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28
시는 무겁고, 시는 짙고, 시는 너무 독했다.
2. 74
작년 일이다. 샐러리맨 시절의 친구와 육 년 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지금도 간혹 며칠동안 펜을 잡지 못하고 울적한 기분으로 지내곤 한다.
친구는 헤어질 무렵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변했군." 그 말에서 얼마간 실망의 뉘앙스가 느껴져 나는 짬을 주지 않고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말을 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 나의 눈매는 지금보다 한층 매서웠고, 처음 만나는 사람도 섬뜩하도록 노려보았다고 한다.
3. 89
새로운 소설이 실험적이라든가 모험적이라는 평가밖에 받지 못하고 대부분 실패하는 주된 원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문체가 적합한가란 문제부터 차근차근 출발하지 않고, 대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미지에 휘둘려 서둘러 펜을 잡기 때문이다.
4. 104
영화나 소설이나 '절제'가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다. 지나치게 설명적인 대사와 다변적인 대화에만 의존하여 스토리를 이해시키려 한다면 리얼리티 따위는 애초부터 무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그런 안이한 줄거리 전개에 길들여진 나머지, 격에 맞지 않는 대화도 순순히 받아들여, 어느 틈엔가 소설이나 영화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착각하는 점이다.
5. 112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쓰는 일이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지름길이었다. 다른 길은 없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 쓴 작품은 좋건 나쁘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6. 123
소설은 우선적으로 문장을 통하여 독자를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되고, 영화는 화면으로 관객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145
내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린 때가 어쩌면 자유로운 삶의 입구로 가는 문이 열린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가늠할 길 없는 허망함 속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면 반짝이는 인생을 영위할 수 없지 않았을까.
8. 172
사사의 통신과에서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나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9. 203
그때 나는 좀 이상했다. 소설가인 주제에 사람을 싫어했다. 가능하면 타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고,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구태여 생생한 삶의 현장이나 인간들의 모습을 일일이 보지 않아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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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은 늘 존재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좀더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결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내 각오를 확인했다.
10. 207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11. 243
어떤 사나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 책을 사는 게 아니야. 꿈과 감동을 찾아 돈을 서점에 갖다 바치는 거라구."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하, 그런 거였어. 현실은 구질구질하고 넌덜머리가 나는 일뿐이니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밋빛 세계로 도피하겠다는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12. 326
쓰잘데 없는 소설 다섯 편을 쓰는 것보다는 그 시간을 한 편의 소설에 바쳐 보다 나은 작품 한 편을 완성해야 한다. 현재 쓰고 있는 소설이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소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지를 늘 자각하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자세와 각오를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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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은 소설을 지향하며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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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자세'는 젊은 작가를 스스로 단련시키면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의 깊이를 그윽하게 해줄 것이다. 바늘처럼 가늘었던 감성을 창처럼 굳건하게 길러줄 것이다. 그리고 차츰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줄 것이다.
13. 341
샐러리맨으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방법도 있다. 이런 방법은 필력이 저하할 염려는 없다. 다만 안정된 수입과 소설이 잘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샐러리맨 생활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 점차 필력을 느슨하게 만든다. 돈은 사탄과 같다. 돈이 너무 많으면 소설을 쓰지 않게 되고, 돈이 너무 없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 큰 돈이 들어오면 보여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빚에 쪼들이면 보여야 할 빛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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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부딪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