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ear the approaching thender that, one day, will destroy us too, I feel the suffering of millions. And yet, when I look up at the sky, I somehow feel that everything will change for the better, that this cruelty too shall end, that peace and transquility will return once more." Anne Frank, July 15, 1944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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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 남송.금.원.명 : 초원의 질풍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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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사 5권은 남송, 금, 원, 명이 건국된 이후 시기까지를 다룬다. 정강의 변 이후 금군이 개봉을 점령하여 북송 정권이 멸망하고 떠밀리듯 내려가 남송을 세운 강왕 조구는 고종으로 즉위한다.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 황제로 삼아 금릉에 정권을 세웠지만 회하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진족의 비율이 지나치게 적어져 본인들에게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희종 시대에 약 100만명 정도 되는 규모의 여진족 중원 이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동 후 그들은 여진족 본연의 수렵, 사금 채취 생활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농경 생활을 해야 했으니 한족에 비해 소출이 잘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한족에게 땅을 뺏기는 일도 벌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진인들이 한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 거란인은 한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 본연의 문화는 살아 있었다. 그런 반면 여진인은 이주 후 상당 부분이 한 문화에 동화되어 중원 국가화되었다.

문화에 면역성이 없는 여진족은 곧바로 한문화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민족 고유의 야성적인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의 한족화(漢族化)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요나라의 경우는 ‘한(漢)의 분위기가 연운 16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국가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이원제(二元制, 二院制) 정치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을 취하고, 나아가 하남으로 진출한 금나라는 ‘한‘의 것이 주류였다. 이원제의 정체(政體)를 폐지한 것은 그것으로는 이제 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한적(漢的)인 중원 국가로 변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황제는 여진족의 수장이라는 성격보다 한적 중원 국가의 천자라는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6~77

금나라 땅은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고 쌀을 남송에서 받아야 하는 처지인 상황에 이주한 여진인들이 한화하면서 쌀 수요가 늘었다. 해릉왕은 이에 남정을 단행했으나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위한 징병 등 증세로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이에 세종은 해릉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 세종은 금나라의 '요순'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해릉왕은 항주까지 진격했으나 남송군에게 밀려 숨고르기를 했다. 그는 3일 이내 도강하지 않으면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장수들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해릉왕이 시해되자 금군은 철수했고 남송군에게 화의를 신청했다.
남송은 금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중화제국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남송이 지키는 회남 이남 땅을 빼앗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결함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북벌과 남벌이 국가의 기본방침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강화를 맺었다. 국경선은 이전 소흥(금나라 황통) 화약과 똑같았다. 다만 해릉왕의 폭주와 거란족의 대반란 등으로 금 쪽이 조금 불리했다. 따라서 효종 건도(乾道) 원년(1165,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에 맺은 새로운 화약은 남송에게 조금유리해졌다. 소흥 화약의 세공은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이었으나, 건도 화약은각각 20만 냥, 20만 필로 줄었다. 더구나 이를 ‘세공‘이라 하지 않고 ‘세폐(幣)‘라고 불렀다. 소흥 화약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하는것이었다. 건도 화약은 이를 ‘숙질(叔)‘ 관계로 고쳤다. 옛 화약에서 군신이었던 것이, 새 화약에서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된 것이다. ‘공(貢)‘을 ‘폐(幣)‘로 한 것은 속국의 진공이 아니라는 의미다. - P101

남송 제일의 시인은 육유다.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애국 시인인 굴원과 같은 위치를 점했던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북송 휘종 때 태어나 정강의 변을 겪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인 육재가 주전파였던 만큼 그도 북송은 멸망했지만 송의 국토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하필 진사 시험에서 진회의 손자와 붙는 바람에 낙제했는데 이 때문에 주전파에 더 천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유는 평생 1만 수의 시를 썼을 만큼 다작을 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썼는데 마지막 작품은 <아들에게>라는 제목의 시였다.
꿈에서도 잃어 버린 땅의 회복을 잊지 않은 육유는 애국시인으로서도 칭송받는다. 중국이 외국에게 영토를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육유의 시를 애송했다. 송나라 시 중에서도 육유의 시는 특이하다. 송시의 특징은 그 냉정함에 있다. 조용히 응시하는 시 정신에 뒷받침된 탓이다. 그런데 육유의 시는 결코 냉정하지 않다. 후세의 역사가가 ‘남송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 시대도 육유는 그것을 절반은 침몰한 시대로 받아들였다. - P116~117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나,
다만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게 슬프구나.
황제의 군대가 북녘땅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를 잊지 말고 내게 알려다오

칭기즈 칸의 팽창은 금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어났다. 대책을 강구하려고 해도 사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동안에 이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금나라는 여러 유목 부족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으나, 칭기즈 칸 같은 전쟁의 천재가 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금나라의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는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연 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 민족의 조직을 개조했다. 목가적인 동족 공동체였던 것을 철저하게 군사적 집단으로 다시 편재한 것이다. 10호, 100호, 1천 호, 1만 호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전투단위도 되었다. 여진족의 맹안이나 모극과 비슷하다. 몽골족은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특히 효과적으로 기능했을 터이다. 십호장(戶長),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만호장에는 칭기즈 칸이 신임하는 보르추, 무카리, 나야아가 임명되었다. - P137~138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치기 전에 금을 섬기는 서하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금에 경고장을 보냈다.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금나라는 움직이지 않았고 서하는 남송에 손을 뻗는다. 칭기즈칸은 친정하여 금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어서 후퇴해야 했지만 이 무렵 금나라 내부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육유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원호문은 19세 정도의 나이였다. 육유는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망했으나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건도화약으로 금과 남송 간의 관계가 평화로웠다. 하지만 원호문은 칭기즈칸이 금을 침공하던 무렵 22살이었고, 금이 몽골에 멸망했을 때 45세의 나이였다. 그가 68세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했고 끝내 금나라가 원에 멸망할 때까지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난세가 시인을 만든 셈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시 중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조협려에 등장한 '정이란 무엇이길래'이다. 제목을 봐도 느껴지지만 기러기 한 쌍을 보고 지은 시인데 정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느냐?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임이여 대답해주소서,
아득한 만리 구름이 겹치고
온 산에 저녁 눈 내릴 때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 < 안구사雁丘詞 >

원호문은 120년을 이어온 금조에서 감히 비교할 자가 없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남송을 포함해서 12세기와 13세기 중국 최고의시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태평성대였어도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중국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몽골의 침공이라는 난세를 시로 읊었기 때문이다. 주제가 너무 엄청나면 시문이 받아들이기어렵다. 하지만 원호문의 시문은 처참한 시대의 모습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청나라의 조익이 원호문을 노래한 시 가운데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심하지 않은 표현 같지만,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 P149
몽골의 공격으로 마침내 개봉의 성문이 열렸다. 금나라 주요 관료들은 포로가 되었는데 원호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요성이라는 곳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곳에서 < 계사 5월 3일 북으로 건너가다 >라는 제목으로 그는 시를 지었다.
길가에 쓰러져 엎어진 포로가 즐비하고,
지나가는 전차는 물이 흘러가는 듯하다.
여인은 곡하며 회골의 말을 뒤따르고,
뉘를 위해 걸음마다 뒤돌아보는가.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에 금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족계 정권이어서 막내 아들이 상속하는 관습을 따랐다. 단 영지상속과 몽골의 국주 계승은 별개의 문제였다. 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 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칭기즈칸 사후 대쿠릴타이에서 카간으로 추대된 것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였으나 상속법에 따르면 톨루이가 계승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행히 톨루이는 우구데이의 즉위를 인정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우구데이는 태종으로 즉위한 기간 동안 금나라를 토멸하고 카라코룸에 궁전을 지었다. 그는 후계자로 손자인 시라문과 톨루이의 장남 뭉케를 지목했으나 대쿠릴타이에서 황후인 투르게네가 그의 유지를 어기고 장남인 구육을 즉위시켰다. 구육은 정종으로 즉위했지만 주치 집안의 가장인 바투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세력 간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정종의 급작스런 사망(3년 만에)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투는 쿠릴타이를 열어 톨루이 집안의 뭉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헌종 뭉케는 남송 토벌군을 일으킨 1259년 사망했는데 계승을 둘러싸고 또 툴루이 집안의 네 아들 간에 내분이 일어난다. 잘 알고 있듯 최종 승자는 쿠빌라이다. 이 때 고려의 원종이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몽골은 남송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 땅을 남송에게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남송에는 주전론이 힘을 얻으면서 군대를 출병시켰다. 몽골군은 송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남하했다. 남송군이 출병하지 않았다면 몽골군은 남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되었다.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이후에는 몽골이 중원에서 실권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고려는 이 때 몽골과의 외교적 변화를 꾀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 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 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원은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고 싶어했다.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에 괴씸죄가 부과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원은 일본에 원정을 감행한다. 고려는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에서도 의병, 삼별초 등의 항쟁이 이어지면서 원을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원은 삼별초 항쟁을 물리치고 고려에 전선 건조와 병사, 어부 등의 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원은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실패했는데 이는 일본의 운(?)도 있었겠지만 급박스런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강남 땅을 손에 넣은 원 왕조의 사치는 심해졌고 이제는 강남이라는 곳이 원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해상 수송을 이용하게 되면서 해적이 출몰하게 되는데 해적 소탕을 명했음에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경에서 방국진의 난을 시작으로 온갖 군벌들이 등장하였다. 장사성도, 주원장도 이런 세력들 중 하나였다.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여러 가지로 명나라의 주원장은 한나라의 유방과 비슷해서인지 비교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공격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등의 태도와 유방 곁에 장량이라는 참모가 있었듯 주원장 곁에는 이선장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군벌들 중 최종 승자는 주원장이었고 명나라는 이렇게 건국되었다. 

책임자가 되면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쳐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홍무제는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키며 주변 세력을 남김 없이 섬멸한다.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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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계 >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 집의 부엌은 뜨스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희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어가는 장꾼들의 종이 등에 나귀 눈이 빛났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

새벽부터 삶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목탁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있다.

20년도 전 종로의 피맛골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개발이 되기 전이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국밥집이며 술집이며 그런 것들이 수두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는 호기심이 많았거나 열정이 넘쳤는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밤을 새면서 술을 먹고 이른 아침 전철을 타고 다시 귀가를 하곤 했다. 취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걷고 있을 때 새벽녘 거리의 모습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한편으로는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멍한 표정의 공허한 사람들 등 참 다양했다. 솔직히 취한 상태라 별 생각이 없이 걸었을 텐데도 희한하게 그 시절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그 전의 피맛골에서 사람들과 정겹게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도 있고.
이 시를 읽으면서 비슷한 시간이라도 누군가는 삶을 준비하고 다른 누군가는 삶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 광원 >

흙꽃 이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
우수와 쓸쓸함이 느껴진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 MBC 베스트극장에서 방영을 해준 적이 있다. 시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정거장에 내렸다는 표현만 있는데 오래전 이 작품이 떠올랐다. 도중에 내린 남녀. 곰스크행 기차가 언제 올 지 모르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여자는 이 생활도 만족하여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 남행시초 4: 삼천포 >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

봄이 다가올 무렵 볏짚을 쌓아둔 마당에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데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다가 말다툼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실제로는 가난했을 사람들이지만 마지막에 '가난'이라는 글자를 넣으면서도 '따사로이 가난'이라고 표현해서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좋았다.


< 북관 >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

시인이 함흥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의 화려한 외모와 이력과 시의 표현이나 내용이 달라서 놀랄 때가 많은데 특히 이 시가 그렇다.

토속 음식을 느끼고 시큼하고 퀴퀴한 내음새 속에서 그 옛 시절 여진인들과 신라인의 향수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진인들은 실제로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살았고 신라인은 전성기 때 함경남도 지방까지 올라온 적이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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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eed to have something besides a husband and childeren to devote myself to..."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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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쿠빌라이 이전에는 몽골군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쿠빌라이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태자 시절의 원종이 쿠빌라이와 양양에서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쿠빌라이 자신의 정치철학이 유목적인 직접 침략을 피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사시에는 무력을 사용하지만 회유책을 우선하게 되었다. 한족 문명 본위의 사관에서 본다면 쿠빌라이가 한 문화를 접하면서 차츰 개화한 것이 된다.
고려국왕 원종은 몽골의 이와 같은 변화를 틈타 친몽골정책을 취하여무인 권신으로부터 실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두드러지게 이념이 빠진 문화 활동의 소산을 ‘속(俗)‘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초속(超俗)이다.
원대의 문화는 매우 속된 것과 극히 초속된 것, 양극단으로 나뉜다.
문인의 기행은 어쩌면 생활이라는 면만이라도 초속이고 싶다는 간절한바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속과 초속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양유정이 민요풍의 시를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속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답적인 시문을 지었다고 해서 그 전부를 초속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 공허하기 때문이다.
원대에는 수많은 희곡이 지어졌다. 이전과는 달리 재능 있는 문인이집필했는데,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하므로 관객의 수준을 생각해서 써야했다. 그렇다면 원곡(元曲)은 모두 속이냐 하면 그렇다고 한정할 수는 없 - P358

다. 가슴속에 강한 이념을 간직한 작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해도 그것을 작품 안에 살린다. 평범하고 속된 형식 안에 민중이 거부감을 갖지않게 초속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 P359

원나라는 모든 면에서 ‘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떠한 야수적인 폭력으로도 오랫동안 배양된 전통을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침체를깨뜨렸고,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전통 속에 융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 P368

토록 동화되기를 두려워했으면서 다른 형태로 중국 문화를 유지하는 데공헌한 셈이다. 전통의 계열 속에 들어선 원나라가 다음 시대로 이어진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P369

몽골 정권은 중국 전체를 지배하에 두었기 때문에 한지(漢地, 강남을 기준으로 화북)와 한인의 제휴를 강화해야만 했다.
원나라의 국도는 둘이다. 오늘날 북경과 원래의 개평부(開平府)로, 전자를 대도(大都) 후자를 상도(上都)라고 불렀다. 여름이 되자 정부 기관은 대거 대도에서 상도로 옮겨갔다. 이 이도제(二都)는 몽골 정권의 성격을상징한다. 원나라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는 몽골 세계 제국의 한지 총독이었다. 쿠빌라이 정권은 출신지인 막북과 지배지인 한지의 이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도제로 상징되듯이, 원 왕조는 막북과 한지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 남정(南征)으로 강남을 손에 넣으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강남을 장악하기 위해 한인의 힘을 빌리면서 균형이 크게 깨져 버렸다.
원 왕조는 남송을 멸망시킨 뒤 한지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고, 이것이 막북에 있는 몽골족의 불만을 초래했다. 막북은 국가 발상지인 만큼원나라 황족도 적잖이 살고 있었다. 이것이 황위계승투쟁을 더욱 복잡하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 P394

국도가 개봉이나 낙양, 아니면 장안에 있던 시대는 남쪽 물자 수송은 - P396

주로 운하에 의존했다.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그렇지 않아도 홍무제는 소주에 감정이 좋지 않아 주민을 남경으로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소주 사람들도 당연히 남경 정부에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장사성 시대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다. - P498

홍무제도 소주의 시민 감정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손볼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가혹한 탄압으로 반항의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 홍무제의 방식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위관은 정치에 힘을 쏟아 건국 후의 부홍은 소주가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치적을 올렸다. 유능하다는 것을확실히 보인 것이 위관의 불행이었다. 이만큼 치적을 올렸으니 정청 신축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상량식 행사 때, 지사의 친구로서, 또 소주인으로서 고계는 상량문을썼고 또 상량을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이 일이 고계를 죽음으로 몰았다. - P499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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