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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손
존 어빙 지음, 이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신간평가단 9월 주목신간>
단적으로 말해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얽힌 이야기들을 대체 내 나름대로 풀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야하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만든, 그야말로 조금 이상한 소설이었다. 내가 그의 작품 스타일 또는 현재 미국에서 쓰여지는 소설의 경향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고, 요즈음 소설 자체를 멀리한 탓도 있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는게 자존심은 상해도 그만큼 마음이 편하다.
제목에서 바로 보이는 바와는 다르게, 사실 이 소설 전체를 전개해나가는 힘은 손에 관련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주인공이 이런저런 여자와 겪어나가는 성관계들이다. 물론 소설에서 꼭 이해되는 것만 보여져야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왜 관계를 맺는가? 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 모든 국면에서 주인공은 수동적이다. 책에도 직접 그런 표현이 등장한다. ‘그는 여성의 말을 거절하지 않는다.’ 는 식으로. 그렇다면 반대로, 이런 사람과 관계를 맺고싶어하는 그들의 생각은 대체 무엇일까? 단지 그가 매우 겉보기에 매력적이라는 것만으로 설명이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의 제목이 네번째 손인 관계로, 성관계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어쨌든 손 또한 중요한 소재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특정한 페티시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특히 손에 대한 페티시즘이 강하다. 손이 없는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그 없는 손에 대해 호기심을 표하는 많은 여성들이 그렇고(그래서 그들은 주인공을 볼 때마다 꼭 그 쪽을 건드려본다! 고 언급되어있다), 특히 남편의 손을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고싶다는 이유로 남편의 손을 기증한 도리스에게 이런 손 페티시즘은 아주 결정적이다.
사실 그리 바람직한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소설을 보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이 사람이 이런 소재를 떠올리는 데 어떤 다른 문화상품을 소비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국 작가이기에 그럴 일은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그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나름의’ 성장과정은 일본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이른바 미연시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정신적 변화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에 의해 주변의 여자들이 그에게 구애를 하고,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면서 모든 이와 성관계를 맺다가 결국에는 엔딩 부분에서 한 여자에게 달려가는 식의 구도는 동급생 이후의 미연시에서 흔하다 못해 진부해 빠진 공식 같은 서사이다. 결정적으로 그것을 ‘긍정적 전환’, 또는 ‘성장’이라는 말로 포장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미연시와 이 소설의 작가는 교집합을 형성한다. 이런 캐릭터를 그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로 보아야 할지. 그렇다면 이는 젠더 평등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여러모로 바람직하지는 않아보였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다. 모든 인물은 내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로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그래서 내 머리속에는 이 모든 사건들을 묶을 수 있는 몇 가지 유형화된 서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글에 대한 독해에 실패했음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바이며, 앞으로도 다시 이 작가의 소설을 볼 일이 없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