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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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이 세상의 다른 사기꾼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기는 얼마나 쉬우며 나 자신과 타협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핍은 고상한 신사가 되고자 했으나 그가 모델로 설정한 이들은 차별주의적인 인물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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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슬의 양쪽 끝이 있다. 경제가 역사Hitoire의 경로를결정한다. 그러나 최종 심급에서 그러하다. 최종적으로 결정적이라고schlieBlich entscheidenden 엥겔스는 기꺼이 말한다. 그러나 이 경로는 - P199

상부구조의 다양한 형태들, 지역적 전통들이, 국제적 정황들의 세계를 통해 "관철된다". 나는 이 검토에서 최종 심급, 즉 경제에 의한결정과, 상부구조들, 국민적 전통들, 국제적 사건들에 의해 부과되는 고유한 결정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엥겔스가 제안하는 이론적해법은 제쳐 두려 한다. 여기서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경제적인 것에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 대한 상부구조들로부터, 국내적·국제적인개별특수적 particulières 정황들로부터 야기된) 효력 있는 결정들의 축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취하는 것으로 족하다. 내가 제출한 과잉결정된 모순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명확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과잉결정의 존재는 더 이상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이 아니기때문이고, 우리는 이 과잉결정의 존재를, 그 핵심에서, 비록 우리의설명이 아직 지시적인 것에 머문다 하더라도, 그것의 토대jondemen에연관시켰기 때문이다. - P200

마르크스의 역사적 이론의 수준, 그것은 구조 개념, 상부구조 개그리고 이 개념들의 모든 특수화들 spécijfications의 수준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과학적 학문 분야가 자신의 수준과는 다른 수준에서, 어떠한 과학적 인식의 대상도 아닌 수준에서(우리의 경우 무한한 상황들로부터 개인적 의지들이 발생하고, 무한한 평행사변형으로부터 최종적 합력이 발생하는수준에서) 자신의 고유한 대상의 가능성과 이 대상에 상응하는 개념들의 가능성을 생산하려 한다면, 그 학문 분야는 인식론적 공백 속으로, 또는 인식론적 공백의 혼미로서의 철학적 충만 속으로 떨어진다. - P224

어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의식도 자기 자신의 내부적 변증법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속에 지닐 수없다는 원리,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원리, 즉 자기 자신의 모순들의 힘에 의해 현실 자체에 이르는 의식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일체의 헤겔적 의미의 "현상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의식은 자신의 내적인 전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별개인 것에 대한 근원적 발견에 의해서 현실에 가닿기 때문이다. - P250

우리는 일반 이론, 즉 실천 일반의 이론을[대문자로 시작하는] 이론Théorie‘이라 부를 것이다. 이 실천 일반의 이론 자체는 기존의 "경험적" 실천들(인간들의 구체적 활동)의 이데올로기적 생산물을 "지식들" (과학적 진리들)로 전화시키는 기존의 이론적실천들(과학들)에 대한 이론의 기초 위에서 정교제작된다. 이 이론은변증법적 유물론과 동일한 것인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이 정의들은, 이미 실천적 상태로 존재하는 해법을 이론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이론적으로 근거를 갖춘 대답을 제공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 P290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헤겔 변증법과 구별하는 고유한 차이란 무엇인가? 제기된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에 의해서든 계급투쟁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 따라서 그 해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저작들 속에 실존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천적 상태로 실존한다. 이제 그 해법을 이론적 형태로 진술해야 한다. - P312

우리는이데올로기가 그 속에서 자신이 현실적인 것에 관여한다고 믿는 그런 영역을 포기하는 조건하에서만, 즉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을(이데올로기의 근본적 개념들의 유기적 전제를, 그리고 이 체계와 더불어, 이 개념들의 대부분까지를 포기하고, "또 다른 요소들 속에", 새로운 과학적인 문제설정의 장 속에 새로운 이론의 활동을 기초 짓는 데로 나아감으로써만, 과학을 획득할 수 있다. - P333

단순한 것은 복잡한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단순한 범주의 보편적 실존은 결코 기원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긴 과정의 끝에, 극단적으로 분화된 사회구조의 산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단순한 본질이 됐든 단순한 범주가됐든 간에 단순성의 순수한 실존이 아니라, 복잡하고 구조화된 존재들 및 복잡하고 구조화된 과정들의 "구체성들"의 실존이다. - P341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의 특유한 차이는 모순의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이며, 이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은 모순 속에 모순의 존재 조건을, 즉 모순의 실존인 항상-이미 주어진 복잡한 전체의 특수한 (지배 관계를 갖는) 불균등성의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이해된 모순은 모든 발전의 동력이다. 모순의 과잉결정에 기반한 전위와 압축은 그것들의 우세 dominance 여하에 따라, 복잡한 과정의 실존, 즉 "사물들의 생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비적대적·적대적·폭발적)국면들을 설명한다. - P375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진술한 그 영역을 넘어서는지, 따라서 이론적으로 단련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를 다른 구체적 내용들, 다른 실천들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예컨대, 자연과학의 이론적 실천의 시험에, 과학들 속에서 아직도 문제가 야기되는 이론적 실천들(인식론, 과학사, 이데올로기들의 역사, 철학사 등)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이 정의를 이런 시험에 부치는 것은 이 정의의 유효범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요, 경우에 따라, 의당 그래야 하듯이, 이 정의를정정하기 위한 것이며, 요컨대 우리가 검토한 "개별특수적인 것"particulier 내에서 이 "개별특수적인 것"을 개별특수적인 것으로 만든보편적인 것 자체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 P377

다른 민족을 착취하는 민족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계급 역시 그 이데올로기에 구속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기능에 대해 말할 때에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피착취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서 소용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살아지는 관계를 현실적이고 정당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구성하게 하는 데 소용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더 멀리 나아가서 계급들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되는가 자문해야 한다. - P411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 또는 인간본질이라는 관념이, 쌍을 이루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아주 정확히말해서 인간적-비인간적이라는 쌍을, 감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비인간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관계들의 산물이다. ‘비인간적인 것‘은 현재의 관계들의 부정적 측면이다......"라고 쓴다. 인간적-비인간적이라는 쌍은 모든 인간주의의 숨겨진 원리이며, 인간주의는 이 모순을 살고짊어지고-해소하는 방식일 뿐이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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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은 땅의 야수들 (리커버 특별판)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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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제목은 일본인 장교가 한국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나왔는데, 작은 땅에서 거침없이 번성하던 야수들은 한국의 영적인 힘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때 호랑이는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사람들을 북돋아줬다.


1910년대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김주혜 작가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한국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번역 작가의 역량인지 김주혜 작가의 역량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이라는 느낌이 안 들고 한국어 자체로 느껴졌다.

 

이 소설에서는 옥희, 한철, 정호, 명보, 야마다, 이토 등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시대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소설의 제목 자체는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시선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그제서야 수긍이 갔다. 


조선 시대 말만 해도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각종 민담이나 설화, 소설, 그림 작품에 등장할 정도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존재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수많은 밀렵꾼, 일본인들에 의해서 사라져서 1960년대가 되면 사실상 한반도에서 더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소설 초반에 일본인인 야마다와 이토가 산속을 헤매다 어느 조선인을 구해준다. 하필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조선인 덕분에 일본인들도 무사히 산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모태가 된 이야기이자 제목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놀라운 것은 이 조선인의 아들과 야마다가 나중에 극적으로 만나는데 야마다 덕분에 조선인의 아들이 살아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토는 장차 백작 작위를 승계할 후계자다. 전형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논리를 가진 인물이다. 


“우리가 이들을 현대화하고 발전시켜 주는 대신, 이들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쌀과 특산품, 이국적인 공물을 바치는 것 아니겠나? 골동 청자나 호랑이 가죽 같은 것 말이야. 지금 세계의 다른 곳들도 모두 똑같은 상황이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를 좀 보라고. 그들 모두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나눠 먹으며 더 큰 강대국들이 되어가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여자들을 빼먹었군. 쌀, 호랑이, 그리고 여자. 이 세 가지야말로 조선 제일의 특산품이라니까.” 이토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행렬을 향한 박수와 환호에 가담했다.


옥희는 어린 나이에 기생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유명한 연극 배우로 성장한다. 한편에서는 은실, 월향, 연화, 단이처럼 기생과 권번들이 있고 정호, 영구, 미꾸라지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한 이들도, 부모를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김성수와 이명보가 있다. 그러나 김성수와 이명보는 서로 다른 삶을 산다. 김성수는 한국의 독립은 찬성하나 내부적인 자체 발생 행동은 경계하고(아래로부터의 민중 운동은 반대하는) 개혁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1920년대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자치주의자 지식인 중 한 사람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명보는 같이 일본 유학생활을 했지만 삶의 끝까지 한국의 독립을 꿈꾸며 혁명적 행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단이는 권번인데 화려한 젊음의 시절이 지나가고 나서는 마약에 빠지는 모습에서 토지의 봉순(기화)가 겹치기도 했다.


기생과 권번이 독립 운동에 많은 보탬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이도 그랬는데 명보가 운동 자금을 부탁하러 간 자리에서 김성수는 거절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인다. 


자네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지. 그저 지난날 동경에서 자네가 눈독 들였던 그 게이샤한테 따로 집 한채까지 마련해 주느라 아낌없이 탕진했던 돈이 얼마나 되는지 회고해 보길 바라네. 그 돈이라면 지금 우리의 젊은 병사들에게 어떻게 쓰일 수 있을는지도, 그들은 우리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총 한 자루와 실탄을 얻기만을 바라고 있다네.


우리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똑같이 살해하자는 게 과연 올바른 답일까? 그 모든게 너무 야만적이고, 그만큼 옳지도 않은 짓이야. 그래, 그런 무모한 폭력에는 이바지하지 않을 테다.


제가 드리는 이 군자금은 단지 저만이 아니라, 거의 평양 전체 기생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드리는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남자에게 술 따르고 수청 들면서 번 돈이고, 각자 은퇴 후 안정된 여생을 보내기 위해 평생 고이 모아온 패물입니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열기가 존재했지만 세계대전 말기가 되면 전쟁 물자 공출 등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된다. 여유로웠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잃은 개 한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 일탈로 말이다.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살고 사랑을 나눈다. ‘그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그러면서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며 ‘인간들이란!’ 넋두리를 하기도 하고 잔인한 시대 속에서 변해가는 사람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흑백으로 딱 잘라 나눌 수는 없는 법이야.’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1945년 드디어 해방의 문이 열린 날의 풍경을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마지막 빗방울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댐처럼, 사람들이 숨 막히는 속도로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해방 후 드디어 조선이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믿었던 조선의 독립은 멀어져 갔다. 처음에는 남북의 국경을 넘는 것이 경성에서 인천으로 가는 것처럼 쉬웠다. 하지만 결국 국경이 폐쇄되고 초소가 설치되자, 사람들은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한국 전쟁 전에는 친일 부역자의 처리가 있었고, 전후에는 남북 체제의 강화로 반공주의가 득세를 이루며 빨갱이 혐오가 시작되었다. 동백림 사건 등을 비롯한 사건의 조작으로 연루되어 피해를 본 이들이 생겼다. 

소설 속에서 김성수는 마치 박흥식이나 김연수, 김성수 같은 인물을 떠올리게 하고, 이명보는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을 떠올리게 한다. 


김성수의 혐의는 길고도 막중했다. 피고인은 평생을 일본인의 협력자로 살았으며, 피고인의 삼촌은 그 끔찍한 이토 히로부미 총독에게 직접 백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김성수의 아버지는 일본인들과 공모한 덕택에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김성수 본인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그는 종로경찰서장, 일본군 고위 장교들, 그 외 일본인 세력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왔다. 그는 일본이 항복하는 당일까지도 일본군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다. 


어느 날 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야생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포획된 호랑이가 창경궁 동물원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였다. 6.25가 끝난 직후 부모를 잃고 새끼로 발견된 호랑이였다. 관련 생물학자 대부분이 이제 시베리아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공식적으로 멸종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너무나도 작은 땅덩이에서 5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어마어마한 맹수들이 인간과 공존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자연에 대한 경의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을 존중하여 함께하는 것이 한국 문화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신이 많이 피폐해진 지금, 우리의 본질을 일깨우고 싶었다.


작가가 이 책에서 담고자 했던 생각이다.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가면 갈수록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는 생물이 소멸해가고 있다. 기후가 변하면서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이제 다들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인간의 삶을 만나면서 내가 가진 지금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소중한지 곱씹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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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1-30 0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사람이 죽기도 했는데... 사람이 동물이 사는 곳까지 살게 돼서 그런 거기는 하겠습니다 고라니가 한국에는 많지만, 멸종위기 동물이라고 합니다 고라니가 늘어나는 건 고라니를 잡아먹을 맹수가 없어서겠네요 늑대나 여우도 있었는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민족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뀐 것 같기도 합니다 어디나 개발, 산이 더 줄어들면 안 될 텐데 싶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5-01-31 16:06   좋아요 0 | URL
전쟁 말 무렵 창경원 동물의 처분에 대한 내용은 ‘와, 그랬겠구나!‘ 놀라움이었어요. 그렇다고 동물들을 강제로 도살하거나 일본으로 가져가버리다니... 먹이사슬 관계가 파괴되어 이제는 동물들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희선님 고맙습니다^^
 

이 텍스트들은 어떤 저작에 대한 고찰, 비판이나 반박들에 대한대답, 공연에 대한 분석 등으로서 거의 모두가 어떤 정세 속에서 탄생했다. - P43

각기 어떤 특정한 계기에 탄생한 이 텍스트들은 그렇지만 하나의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각기 나름의방식으로, 마르크스 속에서 사고하고자 한 내 나이 또래의 모든 철학자들이 겪어야 했던 하나의 특이한 경험, 즉 역사가 우리를 몰아넣은 이론적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 불가결했던, 마르크스의철학적 사고에 대한 탐구에 관한 증언들이다. - P44

철학한다는 것은 청년 마르크스의 비판의 오디세이 여정을 우리 스스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었으며, 우리에게서현실을 훔쳐 간 환상들illusions의 층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었고, 비판의 영원한 감시 아래 서로 조화하는 현실과 과학이 주는 휴식을 마침내 찾기 위해 유일한 고향 땅인 역사의 땅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독해 속에서 철학의 역사라는 질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소산된 환영 fantasme의 역사, 통과된 암흑의 역사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오직 현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현실의 역사는 잠자는 이에게 앞뒤가 맞지 않는 꿈들을 꾸게 할 수 있지만, 이 심연의 유일한연속성에 정박하고 있는 그 꿈들은 그 자체로 결코 역사의 대륙을 구성할 수 없다. - P59

교조주의의 종언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현실에 대면하도록 했다. 자신의 역사 이론을 창설하는 행위 바로그 속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창설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레닌이 그주춧돌만 놓였다고 말한 것처럼, 대부분 앞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현실. 교조주의의 어둠 속에 우리가 겪으면서 논쟁한 이론적 난점들은 그 모두가 작위적인 난점들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철학이 정교제작되지 않은 데 기인하는 것이었다는 현실. 더적절히 말하자면, 우리가 감내하고 유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경직되고 희화화된 형태들, 두 개의 과학이라는 이론적 기괴성을 담고있는 그 형태들 속에 모종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눈멀고 괴기한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었다는 현실 - 그 증거로는 최근에 재간행된이론적 좌익주의의 저서들(젊은 루카치와 코르쉬)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약간의 이론적 실존과 정합성이 부여되기를 원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운명과 임무는 아주 단순하게도, 백일하에 이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 문제들에 대면하는 것이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 P61

포이어바흐는 청년 헤겔주의 운동의 이론적 발전에서 등장한 위기의 증인이자 동인지이다. 1841년과 1845년 사이 청년 헤겔파의텍스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이어바흐를 읽어야만 한다. 특히우리는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포이어바흐의 사상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었는지 볼 수 있다. - P89

한인간이 자신의 연계들을 통해서만큼이나 자신의 단절들을 통해서자신을 드러낸다면, 마르크스처럼 엄격한 사상가도 자신의 이후 진술들을 통해서만큼이나 포이어바흐와의 단절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지식이 또한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해주리라고 말하려 한다. - P94

마르크스가 보기에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땅에 머물러 있었으며, 비록 그가 헤겔의 땅을 비판했더라도 그 포로로 남아 있고, 헤겔 자신의 원리들을 헤겔에게 되돌려 들이댈 뿐이었다.
포이어바흐는 "요소"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헤겔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요소를 바꿀 것을, 즉 포이어바흐가 그것의 반항적 포로로 남아 있던 저 철학적 문제설정을 포기할 것을 전제한다. - P95

이데올로기적 역사의 진리는 그것의 원 - P132

리(원천)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결말(종말) 속에 있는 것도아니다. 그것은 사실들 자체 속에, 이데올로기적 의미들. 주제들. 대상들을 그것들의 문제설정 그 자체로 현실적 역사에 종속되어 있는 "매여 있고" 유동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의 기반 위에서 생성되는 문제설정의 은폐된 기반 위에 결절적으로 구성하는 것 속에 있다. - P13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 자신의 시작으로 인해 갖게 된 저 환상의 베일을 찢어 버릴 실제적 경험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부터 현실로의 이런 뒤로 돌아오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철학"의 텍스트들 속에서 어떠한 반향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근원적으로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발견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것은 조직된 노동자계급이었다. 엥겔스가 영국에서 발견한 것은 발전된 자본주의였고, 철학 그리고 철학자들과는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법칙들을 따르고 있던 계급투쟁이었다. - P150

마르크스 자신의 시작이 부과한 이 이론적 "장정"에서 마르크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가 결말로부터 그토록 먼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철학적 추상 속에 그토록 오래 체류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그런 공간들을 편력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개인으로서 비판적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게 되었다는 것과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역사적으로비견할 수 없도록 주의 깊은 "임상적 감각을 취득했다는 것일 터이요, 그뿐 아니라, 특히 헤겔과 접촉함으로써, 모든 과학적 이론의 구성에 불가결한 추상화의 감각과 실제, 즉 헤겔 변증법이 그에게 그추상적이고 "순수한" "모델"을 제공한 이론적 종합 및 과정의 논리의 감각과 실제를 익힌 것일 터이리라.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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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신문을 보고 이 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시는 2월 중순에 마무리되어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아무래도 가보기 어려울 것 같아 다음 날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


수묵화를 잘 알지 못하지만 보고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먹의 농담만으로 다양한 표현을 해내는 수묵화는 어느덧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다. 거기에 채색을 더하면 화려한 수묵채색화가 된다. 


이번 전시는 제목처럼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 수묵 화가들의 작품들을 총 148점 만날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 수묵(채색)화는 종종 전시에서 만났지만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경험은 결코 흔하지가 않기 때문에 가기 전부터 무척 흥분되었다는 사실^^ 


한국과 중국은 고대부터 같은 문화권 내에 자리하여 공생하여 왔다. 그러나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두 나라의 문화를 전시품들을 만나면서 더욱 잘 느끼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한국 작품은 근대를 대표하는 수묵채색화가들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대 한국화가의 작품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중국 작품은 자오즈쳰, 우창숴, 치바이스 같이 중국 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작가 뿐 아니라 현대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중국 현대 작가는 직업 화가이면서도 교편을 잡고 있거나 미술관 관장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근대 시기 한국은 기존에 사용하던 ‘서화’란 호칭 대신 글씨와 그림을 분리하여 붓과 종이, 먹으로 그린 그림을 ‘동양화’라 부르기 시작했다. 일부 그림에서는 서양 미술의 영향으로 원근법과 명암법이 적용되어 서양적 색채를 띠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 그림에서는 전통을 고수하거나 동서양의 기법을 융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도 안중식의 <백악춘효>를 볼 수 있었다(벌써 3번째 정도 보는 것이어서 너무나 익숙해진 그림). 봄의 새벽이라는 제목과 달리 그림은 여름과 가을에 그려진 것이다. 이번에는 여름본이 걸렸는데 가을본에는 백악산이 왼쪽으로 치우치고, 오른쪽의 해태상이 보이지 않는다. 1915년 그려진 그림으로 이 시기가 되면 경복궁의 전각들이 철거당하던 때여서 작가는 기억과 사진에 의존하여 그렸다. 실제보다 경복궁을 더 크게 부각하여 작가의 숨은 의도를 엿보게 한다.


1930년대에 오면 수묵은 ‘산수’를 주로, 채색은 ‘인물’을 주로 표현하게 된다. 



이용우의 <점우청소>도 그런 대표적인 그림들 중 하나다.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으로 뒤의 산은 흐릿하게 표현하고 앞의 나무와 강둑은 세밀하게 표현하고 진하게 표현하여 대비를 주었다. 



채색 선면화는 부채 모양에 아름다운 수묵채색화가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은 공간에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는 것이 놀랍다. 작가마다 추구하는 미학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1950년대가 되면 모더니즘의 열풍으로 동양화에도 추상 양식이 차용된다. 



<구월>은 포도넝쿨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가슴을 드러낸 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보자마자 구릿빛 피부에 건강함이 느껴졌다. 배경이 포도라서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장운상은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부를 1기로 졸업한 뒤 평생토록 동양화를 그린 작가다. 이 그림은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기도 하다.



오태학의 <전우>는 군에 입대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961년 그림으로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인물들의 동작만으로 당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다양한 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여 사실화이면서도 추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기창의 <군마>(1955)는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말 다섯 마리가 하나도 같은 모양이 아닐 정도로 각기 다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말의 기상처럼 우리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일까.


1960~1970년대에는 국가적으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정책의 일환으로 민족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는데 이는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생활 속 일꾼들의 모습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경을 그린 산수화가 다시 유행하였다.



안상철의 <영 62-2>(1962)은 이런 것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나 할 정도로 파격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시회 내 같은 공간에서도 한 눈에 차별성을 엿볼 수 있어 단번에 눈에 띠었다. 이 작품은 총 3개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위 화면과 중간에 설치된 목판, 바닥판이 있다. 맨 위층과 중간층에 돌들을 배치해 놓고 화면의 아래쪽을 가로로 길게 찢어서 그 틈을 통해 중간의 돌들을 볼 수 있게 한 구조다. 그래서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적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영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의미로 <영>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적인 소재와 현대 미술 양식을 접목하여 동양화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이끌기 위한 많은 작가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원문자의 <정원>(1976)은 선염법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 여백이 거의 없는 것이 눈에 띄고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자연의 풍경을 포착하여 집에 들여온 것 같은 느낌이다.



박생광의 <제왕>(1982)은 불교적 색채를 느끼게 한다. 박생광은 민족회화를 탐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나갔다.



석철주의 <외곽지대>는 도시 외곽의 산등성이나 산비탈 같은 높은 지대에 밀집한 판잣집 달동네를 그려서 당시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당시 상황을 확인하게 한다. 재료가 너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장판지에 먹을 입힌 그림이라고 한다. 



송수남의 <붓의 놀림>(1997)은 한국 현대화 중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렀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송수남이 현대화에도 수묵화가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추상 수묵화를 연작으로 발표한 그림들 중 하나다. 지필묵만으로 이렇게 현대적인 그림을 나타낼 수 있다니 볼수록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2024년 불과 작년에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그림이다.



이진주의 <볼 수 있는 21>. 이 그림의 독특성은 흰 배경이 아니라 검은 배경이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2017년부터 이런 블랙페인팅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마다의 인식 체계 속에서 다르게 풍경을 인식한다. 작가의 의도도 이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연작은 광목천에 아교를 발라서 바탕을 만들고 물에 부푼 채색 물감을 사용해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의 잔털까지 보일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중국의 전통 수묵화는 예술로 역사와 시대를 표현하고 사회와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연과 인간을 함께 표현하거나 시화로 미학성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문화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자오즈첸은 청나라 말, 이름을 날렸던 예술가이다. 



<화훼>는 서예와 전각을 접목한 화조화다. 강렬한 먹선으로 바위를 강조하고 외곽선을 살려서 사물을 더 입체감 있게 나타내었다. 뒤쪽에 해당화가 그려져 있어 바위와 함께 고풍스러운 기상을 느끼게 한다. 사실 자오즈첸이 유명한 것은 금석화파의 창시자여서이기도 하다. 서예와 전각, 그림이 무척이나 조화롭다.



우창숴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가로 중국 근대화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학자 집안에서 자라 서른 살 무렵에야 직업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구슬 빛>(1920)은 등나무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언뜻 보면 그냥 먹을 대충 벅벅 그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또 저런 붓질이 없었다면 그림에 생동감이 덜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호쾌하면서도 자유로움이 엿보이는 그림이었다.



사실 앞서 소개한 자오즈첸과 우창숴보다 내게는 치바이스라는 이름이 더 각인되어 있다. 치바이스는 20세기 중국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래서 치바이스의 그림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니 그저 감격스러웠다. <연꽃과 원앙>(1955)에는 두 마리의 원앙과 연꽃이 표현되어 있다. 연꽃과 원앙의 그림을 다른 기법으로 표현하여 마치 두 개를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먹과 채색만으로 이런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놀라웠다.



판제쓰의 <석굴 예술의 창조자>(1954)는 둔황석굴을 표현하였다. 화려한 뒷면의 석굴 그림과는 다르게 앞에 그려진 화가와 후원자들은 간소화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현대로 가면 국가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다.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예술 표현을 확장하는 데 주목하게 된다.



라오빙슝의 <자조>(1979)는 항아리를 깨고 나왔지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표현했다. 예술과 자유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자유를 빼앗겨 억압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해학적인 묘사 속에서도 서글픔이 느껴진다.



천다위의 <끓어오르는 마강>(1960)은 중국 산업현장인 마강(당시 철강 기업 이름)의 건설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분주한 산업 현장의 인부들과 건설 현장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산업 현장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양즈광의 <광산의 새로운 일꾼>(1972)은 여성 광부의 모습을 표현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양화의 기법을 활용해 화려한 색채감으로 인물을 강렬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해내고 있다. 배경은 간결하게 표현한 데 반해 여성 광부인 인물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물을 부각시킨다. 인물은 마치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후밍저의 <영원>(2008)은 암채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이다. 암채화는 천연 광물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도 다양한 색상의 암석을 갈아 알갱이로 만들고 알갱이를 접착제와 혼합하여 안료로 사용하였다. 광물성 안료는 색이 깊으면서도 오래 보존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암석들 사이에서 중앙에 하늘색 공간이 눈에 띠는데 마치 빠져 들고 싶을 만큼 깊숙한 공간감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류윈취안의 <넓은 마음으로 바라본 세계>(2018)은 제목에서 일단 눈길이 가고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그림에서 관객을 또 한 번 집중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글씨에 주목하시라. 여백의 미를 강조하여 인간의 좁은 시선을 넓은 시야로 확장하라는 작가의 주문을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현대 작품들 중 가장 오래 시선을 머무르게 한 작품이었다.


총 3시간을 넘게 들여 전시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허락한다면 5~6시간을 봐도 모자르다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았다. 다만 전시 도록을 사려고 했더니 품절이라고 해서 좌절했다. 아니 전시에 도록이 없다니 너무하잖습니까. 2월 중순에 전시가 끝나는지라 또 보러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한 번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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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28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바이스!
꼭 가봐야 겠네요
정보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1-29 08:24   좋아요 1 | URL
작가별로 여러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려 치바이스니까요^^ 가시면 좋은 시간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5-01-29 08:35   좋아요 0 | URL
내일 예약했어요
무료네요?!^^

거리의화가 2025-01-29 16:22   좋아요 1 | URL
예약하셨군요^^ 간 김에 궁궐 구경도 하실 수 있겠습니다.

hnine 2025-01-28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전시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설까지 친절하게 올려주셔서 전시 볼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5-01-29 08:25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전시 보실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희선 2025-01-29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묵화에 추상 양식을 쓰기도 하는군요 지금 생각하니 그런 거 얼마전에 보기는 했네요 그런 걸 또 보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수묵화 하면 옛날 수묵화가 먼저 떠오르네요 멋진 전시회에 다녀오셨군요 시간을 더 들여서 보고 싶으시다니...

거리의화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1-29 08:27   좋아요 0 | URL
수묵화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패턴이 있는데 현대에 올수록 방식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새로움을 주는 것 같아요.
시간이 더 날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들어 본 전시 중 단연코 가장 좋았습니다.

희선님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시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