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정쩡함! 그건 오래 걸친 외투처럼 내겐 너무도 친근한 말이 아닌가. 한번은 아들녀석이 물었다. 엄마를 무슨 작가라고 소개해야 돼? 엄마가 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단다. 소설가냐,
시인이냐, 드라마 작가냐. 난 아이에게 엄마는 인터뷰 하고 칼럼 쓰고 산문도 쓴다고 설명했지만, 말하면서도 뭔가 잡다하고 애매했다.
오랜 질문이다. 나는 무슨 글을 쓰는 사람인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반듯한 명함도 없고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있는 것도 아니나 어쨌든 매일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말은 늘 궁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지만, 그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다. 그럼 난 그날 일을 한건가 논건가, 헷갈렸다. - P18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라는 니체의 말대로, 불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우리는 또 대부분 그렇게 산다. 주변을 봐도 고시 합격생보다는 준비생이 많다. 고액 연봉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노동자가 다수다. 연인 관계도 팽팽한 사랑 감정을 느낄 때보다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길다. 그러니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했다. - P19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글을 쓰는 안정된 집필 환경을 꿈꿨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라도 있다면 존재 증명이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책상과 고요가 확보된다고 글이 싹 바뀌지않았고, 책이 나온다고 삶이 확 달라지진 않았다. 아이가 기저귀만떼면 엄마 노릇 수월할 줄 알았는데 걸으면 넘어질까 걱정, 취학하면 학교적응 못할까봐 걱정, 성장할수록 근심의 층위도 깊어갔다.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 P19

나이 들면서 체지방이 늘 듯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인다. 번호는 정리해도 인연은 삭제되지 않고 내가 피해도 삶이 만나게 한다. 사는 동안 운명을 뒤바꿔놓을 결정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않겠지만 신상 정보 업데이트가 안 된 지인들과의 애매한 만남, 아니 마주침은 종종 일어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은 (..…)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116) 이 단편적 만남, 하찮은 우연에 잘 임하고싶다. 안색을 살피고 고요를 챙길 것. 앞으로 수차례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무수한 대중교통 탑승 기회가 남았다. - P30

많은 글과 논리가 있고 지식이 있다. 그것에 묻힌 너무 작은 목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살리는 일을 내심 과업으로 삼았다.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이 무위의 글쓰기라는 경지는 아득하지만 일단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해진 마음은 누그러뜨려준다.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수행하려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을 다스리라는 글쓰기의 이정표 앞에서 나는 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글이 불이 되는 글쓰기를 해낼 재주는 없지만 쓰면서 알아가고싶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으면, 혹은 되었다면 하루에 이삼십 장씩쓰라는 말보다 이쪽이 더 윤리적이며 매혹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글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면기에서 면발 나오듯 줄줄 써대는 게 능사는 아니며, 그렇게 능력을 행위로 소모하다간 4대 보험 적용도 안되는 무명 작가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는 자각이 아주 세게 드는 조언이다. 고마워요, 아감벤 씨. - P34

싸구려 모텔에서 단기투숙자로 미혼모 엄마와 사는 아이는 가난과 결핍의 공간을 생성과 자극의 놀이터로 만든다. 이 낙담하지 않는 악동은 자신의 신묘한 능력을 고백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엄마의 기후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것도 아이고, 어떤 절망에 빠졌어도라면 수프 같은 복원력으로 생기를 되찾는 것도 아이다.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는 뜻이다. 한부모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인 것이냐고. 나와 내 친구가 오매불망걱정했던 그 작았던 아이들은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다. - P42

소설을 읽다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그 허탈함, 황망함, 난감함, 쓸쓸함 속에서 사유가 일어난다(좋은 소설인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생각했다. 처음엔 바틀비가 이유도없이 일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게 이상하다.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 - P45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했던 말이 나를 향한다.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평소 목소리 없는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 P47

결국 딸은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네 상식과 내 상식의다름, 자기 불안의 겨룸, 상호 애환에 대한 무지, 욕망의 투사, 필요의 거래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엄마와 딸. 그러나 패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세상의중심으로 나아가는 딸아이에 비추어 ‘왜소해진 나‘를 본다. 더는 작지 않은 아이가 더는 쪼그라들고 싶지 않은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 P72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 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 진다. - P75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P83

아무려나, 제 몸 써서 일한 사람들이 갖는 삶에 대한 통찰력, 남의 몫 가로채지 않고 자기 손 놀려 ‘저금통‘ 같은 갯벌 일구어 살아온 이들의 가뿐함, 그 와중에도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펴 "누부리곱과(노을이 고와)" 라며 감탄할 줄 아는 우아함을 배운다. 이 책의최고령 97세 소무의도 윤희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땡이가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불 안 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작아진 몸피에서 나온 사리 같은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기에 너무도 혁명적인 그 입말을 곱씹는다. - P104

끼니마다 콕쏘는 김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면서도 목 안이 따끔하다. 한 여성이 소위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듯이, 내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인 김치를 먹게 된다. 얼마나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지고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렸을까.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 Impaid work 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 P107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저자처럼 수년을 공부하고 책 한권 분량의 구조적 분석을 마쳐야 제대로 이해시킬까 말까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 - P124

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자서전으로, 인터뷰로 자기 말을 퍼뜨리지만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이들은 말이 없다. 특정 지역이 사교육 시키기 좋다는 말. 사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득권층이된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사교육에 실패했거나 애초에 사교육을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말은 배제됐다. 재개발이 지역 발전에 좋다는말도 마찬가지. 매매차익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과 그것을 조장한토건재벌의 말이다. 쫓겨난 원주민의 말은 무음 처리다.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생산 및 유통된다.
나는 목동 아파트를 떠나 집을 구하며 주택담보대출이란 것을받았다. 용쓰고 살았으나 살다보니 중년에 빚쟁이다. 20년 상환의굴레에 갇혀 죽지도 못할 처지가 된 게 황망하고 서글펐는데 이 책에서 부채에 관한 다른 해석을 얻었다. "개인이 가난해서 빚을 지는것이 아니라, 빚을 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위해 빚을 지는 것이다." 학생-채무자의 글에 노동자-채무자인 나는 위안을 받는다. - P125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맺기의 무능함으로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 P128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스마트한 여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다."  - P131

안희정 성폭행 혐의 사건에는 법리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끝나도 여성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건성폭행이 계속된다는 말이고, 남성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편집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자주 실패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견고한 지배 질서의 틈을 뚫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삶을 대동하고 나온 목소리는 말하기에 실패할 때마다 정교해진다. 나는 거기서 희망을 본다. - P131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불과 몇 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2년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흩어져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 P134

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 -동기-로부터 본다"(김수영)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 발언, 혐오 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 P149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 - P162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세팅되었다고 한들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1284).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P163

며칠 후 찬바람 뚫고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 오늘‘ 전시회 토크콘서트에 갔다. 전시를 주최한 10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피해자에 대해 양육자와 눈 맞추고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 그래서 처음엔 뭘 물어봐도 "싫어" "재수 없어" 두 마디로만 답하는 아이들이었다고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가정폭력이나 학대를 당하던 아이들이 ‘살려고 집을 나와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을 따르다가 피해를 입는 구조라는 것.
그런데도 아이들은 보호받기는커녕 ‘쉽게 돈 번다‘며 비난받고낙인찍힌다. 조 대표는 말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어보는데 현장을 모르는 행정부 어른들과 싸우는 게 더 어려워요." 심지어 단속에 적발된 성 구매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러 센터에 직접 찾아오는 일까지 있다며 "어째서 구매한 놈이 당당한가"
분통을 터뜨렸다. - P165

이날 내가 배운 것도 세 가지다. 첫째, 소위 ‘원조교제‘나 ‘조건만남‘으로 불리는 10대 성매매는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주지만 한쪽이 취약한 처지이므로 성착취라는 말이 합당하다. 둘째, 전 세계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에 - P165

대해 엄격하게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추세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범죄라는 인식조차 미약해서 가해자들이 외려 당당하게 군다. 셋째, 성착취라는 말이 일반화되면 "당당한 놈들도 바퀴벌레처럼 숨을 것"이며 성착취도 사라질 것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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