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혼자다 싶을 때
그 많은 잎들 다 어디 가고
혼자 떨고 있나 싶을 때
나무는 본다 비로소
공중으로 뻗어간 뼈를
하늘의 엽맥을
광대무변한
이 잎은 아무도
떼어갈 수 없다
2022년 10월
손택수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 P12
저녁 숲의 눈동자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 P14
한 모금 물방울을 붙들고
아프리카 어느 부족 여인들은 지하수가 흐르는 땅의 나무 그늘엔 실례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 지하수를 감지한 나무 그늘은 지하수가 없는 땅의 그늘과는 그 빛깔부터가 달라서, 아무리 급해도 물이 오염되면 쓰나, 멀찌감치 떨어져일을 본다지
그것 참, 내 눈엔 똑같아 보이는 그늘도 그 농도부터가 다르다니, 땅의 체질에 따라 저마다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니, 나뭇잎 그늘 한 장에서 수십 미터 지하의 물기를 감지할 줄 아는 눈을 갖기 위해 초원은 얼마나 바짝 목이 탔을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한 모금 물방울을 붙들고 푸르게 타올랐던 시절, 내 안색만 보고도, 눈빛만 보고도, 그 깊은 곳 물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한 사람을 - P15
바다 무덤
뱃속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멎었다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아기를 위해 여자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유영하는 우주 공간을 허우적거린 이틀
그후 여자는 어란을 먹지 않았다 생선의 눈을 마주하는 것도 버거워서 어물전 근처는 얼씬도 않던 여자, 세월호 뉴스앞에 며칠째 넋을 놓고 있던 여자
한동안 가지 않던 바다에 간다 상처라는 게 흔적이 남아야 치료도 되지 둘 사이의 금기였던 아이들 이야기를 나눈다
버리지 못한 초음파 사진 속 웅크린 태아처럼, 부푼 배를끌어안고 자장자장 들려줄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바다 - P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