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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평점 :
500페이지에 이르는 긴 여정을 우리 앞에 보여주며 지은이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당대에 충분히 가십거리였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연구의 대상이었던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지은이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분명히 숙고할만한 사항이다. 나도 지은이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 두 지식인의 분명한 입장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건널 수 없는 간극
그래서 이 책은, 일관되게 두 사람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해나간다. ‘첫 만남’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격차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얼마나 참여했는지의 정도 차이, 2차대전이 끝난 이후 그 전쟁에 대한 해석, 냉전 기간 동안에 속해있던 진영, 폭력에 대한 문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 그리고 그들의 조국인 프랑스가 저지른 불의인 알제리 전쟁에 대한 정치적 견해 등이 각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을 그저 ‘실존주의적 경향의 대표적 소설가’라는 묶음 아래 한 데 놓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하는 의문마저 문득 든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해볼 때,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에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 가까운 사람은 사르트르가 아니라 카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지만,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사르트르이며 카뮈는 그 이름을 거부했던 것을 살펴볼 때는 조금 의아한 결론이긴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본질은, 자신을 속박하려는 세계와 투쟁을 거듭하면서 자아를 확장하며 그 방식을 전적으로 혼자서 창조해나가는 자유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았을 때에는, 특정한 정치적 이론(또는 세력)과 자신의 자유를 양립시키려는 사르트르의 이론적 시도가 오히려 반-실존주의적인 것이다. 카뮈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결론을 내리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의 자유이다.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카뮈의 지적처럼, 사르트르의 이론적 작업은 역사에 실존을 굴복시키는 반-실존주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책을 봐선.
폭력의 문제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차이와 문제 가운데서도, 폭력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는 이 문제가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에 가장 큰 화두였으며, 결국 이것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내지 못한 것이 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역사의 문제, 참여의 문제, 문학의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올바름의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것이 폭력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개입하는 역사,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으로서의 폭력, 폭력을 형상화하는 도구로서의 문학, 그리고 폭력 자체의 도덕적 지위라는 방식으로 폭력은 그들의 모든 문제와 얽혀있으며, 또 풀지 않으면 안될 문제로서 남아있다.
흥미로운 것은 알제리에서 레지스탕스 - 무장투쟁 활동으로 정치에 입문한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극단적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반대로 폭력과 별 직접적인 연관 없이 삶을 시작한 사르트르는 폭력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서 옹호했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셈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면밀히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각자가 기고한 글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고를 통해 카뮈와 사르트르는 각자 마음 속에서 서로를 형상화하며, 그들이 던질법한 질문에 답변을 내리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입장의 차이를 다 알고 있고,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갈 길을 정립해나간 것이다.
폭력의 문제는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진보-개혁적 세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의 의도 또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관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폭력에 대해 읽는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뜻을 전혀 숨기지 않고,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단, 지은이는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이 각각 붙잡고 있는 것과 놓치고 있는 것, 올바르게 통찰한 것과 보지 못한 것을 골고루 지적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해서, 이 두 사람의 고민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사르트르의 말처럼, 폭력은 약자의 편에서 강자에게 행해질 때 그것은 혁명이자 역사의 창조이며, 최소한 그 역할로 인해 어느 정도 폭력의 비도덕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와 역사적 개인
이 문제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그 두 사람이 지적인 거인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역사의 희생자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킨다. 두 사람 이외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당시에 주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여러 정파들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당했다. 이 책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보부아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들, 유력한 언론인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발언의 대중성과 그 무게에 있어서 이 두 사람에 비할 수 있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 역사가 떠안겨주는 부담과 개인의 결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도 이 두 사람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희생의 측면은, 거의 타의에 의해 자신의 진영을 결정한 카뮈의 경우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그는 냉전시기의 자유진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려했음에도, 자유진영의 사람들은 카뮈의 글을 선전용으로서 십분 활용했다. 이분법과 진영논리, 즉 적의 적은 친구라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전법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카뮈가 지향하던 사회는 (본문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적 조합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와는 구분되는 프랑스 고유의 사회주의 사상, 아마도 프루동 같은 사람들이 추구했을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념의 기준에서 볼 때 이는 틀림없는 좌파임에도, 카뮈는 당시의 좌파들과 전혀 같이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카뮈가 몇몇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자초한 면도 있다고 설명은 하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카뮈를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참여문학론을 들고 나오며 자신의 진영을 스스로 선택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르트르 또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일시적이나마) 동조라는,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카뮈를 비롯해 메를로퐁티와도 등을 돌린 그는, 소련은 그저 단계나 과정일 뿐 결국 결론은 자신의 결단에 있다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몇 년이나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멀고도 먼 길을 돌아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의 사르트르를 보면서도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또한 그들의 입장과 가까워진 것은 아니라는 걸 자신의 마지막 주요 저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에서 펼쳐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물어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사르트르인지, 카뮈인지 선택할 것을 강요당한다. 지은이가 시대가 그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보기에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살던 그 시대와 지금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옮긴이가 이 점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갈무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직 정치적인 지형이 정리되지 않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인걸까, 또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와 같이 선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인걸까. 지은이의 메시지와 옮긴이의 소감을 모두 고려하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그 모두를 뛰어넘는 실존주의적 결론, 즉 ‘모든 선택은 내 안의 자유, 나의 실존으로부터 나와야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댐1 : 책에 오타가 제법 있습니다. 한 두개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좋았겠지만, 글을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라서요. 이거 보려고 더 꼼꼼하게 책을 들여다보게 되어서, 오타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는 것만 늘어놓아보면…
① 75쪽 밑에서 8번째 줄에 [사람들은 그 당시에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전 사라 베른하트르에서 시테 극장으로 개명한 – 왜냐하면 그 여배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 에서 상연했다고 비난했다.] 는 문장이 있습니다. 어떤 여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건지, 상연은 시테극장에서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② 147쪽 위에서 13번째 줄에 [마르크주의] 라고 되어있네요. 문맥상 ‘마르크스주의’.
③ 182쪽 가장 아래줄에 [마르크스주자] 라고 쓰여있는데, 문맥상 ‘마르크스주의자’인 듯.
④ 211쪽 첫문단 끝에 [담담하게]. ‘담당하게’가 맞겠네요.
⑤ 226쪽 밑에서 셋째 줄 [상항]. ‘상황’을 잘못 쓴 것 같아요.
⑥ 273쪽 밑에서 둘째 줄 [자립잡고]. ‘자리잡고’의 오타라고 봐야겠죠?
⑦ 290쪽 밑에서 8째 줄 [할 수는]. 문맥상 ‘할 수 있는’ 같아요.
⑧ 354쪽 위에서 8째 줄 [불신가 두려움을]. ‘불신과 두려움을’이라고 봐야겠습니다.
⑨ 386쪽 밑에서 11째 줄 [저널니즘]. ‘저널리즘’…
⑩ 419쪽 밑에서 8째 줄 [알제리 방문 했던 몰레는]. 어느 틈이든 ‘을’자를 집어넣어서, ‘알제리를 방문했던’이나 ‘알제리 방문을 했던’으로 바꿔야할 것 같네요.
⑪ 465쪽 첫 문장 [그리고 피식민자는 … 그 자신의 식민주의적 신경증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치유될 수 있다’로 바꾸는 게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또는 ‘신경증을’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요.
덧댐2 :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견유주의’라는 번역어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비슷한 뜻의 ‘냉소주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