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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ㅣ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평점 :
레몬 바질을 곁들여 가지로 감싸 오븐에 구운 모짜렐라 치즈. 이는 ‘엘본 더 테이블’의 메뉴 중 하나다. 엘본 더 테이블은 ‘허셰프’라는 캐릭터로 다방면에서 인기몰이 중인 최현석 셰프가 총괄 셰프로 있는 곳이다. 이곳의 메뉴 대부분이 비슷했다. 서울에 볼일이 있던 차에, 들러볼까 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길다’였다.
김치볶음밥, 짜장면, 후라이드 치킨 등 배달음식이 친숙한 나는, 고급 레스토랑의 기다란 메뉴에서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다. 뒤이어 메뉴가 꽤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메뉴를 본 내 감상은 여기서 끝난다.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는 이렇게 생겼네’하고 금방 넘길 것이다. 이런 나와 달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이를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계량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컴퓨터공학자다. 그는 음식의 언어에 주목한다. 내가 그냥 지나친 메뉴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잠재적인 언어학적 힌트(25쪽)”를 발견한다. 예컨대 음식을 묘사하는 글자 하나가 더 늘어날수록 해당 음식이 비싸진다는 통계 같은 것들 말이다.
‘구별 짓기’로 보는 음식의 언어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고들 말한다. 삶은 욕망이며,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등이 단적인 예다.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품지만, 무엇보다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나음’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이 크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별 짓기’라 명명했다. 자본가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이 상품은 타인과 구별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음식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도 구별 짓기를 욕망한다. 때문에 레스토랑의 메뉴에서부터 포테이토칩의 광고 문구까지, 욕망을 자극하는 언어가 난무한다. 요리와 포테이토칩을 공급하는 자본가는 언어를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손에 집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메뉴와 광고 문구에서 자본가의 의도를 도출해낸다.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주 고객으로 삼는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메뉴의 언어가 다르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강박적으로 재료의 출처를 밝히고, 우아하고 장황한 단어로 요리를 묘사한다. 또한 값싼 레스토랑에는 선택할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훨씬 많으며, 이에 반해 값비싼 레스토랑은 주방장 추천 메뉴가 더 많다.
값싼 칩: 우리 칩의 그 특별한 맛은 어디에서 올까? 그건 비밀이 아냐. 만든 방법 덕분이지!
값비싼 칩: 우리는 전적으로 천연 재료를 사용하며, 모든 내용물을 손으로 직접 추려 포장하고, 모든 준비 단계에서 칩을 테스트하여 품질과 맛을 보장한다.(214~215쪽)
포테이토칩 광고 문구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나타난다. 값싼 칩의 광고 문구에는 쉬운 단어와 간단한 문장이 쓰인다. 반면 값비싼 칩의 광고 문구는 정반대다. 카피라이터가 상위 계층에게는 복잡한 단어와 문장을 쓰는 편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자본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반영한다(220쪽)”는 사실을 말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발굴한 역사
"케첩, 시럽, 아스피크, 칠면조, 마카롱, 셔벗, 아락 같은 것들은 페르시아의 샤, 바그다드의 칼리프, 프로방스의 군주들, 뉴욕의 거부들이 먹던 고급 식사뿐 아니라 푸젠성 출신의 선원들, 이집트의 약사들, 멕시코의 수녀들, 포르투갈의 상인들, 시칠리아의 파스타 장인들, 애머스트의 시인들, 그리고 뉴욕의 제빵사들이 먹던 식사의 언어학적 화석이다."(346쪽)
우리는 오래된 지층에서 발굴된 화석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도 옛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저자는 음식에 관련된 ‘언어학적 화석’ 중에서 일부를 발굴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것은 피시앤드칩스, 케첩과 칵테일, 와인과 토스트, 칠면조 등이다. 지면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중에서 피시앤드칩스만 소개할까 한다.
저자는 우리가 영국의 대표요리라고 알고 있는 ‘피시앤드칩스’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가 도착한 곳은 6세기 중반의 사산조 페르시아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이다. 저자는 피시앤드칩스의 원형이 호스로 왕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시크바즈’라고 지목한다. 시크바즈는 새콤달콤한 쇠고기 스튜라고 한다. 피시앤드칩스는 분명 생선과 감자를 튀겨낸 음식인데 말이다.
저자는 독자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크바즈가 어떻게 피시앤드칩스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 추적한다. 호스로 왕의 시크바즈는 널리 퍼졌는데, 퍼지면서 각 지역에 맞게 전용(轉用)된다. 9세기 이슬람 선원은 시크바즈의 재료로 생선을 썼다. 이어 13세기 이집트에서는 생선을 밀가루에 묻혀 튀겼다. 14세기 지중해 항구에서는 생선 시크바즈의 이름을 에스카베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페루 정복 당시 에스카베체가 전해졌는데, 이것이 페루 전통 재료와 접목해 세비체가 탄생한다. 17~18세기 경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에 의해 에스카베체가 들어온다. 여기에다 19세기 중반 등장한 감자튀김이 추가돼 지금의 피시앤드칩스가 만들어졌다. 요컨대 피시앤드칩스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합종연횡으로 탄생된 것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교훈을 얻다
저자는 단지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피시앤드칩스의 변천사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을 끄집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라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98쪽)
문화에 있어 최고와 최초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으며,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혼란에서 어떤 창조적인 특성이 꽃피운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피시앤드칩스에 관한 것만 언급했지만 저자는 책에 언급된 다른 음식에서도 해당 음식과 관련된 교훈을 매번 추출한다.
<음식의 언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선언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저자는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인 ‘자비의 조리법’을 제안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적 습관과 요리 습관은 모든 부족과 민족에게 해당되는 습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와 문화는 깊은 공통성을, 우리를 인간이 되게끔 해주는 사회적·인지적 특징을 공유한다. 이런 사실들, 즉 차이에 대한 존중, 공유되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 등이 자비의 조리법에 들어가는 재료다. 그것이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347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