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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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그리고 기억의 저장소

[독서에세이] <행복의 건축>

 

 

언젠가 두 남자가 세계여행을 다니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두 남자는 당시 프랑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곳은 말 그대로 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풍스러움이 도시 곳곳에서 묻어났다. 하나하나의 건축물마다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나 다니는 길거리에 널려있었다.


내가 이렇게 유럽의 건축물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싫어해서다. 물론 지금의 건축물에 한해서다. 우리나라의 거리를 걷다보면 콘크리트로 된 창살이 달린 감옥을 빙빙 도는 기분이다. 콘크리트로 떡칠을 해놓은 상자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그곳은 단지 길일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과거를 얻을 수 있는 흔적은 이미 소멸해버리고 없었다.


건축물에는 누군가의 역사가 스며있다


국민학교를 갓 들어갔을 때였나. 가족끼리 서울에 간적이 있었다. 옛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나인데도 그 기억은 또렷하다. 지금은 KTX를 타고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더군다나 표가 없어 입석으로 열차를 탔던 터라 꽤나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 꽤 놀랐던 느낌이 있다. 어린 나에게 서울은 얼마나 큰 곳이었을까. 그때의 서울역은 어린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최근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어렸을 때의 그런 감흥은 없었다. 옛 서울역보다 커졌고 편리해진 지금의 서울역은 단지 기차역일 뿐 '나의 서울역'은 아니었다. 군인이었을 때 수없이 서울역을 드나들었어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역을 많이 오고갔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옛 서울역에 간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순간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옛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옛 서울역은 이제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하나의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쳐 옛 서울역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곳에 멈췄다. 순간 어릴 적 서울역에 왔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는 순간 마치 우리의 기억들을 눌러놓는 서진(書鎭)처럼 어떤 구조물을 세우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고 적었다. 옛 서울역은 내가 세운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옛 서울역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외에도 이 건축물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들을 들춰낼 것이다. 어떤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사를 보여줄 것이다. 옛 서울역이 1925년에 지어졌으니 지금 87년 동안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주변의 건축물은 무엇을 저장하고 있을까. 2003년에 신축된 서울역은 고작 10년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 아마 재건축할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나라 건축물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 건축물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무시하는 것 말이다.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것은 미적 취향이라기보다는 그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은 그것이 가진 기능을 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프랑스의 역사를 생각할 것이다.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며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릴 것이고, 에투알 개선문을 보며 나폴레옹 시대의 옛 영광을 느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옛 건축물을 보며 과거의 인물들을 생각할 것이다. 빛바랜 외벽과 문에 난 생채기 옛 사람들의 낙서 등은 건축물의 흠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며 그들이 남긴 메세지다. 건축물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새 것만을 찾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는 낡은 것이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원한다. 그것은 건축물을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은 높은 빌딩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거닐며 건축물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수십 일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는 건축물에서 뭘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에 둔감한 것은 아마 이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폭발물을 설치해 무너뜨리거나 중장비를 동원해 건축물 깨뜨리기 시작할 때 과거의 것들은 소멸한다. 그 건축물이 무너지는 광경은 오래전에 떠난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느낄지도 모르는, 기억 한 뭉텅이를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옛 기억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게 해줄 장소가 없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이제 내가 옛 서울역에서 멈춰 묻어둔 기억을 꺼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그것을 바랄 뿐이다.



책 정보


제목 - 행복의 건축

지은이 - 알랭 드 보통(프랑스)

옮긴이 - 정영목

출판사 - 청미래

출간일 - 2011년 8월 10일

원제 -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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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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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려면 꼭 서울에 가야 하나

[독서에세이] <변방을 찾아서> 




양산천 둔치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사람이 적어서다. 사람이 드물고 외진 곳은 편안하다. 사람이 빽빽이 들어찬 번화가는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답답함을 느낀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양산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생활하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요즘 이런 마음을 흔드는 일들이 많다.


최근 프레시안 협동조합이라는 곳에 가입했다. 프레시안은 일종의 인터넷 신문이다. 언론에 관심이 많고 협동조합이라는 것도 궁금해서 가입했다. 그런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은 다 서울이나 수도권에만 있으니 뭘 할 수가 없었다. 지방의 서러움이란, 소외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부산에 살면서도 변방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박탈감이 들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서울에서 몇 년간만 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서울, 단어만 들어도 뭔가 빽빽이 들어찬 느낌을 받는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집중되는 곳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도 있을 만큼 사람도 서울로 몰린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만큼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다 모여 있다. 내가 주로 좋아하는 것들이나 하고 싶은 것들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다 몰려 있으니 말이다. 부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


서울은 친구들과의 관계까지도 침투한다. 지금 부산 소재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런 나와는 달리 학부 때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들은 전부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를 원한다. 서울에 가야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취업준비를 하는 친구들도 부산에 있기 보다는 서울에 있는 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랐다. 그것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준비를 한다. 그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과 서울로 가야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은 가득 찼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그곳에 있다. 돈이 그곳에 있다. 일자리도 가장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곳에 몰려있다. 하고 싶은 것도 서울 외에는 간헐적이다. 박탈감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욕망으로 바뀐다. ‘서울에 가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서울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서울에 가야만 제대로 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가득 찬 것에서 오는 답답함 때문이다. 서울에 대해 생각하면 백제동월륜, 신라여신월(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백제는 보름달이라 이미 가득 차 앞으로 기울고, 신라는 초승달이라 앞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뜻이다. 가득 찼다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서울에 반해 부산은 아직 채울 것이 많은 도시라고 본다.


또한 서울과 같은 문화의 집결지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것은 천편일률적이 될까 두려워서다.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집결되는 곳이니 만큼 빠른 것은 당연하다. 서울의 빠름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흔들릴까 무섭다. 자칫 휩쓸려버리면 빠름을 쫓아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뱁새가 가랑이 찢어지듯 허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성은 사라지고 서울에 사는 그저 그런,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 될까 두렵다.


역동성의 중심지, 변방


부산은 비었고, 상대적으로 느린 도시다.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를 보면 중국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중국은 황하 유역을 중심부로 삼아 공간적 이동이 없다고 반론하지만 중국역사 역시 고대의 주, 진에서부터 금, , 청에 이르기까지 변방이 차례로 중심부를 장악한 역사였다. 


그러한 변방의 역동성이 주입되지 않았다면 중국 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신영복의 말처럼 부산도 변방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영복은 책에서 이런 말도 한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부산에 있으면서 서울의 아류로 존재하기는 싫다. 부산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서울 중심의 우리나라 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변방의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나 역시 부산에 살고 있기에 변방의 존재다. 변방의 역동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공이산의 성어와 같은 마음가짐이 있어야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기는 것처럼, 우직하게 문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나중에 큰 성과를 이루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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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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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만 살았던 나

[서평] 상처받지 않을 권리



평소에 '저거 갖고 싶다. 돈 모아서 사야지.'라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다. 뭘 그렇게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인지 좋은 물건만 보면 연신 그 말을 해댔다. 한참을 그러다가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난 속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 이상과 짐멜을 만났다. 그들은 돈이 가진 위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상은 돈이 있다면 자신이 활개 칠 수 있는 날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두려운 사실이 이상이라는 활시위를 떠나 날 꿰뚫었다. 짐멜은 나와 타자 사이에 돈이 침입해 직접 관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직접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돈이 없다면 나는 허영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사물도 얻을 수 없는 돈에 속박된 사람이었다. 돈이 신으로 여겨지다니, 무서웠다.


자본주의의 위력


다음엔 보들레르와 벤야민을 만났다. 그는 돈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돈이 있다면 세상은 매춘부처럼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도 돈이 있으면 보들레르처럼 느꼈다. 돈을 한 아름 안고 백화점(아케이드)를 누비는 상상은 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충분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나를 깨뜨렸다. 매춘부를 예로 들면서 자본주의의 무서움을 말했다. 


파리의 여인들이 산업자본이 만든 제품을 사기위해 매춘을 행하기 시작했고, 매춘으로 번 돈이 다시 산업자본의 손으로 들어가는 그 악순환을 보았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뒤에 떠오른 것은 능력 여하에 따라 결혼하는 현대 여성들이었다. 돈, 돈, 돈. 지금은 보들레르의 시대보다 더 매춘이 횡행하고 자본주의가 사랑을 완전히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았다. 나도 이런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니, 오싹했다.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를 만났을 때는 절정이었다. '아비투스'에 갇혀있다니. 문학과 사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면서 넓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나는 근대에 살면서 전근대적인 사람이었다. 자본주의로 인해 미래를 가능성의 장이라고 여기면서도 불합리한 이 사회의 미래가 여전히 같을 것이라고, 잠재성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로 가득 찬 내 마음에 구멍을 뚫었다. 


또한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는 나를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옳다. 나는 상류계층의 사람들을 우러르며 그들의 생활을 모방하려 애썼다. 그리고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멸시하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나?'라고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 상류계층의 사람들을 우러르고, 왜 유행하는 물건을 사고, 왜 돈을 갈구하는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놀이의 아비투스'를 내게 보여줬다. 허영의 미래가 아니라 함께 현재와 내재적 삶을 살아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아직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려면


마지막으로 나는 유하와 보드리야르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도 앞의 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느끼는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일 뿐이라고, 넌 이미 산업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자본주의 속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뭘 만들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한다. 전문화라는 허울좋은 명분아래 나는 사육되고 있었다. 산업자본을 이루는 하나의 부속품이었던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나에게 도구와 상품, 상징, 그리고 기호 중에 어떤 사물의 측면을 고를 것인지 물었다. 지금 나는 대부분이 그렇듯 어떤 것보다 기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상징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그곳에 손을 내밀지 못했다. 과연 모든 이에게 상징으로 내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자본주의에 매몰되어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만났던 이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그들은 내 생각을 열어 자본주의가 낸 상처를 보여줬다. 돈, 돈, 돈. 돈으로 내 생각은 난도질 당해있었다. 곳곳이 미래를 위한 금욕으로 멍들어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가 장밋빛 미래를 향해있었다. 순간 나는 멍해졌다. 투르니에의 로빈슨크루소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나도 그처럼 '놀이의 아비투스'를 가지고 싶어졌다. 이제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것이다. 반쪽짜리 소비의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책 정보


 제목 - 상처받지 않을 권리

 부제목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소

 지은이 - 강신주

 출판사 - 프로네시스(웅진)

 출간일 - 2009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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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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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연에게 빚을 갚아야할 때

[서평] 생태주의적 인문학 <녹색 고전>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자연에게 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견디기 힘든 추위도 자연에 있는 나무를 베어와 불을 때며 살아남았다. 이때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자연의 나무나 물, 불에 정령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상황은 급격하게 돌변했다. 인간이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기계와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 자연에게 종속됐던 신세를 벗어나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마구잡이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철로를 깔고 건물을 올리고 공장을 지었다. 자연을 개발하는 만큼 인간의 과학기술은 나날이 발전했고, 그 발전 속도만큼 자연도 더 빠르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었고, 이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연보호를 위한 여러 시민단체가 등장했고, 자연보호와 관련된 여러 책들도 출간되기 시작했다. 여러 국가들도 이런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는지 녹색 성장, 지속가능한 성장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생태주의라는 학문도 등장했다. 이처럼 자연보호는 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번에 소개할 <녹색 고전>이라는 책도 생태주의, 자연보호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생태주의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다


<녹색 고전>은 조금 특이한 책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시간에 공부했던 ‘청산별곡’이나 ‘바리공주’ 등의 한국 고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녹색 고전>은 이런 한국 고전들을 생태주의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하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 고전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었구나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십 년을 살면서 초가삼간 지어냈으니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 한 칸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이대로 둘러두고 보리라



이 시조는 조선시대 중기에 활약한 문신인 면앙정 송순이 지은 평시조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대로 해석한다면 이 시조는 말년에 낙향한 선비가 자연과 벗하며 노래한 시조라느니, 유학자가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격해 하는 유교적인 충의사상을 내면에 깔고 있다느니 하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녹색 고전>에서는 다르다. <녹색 고전>은 이 시조를 생태주의적으로 해석한다. 2절의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 한 칸을 맡겨두고’를 분석하면서, 2절이 “시적 화자 ‘나’가 자신이 방 한 칸을 쓰고 나머지 두 칸은 달과 바람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곧 달과 바람을 한식구로 삼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적 화자인 ‘나’는 한 가족의 가장이고 달과 바람은 그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생태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시적 화자인 ‘나’가 한 가족의 가장이고 달과 바람이 그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인간은 자연과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녹색 고전>은 현대인은 쉽게 발견해내지 못하는, 하지만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선인들에게는 당연한 생태주의적 관점을 되살려내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파생된 자연 파괴


실옹은 인간중심주의라는 눈곱을 떼고 좀 더 맑은 눈으로 다른 생물을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생태계라는 거대한 가족에 속한 소중한 구성원일 뿐 그 가장(家長)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생태계는 그만큼 건강한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188쪽)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 인간중심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만물 중에서 으뜸이라는 인식은 생태주의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만물이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만물에게 우열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연은 현재 이용 가능한 것일 뿐이다. 경제적인 논리가 만연한 지금, 공장에서는 정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오폐수를 몰래 버리는 등의 행동은 쉽게 일어난다.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환경보호는 뒷전이다.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다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쉽게 결정되는 일이다.


이는 지난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만성적인 경기불안으로 위기에 처한 토건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벌인 이 사업은 국민들의 세금 22조를 토건업자들의 배 속으로 집어넣어준 것뿐만 아니라 애먼 4대강까지 파괴하고 끝이 났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자연이 파괴당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다.  





오염된 언어를 순화하는 언어 생태학


인간의 입장에서 생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태도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언어학 분야를 ‘언어 생태학’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훼손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있듯이 언어도 사용하다 보면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언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순화하는 것이야말로 언어 생태학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두는 문제입니다.(95쪽)


<녹색 고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언어 생태학’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다른 생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권력이며, 잘못 사용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대항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마음대로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언어 생태학’이 조금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다면 하나의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잡초라 불리는 것들도 분명히 그들만의 특색과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그것이 경작물을 망친다고 해서 잡초라 불리는 것은 폭력이다. ‘언어 생태학’이 이런 오염된 언어를 더 많이 순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시 자연과 벗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무위자연의 세계는 바로 건강한 생태계가 지향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생태주의의 원친 가운데 “자연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은 아무런 인공을 보태지 않고 본디 상태 그대로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원칙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연은 손을 대면 댈수록 손해를 봅니다.(155-156쪽)


<녹색 고전>은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옛 선인들의 글을 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다시 발견해낸 책이다. 어쩌면 옛 선인들은 이미 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후대의 현대인들이 근대의 화려함에 취해 그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이 더 망가지기 전에 다시 자연과 벗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개인은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할 수 있다. <녹색 고전>과 같은 책을 읽어보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환경을 파괴하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각 국가의 정부다. 이제 정부도 말로만 ‘녹색 성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녹색 성장을 실천해야 한다. 더 이상 토건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이제 자연과 상생하는 성장이 반드시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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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밥상 - 건강.젊음.활력을 되찾는
방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남자의 밥상』 서평

 






음식으로도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이 있다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했다고 전해지는데그가 정말 이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하지만 이 말 자체는 꽤나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약으로 아무리 병을 고치려고 해도 매일 먹는 음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헛일이니 말이다.

 

인간은 음식을 통해서 스스로의 생명력을 얻는다그래서 음식은 중요하다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자신의 건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매일 먹는 밥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따라 건강도 달라진다책 남자의 밥상은 어떤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은지 알려주는 일종의 설명서다.

 

식물성 단백질의 힘

 

시금치케일브로콜리의 단백질 함량은 닭가슴살의 두 배가 넘고 비타민과 미네랄 함량은 1,000배 이상 높다그러나 당신은 시금치나 브로콜리의 광고를 듣거나 본 적이 있는가동물성 식품을 통해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는 이론은 식품산업이 만들어낸 허구이다.(33쪽)

 

치킨이나 피자와 같은 기름진 음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건강을 되찾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면주로 찾는 음식이 고구마나 닭가슴살이다그래서인지 다양한 닭가슴살을 파는 쇼핑몰이 넘처난다나도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퍽퍽한 닭가슴살을 씹어댄 적이 있다이런 닭가슴살이 그렇게 큰 효과가 없다니 깜짝 놀랐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코끼리 같은 동물이 풀만 먹고 그 몸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닭가슴살과 같은 동물성 단백질보다 식물성 단백질이 큰 효용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만약 이후에 다이어트를 할 일이 있다면 동물성 단백질보다는 시금치브로콜리와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 것 같다.

 




자연 그대로 먹기

 

현미는 씨앗이다씨앗은 완전한 생명체로 자랄 수 있는 모든 영양소를 갖추고 있다현미를 땅에 뿌리면 벼가 되어 자란다현미에는 생명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백미를 땅에 뿌리면 그대로 썩어 버린다백미는 이미 죽은 시체이기 때문이다백미는 모양만 현미와 비슷할 뿐 그 안에는 생명 에너지가 없다마치 비타민 음료가 오렌지와 다른 것과 같다.(134쪽)

 

자연은 인간에게 생명력을 섭취할 수 있는 여러 음식을 제공한다자연이 제공하는 음식은 열매의 형태이거나 아니면 그 전체를 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것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정제된 형태로 먹는다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제공하는 생명력 모두를 섭취할 수 없다.

 

포도를 껍질과 씨 째로 먹으라거나 고구마를 껍질 째 먹으라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자연의 모든 과실은 껍질과 씨에 가장 많은 영양소가 몰려 있다하지만 인간은 그 껍질을 제거하고 껍질 속의 달콤함만 취할 뿐이다자연이 주는 생명력을 다 취하기 위해서는 자연 그대로를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믿음을 버려라

 

승용차 엔진오토바이 브레이크화물차 창틀을 조립하여 자동차를 만든다면 이는 아무데도 갈 수 없는 고철덩어리일 뿐이다온갖 다른 성분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알약도 마찬가지이다이러한 알약은 우리로 하여금 화공약품을 과일과 채소로 착각하게 만드는 종합영양제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식탁마다 건강보조식품이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허약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증거가 클수록 맹목적이 된다알코올 중독자가 술이 건강에 좋다고 떠든다면 술주정이다그러나 저명한 의대 교수가 술이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판단은 쉽게 바뀐다,(66-67쪽)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건강보조식품이 자신들을 뽐내고 있다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건강보조식품을 찾는다는 증거일 것이다하지만 건강보조식품은 말 그대로 보조식품일 뿐이다건강을 지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건강의 본질은 바로 음식이다.

 

비타민제나 건강보조식품을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서 결코 건강은 나아지지 않는다자신의 몸에 맞는 음식을 잘 가려서 먹고적절한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광고하는 건강보조식품의 유혹에서 벗어나고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책 말미에 담긴 저자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이 지금처럼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댄다면 50대에 생을 마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있다성인병은 중년의 병이 아니다잘못 먹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질병이다인체는 당신이 먹은 불완전한 음식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를 증상과 질병이라는 신호로 당신에게 알려 줄 따름이다생명체의 목적은 당신에게 고통을 안기는 것이 아닌 생존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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