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5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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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이화 선생님의 한국사 이야기는 전집으로 우리 집 책장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책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정답고 미소를 짓게 하는 책이다. 선생님을 단 한 번 뿐이지만 민중사 강연 때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본 모습보다 더 푸근한 인상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강의에서는 단호함이 묻어나셨지만!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 서술 방식의 특징은 민중의 힘을 강조하셨다는 점에 있다. 민중사가 이제는 대세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역사가 권력층의 입장에서 쓰여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책은 계속 소비되어야 하고 읽혀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사 이야기 5권은 고려라는 나라가 성립된 시기부터 거란이라는 나라를 만나서 관민이 힘을 합쳐 물리칠 때까지를 다룬다. 


고려의 역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보았으나 항상 아쉬운 것은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기에 작업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인의 입장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록이 너무 소략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움이 많다. 때문에 고려와 동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참고하거나 '야사'를 찾아봐야 하지만 그마저도 조선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숫자라서 슬프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위주로 적어보려한다.


때는 바야흐로 983년, 개경 거리에 술집 여섯 곳이 들어섰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관영 술집이었다고. 11세기 말 숙종 시기 동전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간인에게 주점을 맡기기 시작했고 그 뒤로 술집은 민간인이 경영하게 된 것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주막을 보게 되는데 이 때가 시작이 아닐까.


또 무당을 찾아가는 일인 '당골'이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가 쓰는 '단골'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절에서는 여러 시설을 만들었는데 그 중 민간에서 경영하는 최초의 여관이자 음식점을 이름하여 '원'이라고 불렀다. 스님들만 이곳에 가서 숙박을 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민간인들에게도 이것을 공유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래도 불교를 중시하던 국가여서 불교와 관련한 것이 많은데 승과가 존재하기도 했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출가를 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의 사회적 위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의 폐해로 절이 부를 축적하고 나중에는 부패하면서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만큼 광종, 성종과 현종, 문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4대 임금인 광종은 기존의 공신들의 힘을 낮추고 왕자들을 통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다지는 일에 힘을 썼다. 과거제 실시와 노비안검법 제정 공포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노비안검법으로 노비의 신분을 풀어주자 귀족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광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종의 조치를 두고 정인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 노비가 있어 풍교(風敎)의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외를 엄히 하고 귀천을 매겨 예의가 행해지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노비가 없으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유학자 출신인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정책을 비난하면서 광종의 다음 임금인 성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잡아 처리하게 하소서. 대체로 벼슬이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경우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일지라도 진실로 자기의 비위를 꾸밀 만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속임수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궁원(院)과 공경들이 더러 위세를 빌려 비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지난날 판결한 것을 다시 캐고 따져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는 노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난 일은 접어두고 노비 관계의 송사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 P103

성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노비환천법을 공포하는데 이는 "무릇 도망해온 남의 노비를 숨겨 멋대로 차지한 자는 날을 따져 베 30자를 본주인에게 주고, 날수가 비록 많더라도 원래 값을 넘게 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려 노비주를 보호하였다.


광종이 힘들게 쌓아 올린 노비안검법을 후퇴시키는 조치라니 아쉽게 느껴진다. 게다가 성종은 "여종이 낳은 아이는 아비가 양반이더라도 종으로 삼는다"는 천자수모법을 시행하도록 하여 노비수가 증가하게 된다. 


강조의 정변이 빌미가 되어 거란이 2차 침입을 했을 때 강조는 스스로 도통사가 되어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에서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한다. 삼수채에서 선발대가 요군을 상대로 고려군이 승리를 할 때 더 조심하고 경계했어야 하는데 그는 자만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 

강조가 통주에서 삼수채를 설치하고 있을 때 요군의 선발대와 다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칼을 꽂은 수레를 배치하여 요군을 공격하였다. 요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강조는 지장의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을 물리친 뒤 적을 깔보며 진중에서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반격을 시도한 요군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밀려들어왔다. 이 보고를 받은 강조는 태연하게 큰소리쳤다.


입 안의 음식은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어라.

요군이 물밀듯이 진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서야 강조는 황급하게 일어나 싸울 채비를 차렸으나 어느새 들이닥친 요군이 강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강조의 몸은 북방에서 나는 털담요에 둘둘 말렸다. 함께 있던 고려의 장수들도 다 잡혔다. - P177

대체 왜? 현종까지 옹립해가며 정변을 일으켜서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나중에 거란에 포로로 잡혀서 거란의 황제 앞에서는 끝내 고려의 장수로 절개를 지키지만 진작 좀 잘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항한 리더는 강감찬이었다. 그런데 강감찬이 아니라 책에 강한찬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 잘못 보았나했다. 

강한찬
한은 중국조(趙)나라 서울인 한단에서 처음생겨난 글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한단지몽‘ (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이를 ‘감‘으로 발음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강감찬은 강한찬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강한찬으로 통일하였다. - P169

강감찬이 익숙해서 영 입에 안 붙는 이름이다. 관련하여 기록을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종의 집권 시기 중국은 송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송은 신종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고려에 수교를 제의하자 문종이 화답하며 두 나라의 왕래가 시작되었다. 

송은 문종의 병이 깊어지자 여러 차례 명의를 보내주면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문종은 "고려는 소중화입니다" 하며 엎드리는 자세로 송을 흠모하였다. 

문종은 어느 날 송의 수도 개봉을 돌아보는 꿈을 꾸고 시를지었다.

악업의 인연으로 거란과 가까워 1년의 조공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네.
이 몸 홀연히 개봉에 이르니한밤에 흐르는 눈물 애석하도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요산당기』에 나옴)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소중화'를 표방하고 중국을 '동방 예의의 나라'로 칭송한 것은 자주국의 수장으로서 지나치게 허리를 굽힌 것이 아닌가하여 찜찜함이 남는다. 


이 책은 정사 이외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듯 전달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사건과 상황을 상상하여 이성과 감성에 기반한 판단을 요청한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답을 하며 책을 읽어나간다면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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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8 챕터까지 읽었다. 거의 반 정도 온 것 같은데(킨들로 확인해보면 45% 정도?) 쉬운 단어로만 되어 있는 문장이 해석이 안되는 경우 좌절감이 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어쩌겠나, 계속 쉬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방법뿐이겠지.


나쁜 일이 있어도 또 좋은 일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Mia의 하루들을 보며 나도 힘이 될 때가 많다. '대견하다 대견해.' 하면서 읽고 있다. 아무튼 다음 달까지 읽어보겠다.



[ CH20 ]

모텔에 한 명의 이민자가 왔다. Uncle Li의 친구로 Aunt Ling이다. 그는 네일 살롱에서 일하는데 무척 푸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무척 굶주린 기색이라 엄마는 만두를 내어주시며 충분히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 했다. 엄마의 친절에 그녀는 네일 서비스를 엄마에게 해준다. 그녀는 사장이 내쫓아서 밖에서 살고 있다며 머무는 것이 가능하냐 물었다. Yao씨가 모텔에 불쑥 찾아올수도 있어서 'old blue yankees baseball hat'을 가리키면 그가 있는 sign이고 아니면 없는 것으로 정했다.


[ CH21 ]

손님 Lorenz씨 차량(a green Ford Thunderbird)이 한밤중에 없어졌다. Mia는 노트에 "parking lot gate"를 추가했다. Yao씨는 모텔에 도착하여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며 부모님께 따진 뒤 경찰에 연락하고 모든 방의 손님을 깨웠다. 

Mr.Roberto는 키가 작고 수염이 나 있다.

Mrs.Robinson은 엄마보다 키가 약간 더 크고 어깨 너머까지 웨이브진 검은 긴머리를 가졌다.

검은 머리라고 하자마자 Yao씨는 나쁜 사람을 모텔에 손님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했다. "black people are dangerous." 라고... Mia는 기가 찼다. 

"we can't judge someone based on their skin colour. It isn't right. This is America." 아빠의 발언에 Yao씨는 더 날뛰었다. 

이때 경찰관들이 모텔에 도착했고 Yao씨는 상황을 부드러운 태도로 이야기했다. Yao씨는 Mrs.Robinson이 범인인 것 같다고 대놓고 지목했다. Mia가 하는 말은 무시되었고 경찰관들은 Yao씨의 말만 듣더니 장기 투숙객들을 심문한 뒤 Hank는 남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최근 돈을 빌린 적이 있느냐? 물건을 판 적이 있느냐 물었고 Mia는 그에게 수상한 점이 없었느냐 했을 때 "아니요." 했더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다. "Hank's a good guy!" Mia는 경찰관에게 소리쳤다. 

경찰관들은 확증도 없이 Hank를 끌고 가 취조를 하여 Mia는 분개했다. 정작 Lorenz씨는 보험 처리가 되어 조용히 청구 비용을 돌려받았다. 그제서야 Hank를 풀어줬지만 그럼에도 Mia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는데 Hank는 늘 당하던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이게 대수로운 일인가? 

I stared at the cookies and thought about the world of difference there was between the two colours.


[ CH22 ]

Jason이 Mia에게 학교 강당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Mia가 강당에 들어서자 Jason이 등 뒤에 민들레를 들고 있었다. "These are for you. I like you, Mia." 아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람. 

그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 할수록 Mia는 혼란스러웠다. Mia는 그가 Yao씨에게 인종주의자임을 어필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Jason은 이를 자신에 대한 감정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아무튼 지구상의 단 한 명의 남자가 있다고 해도 넌 절대 좋아할 일이 없다고 말한 뒤 둘은 찢어졌다. 


[ CH24 ]

Mia는 중국의 경찰은 기억이 좋았다고 하는데(중국의 공안과는 다른 것이라 믿으며) 미국은 경찰이 총을 소지하기 때문에 인상 자체가 좋을 수가 없나보다. 아무튼 포기하지 않고 Mia는 경찰에게 진범을 잡으라고 경찰에게 종용했다. 그러나 경찰은 자기 일을 방해하지 말라며 그녀를 방해꾼으로 보았다. 


[ CH25 ]

경찰관이 Hank가 일하던 주유소에서 배회하고 직원들을 인터뷰하는 등 일이 발생되자 그는 결국 마지막 급여를 받고 나서 주유소에서 해고됐다. Mia는 "You have to fight this!" 말했지만 그는 소용없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예전에도 이런 경우들이 많았겠지). 

Topaz Inn 사람이 찾아왔다. 그 모텔은 더 나은 환경이었고 방 개수도 많았지만 우리 모텔은 도로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위치한 만큼 접근성이 좋았다. 두 모텔은 서로 앙숙 관계였는데 Topaz Inn에서 바퀴벌레가 가득하니 Calivista에 머물지 말아라. 간판을 내걸자 열받은 Yao씨가 계란 한판을 사서 간판에 냅다 던졌다. Topazz Inn 사람은 사고를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더니 주변 호텔들과 함께 Black Customers를 공유하면 어떻겠냐며 제안을 해왔다. 과연 검은 속내는 없는지?


[ CH26 ]

Hank는 수리공 일을 Mr.Yao에게 요청했지만 거부한다. "ma fan"이라는 말을 들은 Mia는 차마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중국어로 "ma fan"은 '귀찮다. 짜증난다.' 그런 류의 말이다.


[ CH 27 ]

Mia는 writing essay content test에서 C- 점수를 받고 충격을 받는다. Lupe는 자신이 미국에 와서 처음 받은 점수를 이야기하면 놀랄 것이라며 위로하지만 Mia는 잘 위로가 되지 않는 눈치다.


[ CH28 ]

우울해 있던 Mia는 모텔 투숙객 중 한 명에게 8달러의 팁을 받고 행복해한다. 그는 보답으로 감사 편지를 작성하기 위해 사전까지 빌려서 써서 보낸다. 그리고 Front Desk에 혼자만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쓸 tip jar를 만든다. 

커플이 사진 요청을 엄마에게 부탁했는데 표현을 정확히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떠난 뒤 우울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Mia는 자신의 시험 결과를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러면 엄마가 더 우울해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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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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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저자의 책이라도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20쇄를 넘게 찍을 정도로 현재도 판매되고 있는 책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24쇄로 2020 년 판이었다. 앞서 읽은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는 저자가 뒤에 출판한 책이지만 절판이라 구입 불가다.

사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첫 날 바로 앞부분을 읽었는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못 읽다가 주말에 마저 읽었다. 앞부분을 읽었을 때 좀 지루하고 감흥이 없다 생각했었는데 마지막까지 읽어보았지만 그 느낌을 아주 없애지는 못했던 것 같다.

 

두 권 중 나는 앞서 읽었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책이 더 좋았다. 이유는 몽골 제국사의 대부분이 칭기스 칸의 영웅적 면모와 몽골군의 전투력, 승리사에 주목해서 기술하는데 이 책은 몽골 제국의 리더가 몽골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으려 했는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종교라는 테마에 맞추어). 결국 '합치'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텐데 결과가 어떻든 리더의 노력과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어쩌면 그것이 기본일 것이다)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기존에 내가 읽었던 몽골 제국사로 예상되는 이야기들의 나열이라 신선함은 떨어졌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장점이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 권으로 20세기까지의 몽골 제국사를 만날 수 있고 저자의 글이 유려하여 잘 읽힌다. 내용은 <몽골 비사>와 집사를 기본으로 하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외부인의 기록을 함께 실어 단편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했다. 

그래도 몽골군들이 전투 시 철저할 정도로 잔혹하거나 무도했다는 기술들은 외부인들의 기록들이 덧붙여져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전달된 측면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지금도 그렇지만 편견을 깨부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또한 몽골이 민을 다스리기 위해 펼쳤던 다양한 정책들로 인해 아시아를 비롯한 유럽이 입은 혜택이 많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은 정확한 명칭으로 ‘예케 몽골 울루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제국의 시작점인 칭기스 칸의 탄생과 성장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연대별로 기술하여 한 눈에 보기 좋다. 


1부는 칭기스 칸의 성장 과정부터 몽골 제국의 성립(1206년)까지를 다룬다. 

당시 몽골 초원은 중앙에 케레이트족, 서쪽에 나이만족, 동쪽에는 타타르족, 이렇게 핵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무진은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가족들은 부족을 떠나 살아남아야 했고 16세에 아내인 보르테를 만났으나 메르키트족이 약탈해가는 바람에 케레이트족의 수장인 옹칸의 도움을 받아 되찾아와야했다.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와는 관계가 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주르킨 원정(1197), 타타르 원정(1202~1203)을 거치면서 그는 규칙을 정립해 나간다.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아르반(십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했다. 분대 열이 모여 자군(백호)이라고 부르는 중대를 이루었다. 몽골의 중대 열이 모이면 1000명이 밍간(천호)이라고 부르는 연대를 이루었다. 밍간이 열 모이면 1만 명이 투멘(만호)이라고 부르는 사단을 이루었다. 

새로운 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뼈에 속했다. 이제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 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 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 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 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 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 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20년 정도 투쟁하면서 테무진은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자무카(구르칸)과의 승부는 결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테무진과 자무카의 대결에서 테무진은 옹칸의 군대를 흡수하고 자무카가 도망간 틈을 타서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즉위한다. 


2부는 몽골 제국의 확장 중 1261년 뭉케 칸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이 때가 몽골 제국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다.


1210년 황금 칸이 죽고 아들이 새 칸으로 즉위하면서 칭기스칸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주르첸 원정이 시작된다. 키타이 부족을 포섭하여 주르첸 내부를 분열시키면서 자연스레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칭기스 칸이 죽기 전까지 함께 했던 재상 야율초재를 만나게 된다.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 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1~142


칭기스 칸이 주르첸을 얻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지만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비단길을 확보하는 것은 실크로드의 물자가 오가는 길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이번에도 정치적인 욕심도 있겠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또 호라즘은 무슬림 이웃들과 좋지 않은 관계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페르시아인이나 타지크인들을 적극 이용했다고 한다. 또 주르첸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배웠던 기술과 경험들이 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귀족들은 철저히 죽여 후환이 없도록 했다. 


이 시대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칭기스 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하는데, 사실 믿기는 힘들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중한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고, 그들의 부인과 딸을 품에 안는 것이다.” 그는 공포가 자신의 전사들의 행동이 아니라 서기나 학자의 펜을 통해 가장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문이 나오기 이전 시대에는 지식인의 편지가 여론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한 도시를 정복하면 다른 도시들로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면 이들은 칭기스 칸 전사들이 거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저지른 전례 없는 잔혹행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 칭기스 칸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새로운 선전물이 홍수처럼 퍼져나갔다.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불패 신화도 퍼져나갔다. - P181


이 때는 이미 종이가 사용되고 있는 시기였던만큼 선전물이 유포되기 너무나 좋았다는 것이 몽골인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탕구트 원정에서 칭기스 칸이 사망하고 우구데이가 취임하면서 유럽 원정이 시작되었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에 궁궐을 지으면서 부족의 이동성이 정주성으로 바뀌고 술까지 좋아하여 부를 다 탕진하고 말았다. 정작 원정은 수베데이와 제베 주도 하에 이루어졌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을 상대로 몽골군은 승리한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 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 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기동성 확보가 안 되고 기후 문제도 겹치면서 더 이상 몽골군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이 때 우구데이가 사망한 탓도 있었다. 그의 사망 후 10년 동안 대칸 즉위를 둘러싼 투쟁이 이어진다. 


마침내 몽케 칸이 즉위하였고 그는 송나라와 아랍국들을 위한 정복 기반을 다진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6~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 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분할되었다. - P280


3부는 현대까지의 몽골의 이야기를 담았다.


쿠빌라이 치세가 되면 기존의 몽골 체제와는 다른 체제로 꾸려진다. 그는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 과업을 이루었고  온건한 법을 통해 민심을 수습했다. 또 실용주의 노선을 통해 민중이 자신이 원하는 말과 글을 쓰도록 장려하였고 힘이 아닌(과거와의 단절) 교역과 외교를 통한 제국을 추구했다. 이 때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다만 페스트가 확산되면서 운송 체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제 교역은 위축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자연스레 인종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과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후 얼마 가지 않아서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제국은 붕괴되었고 킵착 칸국만이 400여 년간 유지되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으나 몽골의 역사를 빠르게 확인하기에 좋다고 생각하여 얼마 전 책을 구입하였다. 이런 책은 절판이 안 되고 유지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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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와는 달리, 그가 유목민의 게르에서 죽었다는 사실, 즉 그가 태어난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환경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칭기스칸이 자신의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자기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사회 전체를 오히려 바꾸어 - P18

놓았으니, 이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칭기스칸의 병사들은 죽은 칸의 주검을 몽골 고향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다.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陵)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여기에 머물며 살게된다. 칭기스칸은 매장되어 자신이 나왔던 몽골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조용히 사라졌다. - P19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런 새로운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뼈에 속했다. 어린 시절 낮은 출신 성분 때문에 여러 차례 벽에 부딪혔던 테무진이 검은 뼈와 흰 뼈 사이의 구별을 폐지해버린 것이다. 이제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몽골의 공적인 행사는 방문객이나 연대기 기록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은 이것을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충실한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 전기작가 프랑수아 프티 드 라 크루아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의 문건들을 참고할 수 있었다. 프티에 따르면 칭기스칸의 부하들은 "그를땅에 펼쳐놓은 검은 모전 양탄자 위에 올려놓았다.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큰 소리로 백성의 기쁨을 알렸다." 이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어떤 권력이든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정의롭게 백성을 잘 다스린다면 신이 그의 계획을 축복하고 성사시킬 것이지만, 반대로 권력을 남용하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훈계했다. - P123

칭기스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했다. 이것은 단순한 통치자 집안 사이의 동맹이 아니었다. 칭기스칸전체 부족이나 민족을 통째로 가족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제국에 받아들였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칭기스칸이 그 뒤로도 이 용어를 계속 이용하고확대하면서,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보편적 시민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나 무슬림에 속한 민족의 경우처럼 공동의 종교에 바탕을둔 것도 아니었고, 전통적인 부족 문화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시민권은 단순히 신종(臣從)의 의무, 승인, 의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비몽골 왕국들은 ‘카리‘ 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 P136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P137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 P141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2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칭기스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 P186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 - P195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 P196

칭기스 칸의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는 로마인을 연구하면서 제국과 정복의 역사를 파헤쳤던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 - P202

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일이 아직 많았다. - P203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뭉케는 대칸 선출을 축하하여 이날 하루 모든 사람이 일을 쉬고 짐승도 일을 시키거나 짐을 지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땅에는 천막을 칠말뚝을 박지 말고, 물은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야생짐승을 잡아도 안되고, 잔치를 위해 짐승을 잡을 때도 성스러운 땅에 피를 떨어뜨리지말아야 했다. 성스러운 날이 지나자 일주일 동안 잔치가 열렸다. 매일모인 손님들은 말이나 소 300마리, 양 3000마리, 수레 2000대를 채울만한 아이라크 - 암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인이 좋아하는 알코올음료(마유주馬乳酒)를 먹어치웠다.
이 행사는 소르칵타니의 필생의 사업의 절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뭉케보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칭기스칸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한 자리에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P249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 P276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분할되었다. - P280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되었음에도, 반역자들조차 옛 제국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구체제의 장식과 환상에 매달려 자신들의 새로운 통치를 정당화했다. 내부구조가 무너지고 몽골인이 모두 사라지고난 뒤에도 몽골 제국의 외관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 P355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독교 식민주의자나 공산주의 인민위원을 가릴 것 없이 유럽인은 아시아인을 칭기스칸과 몽골의 무리가 남긴 유산, 즉 야만적 독재와 처참한 미개 상태로부터 구해내려 했다. 몽골을 아시아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일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몽골인을 정복해야 할 근거로 삼는 태도는유럽의 정복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 P365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내내 러시아와 중국은 칭기스칸의 고향을 나누어 갖는 협정을 유지해왔다. 중국은 고비 사막의 남부인 내몽골을 차지하고, 소련은 나머지 반, 즉 고비 사막 북쪽의 외몽골을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몽골을 그들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비워두었다.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 있던 칭기스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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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1부는 긴가 민가했는데 2부는 '어라?'했고 이후는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총 32부작이여서 전개가 빠른지라 마치 영상의 skip 버튼을 누른 듯하여서 내용상의 풍성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쉽다. 그러고 보면 미디어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사극 200부작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겠지. 

의외로 거란 황제인 야율융서나 소배압 장군을 영상으로 보니 앞으로 나올 분량에서 당시의 거란 내부 사정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커졌다.




이미 4부까지 방영이 되었으나 나는 아직 3부까지만 본 관계로 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을 기록을 통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1, 2부에서는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 목종과 김치양(이때는 ‘우복야’ 관직에 올라 있었다)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극 배경은 목종 12년 상황이므로 그가 내려올 날이 머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목종의 재위 기간은 총 13년이다).


1부에는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천추태후의 섭정을 떠나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음에도 중요한 결정은 대신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미루는 등 정사와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인다. 


국경 지대에는 계속 긴장이 감돌았지만 궁중에서는 나태와 방탕과 음모가 판을 쳤다. 목종은 성종의 아우로 왕위에 올랐으나 성격이 매우 나약했다. 그는 태후 황보씨(경종의 후비)와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스스로는 아무 일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근시(近侍)를 총애하여 터무니없이 요직을 주기도 하고 이들을 침실로 끌어들여 남색을 즐기기도 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69 >


김치양은 중의 신분으로 궁중에 출입하며 과부 황보씨를 범하여서 귀양을 갔다 목종의 즉위 후 천추태후의 명으로 궁중에 복귀하였고 ‘우복야’라는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는 뇌물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재물을 불려 집이 300여 칸이나 되었고 집안에 누각과 연못, 정자, 동산을 지어 화려하기가 궁궐과 같았다. 3부에서 김치양과 목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 나오는데 나는 배경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세트장이여서 단지 좁은 범위를 보여줄 뿐이었지만 300 칸이 넘는 집은 대체 얼마나 넓고 번쩍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1009년(목종 12년)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태자를 세우려 하며 문제가 커진다. 드라마 상에서 태조의 핏줄인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둘러싸고 태후는 죽이려 하고 목종은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열두 살짜리 대량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하고 출가를 시켰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태후는 사람을 보내 절에서 외롭게 사는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 절의 중이 밀실을 만들어 끝까지 대량원군을 보호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관련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긴 김치양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마당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이므로 조선 건립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을테니 감안하고 봐야할 것이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관련 내용이 있었는데 밀실 내용을 드라마에서도 보여줘서 깜짝 놀랐다. 


2부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장면이 있었는데 관련 기록이 고려사에 있었다. 목종은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치력이나 인품 등에서 왜곡되거나 과장,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신 왕이 상정전(詳政殿)에 임어(臨御)하여 관등(觀燈)을 하고 있는데,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 불이 나고 번져서 천추전(千秋殿)을 태웠다. 왕이 궁궐 건물과 창고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비탄해 하다가 병이 나서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다. < 고려사 1009년 1월 16일(음) 임신(壬申) , 1009년 2월 13일(양) >


극에서는 목종이 백성들을 모으고 관등회를 열었다가 화재가 나 도망가는 상황에서 “도망치거라!”를 외치고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불은 김치양의 주도 하에, 태후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는데 기록으로는 보다시피 지극히 건조하게 되어 있다. '비탄해 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일어난 상황만 안타까웠던 것인지 정황을 알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발견했다. 


이즈음 태후가 거처하는 천추궁에 불이 났다. 불길은 사정 없이 다른 건물과 창고에까지 옮겨 붙었다. 심약한 임금은 불에 놀라고 슬퍼한 끝에 병이 나 드러눕고 말았다. 불길이 잡히자 조정에서는 궁문을 닫고 승려들을 불러들여 구명도량(救命道揚)을 설치하여 불에 타죽은 사람의 시체를 거두고 부상자를 가려내 구호하도록 했다. 이 화재로 궁중은 불안에 떨었고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극 화면상으로는 왕이 백성을 직접 구제한 것 같지는 않으나 어쨌든 후속 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합작하여 자신의 아이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가 일이 지나치게 커졌다. 과연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이 일로 결별했을까. 김치양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본인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에) 태후를 압박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하는데 글쎄… 이는 극화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다만 둘 사이에는 둘이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목종은 김치양을 제압하기 위해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강조는 저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 곧바로 대궐로 쳐들어갔다.  강조는 임금을 능멸하며 법왕사에 유폐시켰다. 임금은 뜻하지 않은 사태에 놀라 통곡하였다. 강조는 대량원군을 맞이하여 새 임금 자리에 앉혔다. 이어 김치양과 일당을 잡아 죽이고 나머지 세력은 귀양을 보냈다. 

그는 임금과 태후 황보씨를 충주로 쫓아냈다. 강조는 충주로 가고 있는 목종에게 독약을 보냈는데, 목종은 독약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독약을 들고 갔던 자들이 임금을 죽이고 나서 자결하였다고 떠들어댔다. 임금의 시체는 문짝으로 짠 관에 넣어져 관소(館所) 주변에 매장되었다. 태후 황보씨는 이 틈을 타서 황주로 도망쳤다. 

목종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고, 대량원군이 왕위에 올랐다. 1009년 1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2 >


임금에게 충성하던 강조가 왜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는지 오리무중인 측면이 많았는데 화면으로 일률적으로 보니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강조는 이미 목종이 시해당했음을 알고 김치양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으나 결국은 현 조정이 더는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목종 옆에 유충정과 유행간이 있고 목종이 지금과 같은 정치를 계속한다면 더는 고려에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조의 변 이전 거란의 사정을 보자. 


왕건이 북쪽 지대에서 축성 공사를 한창 벌일 때인 922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과 털방석을 예물로 보내며 우호를 보였다. 이것이 거란과 고려의 첫 외교관계였다. 야율아보기는 한편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에 우호를 보인 것이다.
고려는 후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이라 거란과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처지가 아니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54 >


고려와 거란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때만 해도 고려는 거란이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건은 여전히 후백제와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고 거란도 분열되어 있던 중원 땅을 바라보고 있어 고려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중원 땅은 후진이 들어선 상태였다. 


거란은 후진의 황제가 새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거란이 사신을 파견하자 무도한 자들과는 거래할 수 없다 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회동 5년(942) 6월 초하루 계축일에 후진 제왕 석중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사일에 도도고(徒覩古)와 소살(素撒)에서 조공하였다. 을축일에 후진 황제 석경당이 붕서하고 아들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무진일에 후진에서 사신을 보내 대행황제의 상을 알리자 7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경오일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치제하게 하였다. < 요사 권4 태종 야율덕광 >


〈임인〉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 고려사 태조 25년 10월 미상(음) >


최광윤은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가 거란 정탐꾼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고 만다(아버지 최언위는 고려 초기 조정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큰 명망을 떨친 인물이었다). 다행히 재주를 엿본 거란인들이 그를 죽이지 않았고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최광윤은 거란이 앞으로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여진인을 통해 고려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고려 조정은 947년 특수군단인 광군사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요는 후진을 무너트렸으나 한족은 후진에 이어 후주를 세워 요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조광윤이 반란을 일으켜 960년 송나라가 세워졌고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중국 중남부를 모두 섭렵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요를 정복하기를 기도했다. 송의 요 정복은 뒤이은 태종 대에 실현이 되었으나 요가 송을 철저히 무너트리면서 작전은 실패했다. 고려는 송과 연대하여 요의 침략을 막고자 했고, 송은 고려의 후원을 받아 요를 제압하고자 하면서 둘의 이해 관계는 맞아 떨어졌다.  


통화 22년(1004) 9월 기축일에 남쪽[송]을 정벌하는 일을 고려에 알렸다.

윤 9월 기미일에 남쪽[송]으로 정벌을 나갔다. 

겨울 11월 갑자일에 동경유수 소배압이 송나라 위부의 관리를 사로잡아 바쳤다. 정묘일에 남원대왕 야율선보가 아뢰기를 '송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왕계충의 활과 화살을 건네면서 은밀히 화친을 처앟였다.'고 하였다. 왕계충에게 조서를 내려 '사신을 만나 화친토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무자일에 송나라에서 이계창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면서, 태후를 숙모라 하고 해마다 은 10만 냥과 20만 필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에 화친을 허락하고, 곧바로 합문사 정진을 보내 국서를 가지고 보빙하게 하였다. 이 달에 회군하였다. < 요사 권14 성종 야율융서 >


거란은 고려와의 화약을 바탕으로 1004년 전투를 벌여 송을 굴복시킨다. 이 전투에 패함으로써 송은 거란과 이른바 '전연의 맹'을 맺게 되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은 유목민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11세기가 되면, 이들은 요새화된 성읍을 점령하여 국가의 영토를 확장했다. 982년 10월 14일, 11세의 야율융서(사후 성종으로 추존)가 요의 제6대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요 제국의 유능하고 균형감 있고 공정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성종의 장기간 치세 중에서 전반기는 성종의 모후 승천태후(953~10009)가 정부와 왕조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승천태후는 심지어 송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요사는 성종의 통치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성종은 가장 성공적인 요 황제로 간주될 것이며 (그러나 그 성공은) 거의 그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 하버드 중국사 송 P57~58 >


전에 읽었던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나왔으나 성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 몸이 병약했기에 승천황태후가 그를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 송과의 전쟁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는 기록에서 장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극은 안타깝게도 시작하자마자 1009년의 상황이라 승천태후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 누워 있는 상태로 나왔다.


통화 11년(993) 고려 왕 왕치(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죄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여진에게서 취한 압록강 동쪽 수 백리 땅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통화 12년(994) 3월 정사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사로잡힌 포로와 가축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속전을 바치고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인일에 사신을 보내 고려를 어루만지고 달랬다. <요사 권13 성종 야율융서 >


993년 요는 대대적으로 송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후방의 고려를 먼저 복속하고자 대군을 모아 집결했다. 고려 조정은 군사 책임자로 서희를 임명하였고 거란의 상대는 소손녕이었다. 서희의 담판 외교로 고려는 압록강의 강동 6주를 개척하는 쾌거를 일군다.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었으나 회유책일 뿐이었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조의 변 이후 현종이 즉위하고 거란의 2차 침입이 있기 전의 상황까지를 정리해보았다. 앞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관련 내용을 읽고 기록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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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27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역사 드라마가 아주 길었군요 32부도 긴 것 같은데, 이건 긴 게 아니었네요 오랜 시간에 걸친 전쟁이었다고 하는데, 그걸 다 보여주지는 못하겠지요 그때 사람은 그 시간이 아주 길었을 듯합니다 강감찬은 이름은 알았지만, 실제 이름이 나온 건 귀주대첩 때다 하던데... 그때 나이가 꽤 많더군요 강감찬은 기억해도 왕인 현종은 몰랐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1-27 21:16   좋아요 1 | URL
32부작은 역사 정극 치고는 너무 짧은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50부작을 넘기더니 이제는 그렇게도 하기 어려운 환경인가봅니다. 요즘은 TV로 본방사수를 안하고 동영상 등을 이용하니 시청률도 안 나오고 제작비 건지려면 쉽지 않겠죠.
맞아요. 그래서 강감찬 장군을 더 좋게 평가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현종은 나름 고려에서 입지가 있는 왕인데 다만 전쟁을 겪었고 뛰어난 신하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게 아닌가 싶네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