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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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를 키울 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여자아이이니 대체로 이해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부분도 많고,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성향을 가진 딸아이이니 비교적 수월했다. 가끔 남자형제를 둔 엄마들이 '나도 언니처럼 속삭이듯 말해보는 게 소원이다'라고 말했을 때, 남자아이 키우는게 그렇게 어렵나 했었다.그런데, 아들을 키워보니 알겠다. 내가 남자가 아니니, 아무리 어려도 남자인 아들을 키우기가 만만치 않다. 딸아이에겐 맞던 방법이 막히기 시작했다. 아들때문에 쩔쩔매는 나를 보고, 딸아이는 남편이 본다고, 아들만 잘 보라고 말하는데도 힘에 부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럴때마다 남편에게 하는 말은 "당신이 남자니까 아들을 보고, 나는 여자니까 딸을 돌보는게 어떠냐고" 물어본다. 도통 모르겠다. 어린 남자아이 하나때문에 난 늘 끙끙댄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육아서에는 남자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여자아이는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자세히 나와있지 않았다. 제목만으로도 귀가 번쩍 띄였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임상 심리학자는 문제 아이를 하루에도 수십명씩 만난다며 아이가 어릴 때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tv그만볼까, 괜찮지? '라고 질문하는 것은 아이에게 '싫어'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럴 땐 그냥 'TV를 꺼라'라고 말해야 '한다'고 저자는 몇번을 강조한다.) 다음에 오락에 빠진 아이를 통제할 수 없고, 사춘기때엔 더 통제 할 수 업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게 대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요지이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유전학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게 아이를 가르치고 기르자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 다르다. 딸에겐 되는 육아방법이 아들에게도 맞을리 만무하다.

저자는 남자아이를 남자답게, 여자아이를 여자답게 성정체성을 먼저 확립시켜주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받았던 (중성적인) 교육을 받아야 - 아이가 나래를 펼 수 있다고 말한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유치원부터 남자와 여자의 성영역을 무시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여자아이에게 자동차를 남자아이에게 인형을 갖고 놀게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여겼으며, 남녀공학에서 초중고등생활을 보낸다. - 저자는 적어도 여자아이에게서 인형을 빼앗고, 남자아이에게서 갖고 놀던 자동차를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는 당황스러울만큼 처참하다는 것을 저자는 많은 예시를 들어보인다.

남녀공학에 다니는 여자아이는 '외모'로 자신의 자존감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뚱뚱하고 못생기면 낮은 자존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으며, 남자아이는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남자들의 영역에만 여자아이는 여자들의 영역만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반면 여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남자들의 영역이라 불리는 것들을, 남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는 여학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것들도 시도하게 되더란다. 또한 여자아이는 외모외에  공부나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남녀의 성차를 무시한 교육은 실패했으며, 약물중독이나 섹스에 너무 일찍 노출됨으로 인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남자는 원래, 여자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교육,육아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는 수많은 동물실험과 사례들이 나와서 지루한 점도 없지 않았고,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너무 성차를 구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나이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성에 따라서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에 맞게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도 부모도 모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이젠, 남자아이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는지...왜 남자들끼리 모여있으면 더 개구쟁이가 되는지도...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

 

교실에서 투호같은 놀이를 실험관찰했다. 여자들은 혼자서 화살을 던지든, 다른 여자들이 방에 들어오든 상관없이 같은 거리에서 던진다. 그런데, 남자는 혼자 던질때는 가까운 거리에서 던지다가도 다른 남자들이(지금 보고 앞으로는 볼 가능성이 없어도) 보고 있으면 훨씬 먼거리에서 던진단다. 실패확률이 높더라도 말이다. 남을 훨씬 의식하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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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문학 베스트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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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서운 걸 못본다. 공포영화도, 귀신영화도, 추리소설도...

단언하건데, 이건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다.

아주 오래 전의 프로그램인 '전설의 고향'이 무서워서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다. 꼼짝없이 식구들이 틀어놓은 걸 보아야 할 때면 이불이 있어야만 시청이 가능했다.

아직도 내 머리에서 맴도는 '내다리 돌려줘..'

 

암튼, 그런 내가 추리소설을 봤다. 제대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솔직히 그렇게 무서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붙혀진 헌사들은 과한 찬사가 아니다.

아니, 어찌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야.

 

8명의 초대손님과 집사부부, 이렇게 10명이 인디어섬에 갇혔다.

이들을 초대하고, 집사부부를 고용한 섬주인 오언은 어디에도 없다. 그를 본 사람도 없다.

10명에게는 미필적 고의가 있다. 그러나, 심증만 있지 확증은 없었기에 죄에 대한 벌을 받은 자는 없다. 

10명과 10꼬마 인디언이라는 동요와 테이블 위의 10개의 인디어 인형이 있는 고립된 섬.

인디언 소년이란 가사대로 1명씩 살해될 때마다 사라지는 인디언 인형.

10명, 9명, 8명.....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나, 떨고 있다. 베라가 느꼈던 공포의 강도는 아니지만, 지금도 심장이 요동친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건 당연한거고(나처럼 어설픈 사람이 범인을 맞췄다면, 아가사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가 없지), 범인의 자세한 설명을 보고도 정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너무 믿기지 않아서...

그 사람이 범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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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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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하나의 오은수는 그 나이를 지난 나의 자화상같다.
그만큼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서른 하나, 돈도 없고, TV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를 갖춘 전문직 여성도 아니고, 사귀고 있는 남자와의 결혼도 불투명했던 그 불안한 서른 하나를 나 또한 지나왔다.
 
사랑해서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가 결혼을 한다. 오늘...
그 오늘 난 무엇을 할까? 배낭하나 들고 산으로 바다로 떠날까?
아니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라며, 쿨하게 보내줄까?
아니면,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부릴까?
'다 부질없는 짓이다'하며, 쓴 소주 한 잔 마시며 털어버릴까?
은수는 생각보다 덤덤한 것이 이상하리만치, 똑같은 일상 속으로 들어가 다른 날과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아낸다.
나도 은수처럼 했을까? 그랬을 것 같다.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너무 이상한 그 느낌...에서 서른이라는 숫자를 떠올렸을 것 같다.
 
서른을 지났고, 서른 하나에도 아직 노처녀였던 나는 그래서, 은수를 이해했고, 은수의 친구들을 이해했다.
여우야 뭐하니의 서른 셋 병희처럼 '한 잠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어디에다 나이를 흘렸는지 어느새 서른 셋이 되었다'는 병희의 말이 곧 나의 독백이다.
예전엔, 서른만 되면, 걱정도 고민도 다 초월한 진짜(!)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에 몸서리치지 않을 것 같고, 내 미래 때문에 고민할 일도 더는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서른이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미래 때문에 똑같은 고민을 하더라.
이제 그 나이를 훌~쩍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어리고 철이 없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진짜 어른이 되는거지?
 
은수는 서른 하나에 사랑을 보냈고, 사랑을 만났다.
그러나, 은수의 마음에 쏘옥 드는 남자는 없다.
스위트하고, 사려깊은 태오는 너무 어려서 미래가 듬직하지 않고, 맞선 본 그 남자는 젠틀하고, 맞선 시장 어디에 내 놓아도 80점은 하는(서른 하나의 은수가 더는 만나기 힘든) 괜찮은 남자이지만,  만나도 가슴이 뛰질 않는다.
유준이는 오랜 친구이긴 하지만 사랑은 아니고...
내가 은수라면, 나는 아마도, 어린 태오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서른 하나에 나이 어린 태오를 사랑한다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가슴 저리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다면 그걸로 된거 아닌가? 
 
태오의 나이 즈음에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나겠다고 했을 때, 내 친구들은 다 말렸다.
복학도 못한 어린애를 지금 만나면, 언제 졸업하고, 언제 직장을 잡아서 결혼 할거냐는 친구의 말은 틀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내가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보겠다는 건데도 철없다는 소리를 무던히도 많이 들었다.
 
우린 때로 너무 많이 걱정을 한다.
이 사람이 혹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한 걸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그래서 난 은수가 태오를 떠나 보낸게 안타까웠고, 한편으론 이해했다.
나도 그랬을지 모르니까...
내가 서른 하나에 스물 넷을 만난 건 아니었으므로.
은수는 서른 하나에 사랑을 했고, 아파했으며, 사랑을 보냈다.
그래도, 나는 서른 둘의 은수에게 또 다시 사랑이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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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시리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007이 새롭게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액션 시리즈는 제이슨 본시리즈이다.

웬지 고독해 보이는 맷 데이먼 때문이다.

좀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의 제임스 본드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경향이 있다.

나에게 본드는 약간은 느물거리고, 젠틀하지만, 정은 가지 않는 신사의 느낌이랄까...

피터지게 싸우고, 목숨을 거는 위험한 장면이 나와도 멀끔한 양복에 먼지하나 묻히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제임스 본드(내가 기억하는 본드는 주로 로저 무어이다. 물론, 가끔은 티모시 달튼도 기억하고, 피어스 브로스넌도 기억하지만..)들은 완벽하고, 느끼해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의 제임스 본드는 어딘지 어설프고, 아무 생각없는 단순 무식한 이미지가 자주 보인다. 

새로운 본드를 보고 있자니, 자꾸 터미네이터2에 나오는 액체터미네이터(?) 경찰이 떠올랐다. 목표물만 바라보는 고지식하면서도, 집요한 집착같은 모습때문에 뉴 본드가 너무 추락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싫지 않은 것은 아마, 사랑 때문에 슬퍼하기도 하고, 실수도 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야지..암...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질리지 질려, 아무리 영화라도 말이지.

 

완결된 스토리가 아니니,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를 한 번은 더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편에선 어떻게 변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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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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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는 하루키를 지독히도 싫어하나보다. 별점을 하나만 주었다.

내 손으로 하루키 책을 사보지도 않았는데, 3권이나 읽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소장하고 있다.

친구가 권해준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는 실망했다기 보다는 좋은 책인데, 나와는 맞지 않으니 앞으로는 찾아서 읽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번째로 읽은 해변의 카프카 - 비호감 작가인지도 모르고 남편이 사다주었다 -는  가독성은 떨어지지 않으니 읽을만은 하다였지만, 역시 하루키는 나와는 맞지 않는 작가다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 책이다.

 

그런데, 1년쯤 전에 남편이 '또' 하루키의 책인 어둠의 저편을 사왔다. - 이때는 대놓고 지청구를 조금 했다..싫어하는 작가라니까 또 샀어? 하면서 말이다.

이 얇은 책을 읽는데, 1년이나 걸렸다. 어둠의 저편은 몇 번이나 시도를 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상한 책이다. 책을 잡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내가 어둠의 저편은 앞의 첫 장을 5번도 더 읽었다. 1년이나 들었다 놓았다를 했으니,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오래 걸렸다.

 

어둠의 저편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첫번째 이유는 제목이 주는 괴기함때문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을 아직도 갖고 있던터라,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올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오는 이상한 스토리가 아닐까하는 불안감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하루키를 신뢰하지 못하는 내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하루키는 내 취향이 아닌 것을...

 

그나저나, after dark를 왜 어둠의 저편이라고 했을까...꼭 괴물이 나올 것 같잖아!

덧붙이자면, 에리가 잠자고 있는 장면에서 TV를 통한 소통은 영화 '링'에 나오는 tv를 빠져나오는 귀신이 생각나서 얼마나 오금저리던지...저 제목만 아니었다면..편하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혹평(작품에 대한 것인지, 작가에 대한 것인지...)을 해댔으니, 하루키 매니아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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