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의 청일전쟁 - 전쟁과 휴머니즘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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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한달 전 신간 도서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이 갔다. 돌이켜보면 국내 저서 중 ’청일전쟁’ 주제만을 다룬 책은 드물고 한국 근대사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함께 보조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만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청일전쟁은 1894년 발발하여 1895년까지 진행되었다. 청과 일본 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일본이 국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가 전쟁터의 한복판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과거의 사건이기에 사료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겠지만 연구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청일전쟁의 시작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궁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일본에는 세 부류의 세력이 있었다. 천황가와 내각, 내각 구성원 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세력, 이들과 사안에 따라 협력 또는 갈등하는 외부와 군부가 있었다. 청일전쟁은 이 중 외부와 군부의 결정이 개전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였고 오토리 게이스케 조선 주재 공사의 상황 인식과 행동이 변수로 작용하면서 조선 출병과 왕궁 점령이 결정되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내각의 의견에 따라 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전달했다.)

 

일본 참모본부는 경복궁에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선제 발포하고 이에 일본군이 응사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일본군 장교들의 언급을 확인하면 일본군의 왕궁 침입과 그로 인한 ‘상호 교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23일 왕궁 수비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통설에 의하면 조선군은 일본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뒤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이 일본군 철수 명령을 전달했으나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를 무시하고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왕궁 수비병이 해산한 것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날조된 국왕의 ‘전교’를 믿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했다. 우선 전신선 가설을 위해 (조선 전국 지도까지 제작) 한성 전보 총국을 장악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를 차단하고 도성 내외를 수색하며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경복궁 점령 당일부터는 서울-평양 전신선을 차단한다. 

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들의 피난이 이어진다. 경성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는 영사관에서 각 주요지에 순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문하고 인부와 말먹이, 양식을 징발하여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했다고 밝혔다. 당시 길거리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밖으로 몸을 숨겼고, 부녀자들은 10리 내외의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했다. 특히 평양, 황주, 순안, 중화 부근의 피해가 심해서 사방 70~80리 사이 물건은 거의 약탈을 당해 닭과 개 한 마리 없이 텅 빌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P87) 


청국의 조선 출병은 1894년 6월 4일 전라도 농민 봉기에 따른 성의 함락으로 급박했던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직예제독 예지차오와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하의 청군은 아산만의 백석포를 거쳐 아산에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각종 비용을 제공하는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들어주었다. 이에 지방군은 그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1892년 징발령을 통해 현지 조달 원칙을 적용하여 강제 징발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부는 이탈하고 일부 지방관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7월 25일 경기도 남양만의 풍도에서 청일 간의 해전이 일어났고 7월 29일 충청도 성환과 아산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상전이 전개되어 이후 평안도 평양과 정주, 의주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이후에도 한반도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 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 P232


풍도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덕적군도의 작은 섬이다.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는 풍도 해전이 지도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자세히 소개된다고 한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청국에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 7월 24일 일본 함대는 아산을 정찰하고, 아산만 부근의 풍도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7월 25일 청국 함대가 일본 함대와 맞닥뜨렸다. 일본의 배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일본 함선은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청국 함대는 달아나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성환 전투는 일본군이 7월 30일 성환 동북방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 기병이 아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청군 보병을 습격하여 8명을 참살한 전투다. 성환 전투는 양국간 제1차 지상전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청국군이 평양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일본군은 조선 중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언론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위 행위로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강조하는 등 그들이 이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문명 개화, 식민지적 발상이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의 보도 행태는 사실과 거리가 먼, 왜곡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실체로 자리잡으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 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 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청군은 평양에 도착했다. 청국군이 패배한 소식에 조선 청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댈 곳이 없는 정부는 청 정부에 신속한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2차 청국군이 추가로 들어와 평양에 합류한다. 후발 청국군 4대 군은 웨이루쿠이의 성쯔군, 마위쿤의 의군, 쭤바오구이의 펑군, 리셩아의 펑톈 성쯔연군과 지린연군이었다. 

당시 평양 사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기록으로 패은당의 <서경패사초략>이 있다. 그에 따르면 웨이루쿠이가 거느리고 온 병사는 산명장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외촌으로 나가서 우마와 재화를 빼앗는 것이 강도보다 심했다. 그 결과 평양의 인심이 크게 동요했다. 의주부터 평양까지의 500리 거리 연도의 백성들 재산을 약탈한 것도 거의 다 웨이루쿠이 병사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반면 나머지 3군은 상대적으로 덜 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 전투가 벌어지기 전 평양성의 주민 대부분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 인가에서 연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 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 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 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이 책은 청일전쟁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일전쟁에 관한 자료나 출판물 등 청, 일본, 조선에서 가져온 다양한 기록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길 자료조사 및 정리에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다. 오래도록 조사한 자료를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나중에라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구입할 작정이다.  


청일전쟁 동안 조선인들은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을 했고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기에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팽만했다. 그럼에도 청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은 ‘유원지의’를, 동학농민군은 ‘내자불자’의 인도주의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유원지의는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따뜻하게 대접한 후 되돌려보낸다”는 조선의 전통적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서양인과 중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할 때마다 적용한 바 있었고, 고종 초 초반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평안감사 박규수 등이 실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도 풍랑으로 부득이 중국에 표류할 수밖에 없었을 때 같은 이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자불거는 <맹자>의 인생철학을 반영한 “무릇 가는 사람은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누구든 막지 않는다”는 인본주의 원리에 따라, 청국군의 진압 대상인 동학농민군이 스스로 표명한 ‘상화相和’의 방식이었다. - P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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