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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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흐름을 도레의 그림과 함께 간단한 설명과 지도를 통해 장면으로 구성해놓았다(현명한 책의 구성인듯). 전투와 인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쟁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사상자들에 주목한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서로 간 담소, 먹고 마시기, 운동, 언어 등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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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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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권은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면서 3차 십자군부터 마지막 십자군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기간도 길고 무척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 때문에 특히나 3권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많이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재미롭게 읽었다.

3차 십자군에서 살라딘에 맞섰던 리처드. 4차의 엔리코 단돌로, 6차의 프리드리히 2세, 7차의 루이 9세, 8차의 메메드2세까지. 여기에 2차부터 참여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에 이어 소년 십자군이 새롭게 등장한다. 


1, 2차 십자군때까지 영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 뿐 집단으로 출병한 적이 없었다. 이는 프랑스와의 영토 이권 다툼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위한 세금을 거두고 전쟁을 준비했으나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반기를 들면서(당장 떠나기엔 자금, 병력이 부족)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리처드가 승리한 뒤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고 1년 뒤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가 참여했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가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참여한다.


1189년 8월 28일 십자군은 아코 성벽에 이른다. 아코는 항구도시로 출입구는 항구 밖에 없으므로 성벽이 뚫리면 아코가 함락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아코 방어군을 지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리처드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보급선을 중간에 가로채는데 성공하고 아코에 도착한 뒤 십자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리처드는 사령관에 올라 투석기를 성벽을 향해 쏘지 않고 성문을 향해 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성문은 목재로 되어 있으므로 돌로 된 성벽보다 무너뜨리기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전선을 방어선과 공격선으로 분리하여 병사들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니 어떻겠는가. 살라딘은 그에게 휴전을 요청한다. 십자군의 협상 조건은 포로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모든 이슬람교를 퇴출하며 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지불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이슬람교도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으로 하고 기한은 한달로 정했다. 아코 공방전은 2년 만에 이렇게 종료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1세의 최후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시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병사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1191년 9월 7일 십자군 대 이슬람군의 1차 격돌인 아르수프 전투가 시작된다. 아르수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항구도시였기에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곳을 먼저 수중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리처드의 별명이 ‘사자심왕’이 된 것은 상대측인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서다(그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지 않고 언제나 앞선 지휘로 용맹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맞수가 인정하는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전투는 아르수프 바로 아래에 자리한 야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이슬람 기병수는 2천명이었으나 십자군 수는 기사가 불과 17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적인 불리함을 뒤집고 야코에서도 리처드를 위시한 십자군은 승리하고 야파를 탈환했다. 살라딘 측과 리처드 측은 강화  협약에 성공한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화 협상은 무려 이후 26 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성공한 회담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부하에게 걸리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귀국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노리는 동생 존이 있었다. 담판 승부를 벌이려 했던 존은 이미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는데 리처드는 그럼에도 프랑스까지 쫓아가서 그와 화해한다. 

이후 리처드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데 전념한다. 그러다 전선에서 석궁을 맞아 41세 나이에 사망했다. 리처드 뒤를 이은 것은 자연스레 존이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후계자 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이슬람 측으로 인해 이집트가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수송을 위해 이탈리아 해상국들을 물색하는데 최종 선택은 베네치아가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하던 최고 지도자인 도제는 엔리코 단돌로였는데 그는 협상에 응하면서 얻은 땅 절반을 받아내고 수송을 돕기로 한다. 

비잔틴제국도 당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황제인 알렉시우스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놓이고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에 새로 등극한 황제는 두카스 무르주풀루스, 십자군의 항전이 거세자 그는 단돌로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단돌로가 이를 거부하자 자국의 시민으로부터도 인기가 없던 그는 나라를 팽개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공석이 된 황제 자리로 십자군은 쉽게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제5차 십자군은 중근동의 그리스도들을 주력으로 하고, 해군 및 수송은 제노바, 목적지는 이집트 항구인 다미에타로 정해진 채 시작되었다. 13세기 초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모두 이집트 술탄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쪽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수중에 넣었으나 이후 나일강 부근에서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이집트 술탄이 군대를 보내자 더는 싸움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 병사들을 철군시키는 대신 다미에타는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강화 협상은 총 3차례에 이어 싸움을 지속하면서도 이루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는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종용에 십자군을 출발시켰으나 역병이 돌아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자 출발을 연기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6차 십자군은 소수 정예집단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이탈리아 해상에 도움을 얻지 않고 직접 해군을 꾸렸으며(수송용 배도 직접 제작), 지휘 계통을 일원화시켰다. 이때 술탄 알 카밀은 동생 알 무아잠이 죽자 또 다른 동생인 알 아슈라프에 의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아코에 십자군이 당도했을 때 교황의 칙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는 싸우지 않고 공생 관계를 맺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파라딘을 협상자로 내보내 협상을 성공시킨다. 교황이 이를 가만 두고 볼리가 없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프리드리히였는데 이 일로 인해 프리드리히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잘못되었나?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협상자였던 알 카밀은 10년 간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놈의 명분을 위해 전쟁터에 병사들을 내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유럽의 그리스도 세력은 10년이 지난 뒤 전쟁으로 기존 영토를 수복하자는 흐름이 대세를 이룬다. 그런 만큼 유럽의 왕실과 제후, 기사 세력들이 전폭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주력군은 프랑스 군이었는데 왕은 루이 9세였다. 왕이 직접 십자군을 이끄는데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수송 및 해군은 제노바 선단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십자군 목표는 이집트에 일격을 가하여 이슬람 세계를 흔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미에타는 이번에도 공략에 성공하였으나 나일강이 문제였다. 십자군은 결국 나일강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고 대패한다. 그들은 카이로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하는데 되돌아가다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고 왕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카이로로 연행되는 굴욕을 당한다. 


1258년 바그다드(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왕조가 멸망한다.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을 꾸린다. 이번에도 유럽 각지의 왕족이 참여했고 로마 교황이 도장을 찍으면서 출발한 군대였다. 그러나 리더인 루이 9세가 튀니지아의 카르타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슬람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다. 이후 십자군과 이슬람 간의 강화 협상이 이루어졌고 십자군이 스스로 철수하기로 하면서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린다. 


장장 2백 년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성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교황이 승인, 기사들이 모이고 왕과 황제가 자금과 병력을 모았으나 피해를 본 것은 이름 모를 사상자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해상 이용 능력을 가졌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해상국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신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도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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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 트뤼옹 지음, 이세진 옮김, 배세진 감수 / 복복서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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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는 새로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은퇴하고 편안히 늙다가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어릴 적 여름과 그들 손자 세대의 여름은 비슷할 수도 있었다. 물론 기후는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어느 한 세대의 노화와 나란히 가지는 않았다. 현재 나의 세대, 즉 베이비부머세대의 쇠락은 기후의 쇠락과 함께 가고 있다. 나는 내 세대의 역사에서 8월을 떼어내어 내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고 늙어가고 죽을 수가 없다.” - P36


작년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을 독서 모임을 통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시간이 없어 입문서를 읽지 못하고 그 책을 바로 읽었기에 책을 소화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입문서를 읽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또 수개월이 지나가버렸다. 최근에 이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읽어보자 싶어 선택했다. 

우선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판형은 작은데 양장본이고 안의 글자 크기도 작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잘 선정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내용이 브뤼노 라투르가 타계하기 전 인터뷰를 담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투르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력과 사상에 대한 소회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20세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무엇이 근대적이고 근대적이지 않은지 진술한다고 해서 명확해지는 것은 없다. 

“근대인은 끊임없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부인했습니다.”


과학 기술과 근대 문명은 인간 주체를 강조하면서 세계를 분리하고 구별하면서 이를 유지, 가속화해왔다. 라투르는 근대 문명을 유지해온 이 합리론은 세계적 변화로 인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후 위기와 바이러스의 공격은 이제 더는 우리가 예전처럼 살 수 없음을 자각하게 했으니까 말이다. 과연 앞으로 인간 생존이 가능한 조건으로 지구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너무나 큰 명제 앞에 서면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활양식을 좀 바꾸어볼까.’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근대화는 맹목적이어서 문제였다고 라투르는 지적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의문을 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구성’은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 선법과 악법을 가려내는 역량을 말합니다. … 구성의 대안적 메시지는 논쟁에 뛰어들고, 진보와 옛 것의 분리를 포기하고, 거주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생산보다는 거주 가능한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할일이 많지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지만 이제 우리가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작업장은 완전히 열려 있어요. - P60~61


라투르는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공학자인 제임스 브룩이 구상한 개념인 가이아 이론을 가져왔다. 원래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가져온 개념으로 가이아는 모든 신들을 품은 모신에 해당한다. 그는 변한 지구적 환경에 맞춰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가이아’라고 명명했다. 


기술한다는 것은 앉는다는 것,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토대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존재론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나는 늘 실용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할 만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시오." 혹은 "당신이 무엇에 의존하느냐가 영토를 정의할 겁니다." - P77~78

세계를 인식할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생각해보기를 당부했다. 여기서 라투르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는데 신발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어디에 뭐가 있어서 발이 아픈지 안다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이 어디이며 내가 기대어 살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나가는 작업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 맞는 진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이 집합적으로 작업하는 모델 말입니다. 그 학문 분과들은 매체도 각기 다르지만같은 문제에 접근하지요. 이러한 모델은 과학적 생산물을 내놓고 A급 혹은 B급 학술지에 발표한 후에 대중에게까지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연구자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대중을 향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모델이지요. - P110 

라투르가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 간에 집적 결과를 내놓기 위해 하는 노력들을 강조했던 점이라고 본다. 특히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 하나의 학문의 이론과 실험 결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학에 각종 융합 학부가 생기고 학과와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은 어느새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사실을 생산해내십시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자벨 스텡거스가 자기 방식대로부단히 보여주었잖아요. 사실들은 희박하고, 과학적 발견은 정말 희소하지요. 어디서나 통하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관념, 그러니까 하얀 가운을 걸치면 아무 말이나해도 과학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관념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런 건 사기예요. - P131

그는 근대를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증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반증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팩트’로 남아있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을 접근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라투르는 철학이 여러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한 양식들이 유지되기 위한 방식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구성원들이 충돌하고 갈등할 때 어떤 방식으로 상호 존중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 알려준다).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다른 무엇을 거쳐야 하지요. 내가 여기 와서 당신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전에 아침부터 먹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삶의 끝까지 나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자를 집어삼킵니다. 이러한 성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없어요. - P169

그것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토대를, 나머지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저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그것을 정의해주지 않습니다. 철학은 겸손한 실행이요. 더욱이 그 또한 글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172


라투르 입문서로 제격인 책이었다. 내용이 쉽고 친절하게 쓰여져 있어 저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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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5-05-02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책 살까말까 망설였는데, 이 리뷰를 읽어보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리의화가 2025-05-02 10: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삶을 형상화하기, 자코메티가 종종 말했듯이 삶이라는 이 경이를 형상화하기, 그것의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눈이 아니라 눈길을, 눈길과 그 눈길이 바라보는 모든 하늘을, 그리고 그 눈길 안에서 질주하는 삶을 형상화하기?그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눈길의 광채만큼 가치 있지 않다고, 자신은 오직 눈길을 재현하기 위해 조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
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
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허공에 사람들의 머리가, 공간에 에워싸인 머리들이 보였다. 내가 보고 있는 머리가 어떻게 정착될 수 있는지, 어떻게 시간 속에 확고하게 고정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명료하게 지각했을 때, 나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워 몸을 떨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더이상 살아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오브제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오브제였다. 아니, 그것은 어떤 오브제와도 닮지 않았다. 산 동시에 죽은 무언가를 닮았다. 나는 공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이었다. 이 환영幻影은 자주 반복되었다. 지하철에서, 길에서, 식당에서, 친구들 앞에서….

〈걷는 사람〉은 나에게 최종 목적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그동안 내가 보기를 거부해온, 출구 없는 길을.
종착역을.
그것은 〈걷는 사람〉이 이미 발을 들여놓은 땅으로 내가 돌아갈 차례가 곧,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고, 그 생각은 나를 공포로 짓눌렀다.

〈걷는 사람〉은 우리에게 인간의 취약성만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가 걷고 있는 땅의 취약성도 말해주는 것 아닐까?

그날 밤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의 원인들이 밝혀지자, 기이하게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친근한 일들이 중요해졌다. 산책하는 것, 20구 거리를 거니는 것, 콜리브리 카페 테라스 자리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지막 커피 마시듯 마시는 것, 고양이 한 마리가 창가로 풀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다시 읽는 것, 분홍빛 감도는 하늘로 날아가는 찌르레기 떼를 눈으로 좇는 것, 베르나르와 함께 아무 얘기나 나누고 르프레드Lefred의 그림을 보며 함께 웃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행복처럼 보였고, 저녁까지 걷고 싶은 욕구를 안겨주었다.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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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사건의 연쇄 또는 연결은 정확히 말하면 자의성(즉 특정 사건들 사이의 특정 연결을 특권적 연결로 삼는 다소 임의적인 선택)을 적용할 때만 나타나는 환원적 설명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시장에 출시된 최신형 스마트폰을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부유한 동료에 대한 열등감의 희생자여서, 혹은 그 스마트폰의 특정 기능이 그에게 필요해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사실일 수 있으며, 위계질서 없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사건들 사이 특정 연결에 특권을 부여하는 선택은 자의적일 수 있으며, 이 자의성은 현실의 왜곡이므로 가능한 한 적어야 좋다.

ANT는 라투르가 비서구 문화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문화(특히 과학기술)에 인류학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여기에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접근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벗어난 탈인간중심적 사회과학의 길을 처음 열었다.

‘번역’이란 용어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헤르메스(Hermes)≫ 3권에서 빌려 온 것이다. 세르는 정보 이론을 바탕으로 번역이 신호를 전송하고 왜곡하는 의사소통 행위라고 보았지만, 칼롱과 라투르는 이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해 특정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대표자 또는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끊임없는 재배치를 설명한다.

행위자와 연결망은 항상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하이픈이 붙는다(actor-network). 행위자는 분해될 수 있으며, 그 구성 요소들은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성(agency)은 개별 행위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또는 ‘집합체’ 내에 분포해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행위 하는가’는 특정 연결망에서 어떤 효과가 생산되는지 조사해야만 파악·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 문제다.

라투르는 근대성에 대한 학계의 상식과 달리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했다. 근대인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번역’ 작업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계속 혼합했지만, ‘정화’ 작업으로 이러한 하이브리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하이브리드들의 증식을 가속해 왔다.

근대적 헌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물의 의회’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인 코스모스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정치, 즉 ‘코스모폴리틱스’의 제안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떤 존재든 당혹→협의→위계화→제도화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집합체의 구성원이 되는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코스모스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과 공유하는 하나의 지구를 나타낸다. 코스모스 개념은 지구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존재들이 있으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들에게도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라투르는 사회를 잘 식별되고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사회학적 용어로 제공하는 과학인 전통적 사회학을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대안인 ‘결합의 사회학’은 다양한 결합들을 추적하고 그 결합들의 안정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해 사회적인 것을 형성하는 집합적 과정을 재조립하는 데 관여한다. 이런 결합의 사회학을 가리켜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라고 부른다.

라투르는 과학을 ‘상대화’하지 않으며, 과학이 ‘단지 다른 형태의 믿음’, ‘또 다른 문화’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탈근대주의자도 아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다양한 존재양식들을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이다. 라투르의 존재론은 과학의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격상한다.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소설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에게, 생명체들이 지구의 대기(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산소 수준과 이산화탄소 수준의 균형)를 조절한다는 그의 가설을 부를 이름으로 ‘가이아’를 제안했다. 유기체들 대신 생물권을 자연 선택의 단위로 간주한 것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았던 러브록은 나중에 가설을 수정해 가이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해 유기체들과 물질적 환경은 단일한 결합적 시스템으로 진화하며, 현재의 생물군이 무엇이든 그들이 거주 가능한 상태에서 기후와 화학의 지속적 자기조절이 이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한다."(Lovelock, 2003: 769

러브록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존해 이 존재들의 집합체를 인간 활동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는 자기조절시스템으로 이해했을 때, 라투르는 러브록을 따라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그러한 ‘메타디스패처’는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타자로서의 존재들’, 즉 "공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은 결합될 수 있고 결합되어야만 하는가"(Latour, 2013: 461)라는 질문을 자극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다원적 집합체(plural collective)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이아’에 대한 호소가 우리를 통합시켜 주거나 인간과 비인간의 가장 포괄적인 공동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종적 우월성의 수사학을 주장하는 서구 정당들의 대두는 단순히 낡은 파시즘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들 현상은 우리의 근대적 제도와 습관이 지구가 인간 활동에 폭력적으로 반작용(react)하고 있다는 사실에 응답할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독특한 결과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라투르는 인류에게 "우리의 정치적 정동이 새로운 목표로 향할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Latour, 2018: 2).

생태화 정치는 더 이상 마르크스의 생산 시스템 분석을 통해 사유할 수 없는데, 그 분석이 자연을 인간 활동의 맥락이자 자원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관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라투르는 우리가 생성의 실천들(practices of engendering)을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은 자원들로 이루어진 주어진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로부터 시작하지만, ‘생성’은 먼저 이들 자원과 그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이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일지 고려하는 가이아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후변화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즉 경제 성장)에 충격을 가할 뿐 아니라 가이아의 거주 가능성 조건을 급격히 변형해 ‘생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슐츠는 라투르가 말한 ‘생성의 실천들’ 속 계급들이 생산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고 본다(Schultz, 2020). 따라서 단지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계급들과 달리,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사회 집단들의 번영과 생존을 허용하는 더욱 광범한 존재의 물질적 조건들(땅, 식량, 물, 옷, 집 등)에 대한 의존과 접근에 의해 정의된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생존과 재생산은 모든 사회와 그 역사의 제1원칙이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와 사회적 역사에 대한 분석의 첫 번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인간 집합체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사람들이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입는 옷, 사는 집 등)과 그것들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을 생산하는 것을 사회적 역사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에 한정된 것이었다.

계급 투쟁은, 오늘날 다시 명백해지듯 언제나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신학은 현대의 공적 공간 한복판에서 작동하는 종교에 대한 비전으로, 자신의 행위성이 남긴 발자취에 민감하고, 더 크고 새롭게 출현하는 전체의 구성 요소로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서 완전한 정치적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주체들을 생성한다.

라투르는 종교의 존재양식을 ‘생존’의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종교가 세상에 내재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돌봄’과 ‘주의’라는 윤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종교는 존재의 내재적 조건들에 충실한 행위를 요구하며, 미래의 궤적을 결정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 준다고 본다. 라투르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한 생태적 도전 때문에 종교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종교적 존재양식만이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정치 활동 양식을 창출하고 배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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