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수문이 이미 죽고 나자 중사(中使) 가운데 바로 북방 변경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무부(武夫)와 사나운 병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곽수문은 봉록을 받게 되면 모두 소고기와 술을 사서 병사들에게 호군(?軍)32하였는데 죽은 뒤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탄식하고 애석해 하다가 바로 그 집에 전(錢) 5백만을 하사하고 이어서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요(遼)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침략할 것을 모의하여 북악묘(北岳廟)52에 가서 이것을 점치게 하였는데, 신(神)이 허락하지 않자 요(遼)나라 사람들이 불을 멋대로 질러 묘(廟, 북악묘)를 태워버리고 갔다.

가서 옛 서적과 기이한 그림과 선현(先賢)들의 묵적(墨跡)을 모으게 하였는데, 몇 년 사이에 도적(圖籍)을 궁궐에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사관(史館)에 조서를 내려서 천문(天文)·점후(占候)·참위(讖緯)·방술(方術) 등에 관한 책 5,010권을 다 가져오고 아울러 옛날 그림 묵적 114축(軸)을 내어서 모두 비각에 수장하였다.


8월 초하루 계묘일에 비서감인 이지(李至, 947~1001)와 우복야인 이방(李昉)·이부상서인 송기(宋琪, 917~996)·좌산기상시인 서현(徐鉉, 916~991) 그리고 한림학사·제조시랑(諸曹侍郞)·급사(給事)·간의(諫議)·사인(舍人) 등이 비각(?閣)에서 책을 보았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고, 도적(圖籍)을 크게 벌려 놓고 마음대로 보게 하였으며, 다음 날 또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인 왕화기(王化基, 944~1010)와 삼관학사에게 나란히 비각에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서 황제가 지은 시문(詩文)을 비각에 수장(受藏)하였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황제의 성품은 절약하고 검소하여 조회에서 물러가서는 항상 화양건을 착용하였고 베로 만든 옷과 굵은 명주로 된 띠를 맸으며 내복(內服)은 가는 명주로 만들었는데, 모두 여러 차례 세탁한 것이었고, 승여(乘輿)와 공급하는데 사용한 물건은 늘려 보탠 것이 없었다.

9월 을해일(3일)에 북여진(北女眞)54의 4부가 요(遼)에 붙기를 요청하였다.

경술일(9일)에 요(遼)에서는 이계천(李繼遷, 963~1004)을 하국왕(夏國王)로 책봉하였다.

정사일(16일)에 양주(?州, 甘肅省 寧夏)관찰사·판웅주사(判雄州事)인 하비(下?, 江蘇省 ?寧縣) 사람 유복(劉福, 928~991)이 죽었는데, 태부·충정(忠正)절도사를 증직하였다. 유복은 무인(武人)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데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하는 데는 방략을 갖고 있었고, 정치를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게 하였다. 웅주(雄州, 寧夏 中衛市)에서 5년 있었는데, 경내는 편안하고 고요하여 백성들이 전운사를 막고 〔유복의〕 정치적 업적을 추가로 진술하기를 원하여 그 상황을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유애비(遺愛碑)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항상 유복에게 큰 집을 세우라고 권고하였지만 유복은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받는 녹봉은 아주 후하여 충분히 집을 빌려서 스스로를 비호(庇護)한다. 너희들은 아직 한 자 만큼의 공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어찌 살 집을 지어서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황제가 그 말을 듣고 백금 5천 량(兩)을 그 아들에게 하사하고 집을 사서 거주하게 하였다.

좌정언인 사필이 자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니 황제는 그 충성스러운 것을 가상히 생각하여 병진일(18일)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발탁하고 금자(金紫)73와 아울러 전(錢) 30만을 하사하였다. 사필이 어느 날 편전(便殿)에서 응대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다시금 얼굴을 보면서 상찬(賞讚)하고 격려하니 사필이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폐하께서 간언을 좇는 것이 물 흐름 같으시니 그러므로 신은 정성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당 말(唐末)에 맹소도(孟昭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침에 간쟁하는 상소문을 올리었는데 저녁이 되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 시대에 이와 같았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감동하는 얼굴을 오래 짓고 있었다.

정해일(21일)에 병주(幷州, 山西省 太原市)에서 거란의 400여 명이 내부(內附)76하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국가에 만약에 밖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반드시 안의 근심거리가 있다. 밖의 근심거리는 변방 일에 불과하여 모두 미리 막을 수 있지만 오직 간사하기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만약에 안에서 걱정거리를 만든다면 깊이 두려워할 만하다."

지지난 해에 북방의 군사[요의 군사]가 변경으로 들어 와서 살아있는 영혼들이 폐해를 입었습니다. 만승(萬乘, 황제)께서는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지만 많은 관리들은 도와주는 공로를 세우지 않았으니, 동료들이 함께 일을 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며 청렴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오직 대책을 바칠 때에는 조금씩 잠자코 있으니 어찌 급히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처리하겠습니까?

위로군(威虜軍, 河北省 徐水縣)의 군량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자 요인(遼人)들은 이를 엿보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정주로도부서(定州路都部署, 치소는 定州 安喜縣)인 이계륭(李繼隆, 950~1005)에게 조서를 내려서 진·정(鎭·定)의 대군을 징발하여 군량 1천여 승을 호송하게 하였다. 요(遼) 유열(于越)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이 이 소식을 듣고 정예의 기병 수만을 인솔하여 와서 맞았는데, 북면연변도순검(北面緣邊都巡檢)인 준의(浚儀, 河南省 開封市) 사람 윤계륜(尹繼倫, 947~996)이 소속의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변새(邊塞)에서 순시를 하다가 이들을 만났지만, 야율휴격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지나가면서 지름길로 대군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윤계륜이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들은 우리를 마치 어육(魚肉)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저들이 승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이긴 기세를 타고 우리를 북쪽으로 몰아 갈 것이고, 승리를 못한다면 역시 우리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니 우리들은 씨도 안 남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마땅히 갑옷을 둘둘 말고 함매(銜枚)하여 그들의 뒤를 습격해야 마땅하다.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도착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것인데, 힘껏 싸워서 승리하면 충분이 자립(自立)할 것이고, 설사 패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찌 망하여 북쪽 땅에서 귀신이 될 수 있을까보냐?"

무리들이 분격(憤激)하여 명령을 좇았다.

윤계륜은 이어서 군중에서 말에 꼴을 먹이게 하고, 밤이 되자 사람을 파견하여 짧은 무기를 가지고 몰래 그들의 뒤를 밟게 하였다. 수십 리를 가서 당하(唐河, 장강지류)의 서하(徐河, 河北 徐水의 南쪽)에 도착하였는데19 날이 아직 밝지 않았지만 야율휴격은 대군에서 45리20 떨어졌으며 윤계륜은 성의 북쪽에 진을 늘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적들은 바야흐로 모여서 식사를 하였는데, 이미 밥을 다 먹고 곧 나아가 싸우려고 하자, 윤계륜은 그들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급히 그들을 쳐서 그들의 대장 한 명을 죽이자 무리들은 드디어 놀라서 혼란에 빠졌다.

야율휴격은 식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가 수저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짧은 무기에 그의 팔을 맞아 상처가 심하였으며 좋은 말에 올라 먼저 숨어버렸다. 요의 군사들은 멀리 대군을 바라보고는 드디어 붕궤되니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계륭이 진주부도부서(鎭州副都部署)인 범정소(范廷召, 927~1001)와 더불어 뒤를 쫓아 달려가서 서하를 넘어 10여 리를 갔는데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주부도부서(定州副都部署)인 공수정(孔守正)이 또 요나라 사람들과 조하(曹河)의 사촌(斜邨)에서 싸워서 그 장수 대영(大盈) 등의 목을 베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거(大擧) 남하하는 일이 없었으며 윤계륜의 얼굴이 검었으므로 서로 경계하여 말하였다.

"마땅히 흑면대왕(黑面大王)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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