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광야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중앙아시아 편 ㅣ 뭉우리돌 3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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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의 결말은 작은 돌덩어리로 남겨졌다. 거기 새겨진 얼굴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의 압축이다. 그 압축을 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잔잔한 응시로 잠시 시선을 주면 된다. 그러면 바람결이 와 속삭인다. 광야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들의 합창은 그렇게 슬며시 찾아왔다. 곡조는 구슬프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배제된 게 대부분이다. 누굴 울리려는 소리가 아니다. 망자들과 눈을 맞추며 깨달은 내 해석이 맞다면 그들은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 P15


1937년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이미 고향을 한 번 떠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착해온 삶의 뿌리가 또 다시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이는 설움이자 애환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가인 작가는 전작인 두 권의 작업에서 세계 곳곳에 흩어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헤맸고 현재 존재하는 형태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냈다. 전작들을 이미 읽은 바 있었기에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반가웠다.


이번 주제가 담긴 장소는 중앙아시아다. 공교롭게도 불과 이틀 전 신문에서 중앙아시아(타지키스탄)로 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과거의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당시 37세, 자신과 같은 나이였다고 한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무어라도 읽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읽고 싶은 신간이 나와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현장을 채우고 있는 건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라는 문장이 시선을 끌었다. 때때로 카메라의 렌즈에 담긴 피사체는 말을 건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진가의 사진이 정말 그랬다. 그 결과물이 결코 쉽게 얻어질 리 없다. 휴대폰 카메라로 얼마든지 일상의 순간을 '찰칵!'하고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사체에 온전히 공을 들여 사진을 찍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촬영 일정이 길면 좋겠으나 부족한 자금, 한정된 시간이기에 최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작가의 고충이 느껴졌다.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렇다면 1937년 한인들은 어떻게 하여 중앙아시아로 가게 되었나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반 소련에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정책의 기조는 민족 자결주의에서 소비에트 애국주의로 바뀌며 한인 포함 외국인에 대한 경계, 탄압으로 변화한다. 게다가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견제할 필요가 있던 소련은 중국의 국민당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내부 단속 강화를 위해 대숙청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일본 첩자,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을 떠안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한인 강제 이주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채 부랴부랴 짐을 싸야 했다. 짐도 30kg로 제한되어 있어 현재 가진 살림 살이를 모두 포기한채 말이다. 전체 한인 중 55%는 카자흐스탄, 45%는 우즈베키스탄으로 3차에 걸쳐 강제 이주가 진행되었다(소규모지만 부근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도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소련 정부는 한인 가구당 370루블, 1인당 150루블을 주고 가옥과 토지를 담보로 수령증을 발급한 이후 수령증을 기반으로 토지, 가옥의 무상 지급을 약속했으나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뒤 첫 도착지였던 곳이다. 몇날 며칠을 열악한 기차를 타고 지나온 끝에 그들이 닿은 곳이었다. 바슈토베 언덕은 초기 경작지였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 이미 땅을 옥토로 바꾼 경험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랬다. 이곳 땅은 주변 호수의 영향으로 염분기가 많아 그것을 제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고. 안타깝게도 현재 바슈토베 언덕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불과 6년 전에 작가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그러진 않았다. 2019년 기념광장 포장, 울타리배수로 설치, 고려인 추모비 건립, 2021년 한-카 우호기념비 건립, 조형물 설치, 나무 식재, 2022년 8월 고려인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벽이 만들어졌다. 추모비에 기념한 재단 문구 등이 새겨지고 흙을 쌓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등 의도적으로 연출되면서 기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작가의 안타까움과 한숨이 내게도 전해졌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이곳에 독립운동가 시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추모비와 추모벽이 만들어지는 건 장소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홍범도가 수위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미 유명해진 고려 극장의 전신 역사가 흥미로웠다. 최초 1932년 원동 변강 조선극장이 출범할 때만 해도 이동 극장의 형태였다. 해삼시 고려극단으로 개명한 뒤 고려음악드라마극장이 되었다가 지금의 고려극장이 되었다. 강제 이주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극장을 이동해야 했다. 1968년 알마티로 이전해 국립극장으로 승격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장춘은 극작가이자 배우로 홍범도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사람이면서 그에게 고려 극장 수위 일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극 '의병들'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것은 홍범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미화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물과 사건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태장춘이기에 작가는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자 애를 썼고 2024년 마침내 찾아냈다고. 덕분에 나도 이제 태장춘 세 글자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헬렌 선교사님도 그렇다. 그녀는 한인 강제 이주 역사 복원 알리기에 헌신하고 계시는 분이다. 우슈토베 임마뉴엘 교회 선교사님으로 고려인 역사 단지를 조성하고 고려인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 앞장서셨다. 그런데 고려인 기념관을 본 작가가 기존 전시 자료에 오류가 많고 내부 건물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재건립을 건의하여 2025년 재탄생했다고 한다. 그 앞에 태장춘 묘지 비석도 제작되었다니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 이주 1세대인 지순옥 할머니를 작가가 배웅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고. 책에 실리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연이기에 참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들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직계후손인 민 알렉산드리아는 코로나 때 사망했고 고손자인 데니스 텐은 괴한의 칼에 찔려 2024년 사망했다고 한다. 아니 이 무슨 당황스럽고 처참한 상황인지.

인민배우 김진은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최초의 배우라고 한다. 손녀인 한다나는 알마티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김진의 무덤 형태가 너무나 특별했다. 사각형 돌 무덤인데 춘향전의 한 소절인 '내가 간들 아주가며 아주간들 잊을소냐' 글자들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돌마다 새겨 넣은 것이다. 대체 무덤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본인의 유언일까. 그렇다면 이몽룡 역을 맡았던 만큼 죽어서도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서 그리 한 것일까.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무덤의 형태였다.


최봉설은 철혈광복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인공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부인인 김신희 여사(역시 독립운동가)와 함께 쉼켄트에 묻혀 있다. 따님인 최 알렉산드라 여사로부터 15만원 사건 현장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15만원 사건의 주인공들은 최봉설 이외에는 다 붙잡혔다. 그는 경관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오른쪽 등뒤 날갯죽지에 총탄을 맞았다. 최계립이란 가명을 짓고 74세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준은 철혈광복단 15만원 사건을 소설화하여 펴낸 작가다. 그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십오만원 사건>은 소비에트 문학에서 처음 조선말로 쓰인 조선작가의 작품이었다 한다. 

계봉우는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최봉설과도 지인이었다. 소련 수교 이후에나 그의 독립운동 이력이 알려졌다. 상해, 북간도,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한 이후에는 공개 정치 활동을 삼가고 국어 문법, 국어, 국사 강습, 역사 저술 활동에만 집중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서울 현충원에 옮겨 안장됐다.

참고로 크즐오르다는 한인들이 벼농사를 성공시킨 땅이자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강제 이주 초기에 한인 극단, 방송국, 교육 기관, 신문사 등이 있던 곳이다.


한편 한인들은 벼농사에 매진했다. 관련해서 여러 인물들을 책에 거론하고 있다. 최창학은 제3인터내셔널 콜호스(집단농장)을 운영했다(현재 그가 쓴 사무실과 무덤 등을 가볼 수 있다). 김만삼은 1942년 벼농사꾼의 어버이이자 전설로 기록적인 수확량을 올렸던 인물이어서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이 그의 영농법을 너도 나도 배우려고 했다 한다. 그는 추후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벼농사에는 그늘도 존재한다. 벼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관개수로 때문에 아랄해는 기존의 1/10 크기로 축소되었고 기후 변화까지 생겼다 한다.


카를락 박물관과 스파스크 국제 추모단지는 강제 노동으로 끌려온 많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 그곳에 가장 먼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은 바로 이곳 카를락 강제 노동수용소의 수용자로 지냈다. 그는 카를락에 있다가 나중에 코미 자치 공화국, 이후에는 코틀리스 북부철도 수용소(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배경이 된 곳)에 있다 1942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최재형과 허위 가문으로 기억될 수 있는 곳이다. 

최재형의 둘째부인이었던 최 엘레나 무덤이 2017년 비슈케크 세베르니 공동묘지에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최재형의 가짜 후손 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러시아 해체 후 진짜 후손이 따로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싶다. 그리고 2023년 최재형의 묘는 현충원에 조성되었다. 현재 카라콜에는 최재형의 손녀와 딸이 살고 있다. 최재형이 죽고 나자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역사가 낳은 비극이 아닌가 싶다.


허위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허위의 손녀인 허 로자는 살아생전 독립운동가 후손을 지원해 달라며 대한민국 대사관 문을 여러 번 두드렸으나 매번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2006년 당시 한명숙 총리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팔십 평생 만에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한다. 2007년에는 귀화 신청을 했으나 서류에 아버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는 이유로 법무부에서 거부하여 45일 간 여관방 생활을 하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대한민국 국적은 2011년에야 주어졌다). 2021년 서울에서 별세했을 때 빈소와 장례 비용도 없었는데 한 국회의원과 기업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현재 비슈케크 외곽에는 허위의 넷째 아들인 허국의 가족묘가 자리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인들의 눈물이 어린 땅이다. 더불어 우즈베키스탄에도 5.18 광주 사건과 비슷한 안디잔 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더 친숙해졌다. 

이인섭은 '망명자의 수기'라는 자서전을 통해 한인들의 강제 이주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강제 이주 당시 한인은 16000여 가구, 인원은 760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련된 주택은 250채가 다였기 때문에 열악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곳에 살지 못하고 여러 곳의 콜호스로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주로 목화만 생산되던 곳에 벼를 비롯한 채소 등을 심으며 농사가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북극성 콜호스에는 김병화가 있었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모범적 삶을 실천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여서 1948년, 1951년 두 차례 노동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북극성 콜호스는 나중에 김병화 콜호스가 되었고 현재는 그의 업적을 기린 김병화 박물관이 남아 있다. 어둠을 밝히는 북극성처럼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힘과 의지가 되는 지도자가 아니었나 싶다.

한인들은 이주 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인 전통 문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인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침투하면서 전통 문화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그래도 당근채, 양배추 김치, 국시는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한인 전통 음식 문화이다.


책의 사연 중 가장 놀라웠던 이야기는 작가가 한 탈북자를 만났는데 그 아내(남 타티아나)가 최재형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다(너무 놀라워서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앞서 최재형의 후손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했는데 손녀와 며느리의 무덤이 타슈켄트에 있었다. 아는 분들의 도움으로 찾아간 무덤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가는 길이 가시밭길일 수는 있으나 무덤 상태를 보니 정말이지 한숨만 나왔다. 그곳을 지나가기도 어렵겠지만 지나친다 해도 결코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던 광경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인물로 작가는 천도교 독립운동가인 강연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사연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2024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며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발표한다. 그런데 막상 작가가 가보았더니 엉망진창 상태였다. 작가처럼 나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말을 말지 대체 왜?'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타슈켄트에서 우리 역사를 흑백 필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안 빅토르도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그의 사진에 대한 태도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이 기록을 멈추면 그마저도 기록이 사라진다 생각했다는 안 빅토르,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 책은 이야기와 사진 뿐 아니라 방문한 곳의 GPS 좌표를 제공한다. 구글맵에서 해당 좌표를 입력하면 쉽게 저장할 수 있다. 나도 몇몇 군데는 저장해놓았는데 언젠가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유불리로 바라보면 어떤 이익도 취할 게 없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서사일 뿐이고 거기에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소모적 지출이 될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에너지원이다. 그 힘은 현재 판단을 도와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다. 희망은 "너무 비싸도 사야지"란 의지에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함께라면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위정자에게 희망을 걸기보다 이 책을 나누는 독자들이 미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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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ise doesn’t go away, but the most successful people I know have figured out how to live with it, to lean on the people who believe in them, and to push onward with their goals.

I was cautious. I stuck to what I knew. It’s hard to put into wards what sometimes you pick up in the ether, the quiet, cruel nuancs of not belonging-the subtle cues that tell you to not risk anything, to find your people and just stay put.

This may be the fundamental problem with caring a lot about what others think: It can put you on the established path-the my isn’t that impressive path-and keep you there for a long time. Maybe it stops you from swerving, from ever even considering a swerve, because what you risk losing in terms of other people’s high regard can feel too cos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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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8-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작하셨군요. 영어는 읽기에 어떤가요? 저는 새로운 영어책을 펼치자니 좀 두려움이 앞서네요. 그래도 곧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8-18 09:41   좋아요 0 | URL
자서전, 에세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함께 읽었던 책 중 가장 수월하게 읽히는 것 같아요. 물론 중간중간 어려운 단어는 등장하지만. 번역서 읽고 원서 읽으시면 그래도 잘 읽히실 것 같아요. 그나저나 작가가 역시 똑똑하고 글 잘쓴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어서 공동 지도부를 발전시키는 한편 지역 차원의 동력과 통제를 유지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많은 남자들이 감옥에 갇히자 여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점점 지도부의 자리를차지했고,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정치에서 흔히 배제되는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 P252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위가 또다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 대다수가 1990~1991년 걸프전과 관련해심각한 오산을 했기 때문이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점령한 거의 직후에,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한 사실상 거의 모든 주요 아랍 강국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국제적 동맹에 합류했다. 아랍연맹 회원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담 후세인의 행동을 뒤집어엎기 위한 동맹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의 탈식민 국가들이 식민지 시절 경계선과 그 안에서 자라난 국가를 보호하는 쪽을 일관되게 선호한 것과도 일맥상통했다.
아라파트는 이라크에 맞서 쿠웨이트를 확고하게 지지하는 대신 <중립> 방침을 따르면서 양쪽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다. 당사자들은 모두아라파트의 제안을 무시했고, 소련 같은 한결 강력한 행위자의 중재시도도 무시를 당했다. 소련은 고위급 중동 특사를 바그다드로 보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 P264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에 유리한 점령의 부분들-국가와정착민들이 누리는 갖가지 특권과 특전을 유지하는 한편 성가신책임을 떠넘기는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자결권과 국가 수립, 주권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오슬로 협정은 이런 수정의 신호탄이었고, 이후에 다른 협정들이 추가되었다. - P296

하마스가 부상한 것은 많은 이들이 20세기 대부분 동안 중동정치를 지배한 세속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파산이라고 간주한 현상에 대한 대응을 대변하는 지역적 추세의 일부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무장투쟁에서 벗어나 비록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외교적 경로로 돌아선 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조직이 길을 잃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하마스는 그 결과로 극히 보수적인 사회적 입장과 모호한 미래상을 내세우면서도 몸집을 부풀렸다. - P303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필수적인 가림막을 제공했다.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심각한 분열과 가자의 고립을 활용해서 가자 지구에 세 차례에 걸쳐 야만적인 공중과 지상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 P319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 P345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을 돌아보면,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확대하는 데 세 가지 접근법이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의 사례를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남아프리카인, 아일랜드인 등 다른 식민-정착민 경험과 풍부하게 비교해 보는 것이다. 첫 번째와 관련된 두 번째 접근법은 모든 식민지 분쟁의 특징인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엄청난 힘의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는것이다. 세 번째이자 아마 가장 중요한 접근법은 불평등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 P346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목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점령을 종식하고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번복하는 것,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남은 22퍼센트 땅에 아랍권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해서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 현재 국외에서 사는 나머지 절반의팔레스타인인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는 것,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서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주권적인 두-민족국가를창설하는 것, 또는 이 선택지들을 일부 조합하거나 변형하는 것 등 여러 방안이 있다.
분쟁의 약자인 팔레스타인은 분열된 상황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통합을 이루기 전에 우선 새로운 민족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목표를 재정의해야 한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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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광야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중앙아시아 편 ㅣ 뭉우리돌 3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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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채우고 있는 건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 1937년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삶의 뿌리가 송두리채 사라져버린 그들의 애환과 설움이 작가의 사진과 이야기 속에 남았다. 떠나가는 사람들과 장소, 사라질 문화는 남겨진 기록으로 명맥을 잇기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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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 being that in life you control what you can.

Failure is a feeling long before it becomes an actual result. It‘s vulnerability that breeds with self-doubt and then is escalated, often deliberately, by fear.

Her goal was to push us out into the world. "I‘m not raising babies." she‘d tell us. "I‘m raising ad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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