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고자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는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눈길을 끄는젊은이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젊은이란 사실을독자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를위한 것이다(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이며,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를 위해 마음에 새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 만, 홍성 옮김, 『마의 산』, 을유문화사, 2008.


굉장히 복잡한 문장 같지만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걷어 내면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뜻의 문장이된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이보다 적절한 문장이 또 있을까. 게다가 토마스 만 소설의 첫 문장으로도 마침맞고.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지적 과시처럼 보이는 긴 논쟁이나 설명과 마주할 때가 많은데, 저 첫 문장처럼 그 길고 긴 ‘부연 설명‘을 걷어 내면, 대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야기꾼이들려줄 법한 특출한 이야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게다가 그 특출한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짜여 있어, 가령 문체를 느끼면서 읽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번역문으로 읽을 때의 지루함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p120, 121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려면 ‘내 삶‘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제대로 읽어 내려면 ‘내 문장‘이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문장‘은 바로 ‘내 삶‘을 표현한 것이어야 하고, 이게 바로 글쓰기와 글 읽기의 시작점 아니겠는가. 규칙과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저런 기법을 익힌다고 해서 내손끝에서 나만의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글이 첫눈에 말끔하게 해독되는 것도 아니듯이.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삶의첫문장이든 글쓰 - P10

기의 첫 문장이든, 우선은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내 글쓰기의첫 문장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더불어 내 삶의 첫 문장까지다시 살펴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여 처음부터 이렇게 살려던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이렇게 쓰려던 것도 아니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볼 수 있다면.


이 책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주는 책이 아니니오해 없기 바란다. 소설에 대해 논한 책 또한 아니다. 단지 소설의 첫 문장에 기대어 쓴 짧은 단상을 모은 책에 불과하다. - P11


"이제 어떻게 될까, 응?"
앤서니 버지스, 박시영 옮김,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2005.


"다음이 뭐야. 다음이 뭐야....…‘‘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부덴브로크 가의사람들, 
민음사, 2001. - P18

궁금했다. 과연 다음이 어떻게 될지,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책도 읽고 내 삶에대한 기대감도 키웠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다음을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궁금했다"라고 과거형으로 썼으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겠다.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내 안에서 더 이상 그런 마음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다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대감도 사라졌다. 소설책을 봐도 재미가 없고 삶은 그야말로 균일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는 시계 같아져서 드라마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실망하기만 한 건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나 삶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고기대할 것도 없을 때 이야기는 이제까지와 다른 면을 드러내 보이고, 삶 또한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의 틀에서벗어나 마치 꿈속처럼 제각각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젠 소설책을 읽을 때든 삶의 모퉁이에서 다음 장면을 앞두고 있을 때든 내가 궁금해하는 다음은, 다음의 내가 어떤 나일지뿐이다. 다음 이야기에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 또는삶의 다음 장면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지……. 그게궁금할 뿐이다. 다음의 나. - P19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2010.


죽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비카스 스와루프, 조영학 옮김, ‘6인의 용의자』,
문학동네, 2009. - P22

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삶도 죽음도. 물론 그사이에서 겪는행복과 불행의 모습도 다르고, 그 행불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의마음까지도 다 제각각이다.
같지 않아야 마땅하다. 우린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이자명한 사실을 왜 자꾸만 부정하려는 건지.
말만 해도 그렇다. 같아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지독했으면같지 않은 걸 ‘같잖다‘라고 표현했을까.
무섭다. 말도 무섭고 그 말에 담긴 사람들의 욕망도 무섭고.
아무도 나와 같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털끝만큼도 같지 않기를…………. - P23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2.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인규 옮김, 『채털리부인의 연인』, 민음사, 2003. - P50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누구에겐 최고의 시절이 누구에겐 최악의 시절이 되고, 누군가에겐 지혜의 시대가 누군가에겐 어리석음의 시대가 되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건 모든시대가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 시대‘ 이니까. 다른 이가 아닌 나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간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여러 사람이 동시대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엄청난 모순을 버텨 내야 하는 시간들이니까. - P51

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봄 병풍의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마루야마 겐지, 한성례 옮김, 『달에 울다』, 자음과모음,
2009. - P64

바람이 분다. 순간 깨닫는다. 바람은 부는 순간 이미 떠나고없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 뿐, 아,
바람이구나 하고 느낄 때면 이미 바람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바람이다. - P65

내가 처음 여자의 성기를 본 것은일곱 살 때였다.

송기원, 『여자에 관한 명상』, 
문학동네, 1996.



올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아니 에르노, 최정수 옮김,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12.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프랭크 허버트, 김승욱 옮김, 『듄』, 
황금가지, 2001. - P66

처음으로 꿈꾼 날, 처음으로 이 뽑은 날, 처음으로 글씨 쓴 날,
처음으로 친구와 싸운날, 처음으로 자장면먹은 날, 처음으로남의 집에서 잠잔 날, 처음으로 버스 탄날,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통장 만든 날,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책 빌린 날, 처음으로서점에서 책 산 날, 처음으로 욕한 날, 처음으로 주먹질한 날, 처음으로 나 혼자 목욕 간 날, 처음으로 돈가스 먹은 날, 처음으로영화 본 날, 처음으로 누군가와 어깨동무한 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 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한 날, 처음으로 키스한날, 처음으로 섹스한 날,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 날, 처음으로내 손으로 밥한 날, 처음으로 세금 낸 날, 처음으로 내가 쓸 도마를 사 가지고 온 날, 처음으로 운전한 날………….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 문신처럼새겨진 날들. - P67

나는 인생의 가장 내밀한 진실을
비빔국수를 통해 배웠다.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창비, 2014. - P70

비빔국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인생의 내밀한 진실이라.
그게 과연 뭘까?
글쎄, 결국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
비빔국수야말로 다 거기서 거기니까.
맛도 특별할 게 없고, 들어가는 재료도 특별할 게 없는 데다,
종류도 따로 없어 그저 비빔국수이니까.
흰쌀밥에 잡곡밥, 콩밥, 콩나물밥, 가지밥 등등 외려 밥이 더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하지 않은가. 같은 국수라도 뜨끈한 국물맛을 내는 국수라면 잔치국수, 가락국수, 칼국수처럼 가짓수를제법 늘어놓을 수 있지만 비빔국수는 그저 비빔국수일 뿐.
다만 단맛을 높이거나 신맛을 더하거나 매운맛을 강하게 하면서 차이를 내는 게 고작이다.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지만.
거기서 거기인 비빔국수.
거기서 거기인 삶. - P71

꿀벌 이야기에서 꿀이 빠질 수없는 것처럼 사람 이야기에선 돈이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커트 보네거트, 김한영 옮김, 『신의 축복이있기를, 로즈워터씨』, 
문학동네, 2010.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팔아 치웠다.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2010. - P72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는 돈이 없어 겪는 궁핍 중 가장 처참한 것은 "하루 종일 돈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썼다. 그렇다. 가난, 곧 돈이 없어 겪는 궁핍의 본질은 몸과 마음 모두 돈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지 못하는 건 그저 궁핍 때문에 겪는 불편함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깟 불편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면서 가난을 자청하는 사람들도있다지만, 글쎄 내 눈엔 그들이 가난하기는커녕 누구보다 넉넉한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돈 몇 푼 때문에하루에도 몇 번씩 치사해지는 경험을 반복하는 사람이며,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는 함부로 돈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머릿속에서 늘 빠듯한 생활비를 이리저리 계산해야하는 사람, 돈이 없을 때는 물론 여윳돈이 생겼을 때도 즐겁기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다. 돈에 얽매여 자유를 잃은 사람. 그러니 자신이 가난하다고 쉽게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가난 속에서헤매는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난 때문에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든 것은 아니니까. - P73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1. - P90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출간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버스를 탄 적이 있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더러는 멀거니 차창 밖을 내다보고 더러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하차 문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촌에서였던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둘이 버스에오르더니 맨 뒷좌석에 가 앉았다. 몇 분쯤 흘렀을까. 뒤쪽에서조곤조곤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마치시를 암송하듯 감정을 담아 낭송하는 소리였다. 여학생 둘이 한문장씩 돌아가며 읽고 있었다. 시집을 읽는구나 했더랬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슬쩍 뒷좌석을 보니 여학생들 손에 들린책은 시집이 아니라 『칼의 노래』였다. 내가 시의 한 구절이려니여겼던 문장이 바로 소설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였다. - P91

"완벽한 문장 같은건 존재하지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문학사상사, 2003.
- P96

형용사 ‘완벽하다‘와 ‘순수하다‘가 수식하는 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완벽한 문장이나 완벽한 절망은 물론 완벽한 삶이며 완벽한 죽음, 완벽한 행복, 완벽한 불행, 완벽한 거짓말, 완벽한 사랑, 완벽한 논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완벽조차 완벽하지 않은데 (그러니 완벽한 완벽도 존재하지 않는셈이다)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같은 의미에서 순수한 사랑이며 순수한 마음, 순수한 몸, 순수한 의도 따위도 허상에 불과하다. 순수조차 순수하지 않은데 다른 걸 말해서 뭐하랴.
가끔은 ‘완벽하다‘나 ‘순수하다‘ 같은 형용사가 언어의 마개역할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언어라는 수조 밖으로의미들이 새 나가지 않도록 언어 스스로 만든 마개, 가장 극단에 존재해야 하니 의미도 극단적이어야 하고 사용도 극단적이어야 하지만, 의미에서나 사용에서나 형식만 가질 뿐 내용은 갖지 않는 마개, 그러니 ‘완벽한‘이나 ‘순수한‘이라고 쓸 때 우리가경험하는 건 단지 의미의 극단까지 밀려갔다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아무 의미 없이… - P97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로드』, 
문학동네, 2008.



뻔뻔스러운 여자의 쌓이고 쌓인
한이 이 울창한 숲에 그득하다.

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옮김, 『천년 동안에』,
문학동네, 1999. - P110

숲만큼 문학적인 낱말이 또 있을까. 그냥 숲이라고만 써 놓아도 이야기가 저절로 이어질 것만 같다. 무언가 원초적이면서도음험하고, 따듯하면서도 서늘하고, 조용하면서도 요란하기 그지없고,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할 것 같은 그런 이야기……….
그래서인지 숲이 들어간 말 중에 가장 이상하면서도 그럴듯한 말이 내겐 ‘빌딩 숲‘이다. 서로를 추문으로 만드는 것을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이상하지만, 그 이상함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하달까. 적어도 내겐그렇다. 숲을 갈아엎고 들어선 빌딩이 다시 숲을 이루었다는 말이니 숲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말이 되겠지만.
아무려나 뒤틀어진 이야기를 하나 가득 담고 있을 것 같은 빌딩이 숲을 이루었으니, 말만 놓고 보면 이야기의 숲이 따로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 첫 문장들에 등장하는 ‘숲‘ 앞에 ‘빌딩‘을 붙여 보면 어떨까. 음, 그냥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막상 붙여 보니말이 된다. 서늘하다. 정체 모를 숲에 들어온 것처럼. - P111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위대한개츠비』, 
문학동네, 2009. - P124

소설의 첫 문장으로 이만한 문장이 또 있을까. 적어도 내겐그렇다. 말 그대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의 세계 속으로 한발 들어서게 만드는 문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렇잖은가. 어리고민감하던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삶에 대해 충고를 해 주는 것이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니까. 적어도 내겐……….
아버지는 삶에 대한 충고는커녕 자전거를 타는 법이나 여자에게 매너를 지키는 법 같은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아버지가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준기억조차 없다. 오죽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도 친척들 모임에서 주워들은 말로 겨우 알게 되었을까.
그러니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적어도 내겐 소설의 세계로 들어서는 입국장처럼 여겨질 수밖에. - P125

러시아에서의 죽음은
아프리카에서의 죽음과는
다른냄새를 풍겼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장희창 옮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2010. - P142

언뜻 죽음에 대한 추상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인 듯싶지만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어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전장에서 맞닥뜨리는 시체들의 이야기이니까.
요컨대 저 문장에서 말하는 죽음의 냄새는 말 그대로 시체들이 풍기는 냄새다.
아프리카와 러시아의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날씨가 아닐까. 강렬한 태양, 건조한 바람, 서늘한 밤이 아프리카 쪽이라면폭설, 강추위, 습기는 러시아 쪽이겠다. 그러니 아프리카에서는전사한 군인의 시체가 태양과 바람 속에서 건조한 냄새를 풍긴다면 러시아에서는 습기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는 것.
흥미로운 건 아프리카에서는 낮 동안의 열기 때문에 가스가찬 시체들이 밤이 되면 부풀어 올라 마치 다시 한 번 전투에 나서기 위해 일어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아침이 오면 다시 오그라들어 군복이 헐렁해 보일 지경이라고. - P143

우리 아버지의 성姓은 피립이고 내 세례명은필립이었는데, 어린아이 적 내 짧은 혀는이 이름과 성을 ‘핍‘ 이상으로 길게도분명하게도 발음하지 못했다.

찰스 디킨스, 이인규 옮김, 『위대한 유산』, 민음사, 2009.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모비딕』, 
작가정신, 2011. - P194

두 번째 책부터는 내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번엔 성별이문제였다.
김정선, 여자 이름 같은 모양이다.
『 동사의 맛』은 물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독자평에 저자를 여자로 착각하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강연을 의뢰받고 강연장에 가서도 ‘어머, 남자분이네요‘ 하는 반응과 자주 맞닥뜨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 대표에게 메일을 받았다. 젊은 만화가가 동사의 맛을 만화로 그려 보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샘플 만화를 파일로 첨부했다기에 열어 보았더니 책의화자로 등장하는 내가 쉰 살의 귀여운 아줌마로 그려져 있었다. - P195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초의 어느 날
해 질 무렵.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홍대화 옮김, 『죄와 벌』, 
열린책들, 2009.



무더운 어느 봄날 해질 무렵
파트리아르흐 연못가에 두 시민이
나타났다.

미하일 불가코프, 김혜란 옮김, 『거장과마르가리타』, 
문학과지성사, 2008. - P242

두 편의 러시아 소설이 모두 어느 무더운 날의 해 질 무렵 묘사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다. 닮은꼴이랄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그 흥미가 배가되는 것까지 닮았다.
별 뜻 없이 끼적댄 어느 글에서 "러시아 소설의 시점은 ‘지평선 시점‘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는데, 해 질 무렵이야말로 지평선의 시간인 듯싶어 두 소설의 저 첫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 소설의 시점을 ‘지평선 시점‘이라고 이름 붙였던 이유는, 곰팡내 풍기는 지하 창고 안에서 누군가의 구차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보면 어느덧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우렁우렁 들려오는 광야에서 저 멀리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해서였다.
그런 점에서라면 이 두 소설이야말로 해질녘 ‘지평선 시점‘
으로 쓴 소설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 P243

댈러웨이 부인은 자기가 직접 가서
꽃을 사오겠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 이태동 옮김, 『댈러웨이 부인』,
시공사, 2012. - P274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화자의 시점이 들쑥날쑥해서 읽기에 불편해야 마땅한데 웬일인지 편했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부여된 시간이 마치 제 나름으로 피었다가 지는 꽃들처럼, 혹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밀물과 썰물처럼 ‘어쩔 수 없는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커다란 시계 빅벤의 종소리마저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피고 지고, 밀려오고 밀려가고,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삶 가운데로 스며들 듯 울려 퍼지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 P275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어쩜 이렇게 화창하지! 바깥으로 뛰어들고 싶어!" (7쪽), "그녀는 굴뚝 같기도 하고, 녹슨 펌프 같기도 하고, 바람에 꺾여 부러져 더 이상 새로운 나뭇잎을 나게 할 수 없는 고목 같기도 했다." (118쪽), "몸속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전과 오후가 교차되고있었다."(165쪽), "그 궁극적인 신비는 아주 단순한 사실 안에 담겨 있었다. 여기에 방 하나가 있고, 저기에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 종교가, 또는 사랑이 그 문제를 푼다고?"(186쪽), "또 졌군.
반복되는 인생처럼." (236쪽), "어둑어둑해진 하늘은, 아름다운한쪽 뺨을 돌리듯 저물어가고 있었다." (271쪽). - P275

그리고 첫 문장으로 돌아와 다시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꽃을 사러 나갔었지. 거리를 돌아다니다 꽃을 사가지고는 파티가 열릴 집으로 돌아왔고, 나갔다 돌아오는 것, 그게 삶이었구나,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도 하염없이 솟구칠 수만은 없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셉티머스도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수만은 없다는 것. 어쨌든 다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것. 제 몫의 꽃을 들고서……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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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아르헨티나-쿠바  
1928. 6. 14~1967. 10. 9

새로운 인간을 향하여

1965년 4월, 새로운 혁명전쟁을 위한 출격을 앞둔 게바라ErnestoChe Guevara는 아르헨티나에 사는 부모에게 장차 자신의 유서가될 한 통의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지. 다시 발뒤꿈치 아래에 로시난테의 늑골을느낍니다. (……) 10년쯤 전에도 이별의 편지를 썼었지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 저는 훌륭한 군인도 의사도 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었습니다. 이제 의사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군인으로서는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리켜 모험가라고들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모험가이지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모험가 말입니다. 이번에는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마지막 포옹을 전합니다. (…) 예술가와 같은 희열로 갈고닦아온 - P100

제 의지가 약해진 다리와 지친 마음을 이제부터 지탱해주겠지요.


질풍과도 같은 10년이었다. 그 10년 동안, 방랑의 길을 떠난 스물일곱 살의 청년 의사는 게릴라전의 탁월한 사령관이 되었고, 혁명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공업부장관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전 세계 반제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 서른일곱 살의 게바라는 스스로를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쿠바 정부 지도부의 지위와 가족들과의 생활을 버리고 또다시 혁명전쟁을 향한 긴 여정에 나섰다. - P101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귀국한 1965년 3월, 게바라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일은 세인들의 온갖 소문과 억측을 불러왔고, 한때는 그가 카스트로에게 숙청당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사실은 카스트로 역시
‘제2, 제3의, 더 많은 베트남을!‘이라는 자신의 호소를 몸소 실천하려는 게바라의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1965년 10월 3일,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게바라가 쓴 이별의 편지를 낭독했다.


나는 당 지도부에서 맡은 직무, 장관이라는 지위, 소령이라는 계급, 쿠바인의 신분을정식으로 버리네. 법적으로 나를 쿠바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없네. 그저 사령처럼 파기할 수 없는 인연만이 남아 있을 뿐이네. (......) 세계 도처에서 보잘것없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네. 쿠바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자네에게 금지된 일이 나에게는 가능하다네. 이제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네. - P103

 라이게라라는 마을로 송치되어 10월 9일 사살된다. 남겨진 사진에서 그의시신은 유난히 맑은 두 눈을 뜨고 있다.
게바라의 많은 글 중에서도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 socialismo y el hombreen Cuba(1965)은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은 의무를 수행했다는 만족감으로 보상을 받음을자각하고,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인간을 목표로 모두가 함께 전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신에게 부여된 희생을 완수하려 한다.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과거 소련의 수정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했던 중국마저도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휩쓸린 오늘, 게바라가 보여준 이상주의는 어느덧 냉소와 망각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빈곤과 소외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준 ‘새로운 인간‘이라는 이상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 P104

카스트로 1926~


쿠바의 정치가, 혁명가. 1926년 쿠바 오리엔테 주 출생. 1945년 아바나대학 법학과 입학,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정권 타도 활동, 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의 도시 동에 참여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해 1953년 156명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나 실패 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라는 유명한 자기 변론을 남겼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난 후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1956년 동지 80여 명과 돌아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정부군의 수십 분의 일에 불과한전력으로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다. 총리 취임 후 토지개혁과 외국자본몰수를 단행하고 40여 년 동안 미국의 턱밑에서 반미·반제를 주창했다. CIA에서여러 차례 암살 공작을 폈으나 실패했다. 1976년 신헌법을 제정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했으며, 2006년 7월 건강 악화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했다. - P106

폴 니장
작가 프랑스  
1905. 2. 7~1940.5.23

반격하는 앙가주망

1968년 5월 파리, 학생혁명의 와중에 어느 학생 그룹이 유인물을 뿌렸다. "우리는 ‘파수견‘이 되는 미래를 거부한다." 이어
‘장Paul Nizan의 반격‘을 논하는 글들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만일 니장이 살아 있다면,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라고 가르치는 생활에 양처럼 온순하게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수천 명의 학생들 편에 섰을 것이다."
1930년대를 헤쳐나간 코뮤니스트 지식인, 전쟁으로 인한죽음과 정치적 묵살로 땅속 깊이 묻혀 있던 폴 니장의 초상은장 폴 사르트르가 서문을 쓴 『아덴 아라비아』 Aden Arabie(1931)가1960년에 재출간되고, 이듬해에는 『파수견들』Les Chiens degarde(1932)이 다시 출간되면서 문학적으로는 이미 부활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1968년의 분노한 젊은이들의 눈앞에
‘앙가주망의 시대‘의 상징으로서 정치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 P107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것이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이라는 말은 누구도하지 못하게 하리라.


‘아덴 아라비아‘의 첫머리이다. 프랑스 최고의 지적 엘리트의 지위가 약속되어 있던 니장은 "오직 관념에만 관계하는 것에 대한 혐오‘ 때문에 혁명의물결이 지나간 유럽을 뒤로하고 아덴을 향한 여정에 나선다. 1926년, 스물한살 때의 일이다.


한 발만 헛디디면 모든 것이 젊은이들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린다. 연애도 사상도 가족을 잃는 것도, 어른들의 세상으로 들어서는 것도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맡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 이제는 그저 증오로만 타인들과관계 맺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남을 짓밟는 인간과 밟히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 P108

‘뻔뻔함‘과 ‘거짓말‘은 니장의 기대와는 반대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산당은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과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를 선두에 내세워 니장이 ‘경찰의 스파이‘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죽은 니장을 한 번 더 말살하려했던 것이다. ‘니장의 반격‘은 1960년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은 그 1960년대의 뜨겁던 열정도 멀리 사라져갔고, 지난날 니장이 ‘현대의 그리스라고 불렸던 소련마저도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를 ‘앙가주망‘의 시대였다고 해도 될까? 아니면 20세기의 어느 한 시기에 ‘앙가주망의 시대가 있었다고써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건, ‘앙가주망‘의 작가 폴 니장의 망령은 앞으로도 거듭해서 ‘반격‘ 해올 것이 분명하다.


시와 여인들은 언젠가 사라져가지만, 그러나 혁명이 지나갔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다. (아덴 아라비아) - P111

engagement 앙가주망


본래 구속, 계약 등의 뜻으로 쓰였으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사르트르 이후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통해 쓴다는 것의 전통적인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문학을 통해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것을 주창했다. 또한 1945년 창간한 잡지 『현대를 통해 세계의 불의를고발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강조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르트르 자신도 알제리 독립전쟁과 베트남 전쟁당시 적극적으로 반전운동과 평화재판 등의 활동을 펼쳤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비판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관심을 기울인 빅토르 위고, 드레퓌스 사건 때 권력에 항거했던 에밀 졸라 등은 이 말의 의미가 확장되기 전에 활동했지만 역사적맥락에서 앙가주망 전통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지식인의 앙가주망 전통은 20세기 후반 파업 현장을 찾아 노동자와 연대했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등으로 이어졌다. - P113

프란츠 파농
혁명가·사상가·의사  프랑스  
1925. 7. 20~1961. 12. 6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어젯밤 놈들은 나를 세탁기 속에 처넣었다." 백혈병에 걸려죽음을 앞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이 마지막 말은 실로『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1952)의 저자답다. 백인들의 병원에서 자신의 피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환각과 공포가 낳은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파농 특유의 신랄한 유머 감각과 불굴의 투쟁 정신이 마지막으로 분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12월 6일, 프란츠 파농은 미국 워싱턴의 베데스다 국립병원에서 사망했다.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의 유지에 따라 시신은 튀니지로 공수된 뒤 민족해방군ALN 전사들의 손에 의해 국경을 넘어 알제리영내에 매장되었다. - P114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폭력의 사도라고 말한다. 분명 파놓은 식민주의적야만에 항거하는 식민지 원주민의 유일한 무기인 폭력의 이론가였다. 그러나그의 폭력은 역설이 아닌, 비폭력자의 폭력이었다"라고 같은 마르티니크 출신의 시인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는 말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민족해방투쟁은 물론, 미국의 블랙파워 운동, 프랑스 등 ‘선진국의 학생운동에이르기까지 파농의 사상이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이었다. 한국의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도 파놓은 예민한 공감을 일으키며 받아들여졌다. 일본에서는 어떠했던가. 학원투쟁의 한 시기에 파농의 저작이 읽히기는 했지만 소화되지 않은 채로 토해내지고 배설되기만 했을 뿐이 아닌가"라고 농을 소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비사카 다케시 씁쓸하게 술회한다.
- P115

자유·평등·박애라는 보편적 이념이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은 체현되고있다고 소박하게 믿고 있던 10대의 파놓은 그 지고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전장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미사여구에 감추어진 백인 문명의 차별 구조를 직접몸으로 겪고, 진정한 보편주의 이념의 실현이라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상적도전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파놓은 일단 마르티니크로 돌아왔다가 1946년 가을 다시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했다. 리옹에서 보낸 5년 동안백인 문명과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 파놓은 ‘흑인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에 대한정신병리적, 철학적 해명을 시도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완성한다. - P116

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봉기를 시작으로 알제리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파농은 그 협력자가 되었고, 1956년 말경에는 알제리 주재 장관을 향해 알제리인의 독립 요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요구"라고 선언하면서 병원을 사직했다. "인간에게, 다시 말해 나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파농은 그 사직서를 이렇게 끝맺는다.
1957년 1월 말 알제리에서 튀니지로 탈출한 파동은 정식으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멤버가 되어 대변인으로서 정보선전활동과 기관지 『엘 무쟈히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고, 이듬해 9월에 임시정부가 성립한 뒤로는기니 주재 대사 등의 격무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파놓은 알제리의 독립만이아니라 아프리카의 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너무도 이른 죽음을 맞이한 이듬해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했지만, 그후 알제리와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가 그리던 꿈과는 너무도 달랐다.


유럽은 유럽의 모든 거리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인간을 만날 때마다 인간을 살육하면서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유럽과 결별하자. - P117

사람 한 사람이 인간의 조건에 뒤따르는 보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전인적 인간의 창조를 호소했다. ‘전인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육과 두뇌를 분리하지 않고 노동 속에서 양자를 통일하는 인간", "도구나기술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이 받아들인 목적에 따라 도구와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 "타자와 타민족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고, 타자와타민족과의 공생을 원리로 삼는 인간", "자율적 공동체의 자율적인 성원"이다.
이 같은 파농의 호소는 이제 더 이상 무용한 것일까? 백과 흑, 주인과 노예, 제1세계와 제3세계, 제국과 식민지…… 그 대립과 분열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른 20세기. 파농처럼 20세기의 분열을 자신의 내부에 가장 격렬하게 떠안고 있는 존재들이야말로, 어둠이건 희미한 빛이건 인류사의 진정한 미래를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P118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1954년 결성된 알제리의 독립운동단체·정당 식민지 시기에는 급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독립 후에는 오랫동안 유일합법정당으로 기능했다. 1955년 민족해방군ALN을 결성,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폭탄테러와 게릴라 전술로 독립전쟁을 벌여 8년 동안의 전쟁 끝에1962년 7월 5일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 후 민족해방군의 분열로 알제리는한때 내전 상태로까지 치달았으며, 알제리를 프랑스의 ‘또 다른 영토‘로 간주하고적극적으로 프랑스화 정책을 폈던 132년의 식민지 역사를 반영하듯, 15만 명의 아르키Harki(프랑스 쪽에 가담한 알제리 출신 군인·관료)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지 못한채 FLN의 보복에 의해 희생되었다. 한편 알제리 전쟁을 치안유지활동‘으로 폄하하던 프랑스는 1999년에야 이를 전쟁으로 공식 인정했으며, 1961년 알제리인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사건인 ‘파리 대학살‘도 1998년에 와서야 인정되었다. 알제리 전쟁 시기의 포로 학대와 아르키 처리 문제는 지금도 프랑스와 알제리의 ‘뜨거운 감자‘이다. - P119

프리모 레비
작가 이탈리아  
1919. 7. 31~1987. 4. 11

미래를 위한 증인

1987년 4월 11일, 예순일곱의 프리모 레비 Primo Levi는 토리노에 있는 아파트의 현관 난간에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프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고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점령하자 정의와 자유‘ 라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여 싸우다 1943년 12월 13일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일반적으로 ‘아우슈비츠‘라 할 때는 1940년 4월부터 폴란드 남서부의 오슈비엥침에 나치 독일군이 건설을 시작하여 점차 주변 지역으로 확장한 일군의 수용소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폴란드인 정치범이 수용되었다가, 이어 대규모의 소련군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10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Endlosung을 위해 가스실을 갖춘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건설되 - P120

고, 1942년 7월 네덜란드를 필두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이송이 개시되었다.
가축용 화차에 실려 나흘 동안의 여정 끝에 레비가 도착한 곳은 통칭 ‘부나‘Buna 라고 불리는 모노비츠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합성고무공장에 부속된강제노동시설이었다. 그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여인들과 아이들이 무를 향해떠나는 것"을 보고,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으며, 왼팔에 새겨진 ‘174517‘이라는 문신으로 자신의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곳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 대한 소모전"을강요당하는 전장이자 인간을 파괴하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P121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아무도 여기서 나가선 안된다.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들이대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의 수는 대략 110만에서 15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90퍼센트는 유대인이었다.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등 모든 수용소를 합하면 희생자 수는 약 300만 명에 이른다. 다양한 국적의 정치범과 전쟁포로, ‘집시‘로 불리며 차별당하고 있던 신티sinti, 로마Roma 민족 사람들, 동성애자, ‘여호와의증인 신자 등의 이른바 ‘반사회적 인물‘들도 - P121

거기에 포함된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을때 100만 벌 이상의 옷과 7톤의 머리카락, 셀수도없을만큼의 신발과 안경이발견되었다. 살아남은 수용자 가운데 5만 8,000명은 철수하는 나치에 의해 ‘죽음의 행진‘으로 끌려갔고, 해방된 수용자는 약 7,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화학자였다는 등등의 몇 가지 행운이 겹쳐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다. 그는 1945년 10월 토리노로 돌아와 곧바로 『이것이 인간인가 se questo èun womo를 집필했다. 그것은 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한 자신의 인간성을회복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동시에 "위험을 알리는 불길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1947년에 출간된 이 책의 초판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58년에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1980년에 출간되었다(다케야마 히로히데아사히선서朝日). 그후로도 레비는 『휴전』la옮김,
tregua(1963), 『주기율표II sisterna periodico(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 Sequando?(1982)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일종의 문화적 영웅" 으로 떠오른다. - P122

만일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라고 말한이는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사상가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였다(『극한에 맞서』 Face à extréme). 토도로프는 수용소 생존자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수치심‘을 실마리로 삼아 레비의 죽음을 고찰하고 있다. 첫째, 기억으로서의 수치심. 자신의 의사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와 자기 붕괴에 빠진 희생자의 수치심은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흡사 강간당한 여성의 수치심처럼, 수치심을 느껴야 - P122

하는 것은 강간을 저지른 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도리어 희생당한 사람이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둘째,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레비는 만년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형을 죽인 카인이라는 의혹, 누구나 자신의 이옷을 밀어내고 그를 대신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혹이 마음을 갉아들고 구멍을 뚫는다‘고. 그리고 셋째, 인간이라는 수치심. ‘인간이 아우슈비츠를 건설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죄이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같은 인간인 나역시 유죄가 아닌가‘ 하는 의식이다.
토도로프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레비는 장대를 너무 높이 올려놓았다. 인류는 선할 수가 없었다. 이미저 지극히 가까운 과거마저도 왜곡하고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무고한 자들은 죄를 의식하고, 죄 있는 자들은 자신이 무죄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아우슈비츠의 교훈을 들으려고하지 않는다." - P123

인류의 역사는 20세기에 이르러 절멸수용소라는 인공 지옥을 출연시켰고,
그 역설적인 부산물로서 ‘생존자문학‘이라고 불러야 할 장르를 탄생시켰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trotzdem Ja zum Leben sagen의 저자 빅토르 프랑클 Viktor Frankl이나 3부작 『밤, 새벽, 낮』 Night, Dawn, The Accident의 작가 엘리비젤Elie Wiesel과더불어 프리모 레비는 ‘생존자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지옥은 이제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이나 돌, 그리고 나무들처럼 현실적인 존재라고 말해보아도 어느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생존자들은 이미 수용소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말 - P123

없이 떠나가버리는 악몽으로 온밤 내내 괴로워했다고 레비는 쓰고 있다. 그럼에도 레비는 고뇌를 이야기했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지라도, ‘생존자문학‘이란 단순히 살아남은 자들의 문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이해하고,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고, 전달할 수 없는상념을 전달하도록 운명 지워진 문학, 태생적으로 갈가리 찢긴 문학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환을 기약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바다는 어두컴컴하고, 항해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는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레비의 자살은 인류 자체의 자살 과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 P124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와 이게파르벤


1942년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자리에는 이게파르벤I. G. Farben이라는 기업의 화학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부나‘라는 합성고무를 만드는 데 동원되었고, 그래서 제3수용소를 ‘부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2차대전으로 수요가 폭증해 사세를 빠르게 확장한 이게파르벤은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의전폭적인 지원 아래 충분한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노동력을 제공받았으며(이를 위해 공장에서 일할 폴란드인을 제외한 모든 민간인들이 아우슈비츠 시 밖으로 소개되었다), 노동력 관리에서도 나치 친위대와 긴밀하게 협조했다. 이게파르벤은 다른 기업과 공동 출자해 데게슈 사를 만들고 학살에 쓰인 살인 가스 ‘치클론 B‘를 개발하기도 했다. 부나 공장을 거쳐간 3만 5,000명의 노동자 가운데 2만 5,000명이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게파르벤의 고위 경영진과 기술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회부되어 5명이 각각 6~8년형을 선고받았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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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Bauhaus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에 세운 조형학교,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 Hausbau 를 도치한 이름으로, 순수예술과 공예는 동일한 것의 두 변형이라는 생각 아래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한 것이다. 바로크 이후 상실된 총체예술 이념의 복구, 기술과 장인성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실용성을 근간으로 한예술과 테크놀로지의 통합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지향했으며, 위계적인 교수법 대신 상호협동과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협동 워크숍 체제를 지향했다. 1925년 정부의 재정 지원 취소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 시에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했다.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난 후 베를린에 사립바우하우스가 설립되었으나, 1933년에 나치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조형 디자인의 기능과 효율성에 초점을 둔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현대 조형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P66

에리히 케스트너
작가·시인  독일  
1899. 2. 23~1974. 7. 29

잔혹한 시대의 증인이 되어

‘절대로 울지 말자!‘
하늘을 나는 교실』Das fliegende Klassenzimmer의 주인공 마르틴 탈러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급비생인 마르틴의 부모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다가오는데도 아들에게 고작 5 마르크밖에 송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섣달그믐까지 갚기로 약속하고 양복점 주인에게 빌린 돈이었다.
그러나 마르틴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8마르크의 여비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집에 오지 말고보내준 돈으로 초콜릿이라도 사먹으라고, 가끔은 썰매라도 타면서 놀라고, 그리고 절대 울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자고. "어머니, 다정하신 어머니!"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틴은 한 번은울어버리고 말지만, 이내 ‘절대로 울지 말자! 고 다짐한다. - P67

토마스 만 Thomas Mann을 비롯하여 그의 형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수많은 문학가들이 망명했다.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는1935년 스웨덴에서 자살했다.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에 뉴욕에서 자살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40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가던도중 붙잡혀 자살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케스트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을 떠나는 친구 헤르만 케스텐Hermann Kesten에게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 이곳에 머물 생각일세.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잔혹함의 증인이 되겠어. 나치의 독재를 다룬 장편을 쓸 계획이네. 미래의 고발자로 꼭 남아 있고 싶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케스트너는 자신의 책들이 불태워지는 현장을 일부러 보러 갔다. - P70

고난의 시대를 살아남은 케스트너는 전후에도 『두 명의 로테』Das doppelteLottchen(1949), 『동물회의』Die Konferenz der Tiere(1949), 『내가 아이였을 때A‘s ich einpleiner Junge war(1957) 등의 작품을 남기고 1974년 7월 29일 뮌헨에서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문학가 이케다 히로시池田浩의 표현을 빌리면, 케스트너는 "도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모럴리스트가 되려 했던 인물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인물상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헤르만 케스텐은 이렇게 묘사한다.

정치적으로는 제한 없는 자유주의자이고 세계관에서는 과격한 휴머니스트이며, 천성적으로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돈 씀씀이가 헤프고, 내성적이면서도 결단력이 뛰어나며, 온화하면서도 반항적이고, 친절하면서도 신경질적이며, 신랄하면서도섬세한 인물이 바로 케스트너이다. - P71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1차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한 후 군부, 관료, 대자본가 등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의 타협에 의해 성립한 민주공화국.
1919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그해 8월 헌법을 반포하면서출범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극우 세력의 카프 반란, 좌파의 루르 봉기 등 반대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과1923년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20년대 중반 배상 문제를 일단락하고 다시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하면서 짧은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국력이 회복됨에 따라 강대한 독일 건설을 꿈꾸는 우익의 권력이 강화되고, 1929년 대공황에 휘말리면서 공화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실업자가급증하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이 강해졌는데, 분열한 좌파와 달리 우파는 군부, 관료, 자본가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나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33년 1월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14년 만에 무너졌다. - P73

숄 남매

한스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18. 9. 22~1943. 2. 22

조피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21. 5. 9~1943. 2. 22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강제수용소가 주는 짓눌린 듯한 공포감, 게슈타포 등 그물망 같은 치안 조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이 서로 감시하고 밀고하는 메커니즘, 그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한없이고독" (잉게 숄inge Scholl)한 작업이었을까? 그러나 여기 그런 목소리를 드높인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백장미통신은 1942년 7월 초에 제4호까지, 그리고1943년 1월과 2월에 제5호와 제6호가 제작되어 독일 남부 각 도시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개인들에게까지 송달되었다.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Sophie Scholl 남매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백주 대낮에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고 예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대학 본관에서 팸플릿을 뿌린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호가 된 『백장미통신』 제6호였다. 거기에는 "청산의 날이 왔다. 독일 청년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독재체제를 청산할 바로 그날이" 라고 씌어 있었다. - P75

한스와 조피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태도를 증언한다. 특히 조피는 조사를 받은 뒤에도 편안히잠을 자고, 사형 직전의 면회에서도 부모가 가져온 음식을 보고 "저,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어요" 하고 입맛을 다시며 꾸러미를 펼쳐보았다고 한다. 언니잉게의 회상에 따르면, 조피는 짙은 갈색 머리에 크고 거무스레한 눈동자를 가졌으며, 아직 천진난만한 앳된 표정에 "무엇에건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대는 어린 동물 같은 호기심"과 "대단히 진지한 태도를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진이 그녀의 이런 인상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어떤 교사는 조피의 "섣불리 자신의 자주성을 관철하는 태도를 가리켜 "경망스럽다"라고 표현하기도했다. 실제로 민족재판소에서 그녀는 재판관에게 "비록 우리들의 머리는 오늘떨어지지만, 여러분들의 머리도 우리 뒤를 이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런 ‘경망스러운‘ 태도는 잔다르크나 막달라 마리아를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경망스러운 이들에게는 국가권력이 휘두르는 죽음의위협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P77

조피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엘제 게벨lse Gebel에 따르면, 그녀는 마지막순간을 앞두고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햇살이 비치는 날에 이제 난 떠나가야만해. 내겐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행동이 수천 명의 마음을 흔들어깨울 테니까. 분명 학생들이 저항하며 일어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게벨은 대답했다. "조피, 넌 아직 몰라. 인간이 얼마나 겁 많은 짐승인지를."실제로 조피가 기대했던 학생들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항은커녕, 숄남매와 프롭스트가 처형되고 사흘 뒤 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중대는 ‘백장미‘를 매도하는 나치 학생지도자의 연설에 환성을 지르고, 숄 남매를 게슈타포에게 인계한 대학 직원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장미‘의 다른 동료들 역시 이해 2월과 3월에 연이어 체포되었고, 알렉산더 슈모렐과 쿠르트 후버는 1943년 7월 13일에, 빌리 그라프는 같은 해 10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백장미‘는 ‘시민적, 그리스도교적 저항이며, 그런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세계는 다시 그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P78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한국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 말 한국에 번역되어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며 한국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긴급명령‘과 유신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전두환 군사독재의 철권통치가 일체의 비판을 봉쇄했다는점에서 일맥상통해 이 책의 상황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유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 세대들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반정부 페인트 낙서‘라는 저항 방식을 착안하기도 했는데, 1978년 5월 1일 서울대 강의실 벽 곳곳을 장식한 반체제 페인트 낙서, 1979년 2학기 개강 직후 연세대 독수리상 기둥에서 발견된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붉은 페인트 낙서 등이 그 예이다. - P79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안네의 그런 모습에서어떤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무고한 소녀는 똑같이 무고한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안네의 가족 8명이 25개월 동안 생활한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를 받은 나치 친위대와 비밀경찰에 의해 급습당한다. 그리고 9월 3일그들 가족은 네덜란드의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절멸수용소로 이송되는데, 그것이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마지막이송열차가 되었다. 연합군이 이미 그곳에서 겨우 200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에는 총 1,019명의 희생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남자 45 명과 여자 82명에 지나지 않았다.  - P83

안네의 여덟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 오토 단 한 명이었다. 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 남겨진 어머니 에디트Edith는 1945년 1월 6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에 판단이라는성으로 등장하는 헤르만 판 펠스Hermann van Pels는 1944년 10월 또는 11월에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보내져 사망했다. 그의 아내 아우구스테Auguste는 몇몇 수용소를 전전했지만 사망일시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다. 안네가 사랑했던페터는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1945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치과의사 뒤셀, 즉 프리츠 페퍼Fritz Plefter는 노이엔가 수용소에서 1944년 12월 20일 사망했다. - P83

이렇게 쓴 안네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의 책임을 계속 묻고 있다. 설령 세상 사람들 수백만 명이 안네의 일기』를 읽고 동정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만들어진시오니스트 국가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역설을 저질러왔으며, 한편으로 세계는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또다시 대두하는 배외주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안네의 죽음을 더더욱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84

살바도르 아옌데
정치가  칠레  
1908. 7. 26~1973. 9. 11

칠레의 길을 위한 싸움

드브레는 앞의 인터뷰에 붙인 서문에서 아옌데를 이렇게 규정한다. "박사‘ 이면서 동시에 ‘동지‘이고, 프리메이슨 단원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이며,전 공화국 상원의원이면서 사회주의 전사이고, 부르주아로 성장했으면서도 혁명적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그 나라의 수도보다) 지방적 현실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으면서도 철저한 국제주의자이다." 이런 아옌데 자신이 ‘칠레 역사의변증법‘에 각인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의 여러 형태와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운동의 결합‘의 ‘살아 있는 예이자 ‘화신‘이라고 드브레는 쓰고 있다.
따라서 아옌데가 현재의 사회 위에 "과거의 사회와 미래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랑을 놓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P88

인민연합 정부는 구리광산 등의 기간산업 및 유통·금융 부문의 국유화와철저한 농지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국내의 인플레이션과 구리의 국제가격 하락, 미국의 원조 삭감, 국제금융기관의 대출 정지 등으로 말미암아 칠레의 경제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인민연합 내부에서도 여러 세력 간의 대립이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 과 거대기업 아이티티 IT 사의 후원을 받은 우파의 정권 전복 공작이 격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의 징후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도 아옌데는이상주의자다운 완고함으로 끝까지 ‘혁명적 폭력의 선제적 행사‘를 배격하고
‘입헌적 틀‘을 고집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접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집필중이던 회상록에 서둘러 마지막 몇행을 적어넣었다. - P89

칠레에는 오랜 문민정치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에서는 혁명은 드물었고, 보수적이고 평범하며 안정적인 정부가 많았다. 대부분의 대통령은 그릇이 작았지만, 두 명은큰 인물이었다. 발마세다José Manuel Balmaceda (19세기 말의 자유주의자)와 아옌데가 그 - P89

들이다. (………) 발마세다는 초석으로 얻는 부를 외국에 넘겨주지 않으려 저항했기 때문에 자살로 내몰렸다.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칠레의 과두제가 유혈혁명을 조직했다. 두 경우모두 군인들이 사냥개 역할을 맡았다. 이들 군인들을 사주하고 자금을 제공한 세력은발마세다 때는 영국의 회사, 아옌데 때는 북아메리카의 회사였다. (네루다 회상록』) - P90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길‘을 목표로 한 칠레 인민연합의개혁 프로그램은 당시 ‘아옌데 실험‘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유럽 각국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분파의전략 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복수정당제‘ 개념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 ‘아옌데 실험‘은 사회주의 자체를 구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바라는 아옌데에게 선물한 자신의 책에 "다른 길을 선택해 같은곳에 도달하려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헌사를 썼다고 한다. 다른 길을택한 두 사람은 모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 P90

빅토르 하라
연극인 싱어송라이터  칠레 ㅡ 
1938. 9. 28~1973. 9. 16

두 손이 으깨어지더라도

두 손이 으깨어진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그의 이름은 16세기 독일의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 를떠올리게 한다. 리멘슈나이더는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두 번 다시 작품을 만들 수 없도록 양손을 못 쓰게 되었다. 칠레의 음악가 빅토르 하라 역시 ‘칠레 사회주의의 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똑같은 일을 당했다.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빅토르 하라는 "시민들은 각자의 일에 충실히 임해주십시오"라는 아옌데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국립공과대학으로 향하던 도중체포되었다. 임시 정치범 수용소로 변해버린 칠레 스타디움으로 연행된 하라는 일주일 후인 9월 18일 시체 공시소에서 그 - P92

의 아내 요안 하라 Joan Jara에 의해 확인되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빅토르 하라는 스타디움에 연행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타를 집어들고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venceremas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화를내며 그의 기타를 빼앗았다.
하라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계속 이어갔다. 화가 치밀어오른 군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 팔을 짓이겼다. 그래도 하라는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군인들이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마치 그가 되살아날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수십발의 총탄이 그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그때 한 군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 한번 계속 불러봐. 이래도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야기 히로요八代 금지된 노래」 - P93

쿠바의 뮤지션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는 이렇게 말한다. "박물관에 들어가서는 안 될 전통문화와 민속음악이 있다. 절대로 흥미를 잃지 않고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역사의 한 순간 한 순간마다 그본질이 존재할 수 있도록 형태를 바꾸어가야 하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빅토르 하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노래가 현실의 뼈와 살과 혈관에 형태를 만드는 것일 때,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저 살육자들이 그 - P96

에게 퍼부은 증오야말로 진정 그것을 보여준다. 그의 최후는 그 당연한 귀결이며, 그가 스스로 바란 일임에 틀림없다."
빅토르 하라와 함께 ‘새로운 노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앙헬 파라Angel Parra는 쿠데타 때 체포되었으나 반년 만에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 훗날파리로 이주했다. 1987년 크리스마스, 피노체트 정권의 사면 조치로 추방령이해제되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빅토르 하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 P97

그러나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일을 내가 저질렀단 말인가?
그대의 등에 박힌 40발의 총탄이 나를 용서해주는 것인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내 아버지가?
저 3만 명의 죽은 자들과 피로 물든 마포초 강이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
(.....)
‘너는 리스트에 올라 있어."
무슨 리스트? 웃고, 생각하고,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사랑하고, 죽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스트?
(.....)
그리고 또 하나 자네에게 전하고 싶은 이별의 말이 있네.
올 겨울의 파리는 너무 멋졌지. 그래서 내게 베풀어준 사면을 받지 않기로 했어.
나는 한 방울 눈물 속에 조국을 꼭 안고 싶어.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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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가운데,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책이 바로 데라다 도라히코‘가 쓴 수필집이다. 내 독서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은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벽장 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져보았더니 어지간히 버리기 아까웠던지, 용케 그 수필집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손에들고 보니 아동용 책답게 한자 옆에 일본어 독음이며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었고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寺田集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출간한 곳은포플러 출판사. 초판은 1959년에 발간되었는데 내 책은 그 이듬해에 나온제2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총 스무 권짜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책 뒤에 달린 광고를 보면 첫째 권에는 요시노 겐자부로源三郞,
셋째 권 이하로는 다니가와 테츠조 아마노 데이유, 가메이 가츠,
이치로井勝一郎, 고이즈미 신조2가 갖고 있던 책은 달랑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한 권뿐이었다. - P20

가뜩이나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닌 조선인들에게
‘독서‘나 ‘지식‘이라는 말이 지닌 가치는 단연 막중한 것이었다. "아무개는 지식인이다"라는 평판은 최상의 찬사였고, 동시에 ‘무식한 놈‘이라는 말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최악의 모욕이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수많은 글 중 저 유명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 이라는 말이 있다.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만용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그의 모습이 조선 민중의 심금을 울렸으리라. - P21

"아아,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며 이 대목에서 나는 긴 한숨을내쉬곤 했다. 작가는 홀로 남겨진 꼬마가 도토리를 주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바라보면서 "처음과 마지막이 비참했던 어미의 운명만큼은 이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싶지 않다"고 글을 맺는다.
어디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물론 어린아이인 내가 그런 것까지 이해했을 턱이 없다. 다만 ‘형식‘이 가져다주는 유려한 문장 흐름과좋은 어조가 전해주는 율동감의 매력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P27

1992년 여름, 나는 중국 지란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지난날
‘간도‘로 불리던 이 지역은 조선반도의 민주, 러시아의 국정을 취하고 있어서 20세기 초엽부터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인들이 많이 아주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이 지방은 일본의 중국 침략 교두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투쟁의 상품이 되기도 했다. - P61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또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소년 아라이의 불행에 생각이 이르자, ‘부조리‘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 테지만 거의 그와 비슷한, 왠지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감상에 빠졌다. 단한방에 상대를 녹아웃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내형이 우울해했던 것 역시, 아마도 그 같은 아라이의 현실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 P81

에리히 케스트너가 국외로 망명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나치스의 폭정이 장기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노모老母 곁을 떠나고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마마보이가 많다지만 케스트너처럼 용기 있고 훌륭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글은 제2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케스트너는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홀리려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하며이렇게 충고한다. - P84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 P85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 P85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 P121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는 열풍 속을 뚫고 지나가리라
기적소리 어두움 속에 울부짖듯 외치고
불꽃은 평야를 밝게 비추는데
아직, 조슈의 산은 보이지 않누나.


이렇게 시작하는 「귀향」은 곧바로 암기해버렸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래자갈 같은 인생이런가"라는 구절이 아직 열두 살도안 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얼마동안 잊고 지냈는데, 십여 년 세월이 흘러 옥중에 갇힌 작은형에게 반입할 생각에 홋타 요시에 젊은 시인들의 초상의사서詩人肖像(1968)을읽어보니, 주인공이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가나자와로 귀향할 때마다 이 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와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야 비로소 "모래자갈 같은 인생" 이라는 시구에 대해 나도 아주 조금은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 P128

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마음이 이끌린 뒤부터 나는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고,
시인 흉내도 내면서 시 비슷한 글들을 끄적이게 되었다. 따로 공책을 마련해선마음에 드는 시구들이나 경구, 혹은 자작시 비슷한 글귀들을 적어두었다. 이 공책만큼은 절대로 형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나는 이미 형들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의 이미지란 베레모에 루바스카 차림을 한 ‘문약한 무리‘, 비위를 거스르는 ‘뇌꼴스러운 놈들‘, 꼴사납게 ‘잘난 체하는 배부른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여 형들이 내 기록들을 훔쳐보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가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 P129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1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독서.
으로서의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146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 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 P152

에리히 케스트너나 쥘 베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부터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永郞"의『레몬』, 구라타 햐쿠조출가와 그 제자의弟子,
또는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La symphonie pastorale 등을 읽게 될 때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죽음‘과 ‘성‘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근본문제가 불현듯 내 머리를 온통 뒤덮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는 1년 사이에 내키가 10여 센티미터나 자랐던 터이므로 그런 일쯤이야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사춘기‘ 라는 극히 짧은기간 동안 너무나도 급격한 정신적 성장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잔혹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나와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나 사이의, 그 버거운 불균형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 P153

이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경멸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읽었다‘고그녀가 자만해주었더라면 나로서도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그녀는 그 책만큼은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만큼은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당장 현관 서가에 꽂힌 문학전집쯤은 거의 독파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형이 읽던 ‘마의 산을 손에 쥐었다. "넌 이 책 읽을마음이 없다지만, 여차여차하고 이러저러해서 난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말을꼭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을 정도로지루해져버려, 곧바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 P160

몇 년 전 스위스의 세간티니미술관Segantini Museum을 방문하는 도중에 다보스Davos를 지나치게 되었다.
‘다보스?‘ 그때 갑자기 다보스라는 지명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왜일까?
불현듯 다보스가 ‘마의 산의 무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이 장소를 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다보스에 와 있는 것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요양소에 입원한 아내의 수발을 들면서, 이곳에 3주 동안 머물며 「마의 산』을 착상하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2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다보스를 뒤로하고, 냉랭한 고원의 대기를 헤치고 생모리2츠St. Moritz를 향해 급히 차를 모는 동안 "나・・・・・・ 그 책만큼은, 읽고 싶은 마음이영 들지 않아" 라던 소녀의 말이 귓전에 다시 울렸고, 그때 그녀의 표정까지도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 P162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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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년의 눈물은 특히나 애착이 많이 가는 책이다. 그것은 작품에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소년 시절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 P5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 사용하는 인간이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수 있었을까?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 P7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처지가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이들 디아스포라는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산물인 ‘영어의 감옥‘, ‘프랑스어의 감옥‘, ‘스페인어의 감옥‘ 그 외에 여러 다른 ‘언어의 감옥‘ 에 갇혀 있으며, 저마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싶다고몸부림치고 있다. 재일교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러한 여러 디아스포라들중 하나이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믿는다. - P8

의 독자들 가운데 이 ‘조선‘이라는 단어에 당혹하거나 주저하실 분이 계실지모르겠다.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음습한 민족 차별 정서를 품은 부정적어감을 풍겨왔다. 또 ‘조선인‘이란 조총련계 인사의 어휘라며 오해할 분이 계실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국적은 ‘대한민국‘이며,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당신 스스로를 ‘조선사람‘이라고부르셨고, 이 말은 내 부모님이나 그 윗세대에게는 삶의 치열한 현장에 밀착된,
지극히 자연스런 호칭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기기 때문에 평소 ‘조선‘
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4년 8월 15일
서경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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