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시절이 하수상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결론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어서인지 내가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 자꾸 되묻게 된다. 지금이 군부독재 시절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걸까.
오늘 아침 팟캐스트를 듣다가 ”우리가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의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들으며 공감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헌법 질서를 망가뜨리는 세력을 보면서 한숨만 늘고 있다.

어제는 산책을 나갔다가 또 눈을 만났다. 4월을 코앞에 둔 시점에 눈발이라니…
개인적으로 봄의 전령은 개나리라고 생각하는 만큼 봄이 되면 개나리가 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올해는 개나리가 만개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기인데 이제 좀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작년에도 그랬듯 올해도 개나리가 예쁘지가 않다.
물기가 있어야 생생할텐데 축 쳐져있는데다가 힘이 없다. 내 마음도 축 쳐져서인가 개나리도 영 시원치가 않은 느낌이다.
그래도 개나리를 보니 안 찍을 수는 없어서 몇 개 나온 잎을 가까이 다가가 찍었다.
노란색을 보고 있으니 그나마 잠깐 마음이 반짝하는 듯 했다.
산책을 다 하고 돌아오는데 해가 뜨며 날이 쾌청해졌다. 나라 사정도 제발 이렇게 쾌청해지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주말에는 <‘자본’을 읽자>를 완독했다. 과연 완독한 것인가 억지로 한 것인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렇게 플래그는 많이 붙었는데… 참 여러 모로 정리하기란 어려운 책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읽을 때도 힘이 들었는데 이 책은 두께마저 두꺼우니 괜히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런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역시 한 번에 얻으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분명 어떤 구절들에는 무릎을 치며 ‘그래 맞아!’ 하지만 ‘그래서 얘기하려고 하는 바가 뭐지?’ 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어쨌든 그래도 읽어냈다. 음…

벌써 일주일도 넘은 일이 되어버렸는데 감기에 심하게 걸려 골골대다가 나을 때쯤 되었을 때였나?
동네 근처에 자우림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니 이게 왠 횅재야?’ 하며 무려 오후 반차를 쓰고 달려갔더랬다.
오후에 공연장 근처에서 혼밥을 하고 커피까지 야무지게 마신 뒤 길을 나섰다.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익숙한 노래가!!! 자우림이 리허설 중이었다.
와… 계를 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허설마저도 고퀄이라니~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며 김윤아는 인사까지 해주었다.
특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듣는데 눈물이 날 뻔했다. 마침 하늘은 미친 듯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그랬던가.

무료공연인만큼 공연 시작 무렵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온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온듯). 자우림 뿐 아니라 공연진에는 여행스케치, 안치환, 이무진도 있었다.
여행스케치는 어릴 적 수학여행 때 공연진으로 와서 ’별이 진다네‘라는 곡을 불렀던 적이 있다. 그때는 조금이나마 별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밤하늘을 보며 듣는 그 곡이 참 좋았더랬다. 이번에 그 곡을 불러주어 자연스레 과거 추억이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자유‘라는 말이 이상하게 왜곡되어버린 것 같은데 안치환 하면 ’자유‘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한 변론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에도 ’자유!‘를 토해내는 부르짖음이 인상적이었다.
이무진은 10, 20대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신호등‘은 나도 좋아하는 곡이라 열심히 따라불렀다는.
자우림은 마지막에 나와 5곡을 불렀다. 대중성 있는 곡들로만 불러서 팬으로는 아쉽기도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나중에는 춤도 추고 즐겼다. 하하하쏭 나올 무렵에는 관객석도 열광했다.
마지막 곡은 ‘스물다섯 스물하나’. 이곡이 나올 때 시작부터 울먹이는 반응들이 많았다. 드라마에 삽입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은 곡이라 그런지 10, 20대들도 많이 알고 있더라.
기다리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반차를 내고 간 것이 정말 후회되지 않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이문세 공연을 다녀왔다. 옆지기가 이문세 팬인데 아직 한 번도 그의 공연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사촌 동생이 공연단의 스탭이어서 티켓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비록 내가 이문세 팬은 아니지만 워낙 다양한 노래들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만큼 공연 곡들 대부분이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발라드면 발라드, 댄스면 댄스 열심히 준비하셨더라. 공연을 오래 하는 가수일수록 그 실력이 입증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이 꾸준히 찾는다는 이야기니까.
옆지기가 공연을 보면서 정말 행복해했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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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4-01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하는 책 한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셔서 기분은 좋을 듯합니다 저는 그런 거 한번만 보고 말 때가 많아요 거리의화가 님은 언젠가 다시 보시겠네요 다은 책에서 저기 나온 걸 조금이라도 만날 일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우림과 여러 사람이 공연을 했군요 거기에 가셔서 그것도 좋았겠습니다 무료 공연이었다니, 정말 횡재한 것 같겠습니다 무료가 아니어도 거리의화가 님은 가셨을 것 같네요 옆지기 님하고도 함께 공연을 보러 가셨군요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겠네요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왔네요 사월엔 좀 좋은 소식이 들리면 좋겠군요 거리의화가 님 사월 건강 잘 챙기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5-04-01 08:30   좋아요 0 | URL
저도 이제 중도에 포기하는 책들이 생겼어요. 도무지 안되는 책들도 있긴 하더군요^^; 문학이 좀 그런 것이 많습니다ㅠㅠ
자우림 보려고 갔다가 다양한 가수들도 덤으로 만나 귀가 호강했지만 저희 동네에 이렇게나 아이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초등학생 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이 많아서 신기한 경험! 아이들 텐션이 높아서 기가 빨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에너지가 넘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한편으론 들었답니다. 옆지기와 간 이문세 공연도 참 좋았죠. 무엇보다 이 사람이 좋아해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더랍니다.
4월에는 제발 탄핵이 되기를... 될 수 있겠죠? 되야 하는데ㅠㅠ

책읽는나무 2025-04-0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 다섯 스물 하나 드라마를 봤었는데 갑자기 펜싱하던 김태리가 떠오르네요.ㅋㅋ
딸이 감독이 이 노래를 듣고 만든 드라마라던데 이 노래 아냐고 물어서 들었더니 자우림의 스물 다섯, 스물 하나더라구요.^^
노래를 좋아하니까 갑자기 그 드라마에 푹 빠져 봤었어요.ㅋㅋㅋ
구경온 친구들이 울먹일만 했을 거에요.
저도 이 노래 들음 좀 그리되더라구요. 드라마 보기 전엔 울먹일 정도는 아녔거든요. 그냥 아련하다. 그랬었는데..쩝..드라마의 힘이 큽니다.^^
전 고잉 홈 그 노래만 들음 눈물이 흘러요.ㅜ.ㅜ
아…이문세! 저 몇 년 전에 공연 본 적 있었는데…기억이 떠오르네요. 좋았어요. 저도 그 순간 좀 행복하단 생각도 했었어요. 다녀오고서도 며칠 행복했었어요. 남편분의 마음 공감합니다.
노래라는 게 가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노래가 좋은 건지, 노래가 좋아 그 가수가 좋은 건지, 아니면 추억이 깃들어서인지…참 특별하게 다가오는 곡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5-04-01 13:17   좋아요 1 | URL
근데 저는 정작 그 드라마를 보지를 못했어요. 김태리 배우도 좋아하는데 요새 영 한국 드라마는 보지를 않아서리^^;;; 드라마 삽입곡 또는 OST의 힘이 그런 것 같아요. 노래를 들으면 장면이 생각나고 장면을 보면 노래가 자동으로 재생되는? 그러면서 더 감정 이입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겠죠.
고잉 홈 저도 좋아하는 곡이에요. 들으면 세월호 아이들도 생각나서 한동안 먹먹했던 기억이 납니다ㅜㅜ
이문세 공연 다녀오신 적이 있으셨군요? 나무 님 말씀처럼 아마 노래만이 아니라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의 추억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도 그 때의 기억과 감동이 남아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노동자는 모든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며, 모든 소유를 (자기 노동력 소유를 제외하고) 상실한다. 아울러개별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사회적 노동도구들을 홀로 작동시킬 수있는 일체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는 직업적 숙련을 잃어버렸으니, 이 숙련은 노동수단의 성격과 더 이상 조응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은 더 이상 "그의 소유가 아니다. 고유한 의미의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이 두 "분리", 즉 이 두 상실은, 자본으로 제도화된 생산수단들에 "자유로운" 노동자가 대립하는 형상 안에서 겹치고 일치되어, 마침내 노동자 자체가 자본의 요소가 되기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단일한 개념, 즉 노동자와 노동조건의 분리라는 개념 안에서 줄곧 두 분리를 섞는 이유다. - P747

상이한 구조들안에서, 경제가 규정적인 것은 사회구조의 심급들 중 규정적 자리를 점하는 심급을 경제가 규정한다는 점에서다. 이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관계들의 관계이다. 이는 타동적 인과성이 아니라, 구조적 인과성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는 이 자리를 경제 그 자체가 점하게 된다. 하지만 각각의 생산양식 안에서, "전형"transformation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 P762

이 운동은 어떤 구조의 단순한 해소(노동자와 노동수단의 분리)가 아니라 어떤 구조의 다른 구조로의 변형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또한 제아무리 기원적 구조라 하더라도 그 구조(노동의 대상과 수단이물리적 상호작용들의 단일 체계에서 갖는 통일성)의 무로부터의 구성(또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추상화의 수렴에 의한 그 구조의 우연적 형성)이라고도 결코 분석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변한 것은 노동과정의 형태들인 것이다. - P795

역사들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들의 대상이 변한다는 점이요, 자신들의대상이 아닌 것 역시 변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상은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구성적 문제는 그 역사의 대상이 역사 일반과 맺는 관계, 다시 말해 다른 역사적 대상들과 맺는 관계라는 문제임은 명백하다. - P806

마르크스의 분석 방법에 내포된 역사이론이라면, 이 이론에 속하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데, 나는 그 개념을 역사적 개별성의 차이화différentielles 형태들이라 부르 - P811

마르크스가 분석한 사례에서 우리는, "생산력" 연관의 두 연쇄적 형태에 역사적 개별성의 상이한différentes 두 형태가 내포됨을 볼수 있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사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생산력" 연관의 두 연쇄적 형태에 이 연관의 요소들 중 하나인 "노동자"라는 개별성의 상이한 두 형태가 내포된다는 점인데(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생산수단의 상이한 두 형태 역시 마찬가지로 내포되는데), 첫 번째 경우에 생산수단을 작동시키는 능력은 (관습적인 의미에서) 개인에게 속하며, 이 능력은 이 생산수단들을 개인적으로 장악하는 것이지만, 두번째 경우에는 동일 능력이 오직 "집합노동자"에게만 속하며, 이 능력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장악하는 것이라부른 그것이다. - P812

개별 자본들의 순환들의 연쇄와 이 자본들의 얽힘은 그런 체계에 의존한다는 것 - P836

이다. 이 "결과" 안에서, 이 결과를 생산했던 운동은 필연적으로 망각되며, 그 기원은 "지워진다" (die Herkunft ist aufgelöscht) .
고립된 행위로부터 직접적 생산과정으로부터, 반복으로, 사회적총자본으로, 생산과정의 결과로 이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운동의 허구적 동시간성 안에 정착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이론적 메타포를 원용해 허구적 평면 공간 안에 정착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모든 운동이 제거되고, 생산과정의 모든 계기가 자신들이 의존하는 연관들과 나란히 투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가 1권의 「단순재생산」장에서 처음으로 묘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행운동이다. - P837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재생산하는 조건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살기 위해서 자신을 팔도록 강제하며 자본가에게는 부유해지기 위해 이 노동자를 구매하는 상태에 있도록 한다. 그들이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로 서로 마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정 자체가 이중회전(dieZwickmiühle)하면서 언제나 노동자를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 시장에내치며 그의 생산물을 언제나 자본가의 [노동력] 구매 수단으로 변환시킨다. 노동자는 개별 자본가에게 자신을 팔기에 앞서 이미 사실상 자본가계급에 속해 있다. - P840

자본구성 과정들의 상대적 독립성과 역사적 변이는 마르크스에의해 한마디로 집약된다. 구조의 구성은 "발견" trouvaille이라는 것.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 생산양식의 구조가 결합하는 요소들을 다 형성된 상태로 "발견함"vorfinden 으로써 구성된다(「선행하는 형태들」).
이 "발견"에는 분명히 어떤 우연도 내포되지 않는다. - P869

시기구분 그 자체는 기껏해야 조사의 한 계기, 다시 말해 이론적 질료들 및 이 질료들의 해석에 대한 예비적 비판의 계기이다. 따라서 차이화된 시간 형식들을 사유하기 위해 이론 안에서 생산된 특수한 계기들 중 어느 계기와도 역사 개념은 동일시되지 않는다. 종별화되지 않은 역사 일반이라는 개념은 단지 "역사이론" (역사유물론)의 어떤 구성적 문제를 가리킨다. - P902

독자는 「자본』의 구조를 이미 정리되어 있는 구조들로 환원한다. 그는 이 구조들이 마르크스의 사유와 맺는 연관을 미리, 즉 선입관에 따라 인지한다. 그는 책의 표지에서 1권의 "자본주의 생산의발전"이나 3권의 "자본주의 생산의 과정"이라고 적힌 것을 읽을 것이다. 그러고는 헤겔적 순서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이오해의 주요한 원천임을 우리는 보여줄 것이다.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려 하고, 자신이 열중하는 즉각적 문 - P917

제들이 일반적 원리들과 맺는 관계를 인식하느라 안달인" 독자는
"근대적" 분과학문들(사회학, 정치경제학) 안에서 통용되는 의제에관해 마르크스가 말했을 법한 것을 찾으려 애쓴다. 그는 이 분과학문들이 『자본과 맺는 인접성을 미리, 즉 선입관에 따라 인지한다. 자신의 관심사들의 질서를 자신의 독해의 질서에 관철시키는 독자는 "모델에서 모델로 전전할 것이다. - P918

『자본의 순서는 온전히 이론적 순서라는 것. 따라서 추상으로부터 현실로 가는 것도, 단순한 현실로부터 복잡한 현실로 가는 것도 아니다.
-도식/현실 관계는 『자본의 순서도, 그 각각의 단계도 규명하지 못한다.
-순서가 온전히 이론적이라면, 순서는 그 대상에 대한 형태개념에만 의존할 수 있다.
『자본의 대상은 규정된 생산양식이기 때문에 『자본』의 순서는 생산양식에 대한 형태 개념에 본질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 P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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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면서도변화한다(하지만 이는 어떠한 감각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는 철학 자체에 대해 헤겔이 지적했듯, 자신의 시간으로부터 전혀 튀어오르지는 않으면서도(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거울반영의 포획 내에 사로잡힌 그래서 바 - P584

로 인간들이 그 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인데 이 시간 그 자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 내에서 일어나는 바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부동의 운동이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 이유로 인해 1917년 러시아혁명의메아리로부터 만들어진 혁명적 인간주의가 오늘날 다양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관심사들이 관심사들 중 한편은 이 혁명적 인간주의의 기원들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한편은 이 기원들로부터 다소간 멀어져 낯선 상태로 존재해 있다의 이데올로기적반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 P585

인식론적이고 비판적인독해 내에서, 우리는 이 말해진 단어 아래에서 이 단어가 감추고 있는침묵을 듣지 않을 수 없으며, 텍스트의 검게 칠해진 부분noir [충만함혹은 종이 위의 ‘글자] 속에서 거의 섬광 같은 짧은 시간 동안 매달려있는 엄밀한 의미의 하얀 부분blanc[공백 혹은 (‘글자‘를 제외한) 종이의 여백]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상관적으로, 외양적으로는 연속적인,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억압적 담론의 위협적 침입에 의해 중단되고 복속된 이러한 담론하에서 우리는 참된 담론의 침묵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그 심원한 연속성을 복원하기 위해이 참된 담론의 텍스트를 복원하지 않을 수 없다. - P589

엥겔스의 정식 안에서 우리는 최초로, 그리고 아마도 고전적 텍스트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의 정식에 대한 설명을 명료하게 발견하게된다. "머리로 걷던 화학을 두 발로 서게 다시 돌려놓기"는 엥겔스의텍스트에서 그 어떤 잠재적 모호성 없이 다음을 의미한다. 이론적 토대를 변화시키기, 화학의 이론적 문제설정을 변화시키기, 이전의 [날은] 문제설정을 하나의 새로운 문제설정으로 대체하기. 이것이 바로그 유명한 ‘전도‘가 의미하는 것이다. - P612

명료히 확립된 하나의 과학이 급격한 변화à-coups 없 - P618

이 발전할 때, (인식)대상의 변형은 연속적이고 진보적인 하나의 형태를 띠게 된다. 대상의 변형은 대상 내에서 이전에는 조금도 가시적이지 않았던 ‘새로운 양상들‘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 대상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탐험하게 되는 그러한 지역들에 대한 지리학 지도와 같은 것이다. 지도 안의 빈 부분들은 새로운 세부지점들 그리고 설명들로 채워지지만, 지역의 이미 인지되고인식된 경계contour 일반을 수정하지는 않는다. - P619

정치경제학의 고유한 이론적 구조는, 주어진 현상들의 동질적 공간과 이데올로기적 인간학-이 정치경제학의 공간의 현상들이 취하는 경제적 특징을 욕구의 주체로서의 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소여) 내에 정초하는사이의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관계 맺음에 달려 있다. - P635

소비는 주어진 한 사회의 인간들의 개인적 소비는 물론, 욕구 개념의 보편적 활용에 할애하기 위해 우리가 생산의 욕구를 충족하는 소비로 정의해야 할 그러한 생산적 소비 또한 포함한다. - P641

마르크스는 고전 정치경제학에는 부재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두 가지 구별을 이끌어냈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구별, 그리고 두 가지 생산부문 즉단순재생산의 토대 혹은 확대재생산의 토대 위에서 생산조건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1부문과 개인적 소비의 대상에 대한 생산을 목적 - P641

으로 하는 2부문 사이의 구별이 그것이다. - P642

이 "주어진 한 사회 내 생산행위자들 간 고정된 관계가 바로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찰 ‘본능적‘instinctif예감이라는 형태하에서가 아니라, 다시 말해 ‘모르는 상태‘insu라는태하에서가 아니라, 개념과 그 결론들이라는 형태하에서의 고찰은 고전파 경제학의 대상을, 그리고 이 대상과 함께 [대문자]정치경제학자체로서의 과학 자체를 전복한다.
마르크스의 고유성은 생산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심지어 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리카도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이미 - P650

이를 행했다), 생산이라는 개념에 예전의 개념이 지시했던 대상과는발본적으로 다른 하나의 대상을 지정함으로써 생산이라는 개념을 변형했다는 점이다. - P651

경제적 생산 내에서 이루어지는 변형에 종속된 외부적 자연 [자연이라는 외부]의 ‘공격 양식‘ [자연을 이용하는 양식]을 고정시킴으로써, 이 ‘노동수단‘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경제학만이 아니라 역사학에서도의 기본 범주인 생산양식을 결정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노동수단‘은 생산적 노동의 생산성 정도를 확정한다. - P658

마르크스에게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인간들만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며, 특수한 ‘결합들‘combinaisons내에서 생산과정의 행위자들과 생산과정의 물질적 조건 또한 무대 위에 오르게 만든다. - P660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계 내 경제적 ‘소여‘의 육중한massives
‘명증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바로 이 물신화된 ‘명증성들‘의 ‘육중함‘이라는 특징 때문에, 경제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이 경제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구축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경제적인 것의 지역이 전체 구조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장소의 명증화를 통해서만, 따라서 이러한 지역과 다른 지역들(법-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절합의 명증화를 통해, 그리고 경제적 지역 자체에서 다른 지역들의 현존(혹은 효과성) 정도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 - P670

어떠한 개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특정 지 - P685

역의 구조에 의해 주어진 이 지역의 현상들에 대한 결정으로 식별된, 그러한 새로운 결정형태를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개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혹은 어떠한 개념들의 집합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하나의 구조가 지니는 요소들에대한 결정을, 그리고 이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관계들을, 그리고 이 구조의 효과성 efficace에 의한 이 관계들의 효과들effets 전체를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더욱이, 어떠한 개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혹은 어떠한 개념들의 집합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하나의 지배적 구조에 의해 종속된 하나의 구조의 결정을 사고할 수 있는가? 달리말해, 어떻게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가? - P686

단지 우리는 인식의 추상 내부에서, 구조라는 개념과 이 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효과들의 개념으로부터 이 구조의 개별적particuliers 효과들의 개념들로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개념의 ‘전개‘ 혹은특수화spécification를 사물의 전개와 개별성 particularité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절대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은 정당한 이유에서 그렇다. 이러한 경계는 당연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경계는 전혀 경계가니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이 경계는 하나의 경계일 수 없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이 경계는 하나의 사물에 대한 개념의 추상과 이 사물의 경험적 구체(경계라는 개념의 사용을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사이의 (정신적인esprit 혹은 현실적인réel) 공통의 동질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695

마르크스는, 의지vertu가 아니라 강제force에 의해 본질과 현상이라는고전적 쌍의 모호성을 떠맡음으로써, 그리고 ‘현실적 운동과 외양적 운동‘의 현실적인 것이 취하는 ‘내부와 외부‘라는 형태하에서, 그리고 ‘내밀한 본질‘과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주체들에 의해 지각되고 조작된 - P696

manipulées) 결정들이라는 형태하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이 현실 자체 사이의 인식론적 차이를 현실réalité 속으로 위치전환함으로써,
질과 현상이라는 고전적 쌍에 대한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의 불가피했던) 활용으로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히도 마르크스의 전임자들이 발견했거나 발견하지 못했던 바에 대한 개념을, 혹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전임자들로부터 구별해주는 차이의 개념을 제공하는것이 마르크스에게서 문제가 될 때 우리가 지각할 수 있었듯, 마르크스의 과학에 대한 개념화에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결론들 [이론적 변형]을 초래했다. - P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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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일반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최종적으로는 특수한 구조들 위에 정초해 있는 역사성의 특수한 구조들이 서로 다른 생산양식들이, 이 총체성들의 본질에 따라서만, 다시 말해 이 총체성들의 고유한 복잡성의 본질에 따라서만 의미를 가지는 역사성의 특수한 구조들(왜냐하면 이 역사성의 특수한 구조들은 전체들로서 결정되고결합된 사회구성체들의 실존, 특수한 생산양식들에 속해 있는 사회구성 - P502

체들의 실존에 불과하기 때문에)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 P503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보지 못했던 것은 정치경제학의 ‘추상적‘
이론이 역사이론의 대상 자체에 지역으로서(수준 혹은 심급으로서)유기적으로 속해 있는 하나의 지역에 대한 이론[즉 ‘지역적 이론‘ 혹은
‘국지적 이론‘]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보지 못했던 것은 『자본』에서 역사가 현실대상이 아니라 이론대상으로, 현실적-구체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개념적인) ‘추상적‘ 대상으로 등장한다는점, 그리고 일차적 수준의 역사(학)적 취급[분석]이 노동일 감축을 위한 투쟁에 대해서든 자본주의적인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든 마르크스에 의해 적용되는 곳인 『자본의 몇몇 장[즉 자본의 ‘역사적 장들‘]이 역사이론에, 역사 개념의 구축에 그리고 이 역사 개념의 ‘전개된 형태들‘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경제이론은 이 ‘전개된 형태들‘의규정된 한 ‘지역‘을 구성한다의 구축에 그 원리로서 준거한다는점이다. - P523

현실적인 것[대상의 현실] 내에서 이론적 전체ensemble (정치경제학이론)와 현실적인 경험적 전체ensemble(구체적 역사)이론적 전체는 이 현실적인 경험적 전체에 대한 인식인데 사이에서 이 둘을 일대일로 조응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 내에서의 ‘[대문자]논리‘와 ‘[소문자]역사‘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해 저질러졌던 오해들의기원에 존재한다는 원리 말이다. 이 오해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맹목aveuglement의 효과이다. 즉, 「자본이 경제이론에 대한이해에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역사이론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종종 지각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그러한 맹목 말이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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