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援이 처음 이르렀을 때에 황제가 宣德殿 남쪽 행랑 아래에서 두건만 쓰고 앉아서 맞이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馬援에게 이르기를 "卿이 두 황제(公孫述과 자신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니, 지금 卿을 만남에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부끄럽게 한다." 하였다. 馬援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엔 단지 군주가 신하를 가려서 쓸 뿐만 아니라, 신하 또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합니다. 신은 公孫述과 한 고을 사람이라서 어려서부터 서로 친합니다. 신이 지난번 蜀에 이르렀을 때에 公孫述은 창을 잡은 호위병을 뜰에 세운 뒤에야 신을 나오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먼 곳에서 왔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刺客과 간사한 사람이 아닌 줄을 아시고, 소탈하고 쉽게 대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황제가 다시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刺客이 아니라 다만 客일 뿐이다." 하였다. 馬援이 말하기를 "천하에 반복하여 帝王의 名字를 도둑질한 자를 이루 셀 수가 없었는데, 이제 폐하를 뵈니 넓고큰 도량이 고조와 똑같습니다. 이제야 帝王이 본래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 ≪後漢書馬援傳≫에 나옴-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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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들의 기본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실재는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이고 순수한 존재‘들‘이다.
2. 이 존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무/부정 및 타자성을 매개해 운동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세계가 성립한다. - P148

엠페도클레스는 다원론을 시도한다. 영원한 것이 단지 하나(일자)가 아니라 넷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넷으로부터 나오고 넷으로 돌아가지만, 이 넷은 영원한 동일성이다.

네뿌리들은 결국 물, 불, 공기, 흙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바로 이 네뿌리가 태어나지 않는 것들‘(영원한 것들)로서의 4원소(stoicheia)-라틴어로 ‘elementa‘가 된다.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요소들‘로, 화학적 맥락에서는 ‘원소들‘로 번역된다. ‘stoicheion‘이라는 희랍어는 오늘날까지 화학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네 원소 각각은 영원한 동일성들이고 만물은 이 네 원소들의 조합으로 생겨나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가 질적으로 서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네 가지로 환원되지만 이 네 가지는 서로 환원되지않는다. - P150

사랑은 네 원소들을 결합하고, 미움은 이것들을 분리한다. 공기, 불,
물, 흙의 순서로 분리된다고 한다. 현대 화학에서도 원소들끼리의 결합•분리는 중요한 문제이거니와, 지금 엠페도클레스의 사유는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원소들 자체가 사랑/미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이들을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하는 근본적인 두 힘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 P156

엠페도클레스의 인식론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 원리는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아본다(hé de gnösis tou homoiou to homoio)"는 것이다. 사물들은그 표면에서 여러 가지 방출물(aporrhoē)을 내고 그것들이 인식 주체의표면으로 이전됨으로써 인식이 성립한다. 그런데 시각적 방출물들, 청각적 방출물들 등의 크기가 다 다르고 시각, 청각 등의 미세한 구멍 크기들이 또 다 달라서 결국 시각적 방출물들(예컨대 색)은 눈에만 들어간다고 한다. 물론 다른 감각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P161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아페이론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라리 무한한 규정성들이 얽혀 있는 상태이다. 아페이론은 모든 종자들이 함께 존 - P168

재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모든 사물들은 함께 있었고, 수적으로도또 작음에서도 무한했다." 여기에서 ‘모든 사물들‘은 모든 종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무한히 작은 무한한 종자들이 공존하는 상태, 그것이 아페이론 상태인 것이다.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라 무한한 질서의 상태이다. - P169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은 정신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되고 그것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 정신을 신으로 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기 십상이고, 실제 후대에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을그런 식으로 이어간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가 ‘누스‘라는말로 신을 가리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훗날 헤겔의 ‘정신(Geist)‘ 개념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영향을 보게 된다.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누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렇게 분명하지가않지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이 생각을 반겼다.
이들은 누스를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원리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 P173

데모크리토스는 아르케로서 원자들(atomata)을 제시한다. 각각의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지만, 원자들‘은 다자를 형성하며 또 운동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또한 포스트-파르메니데스적 사유라는 점 - P176

을 확인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을 "어떤 것(to den)", "꽉 찬것(to naston)", "있는 것(toon)"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일자와 마찬가지로 이 원자들도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다. - P177

플리키우스는 이런 말을 전해준다. "데모크리토스가 온갖 형태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말할 때(그러나어떻게, 그리고 어떤 까닭으로 그러한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발생(t‘automation)과 우연(tyché)으로부터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 같다." - P179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전해준 다음 구절이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듯하다. "앎의 능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적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출(庶)적인 것이다. 서출적인 것에는 다음의 모든 것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속한다. 반면에 적법한것은 이것(서출적인 것)과는 구별된다. (...) 서출적인 것은 더 작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접촉에의해 감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미세한 것에 대해서 <탐구해야 할 때는, <적법한 것에 따라야 한다. 적법한 것은 더욱 미세한것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론에서의 이런구분은 특히 근대 초(고전 시대)의 철학자들에게서 다시 분명하게 나타난다. - P186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는 삶의 목적을euthymia‘로 보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autarkeia‘, ‘psychagogia‘, ‘a kataplexia‘ 등을 들고 있다. ‘euthymia‘는 ‘thymos‘를 잘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thymos‘는 맥락에 따라서 기개, 의지, 격정 등을 뜻한다. - P187

"thymos와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는 것은 사려 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데모크리토스에게 ‘thymos‘는 훗날의 ‘passion‘ 즉 ‘정념(情念)‘과 같은 것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념을 극복하는 것이 그에게 중요했던 것이고 이 점에서 그가 고중세의 철학자들 대부분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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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이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발랑탱 경찰청장과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오는 플랑보, 극을 이끌어 가는 브라운 신부가 흥미로웠다. 셜록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흥미로운 추리 단편이었다.


<푸른 십자가>는 추리 과정이 재밌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쯤 될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막판으로 갈수록 소름이. 119페이지 인용구는 정말이지 무릎을 쳤다. 사람이 현실을 보는 것에 심리가 크게 작용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장 멀고 외로운 별이라 해도, 이성과 정의를 피해 갈수는 없습니다. 저 별을 보십시오. 하나하나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같지 않은가요? 식물학이나 지질학으로 비유해 볼까요. 이파리가 모두 보석인 숲을 생각해 보십시오.
달은 코끼리만큼 큰 사파이어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광기의 천문학이라고 해도, 이성과 정의에는 털끝만 한차이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진주로 만든 절벽 아래 오팔 들판이 펼쳐져 있다 해도, <도둑질하지 말지어다>라는 표지판은 똑같이 서 있을겁니다.」 - P31

브라운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참으로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부유하고 안락하면서도 신이나 인간을 위해 아무런 결실도 내지 않고 하찮게 사는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도둑놈과 부랑자는 회개를 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감히 부탁드리건대, 제 영역을 침범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실제로 회개했는지 의심스럽다면 여기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보십시오. <참된 어부 열두 명> 클럽의 은제물고기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사람 낚는어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 P62

모리스 블룸은 빈민들의아버지가 되겠다는 원칙을 지닌 무정부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양측 모두에게 이용당하고 경멸받는 스파이로 끝났네. 해리 버크는 돈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겠다는 신념을지녔지만, 지금은 굶어 죽을 판인 여동생한테 술값이나 뜯어내는 신세가 되었지. 앰버 경은 기사도 정신으로 범죄의세계에 뛰어들었지만, 런던에서 제일 저급한 무뢰한들에게 협박이나 당하고 돈을 뺏기고 있지 않나. 또 자네 앞선세대의 위대한 신사 강도였던 바리용 대위는 배신당하고버려진 끝에 정신병원에서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생을 마감했어. - P93

사람들은 상대의 말이 의미하는 것, 혹은자신이 보기에 상대의 말이 의미하는 것에 대답하는 법이지요. 시골집에 사는 부인에게 <같이 사는 분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네, 집사랑 마부 세명, 하녀 한 명이 같이 삽니다>라고는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하녀가 같은 방에 있거나 집사가 의자 뒤에 서 있다 해도 <같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죠. 여기서 사람이 없다는것은 묻는 사람이 의미한 바로 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전염병 조사를 나온 의사가 <같이 사는 분이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 부인은 곧바로 집사랑 마부 하녀들을 떠올릴 겁니다. 언어는 늘 그렇게 사용됩니다. 문자 그대로의 질문에 답이 나오는 일은 없다는 거죠.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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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0 - 상 - 청 제국 말 1800~1911, 1부 캠브리지 중국사 10
존 킹 페어뱅크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중국의 근대사는 두 개의 커다란 드라마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국제 교역과 전쟁을 무기로 팽창을 거듭해온 서구 문명과 농업과 관료주의를 무기로 이에 끈질기게 저항한 중국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며, 이러한 충돌의 와중에서 미증유의 혁명을 거치며 이루어진 중국의 전면적 변화가 다른 하나이다. - P24


캠브리지 중국사 10권부터 11권까지는 1800년 무렵부터 청 제국 말기까지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캠브리지 중국사 시리즈는 오래 전 나온 책이지만 중국 통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아쉽게도 청나라 역사를 제외하고는 앞부분은 모두 절판이거나 품절되어 현재는 구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청나라의 역사는 구입이 가능하여 구해서 읽었다.


18세기 청 제국은 유럽 세력이 확대되고 영토가 늘었으며 한족 인구가 증가하였다. 전사-통치자들의 간헐적인 침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촌락 생활은 외관상 사회적·기술적으로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 중단되는 일 없이 이때부터 지속성을 유지한 채 꾸준히 발전해온 것 같다. 촌락 공동체 사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 지배층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왕조는 계속 바뀌었지만 이들 지배층은 점차 복잡한 관료주의 통치 조직을 창조해냈다. 1800년 이후까지 이처럼 농업-관료주의에 기반한 중국 제국은 유럽의 상업적 군사적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 질서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중국의 농업 공동체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포함해 개인의 용기와 적극적인 태도가 해상 활동, 전쟁, 탐험, 해외 이민 등을 추구하는 유럽 사회에서와는 달리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P3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 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 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P222).


19세기 초가 되면 중앙 정부의 힘이 지방 정부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착취하고, 이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들고 일어나거나 점점 거세지는 상업화의 물결에 맞춰 도시로 나아간다. 도시에는 정기 시장이 생기고 상인이 늘어났으며 교역을 위한 해운업이 자연스레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농촌의 지식인층은 여전히 상업을 천시하며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걸으려 했기 때문에 이들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관료와 지식인 간에 인맥 네트워크는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종 불법과 부패를 낳는 효과를 낳는다. 가경제는 인사와 재정 지출 문제에 칼을 들이대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민중의 항세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진압을 하고, 이는 지방 사회를 더 분열하고 해체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홍수전은 (꿈을 꾼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광시성에서 포교를 하며 신도를 끌어 모아 배상제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이때 배상제회의 구성원이자 홍수전의 사촌인 풍운산이 체포된 뒤 홍수전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조직의 지도자들이 변경되고 이들은 태평천국 성립을 선포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평등주의적 메시지가 가난한 농민과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운동이 성립하기 전 조직의 지도자들끼리의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증국번을 지도자로 한 군대를 결성하여 대응하게 했다. 

태평천국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는 조직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부 분열, 정부의 반란 대응군 추가 투입(여기서 이홍장 등장),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태평천국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군은 난징성을 점령당하며 주요 흐름은 소탕되었다(이후에도 몇 년 더 이어졌지만 새 흐름을 일으키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 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 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P528).


1800년 이전 청은 내륙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을 포섭하고 흡수하다가 1800년 이후가 되면 그 범위를 본토와 연해까지 확장하게 된다. 1800년 당시 내륙아시아는 크게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4개 지역 모두에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통치를 위한 행정 구조는 각기 달랐다(P84). 청은 현재의 통치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주변 민족들을 포섭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사실 청이 그들에게서 원한 것은 오직 평화였다. 만주인의 내륙아시아 정복은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적대적 세력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륙 방면에서 중국 본토는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그러나 변경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령 인도의 팽창은 티베트의 청조 당국에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신장, 몽골, 만주 등의 변경에서는 러시아 세력이 대두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보면 이들은 먼 지방의 문제였다. 1815년 베이징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거의 감지조차 되지 않았다(P184). 19세기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변경 문제가 비로소 현실화된다.


1800년 무렵 청 정부는 외국 상인들을 인가 받은 교역 업자들만 독점적으로 상대하게 했다. 교역업소에 황제가 임명한 감독관이 파견되었는데 외국 상인들로서는 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고 정부 입장에서도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감독관의 부패를 묵인하는 경향도 발생했다. 특히 광저우는 상업의 중심지로 온갖 물자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편은 18세기 금지되고 윤리를 파괴시키는 물품으로 인식되었음에도 중국 전역에 자유로운 무역 거래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영국 상인들은 아편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섰고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폐단의 근원을 뿌리뽑도록 지시한다. 임칙서는 국가의 힘으로 아편 중독자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론자였다. 1차 아편 전쟁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1차 아편 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이 맺어진다. 조약의 내용은 기존의 특정 항구(광저우) 중심의 사무역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외교 관계를 맺는 방식을 지시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 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P382).


1856년 로이처선 애로호 사건을 배경으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따라 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중국의 하천과 해안을 모두 개방하게 되었으며 아편 무역이 합법화되었다. 이어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은 홍콩의 주룽반도를 영국에 할양하게 되었다.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 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 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P438).


작년부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를 읽어오고 있다. 이번에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어보니 하버드 중국사와는 서술 방식이 다르다고 느꼈다. 하버드 중국사는 시간 순으로 나열된 역사가 아님은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캠브리지 중국사는 목차만 보면 시간 순의 역사가 아닌 것 같지만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느꼈다.


10(하) 권의 내용은 점점 확대되는 외국 세력에 맞서 중국이 스스로 어떻게 맞서려 했는지를 다루는 것 같다. 바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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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는 완전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은폐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훗날의 ‘parousia‘ 개념을 예기하고 있다) 지금 식으로 말해, 실재는 어떤 기호(sign)로서, 징후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언어가 바로 이런 기호들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언어는 담론사의 새로운 문턱을 넘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글쓰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 P99

어떤 사물의 생성의 매 순간은 그것이 그 존재이자그 존재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다. 때문에 매 순간은 모순을 함축한다. 존재이자 비존재라는 모순을 존재와 무는 결코 섞일 수 없다. 서로 절대 모순을 형성한다. 생성은 존재이자 비존재=무이고, 거기에서 존재와 무는 이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생성이란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도래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생성, 시간, 모순관계, 동일성과 차이, 재인(再=recognition) 같은 개념들이 복잡하게얽히면서 하나의 개념군, 문제군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사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존재론적 난제(難題)=‘ontological aporia‘에 봉착한 것이다. - P105

조화라는 것은 모든 투쟁이 끝난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우주의 영원한 진리는 투쟁, 갈등, 전쟁이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원적하나의 계기들이라는 것, 그런 계기들의 균형을 통해 우주는 조화를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이다. - P112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학적인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종교가 말하는 내용이 학문적으로증명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고, 윤리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담당자들이어리석은 대중을 속여 부와 권력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비판은대체로 정당하다. 그러나 윤리적 맥락에서는 간단히 일반화하기가 곤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헐벗은 민중과 함께하는 종교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종교까지 무수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 P113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는 동북아의 사유와 몇 가지 친연성(親緣性)을가진다. 이미 언급했듯이, 만물이 흐른다는 생성존재론은 易의 기본 원리인 "生生不息"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이 흐름이 사실상 로고스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 역시 역의 생성이 태극에 의해 지배된다는각과 상통한다.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이다" 같은 식의 역설적 사유는 『노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투쟁이 만물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비롯한 여러 구절들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은 우리가 깨어난 뒤에 보는것들이고, 자고 있을 때 보는 것들은 잠(삶)이다" 같은 생각은 음양론의구조와 맥이 닿아 있다. 적어도 사유의 골격에 있어 두 전통은 적지 않게 상통한다 할 수 있으리라. 두 사유의 관계를 앞으로 면밀히 검토해볼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서구 철학의 ‘주류‘가 되었다면 동서양의 관계는 사뭇 다른 것이 되지 않았을까. - P118

학이 갈마듦을 확인할 수 있다. 비판 위주의 사유는 세계에 대해 스스로적극적인 가설을 내기보다는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인식론이 대표적이다. 철학을 ‘메타적‘ 담론이라고 할 때 이 말의 한가지 의미는 비판적 사유에 있다. 이런 유형의 철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해서, 세계에 대한 거창한 사변들에 대해서부정적이다. 반면 종합 위주의 철학은 기존의 작업들을 비판하기보다는스스로가 적극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인문·사회 • 자연과학을 종합해서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메타적‘이라는 말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이다. 칸트가 전자의 예라면, 헤겔은 후자의 예이다. 철학사는 비판철학과 종합철학의 대결의 역사이다. 종합철학자들이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비판철학자 - P119

들이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또 다른 인물이 나와 보다 발전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철학사는 인식론과 존재론, 비판철학과 형이상학, 메타적 분석과 종합적 사유의 길항(抗)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P120

크세노파네스는 퓌타고라스학파와 대조적이다. 퓌타고라스학파가 교조성이 강한 종교 단체였다면, 크세노파네스는 헬라스 전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한 비판철학자였다. 종교적 신앙과 비판적 사유는 단적으로 대립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분명한 방식으로 퓌타고라스학파를 비판했다. 크세노파네스의 문화 상대주의와 신화/종교 비판_은 헬라스 문화사의 중요한 한 사건이다. - P123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argument)을 통해서만 사유할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실재는 오로지 ‘영원부동의 일자‘라는 것이다. - P126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압축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있음은 가능하지만 없음은 불가능하다는말이다. 없음은 없다. 즉, 무(無)는 불가능하다. 오직 있음만이, 존재만이가능하다. - P128

결국 완벽하게 연속적이고 균일하며 영원하고 부동인 그런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추상 개념이 아닌가? 존재 개념과 세계, 우주, 자연 개념은 다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일자=존재는 곧 세계이다. 퓌타고라스학파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구분은 희미하다. 때문에 존재는곧 세계로 이해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완벽하게 연속적·균일적 · 영원적 • 부동적이라면, 결국 그것은 완벽하게 둥그런 구(球)가아닐까 생각했다.(따라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유한하다) 우리에게 ‘구‘와 ‘존재‘라는 두 개념은 범주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파르니데스에게는 존재=일자=세계=구이다. - P135

그리스 존재론 및 자연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파르메니데스 극복의 역사, 영원부동의 일자가 다자성과 운동으로 화하고 다자들의 관계와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명되어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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