천 불은 불도 아니라는'라는 것을, 다시 전쟁을 겪은 것처럼 참혹하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우리 세 몸뚱이 추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온전한 마을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국도 연변 마을의 파괴상은 참담했다. 꽤 큰 마을이 장독만 남겨 놓고 잿더미만 남은 데도 있었다. 초가집이 불타, 가볍고 고운 잿더미로 폭삭 내려앉은 집터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은 너무 천연덕스럽고 기품이 있어서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마을의 고요는 묘지의 그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평화로운 농촌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게 미군의 폭격이든 인민군의 방화이든 잊거나 용서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이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정당한 분노가 바로 인간다움일진대 어찌 이 땅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싶은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저귀를 구들장에 말리는 것보다는 밖에다 내 너는 게 훨씬 더 잘 마르게 생긴 햇살이 도타운 날이었다. 모조리 불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에서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 감도는 고요에 홀려서 그 고운 잿더미 사이를 거닐 때였다. 장독대 옆에 서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를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p98,9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p258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50년 5월이다. 다가올 불행을 알고 읽는 화사함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아니,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화사함이 불행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지금은 오월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지는 고온의 시절에 살고 있지만, 1950년 5월은 6월의 무게에 눌려 없는 시절인 줄 알았다. 2014년 4월 이후 도 없는 시절이다. 수돗가에 앉아서 재재거리며 상추를 씻다가 그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7년,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가족들은 어떨지 나로선 상상조차 안 된다.

   해가 더디 지는 봄날이었다. 밤 벚꽃 놀이는 중단된 채였지만, 전차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무르익은 화사함이 고궁 담을 넘쳐 전차 속까지 투영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p31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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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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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정숙이 덤불 위로 고개를 빼고 보니 의용대 세 사람이 총을 쏘며 뛰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는 능선 쪽으로 올라가고 하나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가고 또 하나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운데는 윤세주가 틀림없었다. 뛰며 구르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대원은 진광화 같았는데 그 뒤를 일본군 수색대가 장총을 쏘아 대며 뒤쫓고 있었다. 일본군 하나가 총을 맞고 덤불 속으로 고꾸라지는 게 보였다. 계곡 쪽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한동안 계속됐다. 총소리는 점점 먼 데서 들려오더니 마침내 최후의 총성이 산울림을 남긴 뒤 사위는 고요해졌다.

   적막 속에서 삼사십 분쯤 흘렀을까. 정숙의 일행은 두리번거리며 하나둘씩 덤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모두 창황함으로 얼굴에 푸른빛이 돌았다. 세 사람은 일행의 퇴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되어 일본군 수색대를 유인했던 것이다. 일행이 세 명 줄어들었다.

   계곡 가까이 내려왔을 때 그들은 절벽 아래서 진광화의 시신을 보았다. 얼굴이며 가슴이며 팔다리가 구멍투성이 벌집이 되었고 핏물이 흘러 계곡을 벌겋게 적시고 있었다.

   정숙은 그 모습을 외면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연안에서 진광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재원이었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나온 그는 광주廣州에서 중산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마르크스주의 서클활동 때문에 감옥살이하고 나와서는 대륙의 남쪽 끝인 광주에서 황하 이북의 연안까지 혼자 찾아왔다. 홍군 이동연극단 단장으로 태항산 전선에 파견돼 온 것을 조선의용대로 끌어들인 게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선전용 단막극도 예술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진중陳中에서도 틈틈이 쉴러나 브레히트를 읽었다. "농부가 호주머니에 노신魯迅 문집이나 황신파黃新波의 연환화를 넣고 다니는 날이 오겠죠?" 그런 꿈을 꾸던 그는 1911년생, 이제 서른둘이었다.

   그들은 시체를 바위 아래 후미진 곳에 옮기고 나뭇가지를 덮어 은폐했다. 위치를 기억해두었다가 전투가 끝난 뒤 수습하러 오기로 했다.

   벌써 아침 해가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빗줄기는 황토 먼지 날리는 밭을 버리고 떠나오는 길에 뿌리더니 하늘은 다시 구름 하나 없이 파랗게 메말라 있었다. 태항산 지리에 밝은 그들은 총성이 들리는 반대편으로 우회해 종일 산길을 걸어서 저녁 무렵 팔로군 진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27일이었다.

   마전의 포위를 뚫고 나오면서 팔로군도 격전을 치렀고 부사령관 팽덕회와 정치위원 등소평 등 지휘부는 무사했지만 부참모장 좌권이 전사했다 한다. 전투는 일주일쯤 더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퇴각한 뒤 의용대가 진광화의 시신을 찾아왔다.

며칠 뒤 윤세주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정숙은 방을 치우다 말고 달려 나갔다.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이론가, 불굴의 용기와 기백을 가진 이 남자가 의용대 공동숙소의 마당에 누워 있었다. 날이 더워 주검은 이미 심하게 훼손되었다 했다. 정숙은 그 선량하게 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거적때기를 들춰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계림에서 의용대를 이끌고 태항산으로 오지 않고 의형제 지간인 김원봉 옆에 남았다면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숙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켰다.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p551~553

 

출처; 네이버이미지, 포토그래퍼; 이봉섭

 

 

  태항산, 세 여자를 읽기 전까지 태항산이 어디에 있는 어떻게 생긴 산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태산이나 황산처럼 험준하리라는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저 페이지를 읽고 나서 네이버 이미지로 찾아보았다. 전체는 아닐 것이지만 대강은 감이 오는 '태항산'이다. 저 압도하는 스케일에서 무엇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중국 내륙 저 깊숙한 골짜기에서 죽음으로 내몰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후손인 나는 그들이 죽음으로도 지키고자 했던 이념과 국가에 부합한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자신 없다.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들의 죽음 앞에서 서늘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소설로 불러내는 개인은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로 그려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소설이 있어, 책이 있어,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그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근 현대사가 이념에 휘말려서 사회주의자인 이 사람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 세기가 지난 이 봄, 소설 속에서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소환해보고 그들의 기록을 살펴본다. 이제 이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진광화, 윤세주, 김원봉. 사는 동안 치열했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후손인 나의 소임이다.

 

  진광화 陳光華, 1911년 ~ 1942년

  일제강점기 용진학회 집행위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명은 김창화(金昌華).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25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서회’에 가입해 진보적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해 숭덕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경찰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되자 동지들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남경 오주(五州)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 등을 수학하는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비밀조직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3년 오주중학을 졸업하고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한국인 학생단체인 ‘용진학회(勇進學會)’에 가입했고, 1933년 10월에는 이 학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내 항일운동과 반봉건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1935년 여름에는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중국청년항일동맹’에 가입해 중국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중국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참가한 항일시위운동 ‘12·12학생운동’에 주요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과 하순에 전개된 광주(廣州) 학생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동 군벌 진제당(陳濟棠)의 탄압으로 1937년 1월 중순 체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7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7년 6월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뒤 광주 교외 농촌의 소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청년항일선봉대’ 등 항일조직을 건립해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 연안(延安)에 있는 중앙당학교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을 학습하였다.

  그 뒤 중국 관내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 조직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晉冀魯豫) 변구(邊區) 당학교 교무과장과 조직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말에는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또는 중앙특파원)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 지회 지회장을 겸하며 중국 관내지역 한인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조선혁명청년간부학교’ 건립에 참여했으며, 이 학교의 부교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따른 과로와 영양실조로 폐렴을 앓고 있었으나,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항일전투에 동참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太行山) 일대 포위공격에 맞서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다 산서성(山西省) 마전(麻田)의 화왕산(花王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가묘가 있고, 하북성 섭현(涉縣) 석문촌(石門村) 뒷산에 묘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 尹世胄, 1900년 ~ 1942년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에 입단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명 석정(石正)·소용(小用)·소룡(小龍).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밀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주길림(吉林)으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 뒤, 이해 10월 단원 곽재기(郭在驥)·황상규(黃尙奎)·이성우(李成宇)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3개의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6월 매일 숙소를 바꾸면서 비밀리에 거사시기와 지점을 물색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김원봉(金元鳳)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윤세주의 최후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42년 화북(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원봉 金元鳳, 1898년 ~ 1958년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조선의용대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金若水)·이여성(李如星)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6년 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무력 항쟁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崔昌益)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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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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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8. 학교에 대해서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곳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4~227]

 

 

 

   9.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들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6, 237]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초에 일인칭 '나'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런 글쓰기 방식을 이십 년쯤 유지했습니다. 단편에서는 이따금 삼인칭을 쓰기도 했지만 장편에 있어서는 줄곧 일인칭 '나'로 밀어붙였습니다. 물론 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레이먼드 챈들러=필립 말로가 아닌 것처럼) 각각의 소설에 따라 '나'의 인물상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인칭으로 쓰다 보니 현실의 '나'와 소설 주인공인 '나'의 경계선이 때로는- 쓰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읽는 사람 쪽에서도- 얼마간 불명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라고 할까, 나 자신이 가공의 '나'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만들어내고 크게 펼쳐가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나'라는 인칭만으로는 약간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나(남성형)'와 '나(여성형)'라는 두 종류의 일인칭을 각 장별로 분류해가며 썼는데 그것도 일인칭 기능의 한계를 타개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인칭만을 사용한 장편소설은 『태엽 감는 새』(1994, 1995)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분량이 그만큼 길어지자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서 곳곳에 다양한 소설적 연구를 도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서술을 끼워 넣고 긴 서간문을 끼워 넣고 ‥‥‥. 아무튼 온갖 화법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인칭 구조적 제한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다음 『해변의 카프카』 (2002)에서는 반절만 삼인칭으로 대체했습니다. 카프카 소년의 장은 그때까지 해왔던 대로 '나'라는 화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외의 장은 삼인칭입니다.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절이나마 삼인칭의 목소리를 도입해서 소설 세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태엽 감는 새』의 집필 때보다 기법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습니다. [p240~242]

 

 

 

   10.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 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 (중략)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은 뒷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더라도,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앞뒤로 줄을 서 있더라도, 서로의 뿌리가 이어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 낯선 이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나는 그런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p269~272]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설 한 권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요즘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하루하루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사소한 등장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매일매일의 소설을 읽는다. 날마다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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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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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4,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 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나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106]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 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 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p110]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p114]

5, 자, 뭘 써야 할까?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울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건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단스러워서 (라고 할까, 귀찮아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할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그것이 현실로 증명되었는지 어떤지, 지금 이렇게 주위를 빙 둘러봐도 나 자신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문학에서는 뭔가 증명되는 일이라고는 영원히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삼십오 년 전에도 지금 현재도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에는 거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앞으로 삼십오 년쯤 지난 다음이라면 다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그 전말을 내가 지켜보는 건 연령상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든 내 대신 잘 지켜봐주십시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대만의 소설적 소재가 있고, 그 소재의 형태나 무게로부터 역산逆算해서 그것을 실어 나를 비이클의 형태나 기능이 설정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와 비이클의 상관성에서, 그 접면接面의 바람직한 자세에서, 소설적 리얼리티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어떤 시대에도 어떤 세대에도 각각 고유의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 - 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p138~140]

6.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 장편소설 쓰기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에피소드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태엽 감는 새』를 썼을 때처럼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뭔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몇 개의 장을 통째로 삭제하고 삭제한 것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다른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만들어 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극단적인 예고, 대개의 경우 삭제한 부분은 삭제된 채 그대로 사라집니다.

   그 고쳐쓰기 작업은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첫머리부터 쭉쭉 고쳐나갑니다. 단지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꼼하게 고칩니다. 이를테면 풍경 묘사를 세밀하게 써넣거나 대화의 말투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은 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어써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대수술이 아니라 세세한 수술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한숨 돌리고 그다음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술이라기보다 수정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소설의 전개에서 어떤 부분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 할지, 어떤 부분의 나사를 조금 헐렁하게 풀어둘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장편소설은 말 그대로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나사를 팽팽히 조여버리면 독자는 숨이 막힙니다. 군데군데 문장을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쪽의 호흡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체와 세부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문장의 세밀한 조정을 행합니다. ‥‥‥(중략)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장 등에서의 제작 과정에, 혹은 건축 현장에 '양생養生'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맙니다.

   그렇게 일단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양생도 진득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 수정도 마쳤다. 자, 이 단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제삼자의 의견입니다.

‥‥‥(중략)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는 잘 모릅니다. 원고 단계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맣게 해서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재차 보내준 교정지를 다시 새까맣게 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이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루 정도의 HB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요. 하염없이 하고도 전혀 질리지 않습니다.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그 기분, 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것과 똑같은 일을 나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이상 더 고치면 도리어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라는 미묘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는 쉼표를 빼고 넣는 것을 예로 들어 그 포인트를 적확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중략)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의 기간'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을 내 안에 서서히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 들이는 시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일으켜나가는 기간, 일어선 것을 냉암소에서 진득하게 '양생하는' 기간, 그것을 밖으로 꺼내 자연의 빛을 쏘이고 단단히 굳어져가 는 것을 세세히 검증하고 쿵쾅쿵쾅 망치질을 하는 시간‥‥‥ 그런 과정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작가 본인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p152~166]

7.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 tell a story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 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 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깊은 어둠의 힘에 대항하려면, 그리고 다양한 위험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수치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강한 편이 훨씬 더 좋겠지요. 그리고 그 강함이란 타인과 비교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강함을 말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작업을 통해 그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차츰차츰 깨달았습니다.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p 188~190]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유지할 것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방식의 질을 레벨업 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의 스토리와 자신만의 문체를 각자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프란츠 카프카를 예로 들자면, 그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작품의 이미지로 보면 그야말로 예민하고 육체적으로 허약한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몸을 만드는데 진지하게 신경을 썼던 모양입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하루 1마일(1,600미터) 씩 수영을 하고 날마다 시간을 들여 체조를 했다고 합니다. 카프카가 진지한 얼굴로 체조에 열중하는 모습, 잠깐 좀 구경해 보고 싶지요?

   나는 살아가고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나갔습니다. 트롤럽 씨는 트롤럽 씨의 방식을 찾아냈고 카프카 씨는 카프카 씨의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가 제각각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만의 持論지론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방식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된다면 -말을 바꾸자면 그것이 조금이나마 보편성을 가졌다면,이라는 얘기입니다 - 나로서는 물론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p200~202]

   밑줄 긋기를 옮기다 보니 박완서 선생님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밑줄 긋기에 대한 정의를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 상태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내려놓으셨다. 그렇다. 오래된 책에서 밑줄의 흔적을 발견하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심경이 고스란히 짚어져 오기도 한다. 책은 그렇게 위로를 남기고 당연하다는 듯이 잊힌다. 다시 펴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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