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契丹)의 주군은 나이가 어리어서 나라의 일을 그 어머니에게서 결정하며 한덕양(韓德讓, 941~1011)이 총애를 받아서 가까이 가서 용사(用事, 권력을 쥠)하고 있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괴로워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틈을 타고서 유·계(幽·?)를 뺏으십시오."
황제는 비로소 속으로 북벌(北伐)할 뜻을 가졌다.
조서를 내려서 친정(親征)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참지정사인 이지(李至, 947~1001)가 말씀을 올렸다.
"유주(幽州, 河北 北部와 遼? 일대)는 거란의 오른쪽 팔인데 왕의 군사가 가서 치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항거할 것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사람은 수만 명 밑으로 가지 않을 것이며 병사는 많고 비용은 많이 들며 형세는 반드시 널리 후량(?糧, 말린 음식으로 군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빈 등은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밤중에 거마하(巨馬河)를 건너서 역수(易水)의 남쪽에 영채를 만들었고, 이계선(李繼宣, 950~1013)이 힘껏 거마하에서 싸우자 요의 군사들은 비로소 물러났는데 추가로 도망하여 고산에 도착하였다.

바야흐로 거마하를 건너면서 사람과 가축이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계산할 수 없었다. 지유주행부사(知幽州行府事)인 유보훈(劉保勳, 925~986)의 말이 진흙탕 속에 빠졌고, 그 아들인 유리섭(劉利涉)이 이를 구하려고 하였지만 꺼낼 수가 없어서 드디어 함께 죽었다. 유보훈의 성품은 순수하고 삼갔으며 관리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정예여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명령을 받고서 아직 일찍이 피하는 말씀을 드리지 아니 하였고, 동료들을 맞이하면서 아직 일찍이 실의(失意)하지 않게 하였으며 집에 재물을 쌓아서 아직 천금(千金)에 이르지는 않았다."
죽기에 이르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아파하고 애석해 하였다.

전중승(殿中丞)인 공의(孔宜, 941~986) 역시 거마하에 빠졌다. 나머지 무리들은 고양(高陽, 河北省 保定市 高陽縣)으로 달아나다가 요의 군사에게 충격을 받아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는데 사하(沙河)는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고, 창과 갑옷을 버린 것이 언덕처럼 되었다. 야율휴격은 송의 군사 시체를 수습하여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짐이 지난번에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수를 선발하였는데, 단지 조빈 등이 웅·패에 주둔하면서 양식을 싸고 갑옷을 갈고 앉아서 군대의 성세(聲勢)를 넓히면서 한 달여 동안에 산의 뒤가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반미·전중진 등과 군사를 모아서 나아가서 직접 유주(幽州)에 맞닥뜨려 힘을 함께하여 몰고 가서 물리쳐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 짐의 뜻이었소.
어찌하여 장수들이 이루어진 계획을 준수하지 않고 각기 소견(所見)으로 달려가서 10만 명의 갑옷 입은 군사를 관장하여 요새를 멀리까지 나가서 다투어 속히 그 군현(郡縣)을 빼앗고자 하였고 또한 군사를 돌리어서 치중(輜重)을 도움 받고자 하여 왕복하면서 수고롭게 하는 폐단이 생겼다가 적이 올라타는 바가 되었소. 이 책임은 주장(主將)에게 있는 것이요.

요주(遼主)가 남경(南京)에 갔다. 정유일(5일)에 요주(遼主)가 백관들을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책서(冊書)하여 올려서 예덕신략응운계화승천황태후(睿德神略應運啓化承天皇太后)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은 요주의 존호를 올려서 지덕광효소성천보황제(至德廣孝昭聖天輔皇帝)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관부에서 배를 만들고 이미 완성하면 한 척에 세 호구(戶口)를 징조(徵調)하여 이를 지켰는데 황하의 흐름이 여울지고 급하여 그것이 표류(漂流)하여 잃어버리는 것을 대비하면 1년에 부역(負役)하는 백성이 수천 명이었다. 장평은 마침내 연못을 뚫어서 물을 끌어들이고 그 사이에 배를 묶어두니 다시는 백성들을 징조(徵調)하지 않았다.
도적의 우두머리인 양발췌(楊拔萃)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관중(關中)과 삼보(三輔) 사이에서 왕래하며 도적질하자 조정에서는 여러 주(州)의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는데 장평이 사람을 파견하여 유세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업무를 관장하고서 무릇 9년이 되자 관부(官府)의 돈을 아낀 것을 계산하니 80만 민(緡)이었다.
염철사를 맡기에 이르렀는데 겨우 몇 달 만에 섬서전운사(陝西轉運使)인 이안(李安)이 그[장평]가 옛날에 간사한 일을 한 것을 들추어내니 장평은 걱정하고 화를 내다가 병이 되어 죽었다. 황제는 오히려 조회를 하루 동안 열지 아니하고 우천우위상장군을 증직하고 장사 지내는 일을 관부에서 공급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안변책(安邊策, 변방을 안정시키는 대책)을 물으니 전중시어사인 조부(趙孚)가 주문으로 논의하였다. 대략적으로 마땅히 안에서 전비를 잘 닦고 밖으로 기쁘게 결맹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황제는 칭찬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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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賈復이 남쪽으로 陵과 息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賈復의 部將이 에서 사람을 죽이자,川太守 寇恂이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때는 아직 초창기여서 軍營에서 법을 범한 자들을 대부분 서로 용납해 주었으나 그 部將을 시장에서 죽였다.賈復은 이를 수치로 여겨 潁川지날 때에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恂과 똑같이 장수의 대열에 있는데 그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제 寇恂을 보면 반드시 내 손으로 劍을사용하여 직접 그를 죽이겠다." 하였다.恂이 이 계책을 알고는 서로 만나보려 하지 않자, 누이의 아들 谷이 말하기를 "저는 장수입니다. 검을 차고곁에서 모시다가 갑작스럽게 변고가 생기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寇恂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 藺相가 秦王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廉에게 굽혔던 것은 국가를 위해서였다." 하였다.
마침내 屬에 명하여 군사들에게 먹일 음식을 성대히 장만하고 술과 막걸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執金吾(賈復)의 군대가 경내에 들어오거든 한 사람마다 모두 두 사람 분의 음식을 겸하여 주라고 하고는, 寇恂이 나가 길에서 맞 - P241

이하다가 병을 칭탁하고 돌아왔다. 賈復이 군대를 무장하고 추격하려 하였으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취했으므로 마침내 그대로 지나갔다.
이 谷을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황제가 마침내 寇恂을 부르니, 寇恂이 조정에 이르러 인견할 때에 賈復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서 서로 피하려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두 마리 범이 어찌 사사로이 싸운단 말인가. 금일에 朕이 이것을 풀어주겠다." 하고는 이에 함께 앉아서 지극히 즐거워하고 마침내 함께 수레를타고 나와서 친구를 맺고 떠났다. - ≪後漢書 寇恂傳≫에 나옴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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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쇠퇴는,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그러한 권력이 점점 지방관들 손에 넘어가면서 국가와 사회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리고 몇몇 측면에서 이러한 쇠퇴현상이 실제로 19세기 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제도적 틀은 19세기의 가장 파괴적인 내전 가운데 하나 속에서도놀라울 정도로 중국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었다. 분명 바로 이 때문에20세기의 혁명적 전환들이 전국적 맥락에서 국가 보존을 주목표로 하여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 말기 이후 청 세력 감퇴를 검토할때 중국이 전국적으로 정치적 통합을심지어 학자 엘리트들의 공적인 삶에까지 침투해 있던 부패한 후원제하에서도 어느 정도나이루고 있었는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기 왕조 쇠퇴의 징조는 지방 정부의 착취, 출세 제일주의, 비능률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민중 반란을 야기하는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하려면 가경제 [1760~1820년)초의 정치적 위기가 미친 영향과 그로 말미암아 결국 정부가 추진한성급한 기초적 개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8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 - P222

근대로 진입하기 직전에 부패만이 아니라 상업화가, 그리고 타락만이 아니라 점증하는 사회적 복잡성이 중국 사회와내부의 권력 분배를 변화시키는 힘들로 작용하고 있었다. 전제군주제가 사적 집단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면서 공공이익 분야의 범위를 지정하고 그것을 통제하던 중앙 정부 자체의 역할 또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 P266

역대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란자와의 타협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었다. 즉 정복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민심을 잃어 황실이 제위를 보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명이 바로 이렇게 망했으며, 도광제도 자기책임을 소홀히 하여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제국 통치의 이러한 원리는 비록 아편전쟁으로 인해 바뀌지는 않았지만순수함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편의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원칙을 - P350

제쳐놓고 임시로 서양과 타협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란의 핵심이 되었던 것은 굴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즉각 결정하는 문제였다. - P351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여전히이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 - P382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 P438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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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계의 하나인 선비어를 이은 거란어는 사어로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어는 알타이어족 언어에 속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몽골어의 조상어로 추정된다. - P140

거란 대자의 경우 글자 수가 3,000여 자나 되고, 한자의 소리와 뜻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거란 소자의 경우도 원자가 450여 자나 되어 널리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국 두 종류의 거란 문자는 제정할 때부터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거란 문자가 대중화에는 실패하였으나 이웃한 여러 민족의 문자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036년경 서하가 서하 문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금의 문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은 1119년 거란 대자를 본받아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여진 소자도 제정하였다. - P170

거란은 ‘인속이치’ 방침으로 ‘나라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인의 제도로 한인을 대한다’는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는 이원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 P182

거란 왕조는 유학을 통치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중화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거란이 이미 예법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 P229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첫 번째로 중원 유가문화를 접수한 거란은 유가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서하 등 이웃 나라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모두 한족문화를 학습하였다. 거란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문으로 다스리는 문치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사회 발전의 수요에 상당히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P247

거란 경내의 한족은 대체로 3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연운 16주를 획득한 후 거란에 편입된 이들이다. 두 번째는 거란 건국 이후 중원에서 잡아온 한족 포로다. 세 번째는 진한 이래로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한족 유민이다. 따라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거란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회유하는 것은 거란 통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 P265

거란과 송의 정통 지위를 둘러싼 논쟁은 원대까지 이어졌다. 원은 초기부터 거란 송 금의 역사서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중기까지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누가 정통왕조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송을 정통으로 보고 거란과 금을 송사에 편입하는 것이고, 다른 의견은 송을 남사, 거란과 금을 북사로 서술하여 평등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거란 송 금의 역사를 편찬하기 시작한 지 반세기가 지난 1343년 원 조정은 세 나라의 정통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세 왕조 모두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 P282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 전통 문화 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자신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족과 한족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최초의 정복 왕조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 원 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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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弘을 大司空으로 삼았다. 湖陽公主가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가 공주와 함께 조정의 신하들을 논하여 은근히 그녀의 뜻을 관찰하려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宋公의 위엄 있는 용모와 덕스러운 도량은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못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장차 도모해 보겠다." 하였다. 뒤에 宋弘이 인견을 당할 적에 황제가 공주로 하여금 병풍 뒤에 앉아있게 하고, 인하여 宋弘에게 이르기를 "속담에 ‘귀해지면 사귀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으니, 이것이 人情인가?" 하니,宋弘이 대답하기를 "신은 들으니 ‘빈천할 때 알았던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술지게미와 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 아내는 堂을 내려가게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공주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겠다." 하였다. ≪後漢書 宋弘>에 나옴.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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