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부처 - 한강
착하고 따뜻한 게 아니라, 고지식하고 우유부단한 걸 거예요.

표정 관리 주식회사 - 이만교
씨는 몹시 기쁘고 즐겁고 어떤 분야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사람 특유의 자만심까지도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분이 얼굴 표정에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화려하게 데뷔한 선배들 중에 처신을 잘못하여 그만큼 빠른 속도로 외면당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씨는 스스로 주지하고 경계했다. 세상은 나름대로 엄격하여, 자기 표현력을 갖춘 모델에게 첫 번째 박수갈채를 보낸 다음, 그 박수갈채를 받고도 자기 본심을 감추고 겸손하고 예절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만 두 번째 박수갈채를 보내는 법이었고, 그러나 언제까지나 겸손하고 예절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보다는 다소 거만하고 자신만만한듯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세 번째 박수갈채를 보내는 거였다.
...
씨가 다만 직업적인 훈련에 의해 표정을 분화시킨 데 비해, 생존해 가려면 표정이 한결 느슨하게 떠돌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기자 생활을 하며 피부로 깨닫고 있는 듯했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 김경욱
252
김 대리는 뭘 좋아하나? 우물쭈물. 나는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팀장에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했다. 겸양의 미덕으로 상대편의 오만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결국 궁지에 빠지게 된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팀장은 술을 사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운명이란 여자와 같아서 차갑도록 냉정하게 다가오는 자보다 정복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덤비는 자에게 기울게 마련이다. 왜냐? 운명의 신은 여신이거든. 세상 물정에 그렇게 어두워서 이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정글의 법칙 몰라? 자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안 보나? 역시 나는 우물쭈물. 팀장의 말은 언제나 분명하고 명료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는 굳이 감추는 법이 없었다.
255
언젠가 팀 회식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경쟁사회에서 중립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중립을 내세운 자는 승자에게도 적일 뿐 아니라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자에게도 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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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4
몇 초 후, 조무래기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는 인간의 반응에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태가 있다. 전의를 상실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흥분하여 전의가 고조되든가.

2. 65
칼국수처럼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3. 99
아버지가 말했다.
"이런 어둠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어둠을 모르는 인간이 빛의 밝음을 얘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니체가 말했어. '누구든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락을 들여보다 보면 나락 또한 내 쪽을 들여다보는 법'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구."

4. 198
"알았어, 그런데 설녀하고는 어떻게 돼가고 있어?"
"녹아서 없어져버렸어."
"끝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5. 222
"노 소이 코레아노, 니 소이 하포네스 조 소이 데사라이가도(나는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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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9
우리들의 생활 밑에서 조용히 천천히 어떤 것은 일부가 부식되어가고, 어떤 것은 연결 부분에 금이 가고, 어떤 것은 점점 막혀가고 있다. 짙은 향수 여자의 발 밑, 울던 여자의 머리 위, 그 사이에 펼쳐진 작은 어둠 속,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파이프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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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덕
93년 처음 영화에 관심을 두었을 때 시나리오부터 쓰기 시작했기에 나는 그전에 거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
영화가 희망차고 행복하게 끝나면 관객들은 흐뭇하겠지만, 그건 얄팍한 위로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가래침을 뱉는다.

2. 김대우 - 반칙왕, 정사, 스캔들 시나리오 작가
1966년 욕망
어느 사진작가가 우연히 공원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찍었는데, 그 사진들을 자꾸만 확대하다 보니 사진 속에서 어떤 살인의 기미를 발견하게 되고, 부분들을 확대하자 시체까지 발견된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공원으로 달려가 '정말로' 시체를 발견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자 현상해 둔 사진들은 모두 없어지고 되돌아가 보면 공원의 시체도 사라진다. 주변에서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 역시 자신이 본 것과 그것을 본 자신,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의 실체에 의혹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3. 김지운 - 반칙왕, 장화홍련, 달콤한 인생 감독
1980년 글로리아
몇 해 전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무려 5개월 동안 유럽으로 무전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수많은 날들을 바게트와 바나나로 끼니를 때우면서 파리의 극장을 이곳저곳, 구석구석 이잡듯이 뒤지고 다니던 때였다. 뱃속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이었지만,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나오면 그것마저도 마냥 행복하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4. 노희경
1988년 바그다드 카페
남아도는 게 시간뿐인지라 책 보는 게 일인데,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돈 쏟아 붓는 소리 같았다.

5. 박찬욱
아마도 성정이 건방져서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도 그렇고 음악을 들어도 그런 것이, 남들 다 좋다는 이른바 세계 명작은 젖혀 놓고 꼭 뭐 저런 괴물이 다 있나싶게 이상하고 덜 알려진 물건들만 탐해온 터이다. 물론 사정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괴물은 자연 귀물이어서 썩 마음에 드는 영화를 구해 보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6. 유시민
1995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결혼은 사랑의 느낌을 습관화된 일상으로 전환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하루라도 빨리 거기에 들어가려 안달하는, 그런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제안을 눈물로 거절한 프란체스카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면서 내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어. 하지만 난 알아. 내가 당신을 따라나서면 우리의 사랑도 지금과는 달라질 거라는 걸."

7. 육상효 - 아인언 팜, 달마야 서울가자 감독
1959년 뜨거운 것이 좋아
이 영화 속에는 그때 내가 코미디에 대해 고민하던 모든 해답이 있었다. 코미디 영화의 구조, 코믹 캐릭터가 어떻게 리얼리티와 관계 맺는가, 한 장면 안에서의 코미디적 긴장, 코믹 효과의 극대치를 위해 영화적 정보를 조정하는 방법, 유기적 연출과 코미디와의 관계, 익살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아할 수 있는 대사, 그리고 그것과 긴장하는 시각적 코미디.
...
그의 코미디는 인간은 어차피 비루하고 결점투성이일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8. 함정임
1974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나는 어쩌면 천국의 한 조각, 그러니까 내 감각을 자극해서 이전의 나로, 영화를 볼 수 있던, 음악을 들을 수 있던, 무엇보다 맛을 느낄 수 있던 본래의 '사람'으로 돌이켜 줄 무엇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았는지도 모른다.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그러한 나의 욕망의 단절기에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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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38
광기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이세.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네. 그런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려보지 않고 그런 지진에 의해 토대가 흔들려보지 않은 삶, 지금까지 오성과 예의범절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유지된 모든 것을 울부짖으며 내동댕이치고 지붕 위의 기왓장을 날려버리는 돌풍에 휘말려보지 않은 삶, 그런 삶은 초라할 걸세.

2. 343
라자르는 언제나 진지하게 선입견 없이 현상이나 생각에 주의력을 집중하면서, 결코 어느 것에도 마음을 다 주지 않았어.

3. 376
어느 날 문득 일과 시간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참으로 의의 없고 견딜 수 없는 삶이라고 깨닫네. 어떻게 그렇듯 몇 년 동안이나 어처구니없는 시간 분배에 맞추어 살 수 있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주변과 내면의 모든 것이 변화하고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일세. 새로운 질서와 영혼의 안식, 그리고 변화마저도 고유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데, 이 법칙은 언젠가는 시효가 만료된다네.

4. 413
이를테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는데 도무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이미 땅속에 묻혔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상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지만, 집에서는 하품을 하고 콧등을 긁고 책을 읽고 온갖 생각을 하네. 다만 자신이 애도하기 위해 상복을 입은 사람만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거지. 겉으로는 엄숙하고 품위 있게 살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을 깨닫고서 자신도 놀라네. 기껏해야 죄책감 어린 만족감이나 안도감을 느낄 뿐일세. 그리고 무관심, 극도로 무관심한 자신을 느끼네. 한동안, 며칠 아니면 심지어는 몇 개월 그런 상태가 이어지네. 사실은 죽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데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관심 있는 척 꾸민다네. 그러다 나중에, 일 년 후에 죽은 자의 코가 떨어져나갔을 무렵,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네. 마침내 이해하는 탓에 벽에 몸을 기댈 수밖에 없어. 무얼 이해하냐고? 그야 물론 죽은 자와 묶여 있던 감정을 이해하지. 죽음의 의미. 땅속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파내도 다시는 그의 미소를 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와 권력도 죽은 자와 다시 만나게 할 수 없다는 사실. 군대를 동원하여 온 세계를 정복해도 소용이 없어. 그때 인간은 절규하기 시작하네. 아니, 그럴 여력조차 없네. 멍하니 길거리에 서 있는데,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세상 천지에 홀로 있는 듯 마음이 극히 허전해지는 게야.

5. 426
사람은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에서, 그러니까 사랑의 물리적은 영역인 침대에서도 진실을 찾는 법일세. 상대방이 아름다운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기 마련일세. 또한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이 뛰어나고 매력적이고, 현명하고, 노련하고, 호기심 많고, 탐욕스럽고, 관대한가도 중요하지 않아. 그렇다면 뭐가 중요하냐고?
진실

6. 옮긴이의 말
주인공들이 털어놓는 세 개의 독백, 세 편의 이야기는 매번 새로우며 독특한 감동과 묘미를 자아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독자를 빨아들인다.
...
사랑과 결혼의 승리는 결국 불타오르는 감정과 주위 환경을 슬기롭게 조화시킨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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