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와는 달리, 그가 유목민의 게르에서 죽었다는 사실, 즉 그가 태어난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환경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칭기스칸이 자신의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자기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사회 전체를 오히려 바꾸어 - P18
놓았으니, 이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칭기스칸의 병사들은 죽은 칸의 주검을 몽골 고향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다.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陵)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여기에 머물며 살게된다. 칭기스칸은 매장되어 자신이 나왔던 몽골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조용히 사라졌다. - P19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런 새로운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뼈에 속했다. 어린 시절 낮은 출신 성분 때문에 여러 차례 벽에 부딪혔던 테무진이 검은 뼈와 흰 뼈 사이의 구별을 폐지해버린 것이다. 이제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몽골의 공적인 행사는 방문객이나 연대기 기록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은 이것을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충실한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 전기작가 프랑수아 프티 드 라 크루아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의 문건들을 참고할 수 있었다. 프티에 따르면 칭기스칸의 부하들은 "그를땅에 펼쳐놓은 검은 모전 양탄자 위에 올려놓았다.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큰 소리로 백성의 기쁨을 알렸다." 이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어떤 권력이든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정의롭게 백성을 잘 다스린다면 신이 그의 계획을 축복하고 성사시킬 것이지만, 반대로 권력을 남용하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훈계했다. - P123
칭기스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했다. 이것은 단순한 통치자 집안 사이의 동맹이 아니었다. 칭기스칸전체 부족이나 민족을 통째로 가족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제국에 받아들였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칭기스칸이 그 뒤로도 이 용어를 계속 이용하고확대하면서,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보편적 시민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나 무슬림에 속한 민족의 경우처럼 공동의 종교에 바탕을둔 것도 아니었고, 전통적인 부족 문화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시민권은 단순히 신종(臣從)의 의무, 승인, 의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비몽골 왕국들은 ‘카리‘ 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 P136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P137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 P141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2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칭기스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 P186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 - P195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 P196
칭기스 칸의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는 로마인을 연구하면서 제국과 정복의 역사를 파헤쳤던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 - P202
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일이 아직 많았다. - P203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뭉케는 대칸 선출을 축하하여 이날 하루 모든 사람이 일을 쉬고 짐승도 일을 시키거나 짐을 지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땅에는 천막을 칠말뚝을 박지 말고, 물은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야생짐승을 잡아도 안되고, 잔치를 위해 짐승을 잡을 때도 성스러운 땅에 피를 떨어뜨리지말아야 했다. 성스러운 날이 지나자 일주일 동안 잔치가 열렸다. 매일모인 손님들은 말이나 소 300마리, 양 3000마리, 수레 2000대를 채울만한 아이라크 - 암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인이 좋아하는 알코올음료(마유주馬乳酒)를 먹어치웠다. 이 행사는 소르칵타니의 필생의 사업의 절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뭉케보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칭기스칸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한 자리에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P249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 P276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분할되었다. - P280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되었음에도, 반역자들조차 옛 제국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구체제의 장식과 환상에 매달려 자신들의 새로운 통치를 정당화했다. 내부구조가 무너지고 몽골인이 모두 사라지고난 뒤에도 몽골 제국의 외관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 P355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독교 식민주의자나 공산주의 인민위원을 가릴 것 없이 유럽인은 아시아인을 칭기스칸과 몽골의 무리가 남긴 유산, 즉 야만적 독재와 처참한 미개 상태로부터 구해내려 했다. 몽골을 아시아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일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몽골인을 정복해야 할 근거로 삼는 태도는유럽의 정복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 P365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내내 러시아와 중국은 칭기스칸의 고향을 나누어 갖는 협정을 유지해왔다. 중국은 고비 사막의 남부인 내몽골을 차지하고, 소련은 나머지 반, 즉 고비 사막 북쪽의 외몽골을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몽골을 그들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비워두었다.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 있던 칭기스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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