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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후 우리 마을과 헛간에는 항상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에는보병들, 그다음에는 다른 육군 부대가 여럿 왔다. 1944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나치친위대(SS)가 왔다.
군인들은 향수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들은 마을 사람을만나고 싶어 했고 우리 집 거실과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우리는 겨울에 유일하게 따뜻한 방인 부엌에 라디오를 하나 놓았고 그곳에 모여 뉴스나 음악을 들었다. 내 동생들은 군용 빵이나 ‘야전 주방‘에서 가져온 음식을 주는 군인들과 함께 놀았다. - P63

아우엘은 다운에서 처음국가사회당(NSDAP) 단위가 생긴 마을이었다. 규모가 꽤 큰 소방대 행렬이 나치 깃발을 휘두르는 사진이 내게 있다. 1934년의 학교 사진도 있는데 소년들은 나치 완장을 찼다. 사진 속 큰언니는 세 살이던 나를 팔에 안았다.
국가사회당과 나치돌격대 (SA)의 구성원은 주로 실업자였다. 이 젊은이들은 종종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마을을 행진했다. 아버지는그들을 경멸했고 ‘게으름뱅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도 그들을 미워했고특히 오만한 지역당 지도자를 싫어했다. 1930년대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중앙당에 동조했다. - P61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삶은어떻게든 계속될 거야"라고 혼잣말만 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 농부의 아내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소망, 열정, 철학이었고 그녀에게 용기와 활력을 주었다.

지금까지-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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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을 선포할 상황인지 판단할 권한은 대통령에게 속하지만, 이를 해제할 상황인지에 대해서는국회 판단이 우선한다.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공고해야 한다(계엄법 제11조 1항). 계엄을 해제할 때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계엄법 제11조 2항). 국무회의 심의 결과와 무관하게, 국회 해제안이 가결되면 계엄을 유지할 권한이 대통령에게는 없다. - P43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이라는 계엄해제 요건은 1972년 유신헌법의 잔재다. 그 이전에는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정족수가 따로 명시되지 않으면 ‘일반정족수‘로 해석한다. 일반정족수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과반수 찬성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네 차례 선포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국회 권한을 약화하기 위해 삽입한 조항이 52년 만에 또다시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법학계에회의 서는 추후 개헌을 통해 이 조항을 원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P43

헌법과 법률어디에도 ‘계엄을 통해 국회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군을 투입해 계엄 해제안 논의를 방해했다. 이 대목에서 사건은 ‘전시·사변 여부‘ 등 헌법과 계엄법상 절차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형법상 내란죄의 논리다.
12월3일 계엄을 곧 내란과 연관 짓는시각이 낯설 수 있다. 대규모 유혈 사태나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적 탄압, 군부의사회 전반 통제가 내란의 ‘요건‘이라고여기기 쉽다. 내란죄라는 사례 자체가 접하기 어려운 데다, 내란을 일으킨 군부독재정권 인사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극단적 조치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법이 규정하는 내란죄의 요건은 그보다간략하고 명확하다. 내란이란 "대한민국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형법 제87조). - P44

다시금 계엄 포고령을 읽어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유신정권과 5공의 언어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이제는사어死)가 되어버린 "처단"이라는 말.
그것은 적어도 정부가 국민에게, 혹은 의료인이나 어떤 특정 직업군에도 직접 쓸수는 없는 위협의 언어다. 또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 - P60

는 대목에 이르면, 이들이 유튜브와 카카오톡을 어떻게 분류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우리 공동체가 지난 40년 동안 피와땀의 대가로 얻어낸 소중하고 작은 하나의 성취, 시민적 자유, 그것이 갑자기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훼손된, 모욕받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 P60

대통령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정치라는 전장(戰場)이추악하고 더럽게 보일망정 적어도 말과 절차로 싸우는 필수불가결한 곳이라는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래도 총칼을들고 직접 싸우는 내전(內戰)보다는 낫기때문이다.
정파 간 말이 험해지고, 절차가 무너지고, 심지어 몸싸움이 일어날지언정,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에 총칼이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더럽고도 신성한 공간에 대통령은 계엄이라는 총과 칼을들고 들어옴으로써 스스로 대통령의 역할(정치)을 포기했다. 포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정치 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임을 보여주었다. 두려움, 안도, 비웃음, 분노, 의문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윤석열이라는 이름을 빼고 다시 보더라도, 위의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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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오직 나만이 마을과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안다. - P9

나는 평생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정한 주제를 따랐다. 당연히 내가 시작한 일을 모두 끝낼 수는없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나를 많은 장소와 사람에게로 이끌었고 처음 시작할 때 꿈도 꾸지 못한 경험, 투쟁, 승리뿐만 아니라 패배도 가져다주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아이펠 화산 지대에서 작은 개울로 출발해 굽이굽이 흐르는 강 같다. 이 개울은 점점 넓어져 이제 전 세계를아우르는 거대한 연결망으로 뻗어나갔다. 이 강이 항상 똑바로 흐르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뒤로 흐르거나 고인 연못처럼 완전히 멈춘 것 같기도 했다. 강은 분수령과 굴곡마다 다음에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했다. - P12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나는 작은 마을의 농민 가족 출신임을 잊은 적이 없다. 이는 과도한 낭만주의와 돈키호테식 이상주의에서 나를 보호해주었다. 나는 식량이 슈퍼마켓이 아니라 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내 뿌리는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의 약속에 대한 면역력을 주었다. 세계화한 마을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이 약속은 ‘좋은 삶‘을 주지 못했다. 나는 삶을 통해 자급이 지구의 현재와 미래에 마을과 세계에서 삶을 유지할 단 하나의 희망임을 배웠다. - P14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삶을 되돌아보았고 "좋은 삶 아니었나?"
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아는 큰언니 아그네스는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당신의 삶이 실제보다 더 좋게 보였으면 하신 것 같다고이야기했다. 언니는 어머니가 거의 매년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고, 온갖 말과 노래로 달래고, 기저귀를 빨고, 화목 난롯가에서 요리하고, 오트밀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비록 시간이 가면 손아이들이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지만 보살핌의 부담은 여전히어머니의 어깨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한 삶‘이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는다. - P37

어린 시절부터 나는 동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제공하는, 마을 너머 더 넓은 지평선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나를 매혹하고 영감을주는 것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했다. 내격려를 따른 사람도 있고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헤르만과 요하네스에게 ‘멀리 있는 것‘에 대한 동경을 전했고 이것이 나중에 나와 헤르만의 삶에 큰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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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 ]

2)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806년에 동양을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겼다.
Chateaubriand used his new-found wealth in 1806 to visit Greece, Asia Minor, The Ottoman Empire, Egypt, Tunisia, and Spain.
-> 이곳이 딱히 동양이라고 하기에는...

3) 네르발(Gérard de Nerval)
1842년 레반트(서아시아와 동지중해)를 여행하고 <동양여행기>를 남겼다.
Voyage en Orient (1851) – an account of the author‘s voyages to Germany, Switzerland and Vienna in 1839 and 1840, and to Egypt and Turkey in 1843. Includes several pieces already published, including Les Amours de Vienne, which first appeared in the Revue de Paris in 1841. One of the author‘s major works.

동양이란 사실 유럽인이 조작한 것으로 고대부터 로맨스, 색다른 존재,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풍경, 특별한 체험담의 장소가 되어왔다. ... 베이루트를 방문한 유럽인의 방문객의 최대 관심은 동양에 관한 유럽인의 표현과 그 현대적 운명이었다.
미국인이라면 동양에 대해 유럽인과 같이 느끼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지극히 다른 발상으로 극동(주로 중국과 일본)을 연상할 것이다. - P.13~14
->
‘동양‘이라는 용어 자체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의 동쪽을 일컫는 것에서 기원했다.
그런데 후발 제국주의자인 미국은 ‘동양‘을 어디로 바라보는가. 책에서 일컫듯 유럽의 관점에서 동양은 주로 동지중해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을 일컫는다면, 미국의 관점에서의 동양은 서아시아, 확장해도 인도 동쪽(인도차이나 등지)의 아시아를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유럽과 미국이 보는 동양은 미묘하게 다른데 이는 위치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6) 오리엔탈리즘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면서 조작한 동양에 관한 모든 편견, 관념, 담론, 가치, 이미지 등을 말한다.

오늘날의 전문가들은 오리엔탈리즘이란 말보다도 동양연구나 동양지역연구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이 너무나도 애매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의 유럽 식민지주의의 난폭한 통치 제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 오리엔탈리즘은 과거의 것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동양과 동양인에 관한 학설과 명제를 통해 여전히 학문으로 살아 있다. - P16
->
학문 분야에서는 동양연구, 동양지역연구라는 용어를 주로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가 애매하고 일반적이라기보다는 후자의 문장처럼 여전히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인 이유가 더 크다고 본다.

8) 근동(중동)
유럽에서 보아 가까운 동양이라는 뜻으로 유럽중심주의에서 나온 것.
->
그러고 보니 근동이라는 개념도 지금은 예전보다 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애시당초 ‘동양‘이라는 개념 자체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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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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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이야기다. 시, 희곡, 수필 등 여러 형식을 띠고 있다. 어머니의 역사와 민족, 나라의 뿌리에 대한 고민과 성찰,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의 말은 읊조림으로, 절규로 때론 삼켜지고 뱉어지듯 폭발한다.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고 다양한 책들과 결합할 수 있을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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