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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ㅣ 생활의 발견 시리즈 2
정진아 지음, 정인선 그림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평점 :
일상은 익숙함으로 가득하다. 일상 속에 포함된 공간, 인물, 상황 등은 뻔하다. 한 번씩 색다른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뿐이다. 떠돌이로 살지 않는 이상,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쩌면 떠돌이 생활도 일상으로 고착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상의 중력은 강력하다. 하지만 강력한 중력만큼 벗어나려는 마음도 비례한다. 일종의 관성이랄까.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의 저자도 일상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강하게 짓누르는 일상의 중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를 통해 호주로 훌쩍 떠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수중에 돈이 없는 저자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또 다른 일상에 불과했다. 이 책은 저자의 ‘일상탈출기’이자 ‘일상체험기’이다.
환상과 현실 사이
낯섦은 환상을 동반한다. 낯섦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우리는 그 구멍을 환상이라는 것으로 메운다. 다른 나라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외여행이 보편화됐다고는 하지만, 여행은 여행일 뿐 직접 그곳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대부분은 일상을 여행으로 착각한다. 때문에 막상 일상이 닥쳐왔을 때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장기 ‘여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22쪽)”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앞으로 겪을 노동은 호주를 여행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은 일터에서 겪을 호주인과의 아름다운 교류 또는 호주에서 벌어질 환상적인 여행만이 존재했다.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상당히 컸다. 몸을 누일 숙소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까지.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을 비롯한 속칭 ‘워킹’이라 불리는 이들이 호주 사회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킹이 입국해서 일자리를 구하고 일을 하고 시급을 받는 모든 과정은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일을 시작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가게 주인들은 사람을 고용했다는 신고를 세무서에 하지도 않는다. (중략) 최저임금 절반의 시급, 규정보다 훨씬 긴 노동시간,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없는 환경,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이런 관행들은 직접 일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47~48쪽)”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과 함께 받은 세금 신고 번호를 직접 사용할 일이 없음(47쪽)”을 목격하면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워킹’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순탄하지는 않다. 차이나타운, 주스 가게, 햄버거 집, 쇼핑센터의 초밥 가게 등을 전전한다. 하지만 단순노동은 사람을 쉽게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켜버린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보트가 떠다니고 하늘은 늘 청명하게 높은 시드니”에서 “밤새 일하고 돌아오는 귀가 길에 하루 종일 손이 물에 닿아 불어버린 손톱(116쪽)”을 봐야하는 괴리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저자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농장으로 떠난다. 하지만 농장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워킹이란 존재는 호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해먹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워킹을 싼값에 부려먹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일은 빈번하다. 호주에 사는 교민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가장 등쳐 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한 세상이다. 책에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자리를 알선하면서 높은 수수료와 체재비를 요구하는 것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워킹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경찰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한국 사람들이나, 경찰에 들킬까 봐 숙소로 돌아가 버린 네팔 사람들이나, 경찰들 앞에서 우리는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최저임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하루 종일 일하면 그만인 사람들이었다. (중략) 경찰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호주가 우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사람들을,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219쪽)”
워킹홀리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제도는 ‘호주의 이주 노동자 충원 제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목격했을 때 호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접는다. 호주나 한국이나. 서로 다를 것은 없었다. 차라리, 국민과 외국인 사이에 끼인 워킹이라는 존재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좀 더 나은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워킹홀리데이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씌어 있는 “미지의 세계, 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한 야생의 세계, 그러면서도 서양의 문물을 간직한 선진적 세계(228쪽)”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워킹 생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환상은 현실을 살아내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꾼다. 하지만 꿈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영어만을 바라보고 1년 이상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저자가 워킹 경험 속에서 맞닥뜨린 “보이지 않는 것(231쪽)”을 직면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식당 설거지 담당, 새벽의 건물 청소부, 농장 노동자 등등…. 은폐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인 것처럼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참혹하고, 희망은 요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