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즌 경Lord Curzon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속 어딘가에,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약 - P26

간의 정의나 행복이나 번영, 남자다움이나 도덕적 존엄의 인식, 샘솟는 애국심, 지적 계몽의 여명, 또는 솟아오르는 의무감을 남겼다고 느끼는 것-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국인이 인도에 진출한 이유입니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말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커즌을 비롯한 식민 지배자들이 보기에, 토착민들은자기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또한 이런 것들을스스로 이룰 수 없었다. 커즌은 다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없으면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19한 세기가 넘도록 식민주의자들은 다른 지역의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바로 이런 언어로 묘사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비롯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구사하는 경멸적인 언어는 다른유럽인 동료들의 언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 P27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mizrahi (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Sephardi(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개 제2언어나 제3 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 P40

당시 영국 정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는 지난100여 년간 충분히 분석되었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 philo-Semitism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이런 기대는 <전 세계 유대인>이 새롭 - P47

게 등장한 혁명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힘이 있다는 확신과 연결되었다. 이런 여러 충동 외에도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23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영제국을 움직인 것은 절대 이타주의가<아니었다>. 영국이 전시에 이 지역에 대해 내놓은 여러 약속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기획을 후원한 것도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완벽하게 기여했다. - P48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최근 들어 유대인의 민족자결에 대한 (광신적이지는 않더라도)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 P55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영국의 위임통치 정부와 나란히 시온주의 행정 체제가 탄생하도록 허용했다. 위임통치 정부는 이 체제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런 유사 정부는 결국 인구의한 부분에 대해 주권 국가의 많은 기능을 행사했다. 민주적 대표뿐만아니라 교육, 보건, 공공사업, 국제 외교의 관리까지 그들의 수중에들어갔다. 주권의 속성을 전부 누린 이 정치체에 없는 것은 군사력뿐이었다. 하지만 군사력도 조만간 확보하게 된다. - P63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차별적인 이민법이 제정되자, 독일의 많은 유대인은 이제 팔레스타인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과 시온주의 양자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이 입증되었다. 1935년 한 해에만 6만 명이 넘는 유대인 이민자가 팔레스타인으로 왔는데, 이 숫자는 1917년 이 땅에 살던 유대인 인구 전체보다 많은 규모였다. 주로독일에서 왔지만 유대인 박해가 점점 격렬해지던 이웃 나라들에서도왔다. 이 난민들 대부분은 숙련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불매 운동을 끝내는 대가로 나치 정부와 시온주의 운동이 맺은 이전협정 Transfer Agreement 덕분에 독일 유대인들은 총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자산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 P68

1939년 1월 팔레스타인에서 방침을 변경할 것을 내각에 권고한 보고서에는 이집트와 이웃 아랍 국가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인도 담당 장관의 언급이 실려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순히 아라비아의 한 문제가아니라 범이슬람 차원의 문제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는 만약 이<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인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 P79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런 삼중의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엇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보수적 지도부가 선호했던 방식, 즉 공허한 항의 시위를 개시하면서 영국의 선의와 <공정성>에 호소하기 위해 아무 쓸데 없이 런던에대표단을 파견하던 법적 접근법을 포기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 P86

명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대신 영국인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위임통치 당국에 협조를 거부하며(국민회의당이 인도 제국에 대해, 또는신페인당이 아일랜드의 영국인들에 대해 했던 것처럼), 달리 방법이없으면 실제로 결국 그랬던 것처럼 이웃 아랍 나라들이 걸은 길을 따라 무장봉기를 일으켰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 국제연맹 위임통치라는 강력한 삼각동맹 앞에서 해볼 만한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뚜렷한실체가 없고 조직화되지 않은 아랍의 여론 말고는 진지한 동맹자도전혀 없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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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8-0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이 유대인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려고 했다는 것이군요. 역시 악랄한 영국... -ㅁ- 석유의 발견 또한 영국이 중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영국엔 석유가 없었으니... 나중엔 발견되었지만요.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빨리 만들었어야 했는데.. 한 번의 실수가 길게 이어지네요.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6-08-06 10:52   좋아요 2 | URL
작가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라 실제로 집안 식구들 중 고초를 겪은 분들이 있더라구요(책에도 관련 사연이 나옵니다).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선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모로 유대인에게 유리한 정책이 수행되었습니다. 교묘한 기만 정책도 있었구요. 이런 사건들이 누적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이 193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아직 초반부지만 일단 지금까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이 책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고요.
 

1782년 여름 32세의 캐럴라인은 자신의 항성 목록을 만드는 과업을 시작했다. 이듬해 캐럴라인은 처음으로 독립적인 발견을 했다. 유명한 메시에 Messier 천체 목록에서 누락된 성운을 발견하고 결정적으로 현재 메시에110이라고 알려진, 안드로메다은하와 짝을 이루는 왜소타원은하를 발견한것이다. 오빠 윌리엄이 사망한 지 6년 후 허셜은 왕립천문학회에서 금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는 그 시대에 과학계에서 이룰 수 있는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또 다른 여성인 베라 루빈이 이 훈장을 받기까지는 다시 168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 - P74

내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이 인생이 근면한 인생이었다는것이며,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P82

21세 때 아이더는 이미 자신의 고향 밀턴에 에머슨을 초청하여 정치적으로 대중을 일깨우는 강연을 주최한 적이 있었다. 반면 노예제 반대 결의안때는 폐지 반대 투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24명 안에 아이더가 들어 있다. 250표의 찬성자 명단에는 프레더릭 더글러스, 윌리엄 개리슨의 아내, 헨리데이비드 소로의 어머니와 누나가 이름을 올렸다. 아이더는 미첼의 과학적성취를 미국과 여자의 승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마리아에게 "연단의 여자 platform women "만은 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 P92

두 가지 진실이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워보인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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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 해외파병을 둘러싼 문제들
천자오빈 지음, 박철현 옮김 / 빨간소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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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학계는 주로 중국공산당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정책 결정에 따른 초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 시민은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져왔다. 한국 저자들이 쓴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도 주로 중국(과 소련)은 정권 결정자 중심으로 그려져 왔는데 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나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시민을 전쟁의 주역으로 보고 그들의 언행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이 참전을 시작한 1950년 11월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4개월 남짓이 대상이다. 책에서는 참전한 군인들 뿐 아니라 다양한 일반 시민들의 동향(도시민, 농부, 문화예술인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화사통신』 기자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수집하여 선택해 내놓은 1차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 재구성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얻은 자료를 조사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 시민들은 노조, 협회, 보습학교, 공산당위원회와 파출소, 세무소 등 다양한 전쟁 관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3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이 경제에 다시 악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전쟁 초기에는 대체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여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대학생들의 진로 선택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푸단대학 4년생인 구제강의 조카딸 가오루이란은 진로 고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나 삼촌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 가까운 곳에서 취업하기를 바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졸업 뒤 진로 결정에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학의 공산주의청년단이 그녀를 토지개혁 운동에 보내려 했지만, 가오루이란은 지주들의 거센 저항으로 신변이 위협받을까 주저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으면 조선과 가까운 "둥베이 지역으로 가든가" 타이완 진공 작전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에 입대해야 한다. 모두 거절하고 싶지만, 그러면 장래는 없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P51).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시민들은 국공내전이 종결되면서 이제 겨우 평화를 얻었는데 또 다시 전쟁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유지 등 기반이 있는 사람일수록 전쟁이 확대되면 지금의 지역을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둥베이 지역 사람들 같은 경우는 만주 사변 때 관동군의 폭격을 받은 경험이, 시난의 충칭 사람들의 경우도 충칭 폭격의 경험이 있어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땠을까. 우선 1950년 당시 "지식분자"의 정의부터 보자. 1947년 3월에 수신청 등이 책임 편집한 《사해》(중화서국 출판)에서는 "지식분자"를 "광의로는 흔히 교육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협의로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즉 정신적 노동계급인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나 1949년 혁명을 기점으로 지식분자의 정의가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신명사사전》에서 "지식분자"를 "흔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그 10배에 해당하는 지면을 마오쩌둥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완전한 지식이라는 논의에 할애했다. 동시에 "반지식분자" 항목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론에 치우쳐 실천 지식을 갖지 않는 이를 가리켰다(P85~86). 지식인들은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붉은색에서 초록색까지, 나라를 위한 적극 참여에서 가벼운 관여, 미루기, 불관여,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주커전은 미핵 공격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의 조선 참전이 공식화된 11월 중순이 되자 방사능 피해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중국 과학 내부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더 나은 학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한편 이때 교회 관계자나 기독 학교 교원 측에서는 친미 감정이 강했기에 교원과 학생 간 갈등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무거운 세금에 경영이 악화되자 도산 위기에 처한 상점들이 많아졌다. 이는 연구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어 대학 등은 경영 압박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상공업이 발달한 톈진, 상하이, 홍콩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톈진과 상하이는 당시 중국 내 공장 수 1, 2위를 다투는 곳이었고 홍콩은 중국인들의 자본이 많이 진출한 장소였다. 이곳의 상공업자들은 원료가 부족해지고 조세 부담이 증가하며 무역이 단절되는 등 경제 여건의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을 예견했다. 대체적으로는 정권을 불신하여 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따라서 예금을 인출하겠다며 대거 소동이 벌어졌고 암금융시장의 이자율이 급증하였으며 통제 물품을 사재기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톈진 상공업자들이 공산당과 가까웠다면 상하이 상공업자들은 국민당과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양 정부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라서 상하이 상공업자들이 더 정권의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노동자, 농가는 해외 파병, 후방 지원에 투입되었다. 이중 농민은 대체로 평화를 선호하고 전쟁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공산당의 선전과 교육이 잘 먹혀 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일부 농민은 정권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며 토지개혁으로 얻은 땅을 처분하는 이들도 있었다(특히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그랬다고 한다). 후방 지원은 한반도와 인접한 둥베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기술직을 제외한 단순 작업에는 대부분 농민들이 투입되었다. 이중 토지개혁에 불만이 있었던 농민들일수록 후방지원에 회의적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 중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 새로 입대한 이들의 경우 친미 감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중일전쟁 때 대일협력군이나 국공내전 중 국민당군에서 귀순한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에 소극적이었다고. 대다수의 장병들은 앞선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며 참전하기를 꺼렸다. 19병단에 조선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10월 초였다. 하지만 이미 8월 중순에 이 병단을 제13병단의 후속 부대로 가을 수확 뒤 산둥성과 허난성에 배치한다는 계획이 군 상층부에서 비밀리에 논의되고 있었다. 이 병단의 장병들은 조선에서의 전황에 다라 자신의 복원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실제로 제13병단은 7월 중순에 복원 절차를 중지하고 복원 예정인 인원을 군에 붙잡아 두었다. 당시 장병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결혼 문제였다. 실제로 19병단의 복원 예정자들은 정치 학습 과정에서 1950년 5월 1일에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혼인법 제19조는 인민해방군 "군인이 본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기산해 가정과 2년간 소식 왕래가 없고 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P302). 

장병의 사기는 승전과 패전에 따라 정반대로 갈린다 인민지원군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리 전투에서 이긴 부대에서는 "적이 패퇴한 사실을 듣고, 들판에 쓰러져 있는 적의 시체를 보고, 승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선전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적극적으로 전투를 요구하면서, 일전을 벌이기도 전에 조선은 해방될 것이고 미군은 역시 약해서 국민당군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순조롭지 않고 사상자가 많은 부대에서는 "'미중 공멸'이나 '수지가 맞지 않는 전쟁이다', '승리의 구호는 들려오지만 그림자는 없지 않은가'"라는 얘기가 나왔다 "비행기나 포병을 보내 공동으로 작전하지 않은 것이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시작한 것을 원망했고, 심지어 마오 주석까지 원망했다"(P328). 


중국 참전 후 전세가 전환되고 나자 시민들은 달라진 반응을 보인다. 평양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시장은 안정을 되잦았고 이전과는 달리 "해볼만하다!"며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1950년 12월 20일에 청간위안과 동급생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실린 수송학교 배정 비준 명단이 학교 게시판에 게시됐다. "군복을 입고 혁명의 전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라고 느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과제는 입대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의 반대를 넘는 일이었다 청간위안의 아버지는 국민정부 시절 난징시 교육국의 관료이자 중양대학 교육학부 교수 및 교무주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안후이성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군사학교 지원 의사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아 천박한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 '혁명'이라는 공론을 떠들어봤자 소용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청간위안은 더 이상 설득한 더 이상 설득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모집사무소에서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도록 16세라고 신고해 입대 수속을 밟았다. 외아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입대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대학 시절 동급생이자 화둥구 당위원회 서기였던 커칭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이 학업을 이어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자녀의 혁명 참여를 지지하라는 훈계뿐이었다(P474). 그러나 타이완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푸저우나 칭다오는 국민당군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경제 제재는 계속 되어 물자 부족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 P495


다만 책에 실린 다양한 사례는 모본이기에 실제 전쟁의 양상을 담고 있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주목하지 않은 목소리(와 그에 따른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중국군의 파병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 그 이후의 양상을 시민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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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것이 됨으로써 동시성을 관통한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성,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사회, 대담한 야망과 맹목적인 희망, 보답 받지 못한사랑과 부분적으로나마 보답 받은 사랑이다. 수평과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삶은 비선형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되며 "전기 biography"라는 직선의 그래프가 아닌 여러 측면과 여러 빛을 지닌 그림으로 나타난다. 삶이란 다른 삶 - P16

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 P17

우리의 습관, 신념, 사상은 살아가는 동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 또한 변화한다. 우리 몸의 세포 또한 대부분 교체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으로 남는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은 과학의 발견을 통해조금씩 변화한다. 그 현실은 우리에게 오직 조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해하고 분석하는 조각이 늘어날수록 그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는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모자이크, 현실의 대리일 뿐이다. 아름다울지언정 완벽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 끝없이 변화해야 하는 대상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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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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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도로 위에 있게 될 거야.˝ 10년 간 가지 못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으로,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 밀입국을 위해 길을 내딛는다. 이를 비롯해 여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군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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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이라는 책도 나와서 관심이 가던데 이런 책도 나왔군요. 화가님 서재는 좋은 책이 보고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6-07-31 16:24   좋아요 0 | URL
2023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 상황은 지지부진한데… 최근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이 중동으로 번지고 있는 것도 영향인 걸까요. 여기 저기 전쟁이 그치질 않으니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람돌이 님께도 좋은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