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공학은 개별 유기체를 모델로 삼아, 신경계를 정점에 두는 통제 위계를 구축할 방법을 찾았다. 이런 유기체적 모델은 사회를 조화롭고 기능이 적절히 분배되어 균형 잡힌 전체로 파악하기 쉽게 만들었다. 유기적 생명과 본능 그리고 성은 경영의 대상이 되었다. 유기체 피라미드 맨 위에는 정신이 놓여 있어서, 경쟁이 과도해지면 이타성이 상황을 완화할 수 있게끔 했다. 후에 사회생물학이 되는 심리생물학은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이타성을 합리화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지배라는 기본 구조는 위협하지 않고 말이다. - P89

인간 종에 비해서는 덜 분화되어 있어도, 침팬지들에게는-"사회조직의 단위로서" 인성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인성이란기능적 전체, "유기체의 심리생물학적 속성과 능력 전체가 통합된 산물"을 뜻했다. 정상적인 인성의 경우 유전된 특징 및 기본적인 유기체적 충동은 의식적 자아와 통합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인성은 생명과 인간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과학적 연구대상이었다.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인성을 갖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성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개인과 정체가 조율되어 행복할 수 있었다. 여키스는 다양성과 가변성을 과소평가하기를 원치 않았다. 성과 지배처럼 핵심적인 충동과, 남성성 및 여성성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과 관련해 인성 교화는 과학적 공공서비스를 책임감 있게 제공하는 문제였다. 합리적 기준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할당할 가능성이 여기 걸려 있었다. - P102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통제 전략을 바꾸어, 운영 연구에 기반해 유기체에서 체계로, 우생학에서 인구 관리로, 인사관리에서 조직구조(사회기술적 체계와 인체공학)로 그 대상을 바꾸었다[릴리엔펠드(Lilienfeld), 1978].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자연적 대상을정보의 생산, 이전, 저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적절하게 이해할 수있는 기술적 장치로 다시 이론화하는 것을 뜻했다.
전쟁 이후 이루어진 전자공학산업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은, 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면이 조직화된 안정적인 체계를 고안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군사적 계획 수립 전략과 점점 강한 관계를 맺었다. - P107

사회생물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체계 유형을 연구한다. 바로개체군과 사회다. 둘 모두 정보의 경계 및 에너지 흐름이라는 용어를 통해 연구된다. 정보와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이다. 열역학과정보과학으로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개체군은 시간에 따른 유전자 흐름의 경계라는 측면에서 계측되며, 유전자는 정보가 물질화된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사회를 커뮤니케이션 지대와 정보교환의 용어를 통해 연구한다(윌슨, 1971, 1975). 개체는사회생물학 및 다른 생명과학 분야에 공통된 체계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상호작용하고, 마찬가지로 정보 및 에너지의 구조화된 흐름의 일부로서 연구된다. 그 결과 보다 높은 차원(개체군과사회)이 생겨난다. 개체는 유전자가 구성하거나 작동을 지시하는매개 구조다. - P113

자연은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희소성과 경쟁의 기초 위에 이론화되고 구축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본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안에서 그를 위해 구축된 생명과학을 구성함으로써 이론화되고 개발되었다. 이것은 풍요를 공동선이 아니라 사적 이해를 위해 전유하는 형태로서, 희소성 관리의일환이다. 이는 또한 가부장제에 근본적인 명령-통제 체계의 논리와 기술이 점증하는 형태로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의 일부다. 이와 같은 관행이 자연을 이론화하는 우리를 이끄는 만큼 우리는 계속 무지하며, 우리는 과학의 실천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것은 투쟁의 문제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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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문이 이미 죽고 나자 중사(中使) 가운데 바로 북방 변경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무부(武夫)와 사나운 병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곽수문은 봉록을 받게 되면 모두 소고기와 술을 사서 병사들에게 호군(?軍)32하였는데 죽은 뒤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탄식하고 애석해 하다가 바로 그 집에 전(錢) 5백만을 하사하고 이어서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요(遼)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침략할 것을 모의하여 북악묘(北岳廟)52에 가서 이것을 점치게 하였는데, 신(神)이 허락하지 않자 요(遼)나라 사람들이 불을 멋대로 질러 묘(廟, 북악묘)를 태워버리고 갔다.

가서 옛 서적과 기이한 그림과 선현(先賢)들의 묵적(墨跡)을 모으게 하였는데, 몇 년 사이에 도적(圖籍)을 궁궐에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사관(史館)에 조서를 내려서 천문(天文)·점후(占候)·참위(讖緯)·방술(方術) 등에 관한 책 5,010권을 다 가져오고 아울러 옛날 그림 묵적 114축(軸)을 내어서 모두 비각에 수장하였다.


8월 초하루 계묘일에 비서감인 이지(李至, 947~1001)와 우복야인 이방(李昉)·이부상서인 송기(宋琪, 917~996)·좌산기상시인 서현(徐鉉, 916~991) 그리고 한림학사·제조시랑(諸曹侍郞)·급사(給事)·간의(諫議)·사인(舍人) 등이 비각(?閣)에서 책을 보았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고, 도적(圖籍)을 크게 벌려 놓고 마음대로 보게 하였으며, 다음 날 또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인 왕화기(王化基, 944~1010)와 삼관학사에게 나란히 비각에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서 황제가 지은 시문(詩文)을 비각에 수장(受藏)하였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황제의 성품은 절약하고 검소하여 조회에서 물러가서는 항상 화양건을 착용하였고 베로 만든 옷과 굵은 명주로 된 띠를 맸으며 내복(內服)은 가는 명주로 만들었는데, 모두 여러 차례 세탁한 것이었고, 승여(乘輿)와 공급하는데 사용한 물건은 늘려 보탠 것이 없었다.

9월 을해일(3일)에 북여진(北女眞)54의 4부가 요(遼)에 붙기를 요청하였다.

경술일(9일)에 요(遼)에서는 이계천(李繼遷, 963~1004)을 하국왕(夏國王)로 책봉하였다.

정사일(16일)에 양주(?州, 甘肅省 寧夏)관찰사·판웅주사(判雄州事)인 하비(下?, 江蘇省 ?寧縣) 사람 유복(劉福, 928~991)이 죽었는데, 태부·충정(忠正)절도사를 증직하였다. 유복은 무인(武人)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데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하는 데는 방략을 갖고 있었고, 정치를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게 하였다. 웅주(雄州, 寧夏 中衛市)에서 5년 있었는데, 경내는 편안하고 고요하여 백성들이 전운사를 막고 〔유복의〕 정치적 업적을 추가로 진술하기를 원하여 그 상황을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유애비(遺愛碑)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항상 유복에게 큰 집을 세우라고 권고하였지만 유복은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받는 녹봉은 아주 후하여 충분히 집을 빌려서 스스로를 비호(庇護)한다. 너희들은 아직 한 자 만큼의 공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어찌 살 집을 지어서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황제가 그 말을 듣고 백금 5천 량(兩)을 그 아들에게 하사하고 집을 사서 거주하게 하였다.

좌정언인 사필이 자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니 황제는 그 충성스러운 것을 가상히 생각하여 병진일(18일)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발탁하고 금자(金紫)73와 아울러 전(錢) 30만을 하사하였다. 사필이 어느 날 편전(便殿)에서 응대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다시금 얼굴을 보면서 상찬(賞讚)하고 격려하니 사필이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폐하께서 간언을 좇는 것이 물 흐름 같으시니 그러므로 신은 정성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당 말(唐末)에 맹소도(孟昭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침에 간쟁하는 상소문을 올리었는데 저녁이 되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 시대에 이와 같았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감동하는 얼굴을 오래 짓고 있었다.

정해일(21일)에 병주(幷州, 山西省 太原市)에서 거란의 400여 명이 내부(內附)76하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국가에 만약에 밖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반드시 안의 근심거리가 있다. 밖의 근심거리는 변방 일에 불과하여 모두 미리 막을 수 있지만 오직 간사하기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만약에 안에서 걱정거리를 만든다면 깊이 두려워할 만하다."

지지난 해에 북방의 군사[요의 군사]가 변경으로 들어 와서 살아있는 영혼들이 폐해를 입었습니다. 만승(萬乘, 황제)께서는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지만 많은 관리들은 도와주는 공로를 세우지 않았으니, 동료들이 함께 일을 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며 청렴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오직 대책을 바칠 때에는 조금씩 잠자코 있으니 어찌 급히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처리하겠습니까?

위로군(威虜軍, 河北省 徐水縣)의 군량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자 요인(遼人)들은 이를 엿보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정주로도부서(定州路都部署, 치소는 定州 安喜縣)인 이계륭(李繼隆, 950~1005)에게 조서를 내려서 진·정(鎭·定)의 대군을 징발하여 군량 1천여 승을 호송하게 하였다. 요(遼) 유열(于越)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이 이 소식을 듣고 정예의 기병 수만을 인솔하여 와서 맞았는데, 북면연변도순검(北面緣邊都巡檢)인 준의(浚儀, 河南省 開封市) 사람 윤계륜(尹繼倫, 947~996)이 소속의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변새(邊塞)에서 순시를 하다가 이들을 만났지만, 야율휴격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지나가면서 지름길로 대군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윤계륜이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들은 우리를 마치 어육(魚肉)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저들이 승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이긴 기세를 타고 우리를 북쪽으로 몰아 갈 것이고, 승리를 못한다면 역시 우리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니 우리들은 씨도 안 남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마땅히 갑옷을 둘둘 말고 함매(銜枚)하여 그들의 뒤를 습격해야 마땅하다.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도착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것인데, 힘껏 싸워서 승리하면 충분이 자립(自立)할 것이고, 설사 패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찌 망하여 북쪽 땅에서 귀신이 될 수 있을까보냐?"

무리들이 분격(憤激)하여 명령을 좇았다.

윤계륜은 이어서 군중에서 말에 꼴을 먹이게 하고, 밤이 되자 사람을 파견하여 짧은 무기를 가지고 몰래 그들의 뒤를 밟게 하였다. 수십 리를 가서 당하(唐河, 장강지류)의 서하(徐河, 河北 徐水의 南쪽)에 도착하였는데19 날이 아직 밝지 않았지만 야율휴격은 대군에서 45리20 떨어졌으며 윤계륜은 성의 북쪽에 진을 늘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적들은 바야흐로 모여서 식사를 하였는데, 이미 밥을 다 먹고 곧 나아가 싸우려고 하자, 윤계륜은 그들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급히 그들을 쳐서 그들의 대장 한 명을 죽이자 무리들은 드디어 놀라서 혼란에 빠졌다.

야율휴격은 식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가 수저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짧은 무기에 그의 팔을 맞아 상처가 심하였으며 좋은 말에 올라 먼저 숨어버렸다. 요의 군사들은 멀리 대군을 바라보고는 드디어 붕궤되니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계륭이 진주부도부서(鎭州副都部署)인 범정소(范廷召, 927~1001)와 더불어 뒤를 쫓아 달려가서 서하를 넘어 10여 리를 갔는데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주부도부서(定州副都部署)인 공수정(孔守正)이 또 요나라 사람들과 조하(曹河)의 사촌(斜邨)에서 싸워서 그 장수 대영(大盈) 등의 목을 베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거(大擧) 남하하는 일이 없었으며 윤계륜의 얼굴이 검었으므로 서로 경계하여 말하였다.

"마땅히 흑면대왕(黑面大王)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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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무오일(4일)에 요의 군사가 사퇴역(沙堆驛)을 깨뜨렸다. 경오일(16일)에는 항복한 군사를 나누어 7지휘(指揮)에 배치하고 귀성군(歸聖軍)이라고 불렀다. 행군참모(行軍參謀)인 마득신(馬得臣, ?~989)이 말하였다.

"송의 군사에게 항복하라고 유시하였지만 아마도 끝내 써 먹을 수가 없을까 걱정되니 청컨대 풀어주어 돌려보내십시오."

요주(遼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사일(27일)에 해왕인 주녕(籌寧)이 남쪽의 군사를 익진관(益津關, 송·요 분계선에 위치)에서 패배시켰다. 계미일(29일)에 군사를 장성(長城) 입구로 내 보내니 정주(定州, 河北省, 保定市와 石家莊市의 사이)의 수장(守將)인 이흥(李興)이 이를 쳤지만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에게 패배하였다.

요(遼)의 군사가 당하(唐河, 하북 중부)의 북쪽에 도착하니 〔송의〕 제장들은 조서를 좇아서 일을 하려고 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들을 깨끗이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으려 하였는데, 정주(定州)감군인 원계충(袁繼忠, 938~992)이 말하였다.

"적의 기병이 가까이에 있고 성 안에는 많은 군사를 주둔하고 있으면서 목을 베어 없앨 수 없다면 멀리 말을 달려 깊이 들어갈 것인데, 어찌 잘라 충격을 주어 모욕을 막는데 쓰겠는가! 내가 곧 자신이 사졸의 앞에 나아가서 적에게 죽을 것이다!"

말씨와 기세가 강개(?慨)하니 무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역주(易州)의 정새(靜塞)에 있는 기병(騎兵)은 특히 날래고 과감하였는데, 이계륭이 가져다가 자기 휘하에 예속시키면서 그들의 처자를 성 안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원계충이 이계륭에게 말하였다.

"이 정예의 병졸이 단지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에 그치게 하였는데 만일에 구적(寇賊)이 이르게 되면 성 안에서 누가 더불어 적을 막을 것인가!"

이계륭이 좇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하였는데 과연 요의 군사가 이르렀고, 역주는 드디어 함락되었으며 병졸들의 처자는 모두 노략되었다. 이계륭이 병졸을 나누어 제군(諸軍)에 예속시키려고 하니 원계충이 말하였다.

"아니 된다. 그러나 상주하여 그 군사의 명수(名數)를 올려주고 늠급(?給)을 우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절개(節槪)를 다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이계륭이 그 말을 좇으니 무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기뻐하여 이계륭은 이어서 자기 예하에 예속시키기를 빌었다. 이에 이르러 먼저 들어온 사람들의 예봉을 꺾으니 요의 군사들은 크게 붕궤되었고 추격하여 조하(曹河)에 이르렀다.

호부랑중인 장계(張?, 934~997)가 주문(奏文)을 올려서 말하였다.

"유·계(幽·?)에서 군사 활동을 하면서부터 여기까지 여러 해가 쌓였는데 그 연고는 무엇입니까? 대개 중국(中國,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 즉 宋)은 지세(地勢)의 이로움을 잃었고, 군사력을 분산되었는데 장수는 중앙(中央, 조정)에서 통제하며 병사들이 명령을 다 사용하지 않는 연고입니다.

중국이 믿는 것은 험한 지형뿐입니다. 삭방(朔方, 북방)에 있는 요새의 남쪽은 지형이 거듭하여 험하고 깊은 산과 큰 골짜기가 만 리에 이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안팎을 한계 짓고 있습니다.

국가가 통제하고 어거하는 길52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살펴 관찰하여 만 가지가 다 안전한 계략을 채택해야 합니다.

신은 얼마 전에 탁주에서의 전투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융(元戎, 主將)은 장교들의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고 장교는 삼군 가운데 용감한 사람과 겁먹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각기 서로 관할(管轄)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자임(自任)하며 아직 상을 주어 효과 있게 쓰인 것과 명령을 배반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의 싸움에서 적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 개의 강노(强弩)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적의 기병이 이미 돌아갔는데, 화살이 산처

럼 쌓였다고 합니다. 이에 과극(戈戟)과 도검(刀劍)은 그 쓰인 것이 모두 그러함을 알겠으며, 이는 천병(天兵, 천자의 변사, 즉 송의 군대)을 몰아서 빈주먹을 휘둘러서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州)의 전투에서 진지(陣地)의 전장(戰場)이 이미 포진(布陣)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병장기(兵仗器)를 가지려고 찾고 어떤 사람은 부대(部隊)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하고 부르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비등(沸騰)하여 마침내 수레가 혼란에 빠지고 놀라며 먼지가 일어나 갈 곳을 알지 못하여서 시석(矢石)은 아직 교차되지 않았는데, 기정(奇正)55은 먼저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군정(軍政)이 이와 같은데 누가 패망하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우정언·직사관인 왕우칭(王禹?, 954~1001)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변방에 대한 대비책은 밖으로 그에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고 안으로는 그 덕을 닦는데 있습니다. 밖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군사 세력의 걱정거리가 합쳐지지 않는데 있고, 장수인 신하의 걱정거리는 권한이 없는데 있습니다.

둘째로는 변방을 정탐(偵探)하며 순라(巡邏)를 도는 일에서는 소인(小人)인 신하를 채용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오래된 신하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채용하시어서 왕래하며 펼쳐서 위무하면서 온화한 안색을 내려 주시고 모든 마음을 숨김이 없게 하신다면 변방의 업무는 해결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간첩(間諜)을 운영하여 그들[적]을 떼어 놓고 틈새를 이용하여 그것을 빼앗습니다.

의당 두터운 이익을 덜어내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먹여서 그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공격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中國)의 이로움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애통(哀痛)하는 조서를 내리시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감격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의당 애통하는 조서를 내리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고유(告諭)하여 하나의 수급을 얻는 사람에게는 백(帛)을 하사하고 말 한 필을 얻는 사람에게는 그 값을 돌려주며 부수(部帥)를 얻는 사람에게는 산관(散官)을 준다고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람들은 그 용기를 백배하고 병사들은 그 마음을 하나로 할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은 관리를 살피고 뽑아 올리는 것을 신중히 하며 대신을 믿고 쓰며 놀고 게으른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지제고인 전석(田錫, 940~1004)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오늘날 적을 막는 것에서는 장수를 선발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며, 이미 장수를 찾고 나서는 청하여 책임을 맡기고 성공하기를 책임 지우는데, 진지의 계획을 내려 줄 필요가 없고 방략(方略)을 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기회에 따라서 변화를 만들게 하며 틈을 관찰하고 마땅하게 통제하도록 하면 성공 못할 것이 없습니다.

거란은 스스로 여러 나라[우호국]를 소유하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일찍이 탐색하신 것 가운데 무릇 몇 개의 나라가 그들과 더불어 원수를 맺고 있는지

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모두 이를 알았다면 무거운 상을 이용하고 간첩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간첩이 만약에 가게 된다면 거란은 스스로 혼란해 질 것이니 변방의 시골은 스스로 편안할 것입니다.

조서를 내려서 〔황제가〕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당시에 진사 17명이 집안 식구를 데리고 요(遼)에 귀부하였는데, 요주(遼主)가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그 중에 급제한 사람에게 시험을 치게 하여 국학관(國學官)으로 보임하고 나머지는 현(縣)의 주부(主簿)와 현위(縣尉)로 하였다.

황제가 조보에게 유시(諭示)하여 말하였다.

"경은 자리가 높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방종하지 말고 권력이 무겁다고 스스로 교만하지 말며 다만 상을 주고 벌을 주는데 삼가 〔사사롭게〕 아끼고 미워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군사와 국가의 일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소!"

여몽정은 바탕이 후덕하고 관대하며 간편하여 두터운 명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였으며 일을 만나서는 과감하게 말을 하였으며 매번 정사를 논의하면서 아직 마땅하지 않다면 반드시 굳게 안 된다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감추지 않는 것을 가상(嘉賞)히 여겼으니 그러므로 조보와 함께 명령을 내려서 조보의 옛날 은덕에 의거하여 그를 위한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여몽정은 후배이지만 빨리 나아가서 조보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되었는데 조보는 아주 그를 밀어서 허락하였다.

개봉윤인 진왕(陳王) 조원희(趙元僖)의 봉작(封爵)을 올려서 허왕(許王)으로 삼고, 한왕(韓王) 조원간(趙元侃)의 봉작을 올려서 양왕(襄王)으로 삼았으며, 기왕(冀王) 조원빈(趙元?)의 봉작을 올려서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황제가 손수 조서를 내려서 조원희 등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깊은 궁궐에서 낳아서 자랐으니 반드시 자기를 이기도록 힘쓰고 자세히 하며 낮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라. 매번 한 벌의 옷을 입을 적마다 누에치는 여인을 가엽게 여기고 매번 한 그릇 밥을 먹을 적마다 밭가는 농부를 생각하라.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는 시점에 이르면 그에 대한 기쁘거나 화내는 것을 신중히 하여 멋대로 하지 말라. 짐은 매번 여러 신하를 예로 접하면서 계옥(啓沃)10하기를 요구하는데, 너희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의 단점을 천시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을 믿지 말아서야 마침내 부귀함을 영원히 지키고 아름다운 끝을 보존할 것이다. 먼저 계셨던 현인들이 말하였다. ‘나를 거스르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고, 나에게 순응하는 사람은 나의 도적이다.’ 이것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월 신유일(5일)에 비각(秘閣)을 숭문원(崇文院)에 두고 세 관(館)으로 나누어 책 1만여 권으로 그 안을 채웠다. 이부시랑인 이지(李至, 947~1001)에게 비서감(秘書監)을 겸직하도록 명령하고 황제가 이지에게 말하였다.

"인군(人君)이란 마땅히 담담하고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을 밖에 형체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되니 간사하고 망령된 것이 스스로 들어오는 일이 없다. 짐은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책 읽기는 좋아하여 고금(古今)의 성패(成敗)를 많이 보아서 좋은 것은 이를 좇고 좋지 않은 것은 이를 고치니 이처럼 할 뿐이다."

이지 등이 전각(殿閣)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황제는 반드시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내려주었고, 또 삼관의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참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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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과거는 논쟁지대다

우리가 재생산과 생산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이중적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지배의 자연적·문화적 필요성의 전망을 강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을 실천하는 다른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즉, 이론의 범주 및 통제와 적대의 실천에 압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현재로서는 단편적인 가능성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줄 수 있다. - P44

과학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과거의 규칙성과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사건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우리의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이론화하도록 훈련하는 활동이며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데에 보태어) 세계 속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고 구성하며, 미래를 만드는 전략을 개발한다. - P46

밀러와 주커먼은 인간가족(이른바 지속적인 여성 수용성)의 생물학적 핵심에 해당하는특성이, 포유류가 번식을 위해 이루는 집단에서 모두 발견된다는의견을 피력했다. 단지 주커먼은 그로써 형성되는 영장류의 사회형태에 대한 분석으로 시야를 넓혀 나갔을 뿐이다. - P54

주커먼에게 사회 진화에서 중심적인 사건은 극단적인 계절성과 암컷의 지속적인 성적 ‘수용성‘에 토대를 둔 장기간의 유대(association)가 도입되는 사건이었다. 우선 발정기가 도입되었고, 그 뒤를 따라 생리주기가 도입되면서 성교에 몰두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월 주기가 계절 주기를 대체했고 사회적 혁명이 그 뒤를 따랐다. 동물들이 지속적인 유대에서 살아남으려면강력한 통제장치가 필요했다. 그에 따라 ‘하렘‘이 발전한 것이다. - P56

주커먼은 남성 경쟁은 자연스럽고 여성 성욕은 위험하다고 강조하는 과학적 믿음을 의심하는 연구자까지도 따라야만 하는 질문 형식을 설정했다. 성욕을 지배에 묶어 두는 그의 관점은 1930년대의 생리학과 행동과학이 수용할 수 있는 형태였고 지배 상태를 개념보다는 속성 내지는 사실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영장류학은 계속해서 지배 행동의 선택적 이득에 대해 줄곧 질문했고, 번식상의 이득과 지배라 일컬어지는 무엇 사이의 관계를, 검증하기보다는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1965년 셔우드 워시번의 학생 두 명이 논문 한 편을 발표해서연중 지속되는 암컷의 성욕을 영장류 사회의 기원으로 보는 그의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 그의 이론은 확신 속에 지탱되었다. 잠복한 프로이트주의, 생화학적 메커니즘, 사회적 행동 연구를 혼합하는 주커먼의 방식은 장기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 P59

1974년 로웰은 사회구조를 이해할 때 지배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요약했다. 로웰에 따르면 두 가지 핵심 접근법이 있다. 첫째, 잠정적으로 지배로 간주되는 행동 전체를 학습된 반응으로 봄으로써 현대 동물심리학 이론이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둘째, 지배를 선택압에 종속된 특징이나 적응적복합체로 간주하게 만드는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 다시 말하면, 이른바 지배 행동은 번식 성공과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 P62

스트레스 반응의 차이 배후에 있는 개체군의 유전적 다양성은 진화 과정에서 보존될 것이다. 체계 전반의 균형에 대한 사회적 역할의기능주의적 관념, 생화학적 호르몬 기능에 대한 유전적 개념, 그리고 지배 - 종속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법은 모두 스트레스라는중심 개념에서 수렴된다. - P64

생물학적 특성은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젯거리가 되었다. 점점 빨라지는 기술적 진보 탓에 오적응이 되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옛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언를 통한 새로운 기술의 문화적 전수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했ㄷ그렇다면 이제 사회통제가 와해될 때, 병리적 파괴가 뒤따를이라고 예상해야만 한다. 여기서 햄버그와 워시번이 제공하는례는 나치 독일, 콩고, 알제리, 베트남의 사례다! 교훈은, 우리우리의 본성을 통제하려면 우선 그 본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난점은, 영장류가 현대의 인간 집단을 이끈다는 사실이다. 영장류의 진화사는 생물학적·사회적 전수를 통해 위계ㄷ대한 강한 선호를 낳았다". 이 논리는 정보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과학 이전의 관습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진보된 세계에서 과학전의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공격적인 종은, 대인 갈등과 국제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특정한 사회질서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건 정치와 가치의 문제다) 모든진보된 사회를 위한 선결 조건을 수립하는 것, 즉 이제는 실효성이 없고 오적응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생물학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 P68

주커먼과 워시번의 수렵 논변을 추적해 온 독자의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 암컷 수용성은 암컷 선택이라는 다른 이름을 얻었고 그 유전적 결과 또한 컸다는 점이다.
둘째로, 송곳니의 축소라는 해부학적 현상은 다른 행동과 다른 기능이 가정될 때 재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 P79

각 설화의 목표는 인간 보편성과 문화의 기초로서간 본성을 그려 내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즘에 유용한 인간 본성의 재구성은 사회주의페미니즘의 사유에서 가장 경멸당하는 두 이론에서 도출되었다. 기능주의와 사회생물학이로 그것이다. 이 두 분야는 불평등한 경제와 정치적 구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한다고, 신체와 정체의 현재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을 합리화한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분명 로웰, 태너, 질먼이 보여 준 것처럼, 이 이론들은 다른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가변성과 복잡성, 변화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바로 과학 내부로부터 생명사회적 논쟁에 진지하게참여할 수 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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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0 - 하 - 청 제국 말 1800~1911, 1부 캠브리지 중국사 10
존 킹 페어뱅크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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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 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0~611


이전 권에서 1800년 경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와 청의 조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권에서는 1820년~1830년 무렵의 시기를 살펴본다. 특히나 청과 러시아 사이 국경을 둘러싸고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시작은 다른 내륙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교역 관계의 문제였는데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로 러시아가 영국을 경계하면서 청과의 접경 지역을 더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이 과정을 청은 주도적으로 끌고갈 수 없었는데 이는 태평천국운동으로 내부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1858년 아이훈조약과 텐진조약을 차례로 맺으며 양국 간 북쪽의 국경선이 정해지고 항구를 개방하며 러시아인에 대한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서 동북 만주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몽골 유목 사회는 사원 제도가 정착하면서 출가에 따른 남성 인구가 감소하였고 한족 세력이 침투하여 몽골인의 채무가 늘어나 약탈, 걸식으로 내몰리자 일반인들은 빈민화되었다. 몽골의 방목지까지 감소하면서 먹고 살 길은 더 어려워졌고 이에 도시 지역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청 조정도 처음에는 한족이 이 땅에 이주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통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몽골 지역에서 청조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오랜 목표, 즉 유목민들을 변화시켜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만주족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만주 지역에서 준가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감소했고 가축과 영토 또한 크게 감소했다.

신장에서 만주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공식적으로 청조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동투르키스탄인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이슬람 문명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모든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초석에 도전적이었다. 황제는 라마교도가 되지 않고도 라마교의 합법적인 후견인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되지 않고서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P701


몽골이나 신장과 달리 티베트는 자기 고유의 토착적인 중앙 정부를 갖고 있었다. 티베트의 군사력은 중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만주족은 이 종교 국가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세기 내내 달라이 라마 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고, 베이징은 외국의 영향력을 배척하고 티베트의 고립을 유지하려는 라싸의 노력을 지지했다. - P702~703


1830년대 신장의 역사는 놀라웠다. 그 지역을 꽉 잡고 있던 세력은 코칸드 정부로 청 조정은 1840년대 난징조약 등 외국 세력과 맺은 다양한 사항을 미리 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의 조항이 있는데 향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다. 티베트도 네팔과의  사이에서 코칸드 정부와 비슷한 협상을 거치며 1856년 조약을 맺었다. 


청조는 태평천국운동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증국번은 양쯔강 이남 지역의 농촌에 토지세와 부가세를 줄이면서 농민들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했고 조정 관료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인재 선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반면 화북 지방에는 소금 밀매업자인 염군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의적을 자처하며 핍박 받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일어났고 1868년 무렵이 되면 그들이 화북 전체로 집단화되어 민란이 번진다. 때문에 조정의 입장에서 민란은 태평천국 이후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세력이었을 것 같다.


메리 클래버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조뿐만 아니라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문명 또한 1860년대 걸출한 인물들의 걸출한 노력으로 살아남아 이후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동치중흥이다. - P808

메리 라이트의 탁견은 앞으로도 이 시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조의 중흥은 "중국의 전통적 제도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기 위한 최후의 위대한 노력을 대변하며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1870년대 초 장쑤 성, 산둥성, 직예성 등에서는 구질서가 분명하게 회복되었다. 쑤-쑹-타이 지역의 ‘대호들‘은 탈세를 계속했다. 아역들은 다시 산둥 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금 징수를 독점하거나 부가세를 착복했다. 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층 신사들(심지어 예성의 하층 신사들조차)은 세금 징수인 혹은 말썽많은 ‘송‘ 혹은 송사가 되어 아역과 결탁하거나 경쟁했다.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서양식 무기를 이용할 수있게 된 여러 성의 용영, 심지어 재훈련된 녹영군 때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청조가 관료 인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면서, 총독과 순무가 지방 관원 임명에 대한 역할을 확대시켜 행정적 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융통성이 점차 제한되었다. - P824~825


2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며 청 조정의 관료들은 전통적인 유교식 덕치주의 정치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이제 과거와는 단절하고 외국 열강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느낀 것이다. 특히나 전쟁에서 확인한 서양의 대포를 비롯한 화기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들은 부국 강병책을 위해 서양 무기 수용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의견 갈등은 있었으나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대부분은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전통과의 단절에 대한 압박은 서양 종교의 포교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 선교회는 일찍부터 청에 들어와 포교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 체계를 세우고 청나라 전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이동, 경비 마련 등이 필요했다. 1860년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에서의 모든 기독교 선교가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산은 깊었다. 송나라 시기 이후 기독교는 유가적 세계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기적에 의한 기독교적 신앙이 정치 전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며 이단화된다. 결국 옹정제 때 기독교 금령이 내려지는데 결정적으로 태평천국운동 세력이 기독교에 배경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용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엇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였다. 서양인들이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청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대로 서양인들도 청나라 사람들의 문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서로 다가가지 못한 기간이 이토록 길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선교가 자유화되며 기독교 세력은 확대되지만 중국 내 자리잡는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지식은 수용하고 종교는 거부하는 이중 전략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0권 상/하권 읽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잘 안 읽혀서 고생했는데 책에 대한 감을 잡고 나니 그 이후에는 읽기가 더 매끄러웠다. 책에서 특히 만주, 신장, 티베트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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