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쿠빌라이 이전에는 몽골군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쿠빌라이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태자 시절의 원종이 쿠빌라이와 양양에서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쿠빌라이 자신의 정치철학이 유목적인 직접 침략을 피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사시에는 무력을 사용하지만 회유책을 우선하게 되었다. 한족 문명 본위의 사관에서 본다면 쿠빌라이가 한 문화를 접하면서 차츰 개화한 것이 된다.
고려국왕 원종은 몽골의 이와 같은 변화를 틈타 친몽골정책을 취하여무인 권신으로부터 실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두드러지게 이념이 빠진 문화 활동의 소산을 ‘속(俗)‘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초속(超俗)이다.
원대의 문화는 매우 속된 것과 극히 초속된 것, 양극단으로 나뉜다.
문인의 기행은 어쩌면 생활이라는 면만이라도 초속이고 싶다는 간절한바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속과 초속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양유정이 민요풍의 시를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속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답적인 시문을 지었다고 해서 그 전부를 초속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 공허하기 때문이다.
원대에는 수많은 희곡이 지어졌다. 이전과는 달리 재능 있는 문인이집필했는데,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하므로 관객의 수준을 생각해서 써야했다. 그렇다면 원곡(元曲)은 모두 속이냐 하면 그렇다고 한정할 수는 없 - P358

다. 가슴속에 강한 이념을 간직한 작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해도 그것을 작품 안에 살린다. 평범하고 속된 형식 안에 민중이 거부감을 갖지않게 초속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 P359

원나라는 모든 면에서 ‘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떠한 야수적인 폭력으로도 오랫동안 배양된 전통을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침체를깨뜨렸고,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전통 속에 융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 P368

토록 동화되기를 두려워했으면서 다른 형태로 중국 문화를 유지하는 데공헌한 셈이다. 전통의 계열 속에 들어선 원나라가 다음 시대로 이어진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P369

몽골 정권은 중국 전체를 지배하에 두었기 때문에 한지(漢地, 강남을 기준으로 화북)와 한인의 제휴를 강화해야만 했다.
원나라의 국도는 둘이다. 오늘날 북경과 원래의 개평부(開平府)로, 전자를 대도(大都) 후자를 상도(上都)라고 불렀다. 여름이 되자 정부 기관은 대거 대도에서 상도로 옮겨갔다. 이 이도제(二都)는 몽골 정권의 성격을상징한다. 원나라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는 몽골 세계 제국의 한지 총독이었다. 쿠빌라이 정권은 출신지인 막북과 지배지인 한지의 이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도제로 상징되듯이, 원 왕조는 막북과 한지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 남정(南征)으로 강남을 손에 넣으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강남을 장악하기 위해 한인의 힘을 빌리면서 균형이 크게 깨져 버렸다.
원 왕조는 남송을 멸망시킨 뒤 한지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고, 이것이 막북에 있는 몽골족의 불만을 초래했다. 막북은 국가 발상지인 만큼원나라 황족도 적잖이 살고 있었다. 이것이 황위계승투쟁을 더욱 복잡하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 P394

국도가 개봉이나 낙양, 아니면 장안에 있던 시대는 남쪽 물자 수송은 - P396

주로 운하에 의존했다.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그렇지 않아도 홍무제는 소주에 감정이 좋지 않아 주민을 남경으로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소주 사람들도 당연히 남경 정부에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장사성 시대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다. - P498

홍무제도 소주의 시민 감정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손볼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가혹한 탄압으로 반항의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 홍무제의 방식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위관은 정치에 힘을 쏟아 건국 후의 부홍은 소주가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치적을 올렸다. 유능하다는 것을확실히 보인 것이 위관의 불행이었다. 이만큼 치적을 올렸으니 정청 신축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상량식 행사 때, 지사의 친구로서, 또 소주인으로서 고계는 상량문을썼고 또 상량을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이 일이 고계를 죽음으로 몰았다. - P499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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