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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다. 거리를 나서면 원숙한 가을바람이 머리칼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이 갑갑한 도시의 한 가운데까지 불어와서 대지가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고 더불어, 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바람... 세심하고 너그러운 그 바람에 오감을 열고 있노라면 ‘가을은 바람의 계절이다’라고 정의 내리고 싶어진다.

 

  그런데, 가을이란 계절을 이야기하면 빠뜨리지 않는 정의가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좋은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은 ‘책’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오해들 때문이겠다.

 

  인간은 책의 친구가 되기 위해 책을 창조했지, 책의 노예가 되기 위해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책을 ‘우러러’보는 지 갑갑하다. 나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없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면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남의 생각’인 책에 파묻혀서 그것들을 들어주느라고 내 생각을 제대로 풍부하게 다듬을 시간이 없어서 고민이다. 게임에 빠져 사는 아이들을 걱정해야 하듯이, 나처럼 남의 생각 읽는 재미에만 빠져 사는 사람 역시 문제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떠올릴 때, ‘많이 읽기’, ‘빨리 읽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일 거이다. 그러나 진정한 독서는 자기의 생각과 삶을 위해 존재하는 독서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광고, 평론가, 그 어떤 누가 권해도 자기에게 맞지 않고 재미없는 책은 덮어 버린다. 그리곤 능청스레, ‘재미없다’를 연발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꼭 맞는 책을 발견했을 때는 그 재미에 푹 빠져 든다. 그리고 그 감동을 오래오래 느끼기 위해 한동안 다른 책을 잡지 않는다. 정말 책의 친구가 될 만한지 않나.

 

  그 친구를 보고 있노라면 공자의 저 유명한 말이 딱 어울린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 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 하니라

 

  가을이다. 내가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기꺼이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 해 보자. 그게 책 읽기라면 좋은 책 한 권 드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아쉽지 않나, 저 바람...

  오늘만은 책을 덮고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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