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반역자
존 르 카레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꼬장꼬장한 영감님의 소설은 칠흙 같은 어둠에서 시작하곤 한다. 잘 읽히지 않는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뒤섞인 시간과 단절된 문장들이 마치 독자와 밀당을 하듯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도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인내심을 가지고 나아간다. 어느 순간인가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한국 나이로 여든을 훌쩍 넘긴 이 첩보 스릴러 거장이 만들어낸 세계는 그제야 어렴풋이 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 그 세계를 조망하기만 한다면 더는 억지로 페이지를 넘길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고? 그저 본능이 저절로 넘겨줄 테니까. 마치 미끄러운 비탈길을 내려가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담박에 읽힌다.


이 맛. 바로 이 맛이다. 이 맛에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장님처럼 나아가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됐을 때 그 쾌감! 뒤늦게 밝혀지는 진실에 대한 분노는 비로소 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리들의 반역자』는 내가 고작 두 번째로 접한 존 르 카레의 작품이지만, 영감님의 스타일을 대충 알 것도 같다. 『민감한 진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성미가 급한 독자와는 맞지 않는 작가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불친절하긴 해도 품을 팔 만한 가치는 확실히 보장하는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능한 정부와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국가 요원’이라는 설정은 그에게 가장 자신 있는 소재일 것이다.(존 르 카레는 실제 MI6 요원 출신이며 ‘킴 필비 사건’의 피해자이다.) 냉전 체제는 이미 오래전 종결됐지만, 자본화된 전쟁이 가진 위협은 날로 커져만 가는 시대에서 우리는 안전해 ‘보이는’ 세계를 살고 있을 뿐이다. 『민감한 진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우리들의 반역자』(순서상 먼저 출간된 작품이다.)에서 역시 그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한다. 그 안에는 경험에서만 엿볼 수 있는 일종의 리얼리즘이 있기에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의 묵직함이 느껴진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의 소설들, 나아가 이 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재미면 재미, 메시지면 메시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더 쉽게 말해 최소한 후회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올해 중순쯤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다고 하니 앞서 읽고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