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10월 무오일(4일)에 요의 군사가 사퇴역(沙堆驛)을 깨뜨렸다. 경오일(16일)에는 항복한 군사를 나누어 7지휘(指揮)에 배치하고 귀성군(歸聖軍)이라고 불렀다. 행군참모(行軍參謀)인 마득신(馬得臣, ?~989)이 말하였다.

"송의 군사에게 항복하라고 유시하였지만 아마도 끝내 써 먹을 수가 없을까 걱정되니 청컨대 풀어주어 돌려보내십시오."

요주(遼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사일(27일)에 해왕인 주녕(籌寧)이 남쪽의 군사를 익진관(益津關, 송·요 분계선에 위치)에서 패배시켰다. 계미일(29일)에 군사를 장성(長城) 입구로 내 보내니 정주(定州, 河北省, 保定市와 石家莊市의 사이)의 수장(守將)인 이흥(李興)이 이를 쳤지만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에게 패배하였다.

요(遼)의 군사가 당하(唐河, 하북 중부)의 북쪽에 도착하니 〔송의〕 제장들은 조서를 좇아서 일을 하려고 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들을 깨끗이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으려 하였는데, 정주(定州)감군인 원계충(袁繼忠, 938~992)이 말하였다.

"적의 기병이 가까이에 있고 성 안에는 많은 군사를 주둔하고 있으면서 목을 베어 없앨 수 없다면 멀리 말을 달려 깊이 들어갈 것인데, 어찌 잘라 충격을 주어 모욕을 막는데 쓰겠는가! 내가 곧 자신이 사졸의 앞에 나아가서 적에게 죽을 것이다!"

말씨와 기세가 강개(?慨)하니 무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역주(易州)의 정새(靜塞)에 있는 기병(騎兵)은 특히 날래고 과감하였는데, 이계륭이 가져다가 자기 휘하에 예속시키면서 그들의 처자를 성 안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원계충이 이계륭에게 말하였다.

"이 정예의 병졸이 단지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에 그치게 하였는데 만일에 구적(寇賊)이 이르게 되면 성 안에서 누가 더불어 적을 막을 것인가!"

이계륭이 좇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하였는데 과연 요의 군사가 이르렀고, 역주는 드디어 함락되었으며 병졸들의 처자는 모두 노략되었다. 이계륭이 병졸을 나누어 제군(諸軍)에 예속시키려고 하니 원계충이 말하였다.

"아니 된다. 그러나 상주하여 그 군사의 명수(名數)를 올려주고 늠급(?給)을 우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절개(節槪)를 다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이계륭이 그 말을 좇으니 무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기뻐하여 이계륭은 이어서 자기 예하에 예속시키기를 빌었다. 이에 이르러 먼저 들어온 사람들의 예봉을 꺾으니 요의 군사들은 크게 붕궤되었고 추격하여 조하(曹河)에 이르렀다.

호부랑중인 장계(張?, 934~997)가 주문(奏文)을 올려서 말하였다.

"유·계(幽·?)에서 군사 활동을 하면서부터 여기까지 여러 해가 쌓였는데 그 연고는 무엇입니까? 대개 중국(中國,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 즉 宋)은 지세(地勢)의 이로움을 잃었고, 군사력을 분산되었는데 장수는 중앙(中央, 조정)에서 통제하며 병사들이 명령을 다 사용하지 않는 연고입니다.

중국이 믿는 것은 험한 지형뿐입니다. 삭방(朔方, 북방)에 있는 요새의 남쪽은 지형이 거듭하여 험하고 깊은 산과 큰 골짜기가 만 리에 이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안팎을 한계 짓고 있습니다.

국가가 통제하고 어거하는 길52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살펴 관찰하여 만 가지가 다 안전한 계략을 채택해야 합니다.

신은 얼마 전에 탁주에서의 전투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융(元戎, 主將)은 장교들의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고 장교는 삼군 가운데 용감한 사람과 겁먹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각기 서로 관할(管轄)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자임(自任)하며 아직 상을 주어 효과 있게 쓰인 것과 명령을 배반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의 싸움에서 적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 개의 강노(强弩)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적의 기병이 이미 돌아갔는데, 화살이 산처

럼 쌓였다고 합니다. 이에 과극(戈戟)과 도검(刀劍)은 그 쓰인 것이 모두 그러함을 알겠으며, 이는 천병(天兵, 천자의 변사, 즉 송의 군대)을 몰아서 빈주먹을 휘둘러서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州)의 전투에서 진지(陣地)의 전장(戰場)이 이미 포진(布陣)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병장기(兵仗器)를 가지려고 찾고 어떤 사람은 부대(部隊)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하고 부르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비등(沸騰)하여 마침내 수레가 혼란에 빠지고 놀라며 먼지가 일어나 갈 곳을 알지 못하여서 시석(矢石)은 아직 교차되지 않았는데, 기정(奇正)55은 먼저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군정(軍政)이 이와 같은데 누가 패망하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우정언·직사관인 왕우칭(王禹?, 954~1001)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변방에 대한 대비책은 밖으로 그에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고 안으로는 그 덕을 닦는데 있습니다. 밖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군사 세력의 걱정거리가 합쳐지지 않는데 있고, 장수인 신하의 걱정거리는 권한이 없는데 있습니다.

둘째로는 변방을 정탐(偵探)하며 순라(巡邏)를 도는 일에서는 소인(小人)인 신하를 채용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오래된 신하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채용하시어서 왕래하며 펼쳐서 위무하면서 온화한 안색을 내려 주시고 모든 마음을 숨김이 없게 하신다면 변방의 업무는 해결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간첩(間諜)을 운영하여 그들[적]을 떼어 놓고 틈새를 이용하여 그것을 빼앗습니다.

의당 두터운 이익을 덜어내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먹여서 그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공격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中國)의 이로움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애통(哀痛)하는 조서를 내리시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감격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의당 애통하는 조서를 내리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고유(告諭)하여 하나의 수급을 얻는 사람에게는 백(帛)을 하사하고 말 한 필을 얻는 사람에게는 그 값을 돌려주며 부수(部帥)를 얻는 사람에게는 산관(散官)을 준다고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람들은 그 용기를 백배하고 병사들은 그 마음을 하나로 할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은 관리를 살피고 뽑아 올리는 것을 신중히 하며 대신을 믿고 쓰며 놀고 게으른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지제고인 전석(田錫, 940~1004)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오늘날 적을 막는 것에서는 장수를 선발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며, 이미 장수를 찾고 나서는 청하여 책임을 맡기고 성공하기를 책임 지우는데, 진지의 계획을 내려 줄 필요가 없고 방략(方略)을 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기회에 따라서 변화를 만들게 하며 틈을 관찰하고 마땅하게 통제하도록 하면 성공 못할 것이 없습니다.

거란은 스스로 여러 나라[우호국]를 소유하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일찍이 탐색하신 것 가운데 무릇 몇 개의 나라가 그들과 더불어 원수를 맺고 있는지

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모두 이를 알았다면 무거운 상을 이용하고 간첩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간첩이 만약에 가게 된다면 거란은 스스로 혼란해 질 것이니 변방의 시골은 스스로 편안할 것입니다.

조서를 내려서 〔황제가〕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당시에 진사 17명이 집안 식구를 데리고 요(遼)에 귀부하였는데, 요주(遼主)가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그 중에 급제한 사람에게 시험을 치게 하여 국학관(國學官)으로 보임하고 나머지는 현(縣)의 주부(主簿)와 현위(縣尉)로 하였다.

황제가 조보에게 유시(諭示)하여 말하였다.

"경은 자리가 높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방종하지 말고 권력이 무겁다고 스스로 교만하지 말며 다만 상을 주고 벌을 주는데 삼가 〔사사롭게〕 아끼고 미워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군사와 국가의 일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소!"

여몽정은 바탕이 후덕하고 관대하며 간편하여 두터운 명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였으며 일을 만나서는 과감하게 말을 하였으며 매번 정사를 논의하면서 아직 마땅하지 않다면 반드시 굳게 안 된다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감추지 않는 것을 가상(嘉賞)히 여겼으니 그러므로 조보와 함께 명령을 내려서 조보의 옛날 은덕에 의거하여 그를 위한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여몽정은 후배이지만 빨리 나아가서 조보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되었는데 조보는 아주 그를 밀어서 허락하였다.

개봉윤인 진왕(陳王) 조원희(趙元僖)의 봉작(封爵)을 올려서 허왕(許王)으로 삼고, 한왕(韓王) 조원간(趙元侃)의 봉작을 올려서 양왕(襄王)으로 삼았으며, 기왕(冀王) 조원빈(趙元?)의 봉작을 올려서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황제가 손수 조서를 내려서 조원희 등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깊은 궁궐에서 낳아서 자랐으니 반드시 자기를 이기도록 힘쓰고 자세히 하며 낮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라. 매번 한 벌의 옷을 입을 적마다 누에치는 여인을 가엽게 여기고 매번 한 그릇 밥을 먹을 적마다 밭가는 농부를 생각하라.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는 시점에 이르면 그에 대한 기쁘거나 화내는 것을 신중히 하여 멋대로 하지 말라. 짐은 매번 여러 신하를 예로 접하면서 계옥(啓沃)10하기를 요구하는데, 너희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의 단점을 천시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을 믿지 말아서야 마침내 부귀함을 영원히 지키고 아름다운 끝을 보존할 것이다. 먼저 계셨던 현인들이 말하였다. ‘나를 거스르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고, 나에게 순응하는 사람은 나의 도적이다.’ 이것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월 신유일(5일)에 비각(秘閣)을 숭문원(崇文院)에 두고 세 관(館)으로 나누어 책 1만여 권으로 그 안을 채웠다. 이부시랑인 이지(李至, 947~1001)에게 비서감(秘書監)을 겸직하도록 명령하고 황제가 이지에게 말하였다.

"인군(人君)이란 마땅히 담담하고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을 밖에 형체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되니 간사하고 망령된 것이 스스로 들어오는 일이 없다. 짐은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책 읽기는 좋아하여 고금(古今)의 성패(成敗)를 많이 보아서 좋은 것은 이를 좇고 좋지 않은 것은 이를 고치니 이처럼 할 뿐이다."

이지 등이 전각(殿閣)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황제는 반드시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내려주었고, 또 삼관의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참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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