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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신간평가단 9월 주목신간> 

  어려운 학문을 하면서 복잡하게 살았던 사람의 삶을 쉽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파인만의 삶을 만화로 그려낸다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쉽게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속된 말로 ‘문돌이’, 그것도 문돌이 중에서도 문돌이라는 철학도인 내게는 그의 물리학 강의가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책을 쓴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만화]라. 어떤 느낌일지, 게다가 이번 신간평가단을 진행하면서 가장 처음 선정된 과학 분야의 도서인지라 더욱 흥미로운 눈길로 살펴보았다.

  파인만의 삶을 만화로 그려내는 데는, 내 생각에 풀어야 할 숙제는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그의 (유쾌했다고 널리 알려진) 복잡다단한 삶을 간명하게 잘 풀어낼 것, 그리고 둘째는 그가 과학분야에서 정확하게 어떤 업적을 남긴 것인지 정확하게 표현할 것. 이 책은 과학 분야로 분류되는 책이긴 하지만 결국 과학이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 과학자의 삶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둘째 문제는 일단 뒷전으로 미뤄둔 듯 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그가 강의하는 것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여러 대사들은 다소 전문적이며, 이 부분을 내가 알아듣기에는 조금 버거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그가 직접 내뱉은 말에서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을 바탕으로 각색된 삶의 주요한 사건들이 그려져있다. 미국식 카툰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다시피 그림을 뜯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이하게 그의 삶을 그려낸 듯 하다.

  이런 만화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다면, 아마도 만화가 아니라 글로 그의 삶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림의 함축성보다는 글의 세밀함이 삶에 대한 분석과 감상으로는 더욱 알맞을 매체일테니 말이다. 이 만화의 뒤에 제시된 여러 참고문헌들은, 자신들이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이 만화를 읽은 뒤에 또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괜찮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확실히 그의 삶에는 특이한 부분들이 많았다. 주로 내 눈에 띄는 부분들은 그가 사회적 상황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지, 그리고 과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 어떤 계기보다도, 주목받은 천재과학자이지만 동시에 그 유능함 때문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개입하기도 했던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연 그 만화에 기술된 것처럼, 단순히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개발해야 하고 원폭의 강대함을 독일이 선취해서는 안된다는 계산에서 그 연구가 시행되었던 것일까? 또 적어도 파인만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것은 그가 직접 쓴 글과 여러 전기적 자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대체로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에서의 이 부분은 간단히 생략해버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또 다르게 주목한 부분은,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시선이었다. 그는 나이가 한참 들기 전까지는 분명하게 과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 흥미도 없었으며 그것들에 대해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 이 만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내게는 철학을 오컬트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장면이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그 같은 자연과학자가 이런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과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리된 뒤에야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그 예술로 자연과학에 필요한 여러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고안하거나 기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자연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아마도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이 책에서 단점을 꼽는다면, 각 연도 별로 많은 사건들을 기술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옮겨놓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것이라고 여겨질 것에 대한 주목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꼼꼼함이 약간은 만화 자체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해마다 일어났던 일은, 이렇게 만화에서 다루지 않더라도 책에서도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연구방향 또는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국면들을 그려내는 것으로도 그의 삶에 대해 흥미를 일으키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만화보다는 책을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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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3장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 요약.> 

벌린의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문제

  언어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한 로티는, 그 다음으로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에게 확고한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인데,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에서 그가 논하려는 내용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즉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이다.

  로티가 자신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제기한 이사야 벌린의 자유주의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과는 구별된다. 그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각각 선택한 신념들이 절대적-보편적-필연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내용이 들어간 근대적 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물론, 인간에게는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벌린의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로티가 전개한 논증에 따르면 개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벌린이나 슘페터의 말처럼 ‘신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토대’를 자신의 행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샌들은 벌린의 자유주의적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만약 개인의 신념에 확고한 토대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그 신념을 굳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과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은 서로 모순인데, 만약 합리적인 것이 더욱 근본적이라면 자유는 단지 합리적으로 선택가능한 사항으로서의 가치 정도밖에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자유가 ‘자유롭게’ 포기할 수 있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유’를 공동체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 또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대립시키는 샌들의 구도 자체가 전형적인 근대인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상대성을 판단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 상대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정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샌들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정초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로티가 보기에 인간은 오로지 역사적인 존재일 뿐이며, 역사성을 벗어나 합리적으로 신념들을 선택할 능력은 없다.

  또한 그는 데이비슨의 견해를 빌어서,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쓰는 행위, 즉 은유(메타포)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절대적-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합리성조차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각 시대의 합리성조차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샌들의 질문은 벌린이 제기하는 현대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 또는 비판일 수 없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변화를 불러오는 새로운 은유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념이다. 절대적, 보편적 정초를 요청하는 경우 그 정초와 어울리지 않는 특정한 은유들은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로티 식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그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는 매우 세련되고 신선한 은유였다. 그 은유의 확산은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공동체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결합된 상태로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들이 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은유들을 상대로 절대성과 보편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절대적-보편적 정초에 대한 열망, 즉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적 욕구와는 결별해야한다. 그 자리에 시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은유의 자유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한다. 자유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 행위는, 샌들의 반박이 그렇듯 다른 것을 철학적 기초로 삼는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에 의해 선택가능한 이념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며, 그 가치를 상실한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특징 자체를 퇴색시키게 된다.

  이런 재서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효과는 중립성의 포기이다. 역사적 인간은 결코 모든 신념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어떤 은유에 대한 선택은 곧 어떤 신념에 대한 선택인데, 인간은 결코 어떤 은유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은 중립에서 선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유들의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은유는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라지거나 또는 확장되는데, 그 불투명성이야 말로 진짜 자유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 로티의 생각이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문제

  그렇다면 이전에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또 지금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것이 로티의 두 번째 질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잘 알려져있듯이 이 관계에 대해 연구한 고전이다. 인간들은 계몽주의의 핵심인 비판과 반성을 통해 인간에게서 (도구적) 합리성을 끄집어내고 인간의 본성을 이념적으로 정초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한 비판과 반성에서 비롯된 ‘철저한 세속화’로 인해 자기 스스로 세운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함한 어떠한 신념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뿌리를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 기초를 잃은 자유주의 또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원리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판과 반성의 원리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서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로티는 그 비판과 반성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며, 자유주의가 계몽주의와 동시에 탄생했다고 해서 이 둘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그들이 그것을 비판하려고 시도한 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실제로 그 두 은유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이 분석한 그 결과들이 등장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와 긴밀한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듀이, 오크쇼트, 롤즈 등 현재에도 여전히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연결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라는 철학적 정초와 합리성에 기초한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자유주의적 상황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내용들을 인간들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보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어떤 공동체의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오로지 다른 공동체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뿐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치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놓는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자유주의가 갖추어야 할 진짜 모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정초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 그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보편성이나 절대성을 띌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이론의 구성은 다양한 규범과 덕목들이 갈등하는 가운데, 특정한 것들을 더욱 명료하게 말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은 이론에 대해 우선된다. 이론은 실천의 유형화, 일반화, 체계화이며, 그 요점을 밝히는 도구로 한정된다. 오크쇼트는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유형을 우니버시타스universitas에서 소시에타스societas로 변화하는 것, 즉 통합적 사회에서 상호존중이라는 가장 약한 약속만으로 결합된 연대체로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셀라즈가 도덕성이라는 말을 ‘우리-의식’으로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가치는 엄밀하게 갖춰진 형식에 들어맞는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존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는 도덕에 선행한다.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부여되며, 또한 형성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견해에서 역사성을 배제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합리성이 배제된 자유주의에서는 역사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 역사성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찾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며, 언제나 발생하는 갈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관계의 규정은 그 역사성에 의해 언제나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그리고 자유주의가 공동체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인 시인이 그 사회의 영웅이 된다. 그는 새로운 은유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끊임없이 모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은유의 근거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의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은유의 근원이 그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창조되었던 은유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어느 정도의 폭력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영웅인 혁명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푸코, 하버마스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이러한 설명에 따라,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은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로티는 (자신의 관점에서) 아이러니스트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푸코와, 자유주의자이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아닌 하버마스를 비교한다.

  로티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니체에 대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견해를 비교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적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아가 우연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속박하는가를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푸코의 중요한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하버마스는, 니체가 개인의 내면적 정초로부터 실천의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주의적 공동체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는 생각까지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니체의 입장과 자유주의는 모순된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구성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니체의 입장을 반박하고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하지만 푸코는, 그런 상상력과 의지는 이미 개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화의 과정 동안에 충분한 제한을 받고 따라서 개인은 그 사회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 이상의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근대사회는 전근대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이 방법은 대단히 정교하고 풍부해서 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한 행동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주체들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히 창조적이며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어버리는데, 푸코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험한 사회이다.

  로티는 먼저 푸코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가장 해서는 안될 모습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적어놓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가장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지향해서는 안될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은유를 고안해낸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과제는 푸코가 말한 형태의 사회를 극복할 대안을 내놓는 것이며,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로티 스스로가 정초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이 그 사회에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많이 포진되어있는가에 달려있다.

  게다가 푸코의 저서에 대한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그가 여전히 ‘내면적 인간’과 그의 자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사회화 이론은 ‘내면적 인간’이 일그러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것은 현재 사회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변화시킬 혁명 정국 내지는 총체적 변화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거치면 이 자유가 온전히 드러나는 사회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의 사회화 이론 내에서, 그리고 그의 철학 속에서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인간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총체적 혁명에 대한 이러한 동경을 거부하고, 공공 영역에서의 편견과 지배적 구조가 없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역사적 변화(와 진보)가 가능하리라고 주장한다. 그가 의사소통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푸코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의 출현과 그에 비례한 총체적 혁명에 대한 혁명가적 전문가들의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전문가집단의 관료화로 인한 ‘합리적’ 관료지배현상이다. 이러한 우려는 로티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는 하버마스의 경우 총체적 혁명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데 비해서, 로티의 모델인 ‘시인’의 인간형은 이전의 역사적 전통에서 도약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이 두 입장은 대립한다. 또한 의사소통은 서로가 이해에 수렴하는 모델이지만, 시인은 그 사회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방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는 발산적 모델이다.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와 로티는 다시 충돌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자신과 하버마스의 차이가 철학적인 차이일 뿐 정치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로티의 하버마스 비판은, 그가 보편주의를 포기하는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그들의 철학적 결론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이런 견해는 로티가 폐기하고자 하는 이성과 비이성의 영역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는 공공영역의 의사소통에서 사용되는 인간의 능력이 이성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공의 영역에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이 난입하여 지배적 견해를 형성할 경우, 그것은 공적 영역의 이성을 포기하는 일이 되며 공동체에 비합리주의를 유통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그들의 은유 또한 존중받을만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공영역이란 사실 사적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것, 즉 상존하는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그들이 비합리주의 또는 합리주의라는 단일한 토대를 바탕으로 단일한 견해에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이런 논리에 따라 거부하는 것이, 자유주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로티가 결론짓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푸코와는 달리 ‘모든 곳에서의 자유’를 열망하는 모습도 아니면서, 하버마스와 같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념을 거부하면서 공공영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보편성을 귀환시키는 시도 또한 아니다. 이 둘을 절충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서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연역적 체계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역사성과 자신의 독창성을 연결하는 분명한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로티 스스로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잔인성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을 유도할 정치적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스스로 막기 위해서, 참됨과 순수성을 향한 니체-푸코적인 시도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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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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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페이지에 이르는 긴 여정을 우리 앞에 보여주며 지은이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당대에 충분히 가십거리였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연구의 대상이었던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지은이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분명히 숙고할만한 사항이다. 나도 지은이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 두 지식인의 분명한 입장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건널 수 없는 간극

  그래서 이 책은, 일관되게 두 사람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해나간다. ‘첫 만남’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격차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얼마나 참여했는지의 정도 차이, 2차대전이 끝난 이후 그 전쟁에 대한 해석, 냉전 기간 동안에 속해있던 진영, 폭력에 대한 문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 그리고 그들의 조국인 프랑스가 저지른 불의인 알제리 전쟁에 대한 정치적 견해 등이 각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을 그저 ‘실존주의적 경향의 대표적 소설가’라는 묶음 아래 한 데 놓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하는 의문마저 문득 든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해볼 때,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에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 가까운 사람은 사르트르가 아니라 카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지만,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사르트르이며 카뮈는 그 이름을 거부했던 것을 살펴볼 때는 조금 의아한 결론이긴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본질은, 자신을 속박하려는 세계와 투쟁을 거듭하면서 자아를 확장하며 그 방식을 전적으로 혼자서 창조해나가는 자유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았을 때에는, 특정한 정치적 이론(또는 세력)과 자신의 자유를 양립시키려는 사르트르의 이론적 시도가 오히려 반-실존주의적인 것이다. 카뮈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결론을 내리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의 자유이다.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카뮈의 지적처럼, 사르트르의 이론적 작업은 역사에 실존을 굴복시키는 반-실존주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책을 봐선. 

  폭력의 문제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차이와 문제 가운데서도, 폭력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는 이 문제가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에 가장 큰 화두였으며, 결국 이것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내지 못한 것이 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역사의 문제, 참여의 문제, 문학의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올바름의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것이 폭력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개입하는 역사,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으로서의 폭력, 폭력을 형상화하는 도구로서의 문학, 그리고 폭력 자체의 도덕적 지위라는 방식으로 폭력은 그들의 모든 문제와 얽혀있으며, 또 풀지 않으면 안될 문제로서 남아있다.

  흥미로운 것은 알제리에서 레지스탕스 - 무장투쟁 활동으로 정치에 입문한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극단적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반대로 폭력과 별 직접적인 연관 없이 삶을 시작한 사르트르는 폭력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서 옹호했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셈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면밀히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각자가 기고한 글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고를 통해 카뮈와 사르트르는 각자 마음 속에서 서로를 형상화하며, 그들이 던질법한 질문에 답변을 내리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입장의 차이를 다 알고 있고,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갈 길을 정립해나간 것이다.

  폭력의 문제는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진보-개혁적 세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의 의도 또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관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폭력에 대해 읽는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뜻을 전혀 숨기지 않고,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단, 지은이는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이 각각 붙잡고 있는 것과 놓치고 있는 것, 올바르게 통찰한 것과 보지 못한 것을 골고루 지적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해서, 이 두 사람의 고민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사르트르의 말처럼, 폭력은 약자의 편에서 강자에게 행해질 때 그것은 혁명이자 역사의 창조이며, 최소한 그 역할로 인해 어느 정도 폭력의 비도덕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와 역사적 개인

  이 문제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그 두 사람이 지적인 거인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역사의 희생자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킨다. 두 사람 이외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당시에 주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여러 정파들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당했다. 이 책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보부아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들, 유력한 언론인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발언의 대중성과 그 무게에 있어서 이 두 사람에 비할 수 있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 역사가 떠안겨주는 부담과 개인의 결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도 이 두 사람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희생의 측면은, 거의 타의에 의해 자신의 진영을 결정한 카뮈의 경우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그는 냉전시기의 자유진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려했음에도, 자유진영의 사람들은 카뮈의 글을 선전용으로서 십분 활용했다. 이분법과 진영논리, 즉 적의 적은 친구라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전법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카뮈가 지향하던 사회는 (본문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적 조합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와는 구분되는 프랑스 고유의 사회주의 사상, 아마도 프루동 같은 사람들이 추구했을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념의 기준에서 볼 때 이는 틀림없는 좌파임에도, 카뮈는 당시의 좌파들과 전혀 같이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카뮈가 몇몇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자초한 면도 있다고 설명은 하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카뮈를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참여문학론을 들고 나오며 자신의 진영을 스스로 선택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르트르 또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일시적이나마) 동조라는,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카뮈를 비롯해 메를로퐁티와도 등을 돌린 그는, 소련은 그저 단계나 과정일 뿐 결국 결론은 자신의 결단에 있다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몇 년이나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멀고도 먼 길을 돌아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의 사르트르를 보면서도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또한 그들의 입장과 가까워진 것은 아니라는 걸 자신의 마지막 주요 저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에서 펼쳐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물어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사르트르인지, 카뮈인지 선택할 것을 강요당한다. 지은이가 시대가 그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보기에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살던 그 시대와 지금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옮긴이가 이 점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갈무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직 정치적인 지형이 정리되지 않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인걸까, 또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와 같이 선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인걸까. 지은이의 메시지와 옮긴이의 소감을 모두 고려하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그 모두를 뛰어넘는 실존주의적 결론, 즉 ‘모든 선택은 내 안의 자유, 나의 실존으로부터 나와야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댐1 : 책에 오타가 제법 있습니다. 한 두개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좋았겠지만, 글을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라서요. 이거 보려고 더 꼼꼼하게 책을 들여다보게 되어서, 오타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는 것만 늘어놓아보면…

① 75쪽 밑에서 8번째 줄에 [사람들은 그 당시에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전 사라 베른하트르에서 시테 극장으로 개명한 – 왜냐하면 그 여배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 에서 상연했다고 비난했다.] 는 문장이 있습니다. 어떤 여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건지, 상연은 시테극장에서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② 147쪽 위에서 13번째 줄에 [마르크주의] 라고 되어있네요. 문맥상 ‘마르크스주의’.

③ 182쪽 가장 아래줄에 [마르크스주자] 라고 쓰여있는데, 문맥상 ‘마르크스주의자’인 듯.

④ 211쪽 첫문단 끝에 [담담하게]. ‘담당하게’가 맞겠네요.

⑤ 226쪽 밑에서 셋째 줄 [상항]. ‘상황’을 잘못 쓴 것 같아요.

⑥ 273쪽 밑에서 둘째 줄 [자립잡고]. ‘자리잡고’의 오타라고 봐야겠죠?

⑦ 290쪽 밑에서 8째 줄 [할 수는]. 문맥상 ‘할 수 있는’ 같아요.

⑧ 354쪽 위에서 8째 줄 [불신가 두려움을]. ‘불신과 두려움을’이라고 봐야겠습니다.

⑨ 386쪽 밑에서 11째 줄 [저널니즘]. ‘저널리즘’…

⑩ 419쪽 밑에서 8째 줄 [알제리 방문 했던 몰레는]. 어느 틈이든 ‘을’자를 집어넣어서, ‘알제리를 방문했던’이나 ‘알제리 방문을 했던’으로 바꿔야할 것 같네요.

⑪ 465쪽 첫 문장 [그리고 피식민자는 … 그 자신의 식민주의적 신경증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치유될 수 있다’로 바꾸는 게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또는 ‘신경증을’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요.

덧댐2 :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견유주의’라는 번역어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비슷한 뜻의 ‘냉소주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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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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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은 아니지만, 『강남좌파』와 같이 진짜 현재에 집중해서 이런저런 재단질을 하는 책을 본 지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읽어내는 감각이 내겐 많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남좌파라는 말은 유행한지 꽤 오래되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삼은 것은, ‘정말 강남좌파라는 말 - 담론이 현실을 제대로 분석해내는 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을 읽어본 결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강남좌파라는 말을 제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썼으며, 또한 그 의미를 규정하고 그것이 한국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는 사람이 쓴 이 책인데도, 내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가 말하는 강남좌파는 오히려 그 규정이 너무 넓고 세부적이어서 정치엘리트 가운데 해당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고, 그가 강남좌파라고 지목하는 사람은 사실상 좌파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정책을 설명하기에 강남좌파라는 말은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지은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강남좌파가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주의, 학벌사회, 정치혐오와 같은 기존하는 정치적 현상들의 효과일 뿐인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강남좌파는 무엇인가

  우선 강남좌파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자. 이 책의 제목인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에도 알 수 있듯이, 지은이는 실제 주권자인 인민과는 동떨어진 정치엘리트 가운데 특정한 집단의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로 강남좌파를 이해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만 국한되어있는 것 같다. 지은이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강남좌파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엘리트들의 행태를 비꼬고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탄생하였으며, 현재도 그 의미 그대로 잘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강남좌파는 이렇게 담론으로서 형성될 수 없을 정도로 의미없는 단어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며 변화를 선호하는 정치엘리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엘리트들 또는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적인 노선을 중심으로 오피니언 리더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들이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상류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절차를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일 뿐, 지금 현재에도, 한국 사회에도 특이한 점은 아니다. 민주화 이전에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강남좌파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주도하고 인민과 결합하여 쟁취한 것이 바로 이 땅의 민주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현재 사용하는 강남좌파라는 어휘는, 그 의미를 확실히 뒤집어놓을 큰 계기가 없는 한 진보적 성향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비난과 질시라는 뜻을 벗어던져버리기가 힘들다. 언론의 시장점유율(즉 주도권)이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언론사들에게 넘어가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힘들다. 아마도 지은이는 이런 부정적인 속뜻을 걷어내려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싶지만, 내 생각엔 여의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강남좌파에 유난히 주목하는 오마이뉴스가 아무리 여기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애를 쓰며 몇몇 호감형 인물들을 강남좌파라고 지칭한다고 해도 한계는 여전히 놓여있다. 대표적인 강남좌파인 ‘인터넷 대통령’ 문국현이 현실에서는 5% 안팎에 불과한 표를 얻는 것만 보아도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강남좌파는 어떤가

  그럼에도 강남좌파가 유의미한 정치현상이라면,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오히려 지은이가 강남좌파라고 열거한 사람들의 언행과 성향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좌파라고 지칭되는 그들의 정치적인 성향 또는 세계관이 드러난다. 그들의 입장을 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지은이가 지적한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지은이가 강남좌파의 아이콘으로 지목한 문국현, 유시민, 문재인, 손학규, 조국 등은 어떤 식으로든 노무현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강남좌파 집단은 그 행보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명확히 실증적인 조사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세계관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그러나 강남좌파의 아이콘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성향은 그 책에서 보여지는 샌델의 공동체중심주의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경제운용의 중심적인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경제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전복의 위기를 막기 위한 ‘건전한 자본주의’를 표방한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조장하는 정치적 불평등을 ‘건전한’ 정치운용을 통해서 교정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개인보다는 공동체’라는 사고관을 심어주는 것이 필수이다. 전복의 위기에서 헌신하는 자세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끊임없는 훈련과 행동교정을 통해 길러지는 일종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부유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지은이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안철수나 박원순도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저 아이콘들에 대한 지지와 강남좌파 현상은 최근의 ‘안철수 효과’에서 다시 확인된 듯하다.

  이런 세계관이 어떻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그의 정책적 방향과 이미지가 결합해 만들어진 ‘노무현’이라는 이미지와 겹친다. 적어도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의 삶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실제로 그런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모습을 여러번 연출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실제 정책의 방향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것은 기나긴 고민 끝에 선택한 집권세력과의 타협일 수도 있으며,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 정치의 영역이 반드시 부패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기 전에 구시대적 집권층을 대표하는 보수세력은 그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고, 이것은 그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함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을 실제의 정책적 방향과 기존의 이미지가 가장 긍정적인 모습으로 결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강남좌파가 기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지은이가 열거한 강남좌파의 여러 아이콘들과 그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 그리고 그의 평가를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인 인물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각종 평론과 신문기사를 끊임없이 스크랩하며 차곡차곡 자료를 모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만 하겠다. 그러나 그 이외에 달리 특별하게 꼽을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혹 지은이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의 말미에 가면서 내 생각은 이런 쪽으로 더 옮겨갔다. 강남좌파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박근혜와 오세훈의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 이유, 또한 강남좌파 현상의 중요한 축이라면서 학벌문제에 대해 굳이 언급한 이유. 이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은, ‘강남좌파’라는 현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에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몇몇 정치적 성향들의 교집합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기존의 정치적 성향이란, 이 책에 근거해서 볼 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지역패권이다. 호남 진보(좌파) - 영남 보수라는 구도는 이념적인 구분이기도 하지만 투표에서도 나타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강남좌파는 얼핏 보기에 이 틀에서는 잡히지 않는 새로운 욕망의 분출인 것 같지만, 적어도 지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까닭은 역시나 노무현 전 대통령인데, 그가 강남좌파의 이미지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가 아니라 이른바 ‘영남 진보’이다. 즉, 지역패권의 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성향 가운데 하나가 부각된 것이 아니라, 호남-영남과 진보-보수라는 기존의 틀의 이종교배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지역패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결국 지역패권을 이미 쥐고 있는 정치세력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학벌이다. 지은이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생활수준을 누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학력자들도 강남좌파에 포함시키는데, 그들은 문화자본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생활수준은 아니더라도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기회는 철저하게 학벌구조에서 얼마나 상층에 있느냐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즉 강남좌파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학벌구조를 더욱 공고히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이 어느정도 ‘좌파’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도, 학벌에서 상층에 진입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문제의식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강북 우파’의 반대다.

  셋째는 대중추수주의, 즉 포퓰리즘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의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동력이 바로 이것이다. 진보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자신의 견해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층부의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강북 우파’의 표를 얻고자 하는 보수 세력의 정치적인 전략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람이 바로 오세훈이고, 현재까지 이 포퓰리즘에 의지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언급되던 사람이 박근혜이다. 또한 강남좌파들이 구체적인 정책 없이 ‘바람직한 것’에 대한 견해와 세계관만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한 포퓰리즘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어느 쪽이든, 정책대결공간인 대의제를 우회하여 인민의 직접적인 지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강남좌파를 고유한 색깔이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유보하고 싶다. 나아가서, 이것이 과연 의미있는 담론인가, 기존의 담론으로도 재단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으며 지은이 또한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 또한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진보적인 사람들이 집권을 꿈꾼다면, 끝내 강남좌파는 그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정치적 수사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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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후설의 현상학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사이에서

  후설은 초기에 수학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였지만, 점점 철학으로 연구 분야를 옮기면서 현상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상학의 여러 요소들과 그 태도는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철학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이 후설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현대철학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설의 철학은 현상학이라는 흐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상학에 대한 구상은 당시 후설을 둘러싸고 있던 학문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계몽주의의 기획과 구상, 즉 자연과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이란 ‘모든 것의 자연과학적 해석’을 의미했고, 인간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을 방어하려는 조류 또한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맞먹는 방법과 체계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분과, 즉 ‘정신과학’을 만들고자 했고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후설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물론 그가 각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탐구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후설이 비판하려 했던 것은, 개별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그 방법을 사용해 드러낸 특정한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특정한 방법은 이미 그 안에 세계를 예비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세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에 의해 드러난 전체 세계의 특정한 모습일 뿐, 그것이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그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서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이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장하며,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정신과학의 흐름 또한 비판한다. 정신과학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주로 인간의 정신이 활동해온 결과들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역사, 문화 등을 강조하며, 또한 현세대의 인간의 정신도 이들에 비추어 고찰할 수 있다고(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경계 안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후설이 보기에 인간의 정신은 이 영역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보편성은 여기에서 갖추어진다.


  현상학의 목표와 대상 – 선험적 자아의 구조, 현상

  당시 주류이던 학문적 경향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토대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몇몇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한가? 그렇지 않다면, 개별학문들이 기초로 삼는 그 근거들은 또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주는 의심과 매우 유사하다.

  정신과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편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개별학문의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보편적 세계란,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보편과 객관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후설은 전반성적인 영역이라고 답한다. 학문적 인식을 포함한 모든 인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형식은 수학적일 수도 있고(저것은 부피가 1ℓ이다), 실용적일 수도 있으며(저것은 내가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적일 수도 있다(저것은 예쁘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규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유의미한 것(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정신이 참여한다 -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목하는 것은 그 의미들로 이루어진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부여되기 전 가장 즉자적인 세계 – 즉 전반성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수행하는 자아가 경험 이전의 자아, 즉 선험적 자아이다.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결합한 장소를 후설은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식의 근원이며, 학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대상은 바로 현상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을 바로 이 현상에 대한 학문, 즉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선택하였다. 모든 개별학문들은 현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서 끄집어낸다. 이것은 그 학문이 전제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보다는 특수한 정신적 태도와 절차의 산물이다. 현상학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서 모든 특수한 정신적 절차들을 예비하고, 그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학문이 된다.

  따라서, 현상학의 정신에 따르면 세계는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객관적 존재자들의 여러 특성을 지각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자아는 근본적으로 지향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상에게 다가가고, 대상은 선험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이 관계에서 주체의 특성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현상인 대상은 형상(eidos)에 근거해 반성을 통해서 판단하고 규정될 수 있다. 후설의 입장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선험적 자아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자아가 현상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 또는 세계를 어떤 태도로 고찰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학문이다.


  현상학의 방법 –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기술

  현상학의 연구영역인 전반성적인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첫 단계는 판단중지이다. 후설에 따르면, 각 개별학문들은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의 다양한 정신활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에 매이는 한, 그 세계를 구성해낸 방법, 즉 정신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가정을 거부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정신이 그 자신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의 용어를 빌려와 판단중지(epoche)라고 표현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다. 판단중지는 판단과 규정에 의해 대상에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들을 세계에서 걷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뭉뚱그려져 드러난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그 전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었던 정신의 절차가 걷어진 존재자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한다. 이 때 모든 인식은 이 하나의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전체를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할 수 없는 내적 구성물이다.

  이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변환이다. 객관적 대상이 구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의식은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방식은 온전히 의식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대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른 대상으로서 무한히 열려있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자유로운 변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의 형상이다. 의식의 구성 방식에 따른 무한한 변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이 인식과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변환 속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성은 이 차원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판단하고 규정하는 인간의 능력이므로, 판단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전체인 세계,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를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매개 없이 대면한다. 직관에 의한 대면은 선험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직관은 인식의 기초를 이루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판단에 작용하여 대상을 우리의 정신에 드러낸다. 직관의 능력은 정신을 형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의 표현방법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전체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방법에 대비되는 것은 설명의 방법이다. 설명은 세계가 왜 그렇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한 사태와 다른 사태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러한 표현은, 설명이 자연과학의 설명방법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단과 규정,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하며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술의 방법은 어떻게 세계가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표현한다.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인과관계나 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순적인 표현도 허용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능동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법칙에 의한 설명이라는 정신적인 틀이 오히려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그려내는 데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


  현상학의 객관성 - 상호주관성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구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인데,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체와 대상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후설의 철학에서 객관적 세계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로서만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현대 사회의 위기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 확보한 상호주관성은 인간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후설은 현상학의 구상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닫힌 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특한 상호주관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인식론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의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단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유럽 사회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건전한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소통에 필수적인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깊은 숙고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모든 삶에 걸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자명한 진실을 가리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신봉은 이와 같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 그 방법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결국에는 사회가 파괴되는 위기를 정신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생시킨다.

  자연과학이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세계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선험적 자아가 참여하는 세계, 즉 현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것으로 호도한다. 이 세계가 반성 이후의 모습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여 접근하려는 태도를 후설은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엄밀하게 자신을 비판하며 가장 자명한 토대에서 시작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 단순한 정확함을 확보하는 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정신의 위기란, 이성의 기능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능력을 현재의 정신적 경향을 강조하는데만 끊임없이 사용하는 실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현상학은, 그가 정립한 하나의 철학적 사조 또는 정신의 방법론인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순히 특정한 정치세력에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도래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 위기는 가장 심층적인 측면, 즉 정신적 측면에서 유래하는 위기이며, 따라서 그 극복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들은 철학의 표현이었다. “유럽인의 진정한 정신적 투쟁은 철학 내적인 투쟁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김태길 외, 『현대사회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1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W. Marx, 『현상학』(이길우 옮김), 서광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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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4 16:16   좋아요 0 | URL
선택한 건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로 첫 발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고요.

음... 현상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상에 대한 학문(...)이겠습니다. 후설의 저서는 『데카르트적 성찰』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일관념론의 전통에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더라고요. 초월(선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고, 현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건 어느 맥락인지 저는 잘 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현상학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일반의 정신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혀내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현상은 정신이 자기를 현현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이겠고요.

반면에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정신?)이 지향하는 것이라, 의식과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곧 의식에 대한 연구이고, 현상학은 의식과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또는 상호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됩니다. 그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지향성인 것에서 이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론체계는 아닌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법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상학의 연구를 발표하는 형식이 '기술'이라고 후설은 주장한다고 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기술이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적으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이야기죠.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은거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을 차용하고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등의 전혀 다른 학문적 경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은... 음... 저게... 저렇게 읽고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거라... 상호주관성 부분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고 쓴 것입니다.

2011-09-2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5 02:2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겠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설만의 독특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방법의 토대를 닦은 것이죠.

차이점이라면, 후설은 초점이 인식론적인 부분이고, 인식을 통해서 존재가 생성(자각?)된다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인식 이전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의 양식과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 표현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이라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요. 이 정도가 예전에 『데카르트적 성찰』과 『존재와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나 어휘가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터라(ㅠ.ㅠ) 저도 힘에 부칩니다......

바오 2015-03-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기 힘든,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후 맥락을 잘 전달해주어서 어리숙한 머리에 그래도 잘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효진 2015-03-28 18:41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