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집 : 재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김용규 외 엮음, 김석범 외 인터뷰이 / 소명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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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위치는 이산, 이주, 망명으로 인한 상실감과 상처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들을 억압한 문화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소수적인 문화, 특히 타자의 환대에 열린 문화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의 이런 곤경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국권의 상실과 민족 분단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식민주의와 분단체제에 의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 이를 극복할 비판과 저항의 형식을 창조해온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민족적 현실 때문에 '자기 민족이 사는 공간'을 떠나야 했던 박탈과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민족이 아닌 민족이 사는 공간'에서도 차별과 억압을 겪어야 했던, 민족과 민족의 사이-경계in-betweenness를 살아온 존재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것은 이런 사이-경계의 사유를 토대로 민족 내의 다수자의 체제와 이념의차별적 폭력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으면서 그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6~7


구한 말, 일제 강점기 시기 한반도에 살던 이들 중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정착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미국, 일본,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역 등 어렵게 그 곳에서 살면서 정착을 위해 애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기도 하고 실제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존재한다. 1900년 무렵 넘어갔다고 한다면 어느덧 1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몇 세대가 흘러간 것이다. 근래 들어 이민 세대들이 딕테, 마이너 필링스, 파친코 등과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놓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이민자들에 대한 생각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재일조선인도 어느덧 3세대가 훌쩍 지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세대 별 재일조선인들을 만난 인터뷰을 기록화하여 담고 있다. 세대가 지나면서 변화하는 재일조선인의 위치와 그에 따른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인터뷰 시기는 2014년 무렵 10년 전인 경우가 많아 대담자들의 최근 생각이 아닌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래도 古 서경식 선생님의 경우는 2014년, 몇 년 후로 2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실어서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생각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1세대가 식민주의와 냉전과분단의 역사적·집단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고 주로 조국에 대한 집단적 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면, 2, 3세대들은 그런 경험을 물려받으면서도 일본사회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1세대보다는 일본사회 내부에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별과 마주쳤을 것이다. 따라서 2세대 이후에는 모국과의 관계 못지않게 일본사회 내부의 문제와의 깊은 연관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세대에서는 주로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생성이 두드러진다면, 2, 3세대에서는 디아스포라의 개인적 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P8~9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쯤 될까. 나의 정체성이 흩어져 있다면 고달픈 생각이 들 것 같다. 원치 않아도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태어나보니 우연히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다면 지금의 정체성과는 다른 색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자리하든 정체성은 혼란스럽기 마련일 것 같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런지. 어쨌든 이들은 몸은 타지에 남아 생활해야 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 흔적을 인터뷰를 통해 엿보게 된다.


첫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1세대 김석범이다. 그는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고 일본공산당에 입당 및 탈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화산도’라는 대표작을 써낸 문필가로 지금까지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민족 의식이 뚜렷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도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온전히 그 시절 역사를 살아낸 분 아니던가.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강한 정신을 갖고 버티며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뉴라이트 등의 극우 인사들에 대한 역사 인식에도 비판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재의 정치상의 분열과 대립이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것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뉴라이트 사람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고 말이야. 역사는 그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역사의 진리를 가지고 맞서 싸워야 하는거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 문제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겁니다. 다 관계되어 있는 것이죠.

요는 분열의 원인이 외세와 역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세와 결탁한 세력, 특히 이승만 같은 친미주의자에 있다는 겁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바라면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서 공작을 하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영·중·소와 조선의 임시 정부가 신탁을 했더라면 꿈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6.25도 터지지 않았고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앞으로 통일논쟁할 적에는 왜 분열되었느냐, 외세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왜 단독선거가 이루어졌느냐하는 것을 꼭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50


두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2세대 서경식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가장 많은 활동을 벌였지 않았나 한다. 조금 더 활동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뵐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든다. 특히 소수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일조선인 2세대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들과의 사이에 위치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고 디아스포라라는 개념 자체를 많이 설파했다.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사고한다는 것이 디아스포라적 사고임을 그는 특히나 강조한다. 국가주의적, 국민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보아야 하는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라는게 한 마디로 하면 국가에 거리를 두고 국가에 대항해서 하는 사고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적인 사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국민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속하고 일본의 다수자, 미국의 다수자가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를 가져야지 대화도 이루어지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간단치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지식인, 글 쓰는 사람, 예술 하는 사람은 잘 견디고 그 방향으로 다수자를 교육해야 합니다. 소수자가 "소수자, 싸워라"라고 하면 아까 말한 악몽이 이뤄지기 쉬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 조국이 분단되어 있고, 이렇게 계속 70여 년 동안 차별을 당하면서도 40만 넘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 사람들 중에 제가 볼 때에도 민족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조선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에요. - P105~106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재일조선인 2세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어떻게 민족의식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볼 때는 이 사람이 일본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해요. 나라는 사람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 소위 재일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그런 사람들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보고 있는지, 그걸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의 의식을 분석한다, 연구한다고 할 때, 재일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계나 사회를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 P143


세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최덕효다. 그는 영국 셰필드 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문제를 박사 논문으로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인터뷰에서 특히 역사학자로서의 보편적 고민, 그리고 일본의 주장과의 충돌에서 오는 불편함과 갈등 등을 논한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는 존 다우어의 책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우어는 미국의 점령에서 일본인의 목소리와 행위에 주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제국의 유산과 재일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적 유산에 대한 문제나 비판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일본과 미국의 입장은 있지만 한국의 입장은 빠져 있다는 비슷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야말로 일제의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통합하여 얘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가 본류고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주변에 있는 다른 역사가 아니라 이 둘을 역사적으로 동시에 볼 수는 없을까? 이런 문제 의식 하에서 이 두 역사를 재일조선인의 시각 속에 통합합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 혹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제 관심은 국경을 넘어선 체제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하듯이 일국사 내지 민족사가 아니라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 P184


마지막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정영환이다. 그는 조선근대사와 재일조선인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개인적으로 몇 차례를 통해서 글을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후 그 책이 일본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책으로 펴내며 한국 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박유하의 책이 소비가 된다는 것은 그 담론을 받아들이면서 전쟁과 식민 지배 책임에 대한 일본의 호응이 있다(국내 일부 극우 인사들도 마찬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1994년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고 1998년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켜보며 자란 세대다. 그가 조국을 복잡한 심경으로 느낀다는 부분은 솔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최근 지역사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사 속에서 조선인들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넘어 제3세계에 대한 연구라니, 앞으로 그의 글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조국의 문제는 학교에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 어떻게 조국에 보답할까?, '당신은 일본에 있지만, 어떻게 조국을 위해서 살 것인지? 하는 문제들, 그러니까 조국을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직접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죠. 학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조국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내가 아는 조국이었고, 학교 다닐 때 공책, 학습장이나 그런 것을 사도, 모두 총련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금강산이나 묘향산, 평양에 있는 여러 시설들이 그려져 있었죠. 조국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어요.

저에게 ‘조국’은 동질성을 느낄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느낄 경우가 많은 대상입니다. 다른 세계인데 한편에서는 친밀감도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 P257~258


재일조선인 각 세대별 언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1세대 만해도 조선의 말과 글을 쓰고 지켜야 한다는 구속이 강했겠지만 2세대, 3세대에 가면 그 구속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언어적 행위를 이행했는가. 

아래는 차례대로 김석범, 서경식, 최덕효인데 1세대와 2, 3세대가 구별됨을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일본어가 편해진 2, 3세대는 오히려 조선어를 말해야 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잘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놓지 않는 자세가 놀라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언어의 두 측면은 개별성과 보편성입니다. 개별성이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일반적으로는 민족이죠.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다 민족과 연관되어 있죠. 발음도 그렇고 글자의 모양도 그렇고요. 또 하나의 측면은 보편성, 말하자면 그것을 다른 언어로 대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근대 일본말이라는 건 거의 서양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과 한국에도 퍼져 나간 것이죠. 이런 점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런 번역을 통해 근대 문명을 동양으로 보편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죠. 내가 작가로서 언어의 주박을 느낀 것은 일본어의 민족적인 측면입니다. 모양만이 아니라 일본어 발음이나 글자 등이 일본적인 것이지 조선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데서 주박을 느끼기 시작한것이죠. 일본 사상뿐만 아니라 글 자체로서 말이죠. 그것과 더불어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본적인 의식의 잔재,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구속성, 그런 주박, 더 나아가 우리를 지배한 지배자의 글로 써야 한다는 굴욕감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겁니다. - P60


저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동시에 느끼고 있어요. 디아포스라적인 것인지 제 개인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본심입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을 그래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일본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한때는 오랫동안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해방될 수 없는 식민지 시민이다'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느꼈었어요. 고등학생 때 제 시가 시집에 실렸는데, 후기에 앞으로 다시는 시를 안 쓸 거라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 나는 한국어로 표현할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벌써 그렇게 느꼈어요. - P98


제 신체 감각으로서는 일본어가 제일 편하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이 조선사람으로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가 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본어가 편한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어를 민족의 자격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하려고 하면 언어를 고민해야 하고 항상 일본어를 상대화하려는 노력, 즉 일본어가 모어라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런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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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역사 -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
한모니까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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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계선을 상상해본다. 분단 경계선을 치우기도 전에 무슨 또다른 경계선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새로운 경계선은비무장지대의 다양한 가치를 조율하는 지혜의 경계선이다. 강고한 냉전구도를 탈피하면서도 생태와 환경을 보존하고 역사와 문화를 기억할 수있는 길이다. 국제적 역학관계에 의해 주어지는 경계선이 아니라, 한국인(Korean)의 관점에서 그릴 수 있는 다양한 평화의 길이다. 

- P505


DMZ 하면 드는 생각은 한국전쟁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몇 십년 간 사람이 자주 들락날락거리지 않아서 생태 자연이 보존된 것이라는 것 정도였다(이는 반만 맞는 내용이다. 북한의 DMZ는 남한과 달리 개발지로 이용되어서 보존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는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고 이후 어떤 변화의 모습을 거쳤을까. 이 책은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정리해놓고 있다. 저자가 약 5년 간 자료 조사 및 정리를 하여 내놓은 책이기 때문에 관련 문헌, 기사 등 꼼꼼한 주석과 해설을 실어 읽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용 자체는 아무래도 무겁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도 만들었다.


비무장지대는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했을 때 영국의 구상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한국 정부는 당시 북진 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비무장지대는 용납할 수 없는 방안이었으나 영국을 비롯한 유엔에서는 과거에도 영토 갈등이 있었을 때 곧잘 행하던 방식이었다. 전세가 어느 한쪽에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될 때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통한 정전에 회의적이었으나 전선이 백중세가 되자(고착화) 미국과 중국은 정전회담을 적극 고려하게 된다. 


북한과 중국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고 싶어한 반면 미국은 38선 이북 북한 지역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 싶어했다. 결국 양측은 조금씩 양보하여 전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고 2km씩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합의가 되었으나 전쟁이 이후로도 20개월 지속되면서 전선이 이동하면서 군사분계선이 계속 수정되었다. 정전협정은 48일 이내 비무장지대를 청소하고 민정경찰을 두고(무기 휴대 금지) 공동감시소조를 두어 위반사건을 조사하기, 허가된 인원 외에는 출입 금지, 군사분계선 통과를 양측의 군정위원회가 합의하기 등의 내용으로 채워졌다. 


1950년대 말 미국이 신형무기인 전술핵을 도입하자 북한은 동굴망(땅굴)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이미 땅굴을 판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전쟁은 북한에게 체제의 불안정성과 외부 침략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베트남전으로 북베트남 정부 수상 팜반동은 김일성에게 지원 요청으로 조선소와 방공토굴과 같은 물자 및 설비를 목록에 포함시켰는데 이 때의 갱도 건설 지원은 북한이 기존에 구축했던 땅굴 기술과 효과를 베트남전에서 시험하면서 기술을 보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남측은 본래 관측을 위해 설치된 경계초소 또는 감시초소를 일부 군사분계선에 더 가깝게 배치하고 군인들을 주둔하게 하면서 경계근무를 서는 감시초소 형태로 요새화를 추진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GP(경계초소)다. 1968년 무렵이 되면 전방초소 등의 진지는 모두 지하 요새화되었고, 2m 두께의 콘크리트로 영구 요새화된 벙커들이 생겨난다. 여기에 철책과 지뢰 설치, 불모지화(숲을 태워서 시야를 확보) 등도 행해지게 된다. 이 무렵이 되면 정전 관리 기구도 유명무실하게 되고 공동감시소조는 1967년 이후 김신조 사건, 오울렛 초소 사건, 판문점 도끼 사건 등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군사정전위원회는 1990년대 전반이 되면 북한의 철수로 무력화된다).


그러나 현재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정전협정 조항이 존재하는데 7~9항이다. 구체적으로는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과 제한을 명시하고 있는데 해석과 적용에 대한 문제로 출발 이후부터 논란이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적대행위가 다시 시작될 경우 미국이 직접 관여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면서도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등 애매한 태도의 입장과 자세를 취했다. 비무장지대는 현재도 작전지역으로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이후 언제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남북한 모두 무장화를 가속화시켰고 각자의 체제를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기정동은 ‘자유의 마을’로, ‘평화의 마을’로 불리지만 양국의 체제 대립의 상징의 역할을 했다. 북한은 1953년 12월 평화리 일대의 농경지 복구를 추진하고 비무장지대 내의 다른 과거의 마을 농경지 복구도 추진하였다. 북한의 이런 적극적인 농지 개발은 비무장지대 자연생태에도 영향을 주었다. 북측 평화리의 모습은 남측에 상당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켜 대성동 개발 및 정책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남한은 대성동 개발의 목표를 “근대화된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잡았다. 그러나 대성동 국민은 정전 체결 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법적 지위가 상실된 채 마을 개발과 동시에 경쟁하는 마음까지 요구받으며 살아오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경기도 파주시 임진면의 관할구역에 장단군 군내면으로 편입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후 대성동은 1971~1972년에 들어서 전면적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주민의 자조, 협동, 반공계몽 교육과 더불어 새마을사업이 추진되었다.


1970년대 들어 미중의 데탕트의 분위기를 타고 비무장지대에도 탈냉전 바람이 불기도 했으나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유엔사는 정전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접근했고, 북한은 군축 문제를 중요시 여겼으며, 한국은 주도적인 입장이 아닌 국제 기구의 의견에 의지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는 보조적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정전된 지도 70년이 지났다. 과시나 명명으로서의 ‘자유‘나 ‘평화‘가 아니라 제도적이고 실질적인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적극적으로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적 역학관계와 한반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지혜롭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 분단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한반도에 가해지는 세계 냉전 경계의 압력을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철통 방비 태세의 긴장을 통해서가아니라 소통을 통한 이완이 필요하다. 1954년 유엔사 군정위가 지적했듯이, 주권을 가진 정부로서 한국 정부는 비무장지대의 비군사적 영역에서 남북한 간에 합의를 이루고 이행하는 주체이다. 남북한 간의 경계를 우리가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상상과 자신감, 정교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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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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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단절로 대표되는 근대성을 부정한다. 인간과 비-인간이 연결망(네트워크)에 함께 존재한다고 본 것이 특징적이다(하이브리드). 서구와 과학, 정치로 대변되는 근대성의 폐해에 대한 미래적 대안으로 그의 이론이 왜 최근 주목을 받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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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 - 상 - 청 제국 말 1800~1911, 2부 캠브리지 중국사 11
존 킹 페어뱅크.류광징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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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권 앞 부분은 청나라 말기 경제의 변화, 주변국과의 관계에 따른 중국의 인식의 변화를 다룬다. 


청나라 말 무렵 정치와 이념 체계의 파고로 중국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 근대적인 경제 성장은 자체적으로 이루지는 못했다. 

농촌은 인구가 증가하여 1인당 경지 면적이 줄었다. 보조 수단인 수공예품 생산도 값싼 면화의 유입으로 경쟁력에 밀리면서 새로운 시장을 향한 재배 작물 유형을 찾아야 했다. 공업은 제도의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 국내 교역 시장은 지방 단위로 소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진 반면대외 교역은 수치로는 증가하였다. 다만 상품 유통은 독점 구조를 가져 하층 노동자에게 가기 어려운 구조였다. 청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도 관세율 조정을 과감히 하지 못해 이를 국내에서 세금 수입을 통해 이루어야 했다. 또 계속되는 내부 반란 진압으로 인한 군사 비용이 커졌고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로 배상금까지 얹어져 삼중고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대외 관계는 급속도로 변화하였다. 먼저 1905년까지 제국주의가 첨예화되면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역학 관계가 변하였고 만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종식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되면서 전 세계의 분위기는 여러 모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869년 중국 최초 외교 사절단이 해외로 파견되었고 그 결과 올콕 협정이 맺어졌으나 이로 인해 홍콩에 영사관이 설립되고 각종 품목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었다. 또 이 때 최혜국 대우가 들어갔으며 내륙에서 외국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871년 타이완 원주민들이 난파당한 류큐인들을 살해한 일로 일본이 류큐에 종주권을 주장한 뒤 1879년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게 된다.

투르키스탄 초대 총독인 카우프만이 1871년 쿨자(일리) 지역을 점령한 일로 청은 1875년 좌종당을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고 신장 원정대를 파견해 1877년까지 신장 전 지역을 수복한다. 청은 이후 1884년 신장을 정식성으로 승격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문호를 강제 개방하고 이후 서양과 연이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임오군란, 갑신 정변, 거문고 점령, 동학 농민 전쟁, 청일 전쟁까지. 조선은 오랜 동안 중국과 접경국이었고 사상과 이념, 철학 체계의 영향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외교적 관계였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아시아의 수장 자리에서 청은 물러나야 했다(조선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청일 전쟁을 아주 짧게 다루지만 전쟁에서 왜 졌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일사분란하지 못했던 청의 군대 체계, 이홍장의 외교력 부족,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군사력 문제, 정부와 백성의 단합 X).  


러시아가 중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뤼순, 다롄을 점령하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것을 계기로 영국, 일본, 프랑스가 조타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청 국내에는 외국 제품이 증가하면서 농촌은 빈궁해졌고 실업난과 생활난이 더해지면서 이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쌓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서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며 일어난 것이 의화단 운동이다. 

이 운동은 외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다른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동기는 타당했으나 방법은 부적절했던 일종의 원시적인 애국적 농민봉기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 P219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거의 틀림없이 만주 그리고 아마 몽골까지 합병했을 것이고, 다른 열강들로 하여금 영토 배상을 요구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한 러시아는 발칸반도로 눈을 돌렸고,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과 충돌해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제 남만주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일본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만주에 대한 청의 통치권 회복은 비록 일본과 러시아가 소유한 특권에 의해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만주가 여전히 중국 땅으로 남을 것임을 보증해주었다. 1907년 4월 20일 조정은 만주족의 발상지라는 만주 지역의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종결시키고 그곳을 정식 성으로 개편하기 위한조치를 취해 쉬스창을 총독 겸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펑톈, 지린, 헤이룽장 3성에 각각 무관 순무 대신 문관 순무를 파견해 총독을 보필하도록 했다. - P238~239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1840~1895년 사이에 계속 변화했는데, 1860년 이후 그러한 변화는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는 1840년대의 쇄국‘ 정책에서 1860년대에는 유가의 성과 신에 기초한 ‘수신‘ 정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근대적 외교술, 특히 국제법 사상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 강조되었다. 1880~1890년대에는 권력 정치, 특히 세력 균형론과 강대국과의 동맹론이 한때를 풍미했다. 다른 한편 1860년대 중반에는 민족의식이 등장해 날로 강력해져갔다. 1840~1860년 사이에는 상업을 이용해 오랑캐들을 견제하자는 원칙이 인기를 끌었으나 1860~1870년대에 그것은 ‘상전‘이라는 좀더 역동적인 관념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들은 유교의 이상주의적 태도에서 실용주의적 태도로의 전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 P327


신장 수복을 계기로 청은 실전에서 서양 무기나 자체적으로 개조한 무기의 사용성을 늘렸다. 이홍장은 직예 총독에 올라 청 최고의 군대였던 회군의 훈련법대로 다른 군대를 훈련시키게 했고 근대적 해군을 창설했다. 또 순양함을 외부에서 구입하여 북양 해군의 함대를 재정비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885년 타이완이 성으로 승격되고 유명전이 초대 순무가 되었다. 그러나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여 조정은 유명전을 직위에서 해임시킨다(임무는 그대로 하게 했음). 


19세기 마지막 10년 청은 서구와 일본에게 겪은 충격으로 인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흐름에 휩싸이게 된다. 여러 지식인들에게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왔다. 캉유웨이는 금문학의 해석을 달리 하여 유교 중심적 지향성을 앞세우며 ‘대동’의 세계, 평등주의와 보편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 나아가자는 이상향을 앞세운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의 주장을 이어받으면서도 민족주의적 이상을 더했다. 옌푸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 지향을 보였으나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 눈에 띈다. 담사동은 중국의 전통적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해방시켜야 한다 주장했기에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중 청원과 조정에는 상소문이 올라와 위로부터 개혁 요구가 빗발쳤다. 아래에서는 학회나 신문 등이 생겨났다. 


1898년 서태후는 광서제와 긴장 끝에 갈등이 폭발한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의 개혁파의 청원을 받아들였지만 조정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백일 유신으로 조정은 황제와 소수의 급진 개혁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태후와 다수의 기존 관료 간에 판이 갈린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했고 훈정을 선포했으며 제3차 섭정을 개시하고 개혁가들은 숙청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근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화를 의미했다. 많은 사대부들이 ‘양무‘ 운동에 찬성했던 것은 그것이 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을 망국의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서구적이라는 이유로 ‘양무‘ 운동에 반대했다. 그것이 유가 학설을 대체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을 구하는 동시에 중국 고유의 방식을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한 그들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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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청일전쟁 - 전쟁과 휴머니즘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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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한달 전 신간 도서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이 갔다. 돌이켜보면 국내 저서 중 ’청일전쟁’ 주제만을 다룬 책은 드물고 한국 근대사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함께 보조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만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청일전쟁은 1894년 발발하여 1895년까지 진행되었다. 청과 일본 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일본이 국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가 전쟁터의 한복판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과거의 사건이기에 사료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겠지만 연구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청일전쟁의 시작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궁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일본에는 세 부류의 세력이 있었다. 천황가와 내각, 내각 구성원 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세력, 이들과 사안에 따라 협력 또는 갈등하는 외부와 군부가 있었다. 청일전쟁은 이 중 외부와 군부의 결정이 개전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였고 오토리 게이스케 조선 주재 공사의 상황 인식과 행동이 변수로 작용하면서 조선 출병과 왕궁 점령이 결정되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내각의 의견에 따라 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전달했다.)

 

일본 참모본부는 경복궁에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선제 발포하고 이에 일본군이 응사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일본군 장교들의 언급을 확인하면 일본군의 왕궁 침입과 그로 인한 ‘상호 교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23일 왕궁 수비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통설에 의하면 조선군은 일본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뒤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이 일본군 철수 명령을 전달했으나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를 무시하고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왕궁 수비병이 해산한 것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날조된 국왕의 ‘전교’를 믿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했다. 우선 전신선 가설을 위해 (조선 전국 지도까지 제작) 한성 전보 총국을 장악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를 차단하고 도성 내외를 수색하며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경복궁 점령 당일부터는 서울-평양 전신선을 차단한다. 

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들의 피난이 이어진다. 경성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는 영사관에서 각 주요지에 순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문하고 인부와 말먹이, 양식을 징발하여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했다고 밝혔다. 당시 길거리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밖으로 몸을 숨겼고, 부녀자들은 10리 내외의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했다. 특히 평양, 황주, 순안, 중화 부근의 피해가 심해서 사방 70~80리 사이 물건은 거의 약탈을 당해 닭과 개 한 마리 없이 텅 빌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P87) 


청국의 조선 출병은 1894년 6월 4일 전라도 농민 봉기에 따른 성의 함락으로 급박했던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직예제독 예지차오와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하의 청군은 아산만의 백석포를 거쳐 아산에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각종 비용을 제공하는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들어주었다. 이에 지방군은 그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1892년 징발령을 통해 현지 조달 원칙을 적용하여 강제 징발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부는 이탈하고 일부 지방관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7월 25일 경기도 남양만의 풍도에서 청일 간의 해전이 일어났고 7월 29일 충청도 성환과 아산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상전이 전개되어 이후 평안도 평양과 정주, 의주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이후에도 한반도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 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 P232


풍도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덕적군도의 작은 섬이다.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는 풍도 해전이 지도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자세히 소개된다고 한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청국에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 7월 24일 일본 함대는 아산을 정찰하고, 아산만 부근의 풍도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7월 25일 청국 함대가 일본 함대와 맞닥뜨렸다. 일본의 배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일본 함선은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청국 함대는 달아나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성환 전투는 일본군이 7월 30일 성환 동북방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 기병이 아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청군 보병을 습격하여 8명을 참살한 전투다. 성환 전투는 양국간 제1차 지상전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청국군이 평양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일본군은 조선 중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언론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위 행위로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강조하는 등 그들이 이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문명 개화, 식민지적 발상이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의 보도 행태는 사실과 거리가 먼, 왜곡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실체로 자리잡으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 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 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청군은 평양에 도착했다. 청국군이 패배한 소식에 조선 청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댈 곳이 없는 정부는 청 정부에 신속한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2차 청국군이 추가로 들어와 평양에 합류한다. 후발 청국군 4대 군은 웨이루쿠이의 성쯔군, 마위쿤의 의군, 쭤바오구이의 펑군, 리셩아의 펑톈 성쯔연군과 지린연군이었다. 

당시 평양 사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기록으로 패은당의 <서경패사초략>이 있다. 그에 따르면 웨이루쿠이가 거느리고 온 병사는 산명장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외촌으로 나가서 우마와 재화를 빼앗는 것이 강도보다 심했다. 그 결과 평양의 인심이 크게 동요했다. 의주부터 평양까지의 500리 거리 연도의 백성들 재산을 약탈한 것도 거의 다 웨이루쿠이 병사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반면 나머지 3군은 상대적으로 덜 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 전투가 벌어지기 전 평양성의 주민 대부분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 인가에서 연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 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 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 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이 책은 청일전쟁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일전쟁에 관한 자료나 출판물 등 청, 일본, 조선에서 가져온 다양한 기록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길 자료조사 및 정리에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다. 오래도록 조사한 자료를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나중에라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구입할 작정이다.  


청일전쟁 동안 조선인들은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을 했고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기에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팽만했다. 그럼에도 청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은 ‘유원지의’를, 동학농민군은 ‘내자불자’의 인도주의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유원지의는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따뜻하게 대접한 후 되돌려보낸다”는 조선의 전통적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서양인과 중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할 때마다 적용한 바 있었고, 고종 초 초반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평안감사 박규수 등이 실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도 풍랑으로 부득이 중국에 표류할 수밖에 없었을 때 같은 이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자불거는 <맹자>의 인생철학을 반영한 “무릇 가는 사람은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누구든 막지 않는다”는 인본주의 원리에 따라, 청국군의 진압 대상인 동학농민군이 스스로 표명한 ‘상화相和’의 방식이었다. - P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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