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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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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바질을 곁들여 가지로 감싸 오븐에 구운 모짜렐라 치즈. 이는 엘본 더 테이블의 메뉴 중 하나다. 엘본 더 테이블은 허셰프라는 캐릭터로 다방면에서 인기몰이 중인 최현석 셰프가 총괄 셰프로 있는 곳이다. 이곳의 메뉴 대부분이 비슷했다. 서울에 볼일이 있던 차에, 들러볼까 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길다였다.

 

김치볶음밥, 짜장면, 후라이드 치킨 등 배달음식이 친숙한 나는, 고급 레스토랑의 기다란 메뉴에서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다. 뒤이어 메뉴가 꽤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메뉴를 본 내 감상은 여기서 끝난다.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는 이렇게 생겼네하고 금방 넘길 것이다. 이런 나와 달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이를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계량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컴퓨터공학자다. 그는 음식의 언어에 주목한다. 내가 그냥 지나친 메뉴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잠재적인 언어학적 힌트(25)”를 발견한다. 예컨대 음식을 묘사하는 글자 하나가 더 늘어날수록 해당 음식이 비싸진다는 통계 같은 것들 말이다.

 

구별 짓기로 보는 음식의 언어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고들 말한다. 삶은 욕망이며,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등이 단적인 예다.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품지만, 무엇보다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나음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이 크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별 짓기라 명명했다. 자본가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이 상품은 타인과 구별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음식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도 구별 짓기를 욕망한다. 때문에 레스토랑의 메뉴에서부터 포테이토칩의 광고 문구까지, 욕망을 자극하는 언어가 난무한다. 요리와 포테이토칩을 공급하는 자본가는 언어를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손에 집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메뉴와 광고 문구에서 자본가의 의도를 도출해낸다.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주 고객으로 삼는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메뉴의 언어가 다르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강박적으로 재료의 출처를 밝히고, 우아하고 장황한 단어로 요리를 묘사한다. 또한 값싼 레스토랑에는 선택할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훨씬 많으며, 이에 반해 값비싼 레스토랑은 주방장 추천 메뉴가 더 많다.

 

값싼 칩: 우리 칩의 그 특별한 맛은 어디에서 올까? 그건 비밀이 아냐. 만든 방법 덕분이지!

 

값비싼 칩: 우리는 전적으로 천연 재료를 사용하며, 모든 내용물을 손으로 직접 추려 포장하고, 모든 준비 단계에서 칩을 테스트하여 품질과 맛을 보장한다.(214~215)

 

포테이토칩 광고 문구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나타난다. 값싼 칩의 광고 문구에는 쉬운 단어와 간단한 문장이 쓰인다. 반면 값비싼 칩의 광고 문구는 정반대다. 카피라이터가 상위 계층에게는 복잡한 단어와 문장을 쓰는 편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자본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반영한다(220)”는 사실을 말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발굴한 역사

 

"케첩, 시럽, 아스피크, 칠면조, 마카롱, 셔벗, 아락 같은 것들은 페르시아의 샤, 바그다드의 칼리프, 프로방스의 군주들, 뉴욕의 거부들이 먹던 고급 식사뿐 아니라 푸젠성 출신의 선원들, 이집트의 약사들, 멕시코의 수녀들, 포르투갈의 상인들, 시칠리아의 파스타 장인들, 애머스트의 시인들, 그리고 뉴욕의 제빵사들이 먹던 식사의 언어학적 화석이다."(346)

 

우리는 오래된 지층에서 발굴된 화석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도 옛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저자는 음식에 관련된 언어학적 화석중에서 일부를 발굴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것은 피시앤드칩스, 케첩과 칵테일, 와인과 토스트, 칠면조 등이다. 지면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중에서 피시앤드칩스만 소개할까 한다.

 

저자는 우리가 영국의 대표요리라고 알고 있는 피시앤드칩스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가 도착한 곳은 6세기 중반의 사산조 페르시아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이다. 저자는 피시앤드칩스의 원형이 호스로 왕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시크바즈라고 지목한다. 시크바즈는 새콤달콤한 쇠고기 스튜라고 한다. 피시앤드칩스는 분명 생선과 감자를 튀겨낸 음식인데 말이다.

 

저자는 독자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크바즈가 어떻게 피시앤드칩스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 추적한다. 호스로 왕의 시크바즈는 널리 퍼졌는데, 퍼지면서 각 지역에 맞게 전용(轉用)된다. 9세기 이슬람 선원은 시크바즈의 재료로 생선을 썼다. 이어 13세기 이집트에서는 생선을 밀가루에 묻혀 튀겼다. 14세기 지중해 항구에서는 생선 시크바즈의 이름을 에스카베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페루 정복 당시 에스카베체가 전해졌는데, 이것이 페루 전통 재료와 접목해 세비체가 탄생한다. 17~18세기 경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에 의해 에스카베체가 들어온다. 여기에다 19세기 중반 등장한 감자튀김이 추가돼 지금의 피시앤드칩스가 만들어졌다. 요컨대 피시앤드칩스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합종연횡으로 탄생된 것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교훈을 얻다

 

저자는 단지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피시앤드칩스의 변천사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을 끄집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라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98)

 

문화에 있어 최고와 최초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으며,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혼란에서 어떤 창조적인 특성이 꽃피운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피시앤드칩스에 관한 것만 언급했지만 저자는 책에 언급된 다른 음식에서도 해당 음식과 관련된 교훈을 매번 추출한다.

 

<음식의 언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선언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저자는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인 자비의 조리법을 제안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적 습관과 요리 습관은 모든 부족과 민족에게 해당되는 습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와 문화는 깊은 공통성을, 우리를 인간이 되게끔 해주는 사회적·인지적 특징을 공유한다. 이런 사실들, 즉 차이에 대한 존중, 공유되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 등이 자비의 조리법에 들어가는 재료다. 그것이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34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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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생활의 발견 시리즈 2
정진아 지음, 정인선 그림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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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익숙함으로 가득하다일상 속에 포함된 공간인물상황 등은 뻔하다한 번씩 색다른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뿐이다떠돌이로 살지 않는 이상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일상이다어쩌면 떠돌이 생활도 일상으로 고착되어버릴지도 모른다그만큼 일상의 중력은 강력하다하지만 강력한 중력만큼 벗어나려는 마음도 비례한다일종의 관성이랄까.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의 저자도 일상에 질려버렸을 것이다강하게 짓누르는 일상의 중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그래서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를 통해 호주로 훌쩍 떠난다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수중에 돈이 없는 저자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또 다른 일상에 불과했다이 책은 저자의 일상탈출기이자 일상체험기이다.

 

환상과 현실 사이

 

 

낯섦은 환상을 동반한다낯섦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우리는 그 구멍을 환상이라는 것으로 메운다다른 나라의 생활도 마찬가지다최근 국외여행이 보편화됐다고는 하지만여행은 여행일 뿐 직접 그곳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대부분은 일상을 여행으로 착각한다때문에 막상 일상이 닥쳐왔을 때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장기 여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22)”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앞으로 겪을 노동은 호주를 여행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했다누구나 그렇듯이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은 일터에서 겪을 호주인과의 아름다운 교류 또는 호주에서 벌어질 환상적인 여행만이 존재했다.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상당히 컸다몸을 누일 숙소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까지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것이 없었다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바로 자신을 비롯한 속칭 워킹이라 불리는 이들이 호주 사회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킹이 입국해서 일자리를 구하고 일을 하고 시급을 받는 모든 과정은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일을 시작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가게 주인들은 사람을 고용했다는 신고를 세무서에 하지도 않는다. (중략최저임금 절반의 시급규정보다 훨씬 긴 노동시간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없는 환경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이런 관행들은 직접 일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47~48)”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과 함께 받은 세금 신고 번호를 직접 사용할 일이 없음(47)”을 목격하면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워킹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물론 순탄하지는 않다차이나타운주스 가게햄버거 집쇼핑센터의 초밥 가게 등을 전전한다하지만 단순노동은 사람을 쉽게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켜버린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보트가 떠다니고 하늘은 늘 청명하게 높은 시드니에서 밤새 일하고 돌아오는 귀가 길에 하루 종일 손이 물에 닿아 불어버린 손톱(116)”을 봐야하는 괴리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저자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농장으로 떠난다하지만 농장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워킹이란 존재는 호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해먹기 쉬운 먹잇감이었다워킹을 싼값에 부려먹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일은 빈번하다호주에 사는 교민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가장 등쳐 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한 세상이다책에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자리를 알선하면서 높은 수수료와 체재비를 요구하는 것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워킹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경찰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한국 사람들이나경찰에 들킬까 봐 숙소로 돌아가 버린 네팔 사람들이나경찰들 앞에서 우리는 다를 바가 없었다우리는 그저 최저임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하루 종일 일하면 그만인 사람들이었다. (중략경찰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호주가 우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사람들을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219)”

 

워킹홀리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제도는 호주의 이주 노동자 충원 제도의 다른 이름이다이것이 현실이다저자는 이 사실을 목격했을 때 호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접는다호주나 한국이나서로 다를 것은 없었다차라리국민과 외국인 사이에 끼인 워킹이라는 존재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좀 더 나은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워킹홀리데이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씌어 있는 미지의 세계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한 야생의 세계그러면서도 서양의 문물을 간직한 선진적 세계(228)”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워킹 생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환상은 현실을 살아내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꾼다하지만 꿈만으로는 부족하다또 영어만을 바라보고 1년 이상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차라리 저자가 워킹 경험 속에서 맞닥뜨린 보이지 않는 것(231)”을 직면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식당 설거지 담당새벽의 건물 청소부농장 노동자 등등은폐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인 것처럼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하지만 현실은 참혹하고희망은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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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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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노동을 신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신성한가.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동은 신성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함만큼 대우받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는, 저 높은 곳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정말 신성한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노동에 붙는 수식어를 살펴보면 신성한보다는 고된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은 고된 것이다. 누구도 노동을 신성시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 생활이 보장된다면 때려 칠 사람이 부지기수다.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를 부러워하며, 고된 노동을 일종의 굴레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타인의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신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속사정 또는 유명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려 있다. 대중의 관심이 부재한 자리에 울리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외침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모두가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책이 최근 나왔다. 바로 박점규 작가의 <노동여지도>. <노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조선 땅을 일일이 밟으며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처럼, 저자가 대한민국 땅을 밟으며 전국의 노동현장을 그려낸 결과물이다. 이 책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는 이들에게 믿음직한 동반자가 될 만하다.

 

노동, 삶의 다른 이름

 

노동은 속칭 금수저로 불리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네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노동은 삶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을 족쇄로 여기고, 언젠가는 결코 끊어내고 말리라 다짐한다.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은 내 자식은 이 족쇄를 끊어주리라는 믿음의 징후일 것이다.

 

하지만 2015년인 지금 노동의 족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끊겼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28개 도시 속 노동현장으로 이끈다.

 

수원, 울산, 평택 등 노동문제와 관련해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탓에 우리가 익숙한 곳에서부터 광주, 경주 등 노동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전국의 노동현장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를 통해 우리 삶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저자가 전국의 노동현장을 종횡무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취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세상에 내놓은 노동여지도의 주제는 비정규직 문제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가 처한 노동문제 중 가장 해결하기 힘든 난제다. 같은 일을 함에도 임금과 복지에 차등이 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간극을 만들고, 분열에 이르게 한다.

 

"2013년 기아자동차와 정규직노조가 장기근속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데 합의하자 사내하청 우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김 부장은 시너를 뿌리고 분신으로 항거했다. 세 딸아이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친 날은 우연히도 세월호 침몰일인 416일이었다."(139)

 

공장 앞 선술집에 모인 비정규직 대의원들이 분노를 쏟아낸다. 정규직과 하나의 노조를 이루다보니 비정규직이 정규직노조에 기대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동료가 분신했는데도 가만히 있고,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알바노동자들을 외면한다고 대의원들은 열 받아 한다. 최근 사내하청 130명을 뽑았는데 정규직 조합원들이 사내하청에라도 자녀를 넣으려고 했단다. 그런데 비정규직들이 우리 자녀도 해달라고 했단다. 정규직노조의 나쁜 점만 배우고 있다고 한탄한다.“(140~141)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바로 노동현장의 모습이다. 자신의 안위에 천착하다보면 자신이 이러한 아귀다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노동여지도>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나와 내 가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투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노동현실 전반을 조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객관화 하지 않으면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아귀다툼을 자신만의 콜로세움에서 낄낄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자본가의 모습을 올려다봐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올려다볼 수 없다. 눈앞에 칼을 휘두르는 적이 있는데 어느 누가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연대, 상투적인 만큼 진리에 가까운 방법

 

대공장 정규직은 부잣집 마름, 중소기업 노동자는 가난한 집 머슴이에요. 대공장 정규직이 이제 신분이 되어버렸죠. 완성차, 부품사 정규직 노조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합니다.”(124)

 

모두가 싸움을 멈추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쉽지 않은 일이다. 차등이 실존하는 사회에서 연대를 실천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이다. 희생이란 없는 곳에서보다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대의 시작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품는 것에서부터이지 않을까.

 

혁명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것도,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두 누군가의 희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노동자인 사회에서, 1퍼센트의 자본가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실을 차지하고 있는 비참한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천민을 만든다는 것은 때린 데 또 때리는 격이 아닌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건 할 소리를 하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게 됐어요. 우리가 뭉쳐서 싸웠기 때문이죠.”(52)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에게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203~204)

 

“‘사축이라는 말을 아세요? ‘회사의 가축이라고 일본의 직장인들이 스스로 비하해서 하는 말이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제는 좀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383)

 

저자가 <노동여지도>에 담아낸 목소리는 모두 인간답게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저자가 밟은 노동현장에서는 그 암울함 속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연대의 성과들이 있었다. 연대하면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19604.19혁명에서부터 19876월 항쟁까지. 전례는 충분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선언은 더 이상 빨갱이나 종북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선언으로 전유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노동자여, 연대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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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학생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종북도서’ 딱지를 붙이는 촌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흔(書痕) 2015-07-14 10:39   좋아요 0 | URL
요즘엔 `종북도서`가 안 되니 좌편향도서니 뭐니 딱지를 붙이더라구요. 정말 촌극입니다. 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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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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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중략)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3~134)

 

인류의 진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과거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 등에서부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나 동성애 합법화 운동 등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불행할 뿐이다.

 

생존하기가 한 해의 목표인 시대다. 갈수록 삶은 팍팍해진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지만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은 희망이다. 하지만 도처는 절망으로 점철돼 있다. 미래에도 삶이 더 낫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희망 대신 행복을 찾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절망의 바다에서 더 나은 삶이라는 희망찾기를 멈추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을 다룬 연구서다. 저자는 독자에게 불행 없음이 어떻게 행복 추구로 귀결되는지 보여준다.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사회, 행복한 젊은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연구는 일본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유사한 것은 공공연하다. 이러한 한일 간의 유사성은 일본 사회현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근거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34)

 

저자는 일본 청년이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회는 절망이 가득한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은 현재가 불행 혹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 투쟁해왔다. 방법은 다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일 수도, 정치적인 혁명일 수도 있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목적은 같았다. 더 나은 삶이라는 지향은 인류의 진보로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청년은 진보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련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일 청년의 삶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생존의 문제에서 타인의 삶이란 논외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계발을 하거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게 남는 장사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해 보인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더 나은 삶이라 믿는다.

 

경험의 부재, 행복의 맹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298~299)

 

혹자는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 난무하는, 진보성 짙은 글의 향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조차도 같은 처지다. 행동하지 않는 진보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청년은 더 이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덧없는 희망을 좇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행복하다고 믿는것이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인지부조화의 길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기성세대는 아마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은 분명 다르다. 경험의 차이다. 현재 기성세대는 인류의 진보를 목격한 세대다. 그들은 청년 시절 진보의 흐름에 참여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절망을 목격한 것이다.

 

진보가 불가능한 시대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능동적으로 현재에 순응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행복할 지점을 찾아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보다 더한 종족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절망적인 사회, 불행한 청년

 

이제껏 일본은 경제 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307)

 

사실 일본의 사례는 양반이다. 최저시급도 높을뿐더러 여러 복지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일본 청년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 청년은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 청년은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나라 청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행은 잠시뿐이라 믿으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끝은 정해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해진 끝으로 달려갈 뿐이다. 행복한 청년을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깨뜨려야 모두가 살 수 있다. 8년 전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어라고 외친 것처럼, 이제 정말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청년은 생존할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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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7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이스북 접속을 줄인 이유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짧게 토해내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서흔님 말씀대로 알라딘 블로그에 쓴 글, 그리고 지금 제가 남기는 댓글 또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페이스북에 비하면 알라딘은 글을 읽거나 댓글을 주고 받으면서 배울 게 많고, 반성할 기회도 많다고 생각해요.

서흔(書痕) 2015-06-17 11:38   좋아요 0 | URL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소비되는 글보다는 알라딘의 글이 훨씬 나은 건 명백하죠. 댓글로 양질의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좋구요. cyrus님 같은 분이 계서서 더 좋은 것일 수도. ㅎㅎ

Soul_Play 2015-06-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서흔(書痕) 2015-06-17 11:3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벌써 마지막 주목신간 페이퍼 작성입니다. 시간은 참 빠릅니다. 시간의 빠름에 비해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부지런이 글을 써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텐데... 한심할 뿐입니다. 


1. 돌베개/ 돌베개




 








장준하 선생의 묘를 이장하면서 드러난 두개골로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때서야 장준하 선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게 됐다. 일제에 항거했던 광복군이자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투사였다. 귀감이 되고도 남을 위인임에도 그동안 들어보지도 못했는지 의문이다. 올해 5월 장준하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수기 <돌베개>가 다시 나왔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2. 면복/ 문학동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왕은 평소 곤룡포를 입고 다닌다. 하지만 즉위식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등장한다. 면복이 대표적이다. 옷은 몸을 가리거나 추위를 막는 것처럼 기능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특정 의례나 행사에서 옷은, 기능적인 것을 넘어 수많은 상징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인다. <면복>은 면복이 품은 여러 상징을 풀어낸 책이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키워드 한국문화시리즈의 열네번째 책 면복군주의 덕목을 옷으로 표현하다는 상고시대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간 군주 최고(最高) 예복으로 군림해온 면복의 구성과 상징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세계관 및 가치관을 소개한다.

 

 

3. 예로 지은 경복궁/ 인물과사상사



 










경복궁은 조선 최고의 궁궐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얼굴마담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을 어떻게 지었는지, 경복궁의 건축사적 위치는 어디쯤인지, 경복궁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예로 지은 경복궁>라는 관점으로 경복궁의 탄생 과정과 건축 미학을 탐구한 책이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예로 지은 경복궁>은 경복궁의 탄생 과정과 건축 미학을 연구한 최초의 연구서다. 그 방향과 기준은 를 토대로 동아시아의 주요 사상 가치로 삼았다. 이런 접근 방법은 경복궁의 탄생을 생각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경복궁의 설계자는 성리학자인 정도전이라는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라는 사상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대신 엄청난 사상적 배경이 있다. 이것을 정밀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철학과 정치·사회를 이끌었던 주요 사상 가치를 심미 형식을 통해 조형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 경복궁이다.

 

  

4.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김영사



 









나는 건축에 관심이 많다. 특히 유럽 건축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 새것만을 탐하는 우리나라 건축에 염증을 느껴서다. 우리나라 현대 건축은 온고지신 정신이 없다. 전통에 뿌리를 두지 않아 부실하다. 크고 높기만 하면 장땡이다. 아마 건축이 건설에 매몰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건축은 멋이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건축도 마찬가지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이 그 멋을 알려주리라 생각한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동아시아 삼국의 건축을 섬세하게 비교하고 그 아름다움을 살펴보는 미학 에세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을 동아시아의 범주 안에서 가능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특히 우리 건축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중국 건축과의 공통점과 차이를 찾아보고, 또한 우리와 비슷한 전개 과정을 밟아온 일본 건축과 비교해보면서 한국 건축의 핵심을 찾아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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