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죽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무언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은 죽음을 지향한다.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 주변을 시찰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신다. 이후 수도꼭지를 수리하고 새 나사를 박고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는 명확하게 죽음을 원하고 있지만 행동은 그와 정 반대다.


이 남자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오베라는 이름의 남자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조연으로 삶을 살아가는 남자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진 속 배경처럼, 그저 자신이 부여받았다고 믿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변화에 저항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더듬다보니 영화 <플레전트 빌>이 떠올랐다. 영화 속 배경인 플레전트 빌은 완전무결한 불변의 세계이다. 사람이 모여 살면 으레 일어날법한 갈등도 없고, 오로지 기쁨만 존재하는 마을이다. 플레전트 빌은 오베라는 남자처럼 색깔이 없다. 그들은 흑백의 삶을 산다. 하지만 흑백의 세상에 <플레전트 빌>의 주인공 데이빗과 제니퍼가 떨어지면서 완전무결함에 균열이 일어나고, 종래에는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모두 색깔을 얻는다.


오베라는 남자도 색깔이 무엇인지 느꼈던 적이 있었다.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소냐는 모든 색깔의 물감을 담은 파레트였다. 그는 우연히 야간 기차 청소부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색깔에 물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세상의 배경처럼 살아왔던 오베를 발견해낸 것이다. 오베는 그렇게 세상의 배경이 아니라 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소냐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오베라는 남자가 색깔을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었다. 소냐 곁에 있었기 때문에 색깔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소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베라는 남자는 다시 색깔을 잃었다. 그는 소냐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전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을 시찰했다. 하지만 그가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는 동안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그는 완고했으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트레일러를 후진할 수 있어야 하고, 라디에이터의 증기를 스스로 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으며, 그는 평생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느긋한 인생을 즐기라는 말과 함께 인생의 3분의 1을 일해 온 곳에서 해고됐고, 주변 사람들에게 구제불능이라고 여김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내 소냐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 죽음임에도 그는 자신이 지켜왔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자살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흩뜨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자살하려는 계획은 계속 미뤄진다.


그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으면서부터 그의 원칙보다는 소냐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자살 이후 소냐의 곁으로 갔을 때 소냐가 그것을 좋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는 일, 전에 싸웠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등을 계속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지 않는다.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체득해간다.


오베라는 남자는 시간이 흘러 끝내 소냐의 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은 그가 원했던 것처럼 조촐하게 끝나지 않는다. 3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는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했지만 그의 삶은 어쩌면 자신이 증오했던 하얀 셔츠의 남자들처럼 편협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색깔을 얻었다. 그의 삶은 대부분 흑백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죽음은 오색찬란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란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세상의 최우선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원칙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우리의 언어대로 그들의 언어를 마음대로 번역한다. 이러한 세상은 아비규환이며, 오베라는 남자처럼 자살이란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오색찬란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베라는 남자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만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가 녹아있다.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얽히고설킬 때, 오베라는 남자가 깨달은 소통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과 연대는 그만큼 힘이 세다. 구제불능이라고 여겼던 오베라는 남자가 결국에는 변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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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세월은 참 빨라서 벌써 봄의 끝자락까지 왔네요. 5월 주목 신간 시작합니다.


1. 노동여지도/알마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불온시 된다. 노동은 말 그대로 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임에도 노동=빨갱이라는 일종의 낙인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나 노동 전반의 문제점을 다루기란 지금까지도 요원하다. <노동여지도>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우리나라 전반의 노동 현장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현재 노동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에 따르면 20여 년을 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해온 저자가 20143삼성의 도시수원에서 시작해 20154책의 도시파주까지, 1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발로 뛰어 오늘 이 땅의 노동여지도를 그려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저자의 여정을 이어가게 한 것은 곳곳에서 싹 트고 있는 희망들이었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노동자 자주관리회사로 전환하고 흑자로 돌아선 시내버스회사, 노조와 병원장이 함께 일궈낸 행복한 공공병원, 성과급을 받는 대신 후배들을 정규직으로 만든 선배 노동자들. 21세기 한국 노동 현장에서 발견한 희망은 아직 작지만 분명 또렷하다.

 

2.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도서출판b)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이 상당히 많다. 이 관심은 종교적인 부분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지금의 관심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관심에 가깝다.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이란 책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알랭 바디우에서부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은 현재 관련 학계의 슈퍼스타들이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정치철학에서 사도 바울에 대한 독해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서구 철학계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는 바디우, 아감벤, 지젝, 샌트너라는 네 철학자가 시도하고 있는 바울-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네 철학자들의 바울을 읽는 상이한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논쟁의 중심에는 사도 바울이 차이철학의 입장(아감벤과 샌트너)을 취하고 있는지, 아니면 동일성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의 물음이 있다.

 

3. 담론/돌베개

 


무릇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동서양의 학문을 아우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고전이나 서양철학에 관한 논의는 쏟아지고 있지만 동양고전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영복 선생의 <담론>의 출간은 동양고전에 관심 있어 하는 이들에게 단비와도 같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선생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이 책 한 권에 선생의 사유를 모두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양고전 독법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일화를 통해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함을 이야기한다.

 

 

4. 논란의 건축 낭만의 건축/문학동네

 


매번 언급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건축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특히 세월이 쌓인 흔적 때문에 고풍스러운 유럽 건축에 더 매력을 느낀다. 유럽 건축에 관심을 쏟다보면 도시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옛 건물뿐만 아니라 눈길을 확 잡아끄는 랜드마크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논란의 건축 낭만의 건축>이란 책 역시 에펠탑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설명에 냉큼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 정대인은 계획부터 완공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에펠탑의 순간들을 면면이 보여주며, 역사·정치·사회·예술의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해부하고 자신만의 견해를 더한다. 심도 있는 조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문장들과 다양한 사진 자료는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한다. 저자는 이러한 여정 속에서 사람과 도시를 아우르며 장수할 수 있는 진정한 건축의 의미를 탐색함과 동시에, 기준 없는 난개발과 랜드마크 집착증으로 신음하는 서울의 현재를 진단한다.

 

 

5. 집을 철학하다/글담(아날로그)

 


건축에의 관심은 공간에 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집이라는 생활공간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철학하다>란 책은 이라는 공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건축가이자 건축평론가인 에드윈 헤스코트가 집의 역사와 공간의 의미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유명한 건축물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는 부엌, 거실, 침실, 서재 등의 공간뿐 아니라 창문, 문 손잡이, , 옷장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의미를 살핀다.

 

저자의 통찰로 창문은 삶을 담고 있는 액자’, 책은 영혼이 있는 가구’, 지하실과 다락은 예리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성찰의 공간’, 계단은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공간으로 재탄생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무심코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 삶을 성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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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여지도`라는 책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군요. ^^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어떤 것을 창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등의 상투적인 격언을 종종 듣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라 상투적인 것을 넘어서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상투적이거나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이제 당연까지 이른 것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격언들은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습득해야만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창작 행위는 선대의 것에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창작 행위는 어떤 한 개인이 그동안 경험했던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개성이라는 바늘로 기워내 하나의 창작물로 재창조하는 작업인 것이다.

 

즉 대부분의 예술가는 앞서 길을 닦아놓은 선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성장하고, 또 뛰어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계의 메커니즘을 다룬 책이 나왔다. 바로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란 책이다. 얼핏 보면 모작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예술 작품의 혈연관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해보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발전시키거나 전복(顚覆)하거나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통용되는 창조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기존의 것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것을 탈피해 도리어 전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여러 작품 중 대표 격인 <최후의 만찬>도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당시 “15세기 중반에 들어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 즉 원근법이 탄생한 도시 피렌체에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그림으로 등장(13)”했던 일화인 최후의 만찬의 내용을 차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위대한 것은 기존에 통용되고 있었던 일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통용되던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배신자 유다는 배신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도록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기존의 통념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유다의 위치를 다른 제자들 사이로 옮겨 놓았다. (중략) 레오나르도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의 핵심은 마음의 동요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배신자에 대한 분노 등이 잇달아 표현되는 안무로 연출해냈다. (중략) 가운데서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6)”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창작은 재창작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창작품은 다른 창작품을 변조하거나 개선하거나 재창작하거나 먼저 창작한 것에 해당한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7)”

 

Input이 곧 Output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1934년에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도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7)”라는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결국 가장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다른 보는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이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것을 토대로 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승하거나 탈피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는 기존의 것이 전제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창작자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Input이 없다면 창작이라는 Output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경험해야만 하는 기존의 것이 너무 늘어난 탓이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알고 그들의 작품을 보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도 정진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주장했듯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형식을 재량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작업이 예술인 셈이다.(7)”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복하려는 대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진리다. 이 진리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에서 얻은 달콤하면서도 쓴 수확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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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끼다`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표절의 의미와 가깝죠)로서 많이 떠올리기 쉬워서 책 제목 선정이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어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유명 화가들이 표절했는 줄 오해할 수도 있겠어요. ^^;;
 
좋은 균 나쁜 균 - 세균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남기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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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균은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가 세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불쾌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자동반사적이다. 다시 말하면 세균이라는 단어에는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의미 대신 더럽고, 꼬물거리고, 불결한 생물체라는 의미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균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해로운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의 신체에 살면서 우리의 몸 대신 해로운 세균을 저지하는 좋은 세균도 존재한다.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가 쓴 <좋은 균 나쁜 균>이란 책은 세균이라는 단어에 기생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떨쳐내려는 시도다. 책은 각종 사례와 전문적인 정보를 독자에게 제시하면서 세균에서 느끼는 감정 대신 세균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세균은 정말 나쁜가?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코흐와 파스퇴르가 증명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신세대 의학 연구자들은 세균 박멸을 목표로 세균계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세균에 대한 파스퇴르의 부차적 관점을 간과했다. 파스퇴르는 모든 세균이 해로운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세균이 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49~50)”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아토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의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를 많이 볼 수 있다. 아토피 피부염에 관한 여러 진단과 처방이 난무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아토피 피부염, 건초열, 천식 등의 유행이 일반적인 감기에서 홍역, 볼거리, 풍진에 이르기까지 유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바이러스성 질환이 줄어든 것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122)”고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 신체에 내재한 면역계가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의 수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필자에게 홍역, 볼거리, 수두 등의 바이러스성 질환은 어린 시절 당연히 겪어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겪는 것인 줄만 알았던 이러한 바이러스성 질환이 미성숙한 면역계가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생이나 청결이 강조되고, 아이들의 놀이터에 흙 대신 우레탄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세균과의 접촉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세균학자 시어도어 로즈버리의 주장을 동원해 이러한 시도가 위선임을 폭로한다. “균과 오물이 항상 우리의 적이라는 통념은 해롭고 낭비적이다. (중략)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고유의 이 오밀조밀 잘 짜인 사회를 이루고 있으면, 이런 균보다 적응을 잘 못해서 병을 일으키는 다른 균의 침입을 막는 가장 튼튼한 방벽이 된다.(59)” 

 

저자는 면역학자인 그레이엄 룩의 주장을 통해 인체의 정상적인 미생물상과 물과 음식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세균을 기준으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감염과 무해한 세균 정착을 구분(152)”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균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리 신체에 들어와 위해를 가하는 감염이었다. 감염만을 염두에 두고 세균을 박멸한다면 세균 정착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룩이 주장하는 세균 정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면역계가 오작동할 수밖에 없다. 면역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몸을 이루는 건강한 세포까지 공격한다. “마치 어떤 안전 정지선이 사라진 것처럼 면역계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친구인지 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116)” 

 

세균과 인간의 공존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우리 몸에서 세균을 박멸하거나 세균과의 접촉을 차단하면 면역계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주장이 균 이론자체가 가져다준 이로운 점을 배제하거나 공중위생과 항생제로 미생물과의 자연스러운관계가 파괴되기 이전 시대의 인류가 훨씬 나았다는 암시를 내포(229)”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다. 저자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의 주장을 빌어 독자들에게 외친다. “만약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보다 훨씬 많은 미생물을 포함하는 초개체입니다.(356)” 

 

우리의 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럽고 불결하게 여기는 세균이라는 아주 작은 존재다.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세균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건강과 생존을 지키는 열쇠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세균계가 쥐고 있을 것이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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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몸에 이로운 좋은 세균도 많은데, 건강에 해로운 나쁜 세균에 대한 기억이 많다보니 일부 사람들은 세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결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어느덧 알라딘 신간평가단의 4월 주목신간 페이퍼를 작성해야할 때가 왔다. 특히 4월은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지 1주기가 되는 달이라, 새로 나온 책을 살피면서 이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로 리뷰 작성이 미뤄졌는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기간이 생겨 얼른 못 다한 리뷰를 써야겠다는 마음뿐이다. 글도 써버릇하지 않으면 다시 쓰기가 힘든 것들 중 하나라 앞으로는 심기일전해 미루기보다는 제때, 꾸준히 리뷰를 써야겠다는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다짐을 했다.

 

사설은 이만 접고 인문/사회/예술/과학 4월 주목신간 추천을 향해 가보기로 하자.

 

5권의 새로 나온 책을 골랐는데, 앞선 둘은 우리 사회에 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들이고 나머지 셋은 세월호 사건 1주기를 맞아 생각해봐야 할 내용을 담은 책들이다.

 


1. 철부지 사회(이마)



 











과거 일본에서 사토리 세대란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앞서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다뤘던 책인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사토리 세대에 관해 자세하게 다뤘다. 철부지 사회란 책 역시 소재는 다르긴 하지만 같은 맥락의 책인 듯하다. 두 책 모두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인 일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철부지 사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도 경제 성장기,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는 희망을 동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길고 깊은 불황이 이어지며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라지자 현실에서 도피해 공상 세계에 빠져들거나 과거의 영광만을 회상하며 그 시절로 퇴행하는 철부지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며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다양한 임상 사례를 통해 철부지를 만들어 내는 원인은 개인과 사회가 공유하는 성장 거부심리라고 진단하고 그 증상과 대안을 제시한다.

 


2. 모방사회(교보문고)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명제가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획일화를 추구하고, 유행을 좇아, 남들과 동일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방사회란 책은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 지 탐구하는 책이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모방사회는 인간의 본능인 모방의 탄생과, 모방이 어떻게 집단행동을 만들어내는지 그 비밀을 다양한 각도에서 풀어보는 책이다. 특히 인류학자인 저자들은 인간문명 발전의 해답을 모방에서 찾기도 한다. 문명의 기원은 똑똑한 사람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두뇌에 각각 다른 지식들이 담겨 있고 저마다 커뮤니케이션과 모방을 통해서 연결된 다른 사람의 두뇌에 저장된 지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일수록 더 많은 지식을 저장할 수 있다는 원리다.

 

 

3. 세월호를 기록하다(미지북스)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세월호 사건 당시 우리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사회는 떠들어댔지만, 그 뒤에 남은 공허함은 아무것도 마무리된 것 없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최근 유족들의 삭발식을 보면서도 무덤덤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하기보다는 작은 무엇이라도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의 시작이 주목신간 추천 페이퍼 작성에서 드러나는 것일 테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세월호 재판의 법정 기록이며, 법정 기록을 바탕으로 세월호 사고를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또한 이 책은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사실 관계를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5개월간에 걸쳐 33차례 이루어진 세월호 공판을 방청하면서, 수만 쪽의 증언과 증거 자료, 피고인, 검사, 변호인 사이의 공방에서 드러난 것을 바탕으로 사고의 원인을 밝혔다.

 

르포르타주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사고 당시 배 안팎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해 독자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서술했다. 선수와 선미, 좌현과 우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승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조타실과 기관실의 선원들은 어쩌다 가장 먼저 탈출했으며, 대공(對空) 마이크가 장착된 123정의 해경 대원들은 왜 그토록 무능했는지가 이 책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4.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펜타그램)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회성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성은 공감이란 능력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이러한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연대해 사회를 진보로 이끌기보다는 강자생존의 배틀로얄과 같은 사회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회는 공감이라는 능력이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는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공감이란 능력을 되찾아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는 정신의학적 내용을 담았음에도 문학성을 인정받은 역작이다. 논픽션이라는 대중적인 형식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사람들도 쉽게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14회 고단샤 논픽션상 수상작. 520명이 사망, 항공사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일본항공(JAL) 추락 사고, 수학여행 중이던 수십 명의 일본 학생들이 희생당한 상하이 열차사고 등 수많은 대형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상실한 유족들의 슬픔과 극복 과정을 기록했다.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저자가 7년간에 걸쳐 수십 명에 이르는 유족들의 인터뷰와 상담 치료를 통해 길어 올린 슬픔의 치유학을 제시하고 있다. 남편을 잃은 아내, 아내를 떠나보낸 남편, 자식을 상실한 부모, 형제와 부모를 잃어버린 자녀, 가족을 모두 빼앗긴 노년이 겪는 절절한 슬픔과 그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살아남은 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5. 혐오와 수치심(민음사)

 













우리는 사회에서 수많은 혐오와 수치심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보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이러한 혐오와 수치심에 기반하고 있다. 약자에 관한 혐오 말이다. 혐오와 수치심이란 책이 지금의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혐오와 수치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의 법체계는 많은 부분이 혐오나 수치심과 같은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세계적인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에 따르면 감정도 신념의 집합체로서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이러한 혐오수치심만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감정은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타자를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즉 약자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 강자들만의 부당한 논리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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