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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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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은 아니지만, 『강남좌파』와 같이 진짜 현재에 집중해서 이런저런 재단질을 하는 책을 본 지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읽어내는 감각이 내겐 많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남좌파라는 말은 유행한지 꽤 오래되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삼은 것은, ‘정말 강남좌파라는 말 - 담론이 현실을 제대로 분석해내는 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을 읽어본 결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강남좌파라는 말을 제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썼으며, 또한 그 의미를 규정하고 그것이 한국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는 사람이 쓴 이 책인데도, 내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가 말하는 강남좌파는 오히려 그 규정이 너무 넓고 세부적이어서 정치엘리트 가운데 해당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고, 그가 강남좌파라고 지목하는 사람은 사실상 좌파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정책을 설명하기에 강남좌파라는 말은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지은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강남좌파가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주의, 학벌사회, 정치혐오와 같은 기존하는 정치적 현상들의 효과일 뿐인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강남좌파는 무엇인가

  우선 강남좌파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자. 이 책의 제목인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에도 알 수 있듯이, 지은이는 실제 주권자인 인민과는 동떨어진 정치엘리트 가운데 특정한 집단의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로 강남좌파를 이해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만 국한되어있는 것 같다. 지은이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강남좌파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엘리트들의 행태를 비꼬고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탄생하였으며, 현재도 그 의미 그대로 잘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강남좌파는 이렇게 담론으로서 형성될 수 없을 정도로 의미없는 단어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며 변화를 선호하는 정치엘리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엘리트들 또는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적인 노선을 중심으로 오피니언 리더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들이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상류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절차를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일 뿐, 지금 현재에도, 한국 사회에도 특이한 점은 아니다. 민주화 이전에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강남좌파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주도하고 인민과 결합하여 쟁취한 것이 바로 이 땅의 민주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현재 사용하는 강남좌파라는 어휘는, 그 의미를 확실히 뒤집어놓을 큰 계기가 없는 한 진보적 성향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비난과 질시라는 뜻을 벗어던져버리기가 힘들다. 언론의 시장점유율(즉 주도권)이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언론사들에게 넘어가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힘들다. 아마도 지은이는 이런 부정적인 속뜻을 걷어내려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싶지만, 내 생각엔 여의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강남좌파에 유난히 주목하는 오마이뉴스가 아무리 여기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애를 쓰며 몇몇 호감형 인물들을 강남좌파라고 지칭한다고 해도 한계는 여전히 놓여있다. 대표적인 강남좌파인 ‘인터넷 대통령’ 문국현이 현실에서는 5% 안팎에 불과한 표를 얻는 것만 보아도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강남좌파는 어떤가

  그럼에도 강남좌파가 유의미한 정치현상이라면,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오히려 지은이가 강남좌파라고 열거한 사람들의 언행과 성향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좌파라고 지칭되는 그들의 정치적인 성향 또는 세계관이 드러난다. 그들의 입장을 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지은이가 지적한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지은이가 강남좌파의 아이콘으로 지목한 문국현, 유시민, 문재인, 손학규, 조국 등은 어떤 식으로든 노무현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강남좌파 집단은 그 행보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명확히 실증적인 조사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세계관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그러나 강남좌파의 아이콘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성향은 그 책에서 보여지는 샌델의 공동체중심주의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경제운용의 중심적인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경제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전복의 위기를 막기 위한 ‘건전한 자본주의’를 표방한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조장하는 정치적 불평등을 ‘건전한’ 정치운용을 통해서 교정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개인보다는 공동체’라는 사고관을 심어주는 것이 필수이다. 전복의 위기에서 헌신하는 자세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끊임없는 훈련과 행동교정을 통해 길러지는 일종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부유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지은이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안철수나 박원순도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저 아이콘들에 대한 지지와 강남좌파 현상은 최근의 ‘안철수 효과’에서 다시 확인된 듯하다.

  이런 세계관이 어떻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그의 정책적 방향과 이미지가 결합해 만들어진 ‘노무현’이라는 이미지와 겹친다. 적어도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의 삶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실제로 그런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모습을 여러번 연출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실제 정책의 방향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것은 기나긴 고민 끝에 선택한 집권세력과의 타협일 수도 있으며,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 정치의 영역이 반드시 부패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기 전에 구시대적 집권층을 대표하는 보수세력은 그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고, 이것은 그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함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을 실제의 정책적 방향과 기존의 이미지가 가장 긍정적인 모습으로 결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강남좌파가 기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지은이가 열거한 강남좌파의 여러 아이콘들과 그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 그리고 그의 평가를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인 인물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각종 평론과 신문기사를 끊임없이 스크랩하며 차곡차곡 자료를 모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만 하겠다. 그러나 그 이외에 달리 특별하게 꼽을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혹 지은이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의 말미에 가면서 내 생각은 이런 쪽으로 더 옮겨갔다. 강남좌파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박근혜와 오세훈의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 이유, 또한 강남좌파 현상의 중요한 축이라면서 학벌문제에 대해 굳이 언급한 이유. 이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은, ‘강남좌파’라는 현상이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에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몇몇 정치적 성향들의 교집합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기존의 정치적 성향이란, 이 책에 근거해서 볼 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지역패권이다. 호남 진보(좌파) - 영남 보수라는 구도는 이념적인 구분이기도 하지만 투표에서도 나타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강남좌파는 얼핏 보기에 이 틀에서는 잡히지 않는 새로운 욕망의 분출인 것 같지만, 적어도 지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까닭은 역시나 노무현 전 대통령인데, 그가 강남좌파의 이미지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좌파가 아니라 이른바 ‘영남 진보’이다. 즉, 지역패권의 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성향 가운데 하나가 부각된 것이 아니라, 호남-영남과 진보-보수라는 기존의 틀의 이종교배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지역패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결국 지역패권을 이미 쥐고 있는 정치세력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학벌이다. 지은이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생활수준을 누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학력자들도 강남좌파에 포함시키는데, 그들은 문화자본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생활수준은 아니더라도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기회는 철저하게 학벌구조에서 얼마나 상층에 있느냐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즉 강남좌파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학벌구조를 더욱 공고히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이 어느정도 ‘좌파’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도, 학벌에서 상층에 진입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문제의식이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강북 우파’의 반대다.

  셋째는 대중추수주의, 즉 포퓰리즘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의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동력이 바로 이것이다. 진보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자신의 견해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층부의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강북 우파’의 표를 얻고자 하는 보수 세력의 정치적인 전략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람이 바로 오세훈이고, 현재까지 이 포퓰리즘에 의지해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언급되던 사람이 박근혜이다. 또한 강남좌파들이 구체적인 정책 없이 ‘바람직한 것’에 대한 견해와 세계관만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한 포퓰리즘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어느 쪽이든, 정책대결공간인 대의제를 우회하여 인민의 직접적인 지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강남좌파를 고유한 색깔이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유보하고 싶다. 나아가서, 이것이 과연 의미있는 담론인가, 기존의 담론으로도 재단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으며 지은이 또한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 또한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진보적인 사람들이 집권을 꿈꾼다면, 끝내 강남좌파는 그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정치적 수사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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