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모든 형식체계에서 참은 정리성을 초월한다는 사실이 그 체계의 "불완전성"이라 불린다.
괴델의 증명 방법에서의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가 겉보기로는 틀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추론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추론 방법들은 어떤 형식체계에도 통합되는 것에 저항한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보기에는, 괴델이 인간의추론과 기계적 추론 사이의, 지금까지 미지였던, 그러나 아주 중요한 차이를 발굴해낸 것처럼 보인다. 생명체계와 비생명체계의 추론능력 사이의 이러한 불가사의한 차이는 참이라는 개념과 정리성이라는 개념 사이의 차이에 반영되어 있다.또는 적어도 그것은 상황을 "낭만적"으로 보는 방식이다." - P117

어떤 회사 중역이 한꺼번에 여러 통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멋진 전화기를 가졌다고 해보자. A와 통화하고 있는데 B한테 전화가 온다. A에게 말한다. "전화 끊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물론 그는 A가 전화를 끊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간단히 단추를 누르고는(푸시(push)) B와 통화한다. 이어서 C한테 전화가 온다. 똑같은 통화 일시중단이 B에게도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지만 너무 길게끌지는 말자! 자, 이제 C하고 통화가 끝났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중역은 B에게 - P170

로 "돌아와서(팝(pop))" 통화를 계속한다. 한편 A는 그 회선의 다른 쪽 끝에 앉아서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전화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통화 대기자를 위한 배경 음악을 듣고 있다.……………. 이제 가장 간단한 경우는 B와의 통화가 끝나면그 중역이 마침내 A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B와의 통화가 재개된 이후 새로운 통화자 D가 전화를 거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B는 다시 한번 통화 대기자상태가 되고(스택에 푸시됨), D가 통화 상대자가 된다. D와의 통화가 끝나면 B에게 돌아오고 그러고 나서 A에게 돌아온다.  - P171

지능은 패턴을 좋아하고 우연적인 것은 꺼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케이지의 음악에 들어 있는 우연성은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심지어 설명을 듣고 나서도,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반면에 바흐의 많은 작품들은 말이 필요 없다. 이런 점에서 바흐의음악은 케이지의 음악보다 더 자기-완결적이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인간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전제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P233

체계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생각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외부에서는 아니다. 당신은 체계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체계 바깥에서, 체계를 이해한다. 그래서 심지어 그 자체 안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이론에 대해서도 여전히 메타이론-외부에서 보는 견해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이론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260

당신이 체계에서의 작업(기계-방식)과 체계에 대한 생각(지능방식)을 조심해서 구별하지 않는다면, 오류가 생길 수 있다.  - P261

완전히 형식화한 다음에, 가야 할 유일한 길은 형식체계를이완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체계는 너무나도 다루기가 불편해서 모든 실용적인 목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따라서 TNT를 더 넓은 맥락, 즉 도출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새로운 추론규칙을 도출할 수 있게 하는맥락으로 집어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추론규칙을 표현하는 언어, 즉 메타언어의 형식화를 요구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 증진 묘책들은 어느 것도 TNT를 더 강력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저 TNT를 좀더 쓰기 쉽게 해준다.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수론 전문가들이 의존하는 모든 사고 양식을 TNT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TNT를 더 큰 맥락속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정리들의 영역을 확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TNT에서의또는 "새로 개선된 버전"에서의 작업을 전통적인 수론 작업과 더욱 닮아가도록 할 뿐이다. - P308

지각을 억누르는 것, 논리적, 언어적, 이원론적 사고를 억누르는 것-이것이선의 본질이요, 이름의 본질이다. 이것이 바로 언-방식(Un-mode)으로 지능적인•것도 아니고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언(Un)"이다. 조주는 언-방식에 있었고그렇기 때문에 그의 ‘무‘는 그것을 불문(不問)에 부친 것이다. 그 언-방식은 선사운문(門)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
호기심이 많은 중이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진정한 길입니까?
"그것은 바로 네 눈앞에 있다." 선사가 말했다.
"어째서 제 눈에는 안 보입니까?"
"왜냐하면 너는 네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흡"그러면 선사께서는 그 길을 보십니까?"
"네가 나는 어쩌지 않는다‘, ‘당신은 어쩐다‘ 등 이런 식으로 말하며 이분법적으로보는 한 네 눈은 흐려져 있다." 선사는 말했다.
"저도 선사께서도 없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습니까?"
나도 너도 없다면 그것을 보려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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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무선 보급판) ㅣ 디 에센셜 에디션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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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르게 장벽처럼 느껴지는 작가들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작품을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쌓아두고 있었다가 묵혀둔 이 책부터 시작해야지 하며 읽었다. 대표작인 <자기만의 방>을 비롯해 다양한 단편을 싣고 있어서 작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울프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살며 다양한 작품들을 남긴 작가다. 아버지는 당대 영국 인명사전을 편찬할 만큼 최고의 지식인이자 에세이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만큼 울프는 지식인의 삶을 곁에서 보고 자랄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울프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집안의 철학자 레슬리 스티븐‘이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철학자로 비췄던 모양이다. 울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니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어떤 모습인지 떠올리게 되었다. 어릴 때는 그 시절 보통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고지식하고 완고했던 가부장이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기본적인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며 조금 바뀐 면도 있다.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인생 선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지침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작가기도 했던 아버지에게 글쓰기 비법을 얻을 수 있었던 점도 있었다. ‘되도록 적은 단어로 되도록 명료하게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의 비법이라는 지침은 내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면 주제를 놓친 채 장황하게 늘어놓기 쉽다. 명료하고 간결하게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개인적으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어제 신문을 읽으면서 AI가 던져주는 글은 결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보기도 했다(요즘은 AI의 도움을 많이 얻으며 레포트를 내서 교수나 편집자들이 비슷한 글들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유산>에서는 길버트 글랜던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길버트 글랜던은 사고로 아내인 안젤라를 잃었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그녀의 일기장에서 B.M.이라는 남자와의 묘한 관계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용기를 내서 마침내 길버트에게 얘기했다. 그는 아주 친절하게도 기꺼이 도와주었다.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나태하고, 너무 쓸모없다고 느낀다고 했다. 자신의 일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바로 저 의자에 앉아 이 말을 하면서 아주 귀엽게 얼굴을 붉혔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당신이 나를 돌봐주고 가정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충분하지 않소? 그렇지만 당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물론 반대하지 않겠소. 무슨 일이라고? 어느 구역에서? 어떤 위원회라고? 다만 당신이 아프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해요.
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이 사연을 보면서 나는 여동생을 떠올렸다. 여동생은 이른 나이에 결혼 후 가정주부가 되었고 아이를 곧바로 낳아 엄마가 되었다. 아이 둘에 시아버지를 모시며 20 여년을 훌쩍 넘게 살았다. 결혼하며 사는 동안 빠듯한 살림에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제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못내 답답했고 화가 났다. 여러 번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놓고 제부에게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서 제부와는 사이가 껄끄럽다. 인사를 하곤 하지만 그 찜찜함이 내 안에 남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19세기 런던 최고의 지식인 계층에서 태어나 지적 문화를 향유했던 울프였지만 당시 대다수의 여성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며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V양의 미스터리한 일생>에서도 그런 대다수의 여성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벽에 난 자국>, <큐 식물원>은 묘사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벽에 난 자국>은 대체 벽에 난 자국이 무엇인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추리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큐 식물원>은 식물원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사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 인상적인 인 기법을 통해 묘사한다.

<웃음의 가치>나 <질병에 관하여>, <여성의 직업>은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글이다. <웃음의 가치>에서 울프는 웃음이 쉽사리 평가 절하되는 상황에 대하여 칼날을 겨눈다. 이는 진지한 체하는 정신이 훌륭하다는 남성적인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예술에서 희극적 태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삶이 비극만으로 구성되지 않지만 웃음을 통해 삶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질병에 관하여>에서는 몸에 대한 기록이 부족함을 이야기하며 지성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감각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가한다.
<여성의 직업>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집안의 천사(?)였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도 여성들 앞에 많은 유령과 방해물이 가로막겠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대표작인 <자기만의 방>은 케임브리지 대학 내 여자 대학인 거턴과 뉴넘에서의 강연을 토대로 나온 작품이다. 워낙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라 읽지 않았음에도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과연 이를 어떤 방식으로 끌어낼지가 궁금했다.
여성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을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보다 여성이 직업 세계에 진출하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일과 가사(살림, 육아)를 병행하기란 쉽지가 않은 상황에서 약 100 여 년 전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고정적인 편견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는 말을 던진다.
여성은 평정을 지켜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들이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며, 자신들의 남자 형제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훈련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노력을 기울일 활동 영역을 요구한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와 절대적인 침체에서 고통받는다. 여성은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짜며 피아노를 치거나 가방에 수를 놓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는 동료 남성들이 말한다면 그들은 도량이 좁은 것이다. 만일 여성이 관습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이상을 배우려고 하거나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해도 그들을 나무라거나 비웃는 것은 분별없는 일이다.

당시 여성 작가들은 얼마 없었던 만큼 출간된 글들은 남성 작가들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었다. 문학 속에 여성들 간의 관계는 지나치게 단순했다. 대부분 여성들의 모습은 남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제시되었는데 이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이해가 편파적이고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울프는 앞선 여성들의 글을 보면서 배울 점은 배우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 소설가들은 남성의 생활을 동경하거나 모방하여 남성의 시선에 의하여 글을 내놓았다. 반면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브론테 등은 여성이 여성의 정체성으로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작가이기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울프는 여성 소설가들이 자신의 성의 한계를 용감하게 인정함으로써 탁월한 경지에 이르기를 열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사소한 것이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든 그냥 써라!˝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말이다.
내가 쓴 글이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여서 타자를 치기를 망설이거나 그만두지 말고 용기를 내 써보라는 것이다.

울프의 말은 지금도 현시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여성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는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내가 여러분에게 더 많은 책을 쓰라고 권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그리고 세계 전반에 도움이 될 일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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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ㅣ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7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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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지리학자가 스위스 여행 중 아나키즘 노조 사람들과 만나면서 아나키즘 사상에 영향을 받고 러시아에 돌아와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체코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와중에 탈출해서 사회주의 아나키즘 운동에 매진했다. 이 책을 쓴 크로포트킨의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이론이자 사상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 이론은 생존경쟁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에 의한 약육강식이 벌어진다는 논리로 인종 차별과 인간 중심주의로 해석되었다. 최근 들어 그 해석에 반기를 들며 다양한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다. 크로포트킨은 그 시절 이미 다윈의 이론에 대한 해석이 오해에서 비롯된 통념이라고 주장했다(상호부조가 진화를 낳게 하는 진보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진화를 주제로 유럽 대륙에서 최근에 발표된 중요 저작들은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양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는 외부적인 전쟁으로, 이는 혹독한 자연조건에 대한 투쟁 혹은 경쟁 관계에 있는 종에 맞서 벌이는 투쟁을 말한다. 두 번째는 내적인 전쟁으로, 이는 같은 종 내에서 생존 수단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가리킨다. 생물학자들은 또 진화에 있어서 내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범위나, 이것이 진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모두 과장되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다윈 자신도 상당히 뼈아프게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에 종의 번영을 성취하는 데 동물들의 사회성이나 사회적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다윈도 이미 인정한 바 있는데도, 오히려 그의 뜻과는 달리 과소평가되었다. ...

당대의 사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중들이 인간사회 제도의 진화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으며, 또한 대중은 무기력할 뿐이어서 인간사회 제도의 진보는 정신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 P7


그는 오히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은 상호부조하는 과정에서 진화했다고 말한다(진화 과정에서 동물이나 인간들 사이에 보이는 도움은 사랑이나 동정이 아닌 상호부조나 상호지원에서 얻어지는 힘이다). '오?' 나같이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일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떤 책을 읽다가 장바구니에 담은 것 같은데 항상 장바구니에 담을 때 어떤 계기로 담았는지 적어둬야지 하면서도 매번 지나치곤 한다. 아무튼 그렇게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동물의 상호부조부터 역사적 흐름에 따른 인간의 상호부조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독자를 설득시킨다. 


동물계에서는 진화의 단계마다 군집을 발견하게 된다. 군집은 순전히 자연적인 성격을 잃게 되어 더 이상 단순한 본능에 따르지 않고 이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더 고등한 척추동물들은 주기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군집에 의존해서 주어진 욕구, 즉 종의 번식, 이동, 사냥이나 상호 방어 등을 충족한다. 군집은 임시적으로도 이루어진다. - P82~83

동물은 집단 생활 속에서 동정심을 배우는데 이는 감수성과는 다른 더 높은 수준의 도덕에 의한 감정이다. 동물은 경쟁에 의한 충돌이 아니라 기후나 전염병에 의해 더 큰 피해를 입는다. 


고대인은 이동생활을 하다가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군집을 이끌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공동체는 특정한 규율 하에 공동작업을 했으며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자에게는 사법절차에 따라 처벌을 했다. 다양한 부족들의 상호부조 사례가 나오는데 그중 나는 특히 카바일족의 상호부조가 인상적이었다. 카바일족은 이미 사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분명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존해했다. 하지만 가깝게 함께 살며 어떻게 빈곤이 시작되는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난을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는 일종의 사고로 여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부자들은 그들의 논밭에서 일을 해준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은 답례로 자기 차례에 일을 해준다. 더욱이 젬마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쓸 수 있도록 공동으로 경작하는 정원이나 논밭을 따로 떼어 놓는다. ... 카바일 마을에 들어온 모든 이방인들은 겨울에 집을 지을 권리를 갖게 되고 24시간 동안 공유지에서 말들이 항상 풀을 뜯을 수 있다. 필요학다면 이방인은 거의 무제한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도 있다. - P181~182

이후 공동체가 국가적 규모로 커져 국가법이 만들어졌음에도 부족 공동체의 민회와 관습법은 유지되었다.


중세 시기 전사집단의 수장들은 법과 권리를 통해 세력을 얻어 확장해나갔다. 그들은 잘못된 행위를 적절하게 복수하는 행위를 정의라 내세웠는데 이는 앞선 부족 단계에서 발전된 것이다. 부족이나 동맹마다 관습법이 달라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과거의 법을 존속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벌금은 공동 설비나 방어를 위한 일에 사용되었다. 자유도시가 등장하면서 동맹회, 협동단체, 친목회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진다. 조직을 통한 상호지지와 자유 추구는 유럽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었다. 이는 길드라는 새로운 모델이었는데 구성원들은 서로를 형제나 자매로 부르고 대우하며 평등하게 대했고 공동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중세도시는 지역에 의한 세대주들과 직업에 따라 서약을 맺은 길드 구성원들인 이중의 연합체로 구성되었다. 중세도시는 개인의 자유, 자치 경영권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내에서는 평화를 바탕으로 한 상호부조로 굴러갔다. 


중세도시는 특히 수공업길드가 중심이 되었다. 수공업길드의 구성원들은 상인이면서 수공업자들이었고 수공업 장인들은 길드를 상대로 물건을 만들어 조합인들을 위해 제품을 만들었기에 품질에 책임을 지면서 장인 정신을 발휘했다. 중세인들은 장인 정신을 존중했기에 제품을 믿고 샀다. 기본적으로 길드는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교회는 신권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나 황제에 빌붙으며 중앙집권화된 정치를 발달시켰다. 영주는 도시가 자리잡지 않은 곳에 영지를 확보하고 농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왕실을 위한 요새 도시로 만들어 기사들을 위한 땅을 분배하고 상인들을 위한 권리를 확보했다. 이 영역이 커지면서 점차 국가화되었다. 국가는 길드의 독립성을 침해하기 시작했고 이에 길드 구성원들의 불평이 증가하며 농민,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는 농업을 무시하고 상공업의 부를 기반으로 성장했기에 점차 농촌, 지방과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실제로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점차 중앙집권화되는 국가 체제에 맞서 촌락 공동체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저항하는 투쟁이 있었다. 그래도 19세기 초반까지 스위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촌락 공동체(의 공유 제도)는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촌락 공동체 생활에서 유래된 습속을 유지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국가는 공유자를 압박해 분할을 집행하거나 땅을 사적으로 전유하도록 부추기면서 점차 공유 경제는 무너지고 촌락 공동체는 힘을 잃었다. 


근대 시기 길드를 이은 것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며 때론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노동조합끼리 자유롭게 연합을 맺고 협동했다. 그밖에 모든 가능한 방면으로 공동 행위를 위해 만들어진 무수한 사회집단들이 있었다. 국가는 개인 집단 위에 군림하며 동맹을 저항으로 받아들였으나 노동자들은 다양한 위장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결했다. 때로 정치 활동을 통해서 투쟁하기도 했다.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도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 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극복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 P339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동물은 연합하여 자연 조건에 맞선 투쟁을 위한 최고의 무기로 삼았다. 인간도 씨족을 시작으로 종족, 종족끼리의 연합, 국가로 확대되며 상호부조의 원리 하에 진보했다. 상호투쟁보다 상호지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윤리적인 진보라는 개념 때문이라고. 이처럼 자연 하에 동물,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여 상호부조했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개인적으로 진보와 윤리라는 개념이 서로 합이 맞기란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이런 낙관적인 해석을 시도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챙겨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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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
안드레아스 말름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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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부터 시작해 장장 4개월에 걸친 팔레스타인 주제 독서 읽기 모임이 이번 달로 끝이 났다. 마지막 주인공은 이 책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의 파괴와 지구의 파괴는 그 연관성의 간격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째서인가.

1840년은 중동과 기후 체계 모두에 역사상 중추적인 해였다. 대영제국은 그해 처음으로 주요 전쟁에 증기 함정을 투입했다. 증기력 기술이 도입된 이후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이 시작되었다. 증기 엔진을 돌리는 연료는 석탄이었다. 영국의 산업을 통해 확산된 증기력은 영국을 최초의 화석연료 경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증기력이 영국 제도 내부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그것은 절대로 기후에 각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이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증기력이 나머지 세계로 수출되어 인류가 대규모 화석연료 내연기관의 소용돌이로 끌려 들어간 덕분이었다. - P43

영국의 산업혁명이 근현대에 미친 영향은 컸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산업 시스템의 동력이 그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후 문제도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다만 중동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1840년 영국이 증기 함정을 투입한 곳이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해안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당시 이집트의 최고 집권자인 알리의 중동 세력 확대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알리는 고위층 귀족으로 오스만제국에 충성을 해야 했으나 술탄은 그의 세력 확대에 위협을 느꼈다. 영국은 부상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오스만 제국의 안정이 필요했다. 게다가 오스만제국은 자유무역협정 이후 영국의 주요 수출터인 곳이기도 했다. 알리는 아랍 땅에 화석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영국 제국주의에 힘에 가로막혔다.

1830년대 말 영국에서는 기독교 시온주의가 급증하던 터였다. 1840년 대영제국의 주요 설계자인 파머스턴 경은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 식민지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이스탄불 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발송한다.
이 유대인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하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땅을 사들이도록 격려하고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분별력 있는 처사일 것입니다. ... - P74

당시 팔레스타인은 비옥했으나 사람이 없는 땅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사람이 없는 땅은 땅이 없는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구호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에 모여들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오래 되었고 시온주의의 기원도 이처럼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다만 시온주의가 그저 제국에서 생겨나고 정작 유대인은 시온주의 프로젝트에 설득당했을 뿐일까 하는 의문점은 남았다(이스라엘의 행위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1917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시작된 이후 1947년, 1967년을 거쳐 서구가 지원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정착민 식민주의를 시행한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파괴 과정은 아주 간략하게 다루고 앞서서 말한 것처럼 화석 자본에 의한 제국주의의 확대 과정으로 인한 지구의 파괴 단계에 더 주목한다.
저자가 팔레스타인 현안을 기후라는 문제와 연결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나크바를 지구라는 하나의 행성 전체로 확장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괴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조국이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살아갈 만한 행성 전체이다(P175). 현재의 기후 위기에 저항해야 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문제에 저항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다. 일견 이해되는 면도 있으나 그대로 대응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기존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안을 다룬 책들과는 다른 전략을 썼기에 차별화되는 면이 있다.

2023년 10월 7일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인적, 물적 파괴가 심각해졌다. 하마스의 작전 수행 중 민간인의 피해가 있었기에 그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섣부른 선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이 수행하는 모든 일이 옳은 것은 아닐 테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이를 동조하는 세력의 책임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민간인에 피해를 분명 입혔으니까.
뒷부분은 저자의 주장인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에 대한 내용, 이스라엘이 유럽과 미국 등 서구에 로비를 했다라는 로비설 등에 대한 반론과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실려 있다.

4개월에 걸쳐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읽으며 공부했다.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들의 역사와 문제를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상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도 좀 겹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어서인지 갈수록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앎과 실천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책을 읽고 나누는 것이 현재로선 내가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실천적 범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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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노은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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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속에서 자신들이 '온 세상 최고의 세계'를 향해 곧고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 P28


19세기 유럽인들은 자유주의와 산업혁명에 의한 진보 속에 하루 하루를 낙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전 세계만 해도 두터운 신분제 하에서 고정된 방식에 갇혀 지냈던 사람들이 최소한 더 나은 자유 속에 평등을 꿈꾸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자유주의와 낙관주의 속에 살았던 그들은 창밖에서 동터오는 새로운 하루하루가 우리의 삶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겪었던 가장 암울한 밤에도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인간이 얼마나 강인하게 위험을 견뎌내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상상하지 못했다(P62). 


좋은 책이 최고의 대학을 대신한다는 에머스의 공리는 내게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사람은 굳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심지어 김나지움을 나오지 않고서도 뛰어난 철학자나 역사학자, 문헌학자, 법학자, 혹은 그 밖의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나는 여전히 확신한다(P166). 

그는 어릴 적부터 좋은 책을 읽으며 기초 체력을 키웠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남다르긴 했던 것 같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첫 시집을 써내 출판사로부터 계약을 따냈으며 시집에 릴케로부터 헌사가 적힌 답장을 받았다. 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당대 최고 작곡가였다는 막스 레거가 시집 속에서 선택한 6편의 시에 붙인 곡이 연주장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에 편집진으로 들어가 활동하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명사들을 만나며 우정을 쌓아 나갔다. 특히 릴케와 남다른 우정을 쌓았고 로댕의 작품에 대한 몰입을 보면서는 배워야 할 부분이라 여겼다. 


츠바이크는 유럽을 넘어 인도, 미국 등지를 여행하게 되었다. 여러 배경의 사람을 만나며 그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여행은 책에서 알려주지 않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때론 긴장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이전까지의 경험의 범위는 유럽 내였다. 그러다 이때 바깥 세상을 보며 겪은 충격은 유럽이 다가 아님을,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아닐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라테나우는 그에게 유럽을 넘어선 시각도 있음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인도와 미국 여행을 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인도 여행에서는 칼 하우스호퍼 부부를 만났다.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의 무관으로 파견된 칼 하우스호퍼는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기에 츠바이크는 동양에 대해 더 아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칼 하우스 호퍼의 제자 중 루돌프 헤스가 가진 사상(‘생활공간’, 지정학) 중 '생활공간'이란 이론이 히틀러에 의해서 “오늘은 독일이 우리의 것이고, 내일은 온 세계가 우리의 것이다”라는 구호로 변질되었다(P309)는 것이 아이러니다. 

츠바이크가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한다. 낯선 땅에 떨어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럴 법도 했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구직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내던졌다. 1910년대 미국은 구직을 위해 국적, 종교, 출신을 묻지 않았고 여권 없이 여행이 가능했다고 그는 언급했다. 그런데 그것은 서양인이고 유럽인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노동자였다면 제약을 받았을 테니까 말이다.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대중은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전쟁을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전쟁은 전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거리감이 전쟁을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학교 교과서나 미술관 그림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P374).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츠바이크는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벨기에에서 마지막 열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 하차하고 보니 역내에 진입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만다. 그 허탈감과 불안감이란 어떠했을까. 그동안 작은 충돌들은 있었겠지만 전쟁이 벌어지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을 사람들, 눈 앞에 벌어진 현실에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 같다. 1차 대전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이용한 화학전이 벌어졌고 군용기를 이용한 항공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전쟁이었다. 결과적으로 앞선 시대와는 전혀 다른 전쟁의 양상,생각보다 더 길어진 전쟁에 피해는 더욱 컸다. 


그래도 1차 세계대전의 기간 동안에는 전쟁중이면서도 각 나라들이 폭력보다는 문화 국가임을 보여주고 증명하기 위한 문화 예술 공연이 넘쳐났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자신들이 양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1차 대전이 벌어지는 곳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자유로웠다고. 궁정 고문관 람마슈(후에 헤이그평화회의 의장)가 츠바이크에게 고백하기를 오스트리아가 독일과의 동맹에서 탈퇴하고 평화의 길을 걷고자 카를 황제의 약조를 받아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하여 현실화되었더라면 1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종전 후 오스트리아 크로네 화폐 가치가 급락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외국화폐만이 유일하게 안정적인 가치를 지녔는데 그 시절 전쟁을 치른 국가들은 대부분 이러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나름 긴 기간 동안 러시아에 있었다. 톨스토이의 무덤을 찾기도 하고 막심 고리키와는 개인적으로 만남을 갖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잘츠부르크 집에 집을 마련했는데 이 무렵 잘츠부르크는 여름 축제이자 예술의 순례지로 자리매김했기에 자연스레 그의 집은 유럽 각지의 명사들이 드나드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필 문서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필 문서에 관해 쓰인 책과 인쇄된 경매 목록을 모은 문헌들을 찾아다닌 끝에 그는 수집가이자 필적 영역의 최고 권위자로 명망을 떨쳤다. 수집활동 마지막 10년 간은 특별히 행복한 기분으로 창작한 작품, 마지막 절정기에 창조된 작품을 모으고자 했다고. 

나는 수집을 통해, 나 자신의 작품들보다 그 전체로서 더 오래 지속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 히틀러의 시대가 시작되고 내가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수집의 즐거움은 물론이고 무언가를 영속적으로 보존할 수 있다는 확신 또한 사라졌다. 한동안 나는 그 일부를 금고나 친구들에게 맡겨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박물관, 수집품, 무기고는 계속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 자체로 굳어버린다는 괴테의 경고에 따라, 더 이상 내가 정성을 들여 완성해 나갈 수 없게된 수집품과 작별하기로 결심했다(P576, 577). 더 이상 수집을 할 수 없게 된 이유가 서글펐다.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면 그는 멀쩡히 살아나가서 더 많은 수집품과 그의 작품들을 남겼을 것이 아닌가.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가장 끔찍한 저주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현재로부터 도피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이었다. 이전 세대는 재앙이 닥치면 고독과 고립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우리 세대에 와서는 지구 어딘가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경우, 바로 같은 순간에 모든 것을 알고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운명은 나와 함께 있었다. - P650

히틀러 집권 전 잠시 평화로웠던 시기 츠바이크는 개인적으로도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히틀러 집권 이후 츠바이크의 저서들은 금서 조치가 내려진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침공, 그리고 이어서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츠바이크는 재혼을 위한 서류를 증명받기 위해 간 날 독일의 폴란드 침공 소식이 들었다.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인 그는 영국의 입장에서 적국의 외국인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탈출해야 했다. 

1차 대전만 해도 대중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1차 대전을 경험해본 유럽인들은 1939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전쟁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평화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것이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츠바이크가 쓴 마지막 이야기라고 알려진 이 책은 이처럼 대략 1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2차 대전 시작 후까지를 다루었다. 근현대 역사상 가장 격변이었던 시대, 그의 서술을 빌어 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경험했다. 그 시기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시류를 어떻게 따라갔을까, 벅차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순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날도 AI의 흐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상황들을 보면서 이것 또한 새로운 격변인가 생각하니까 말이다. 

사실 어찌 보면 개인이 쓴 일기이자 에세이인데 역사로도 읽히고 철학, 인문, 예술, 사회 비평 등 다양한 장르로 읽혔다. 무엇보다 지금 읽어도 다양한 생각들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띠지에 적힌 '현대의 고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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