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 11 - 왕망 3 -

王莽은 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孫建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이에 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匈奴가 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세 나라인 周나라·秦나라 ·漢나라가 정벌하였으나 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周나라는 中策을얻었고 漢나라는 下策을 얻었으며 秦나라는 無策이었습니다.
周나라 宣王 때에 匈奴가 국내로 침입하여 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쫓고 돌아왔으니, 匈奴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中策이 됩니다.
漢나라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軍裝과 양식을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戰亂과가 끊이지 않고이어진 지 30여 년에 中國이 피폐해지고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무제라고 일컬으니 이는 下策이 됩니다.
秦나라 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無策이 됩니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기근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功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삼가 이를 걱정합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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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마가복음> 제7장 6절), 예수는 이같이 주장하였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제15장 11절)그리고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니라."(〈마가복음> 제7장 15-16절) - P176

두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신을 지나치게 경외한 나머지 자신을 낳은 부모, 즉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경외는 사실 충분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질책 이후에 등장한다. 부정의 내면화로 통하는 길은, 율법에 따르기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체면에 관한 사회적 • 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호소하는 것에 있다. 만약 네가 너희 부모를 인정한다면, 외부로부터 너를 위협하던 것이 이제 내부의 위험에 속하게 될것이다. - P177

정신분석 과정의 환자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서》의 독자 또한 그부모와, 특히 그 어머니와 구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오래 된 대상에 관계하는 충동성을 내부로 투사한다. 이같은 내부로의 투사가없으면 전(前)대상들이나 아브젝트가 부정·더러움, 가증한 것같이 외부로부터 위협하고 나중에는 박해자적인 기재를 작동시킨다.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내부 투사는 악이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주체 속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됨으로써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은 오염되고 더럽혀진 실체로서가 아니라, 분리되고 모순된 존재로부터 뿌리뽑을 수 없는 혐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P178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 P179

부정한 음식을 향한 두려움이 마치 타자를 삼켜 버리려는 살해의 충동처럼 드러날 때, 그것을 대신하여 음식물이라는 구강적인만족을 통해 살해의 충동을 극복하고 타자를 삼켜 버리는 기호가나타난다. ‘원초적인‘ 환상이 그것 하나일 때 타자를 삼키는 기호라는 이 주제는 곧장 아브젝트의 정신화와 내재화를 동반한다. 그것에는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다. - P181

상징적으로 배불리 먹는 것(그 딸 속의 악마를 쫓아내 달라고 말하는 어머니로부터 나온)이란 결국 이교도와 친한 어떤 실체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식을 통해 말이 유형화되고, 구체화된 몸짓 그 자체로부터 모든 육체성은 고양되고 정신화되어 숭고해진다. - P183

빚이나 불법과 같은 죄에서 연상되는 ‘부족‘의 개념은 풍부와과잉의 개념, 즉 그칠 줄 모르는 욕망과 한 쌍이 된다. 그것은 ‘탐욕(convoitise)‘이나 ‘게걸스러움 (cupidité)‘ 이라는 용어로 경멸적으 - P187

로 사용된다. ‘pleonexia,‘ 즉 게걸스러움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항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다. - P188

그리스의 아폴론적인(디오니소스가 아니라) 육체관이 표방하는ing평화스러운 형태와는 반대로, 육신은 여기서 두 종류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히브리어의 육신 (basar)과 가까운 것으로 법칙의엄격함에 대항하는 탐욕스러운 충동의 ‘육체‘ 이다. 다른 하나는 가라앉은 ‘육체’로서 영적이므로 공기 같은 육체인데, (성스러운) 말씀 속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이 되기 위해 완전히 역전된 육체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육체’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후자의( ‘승화된‘)육체는 전자(법칙에 도전하는 까닭에 도착적인) 없이는존재할 수 없다. - P189

악의 원천인 죄와 혼동되는 아브젝시옹은 정신 속에서 육신과교리 사이의 화해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것은 질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건강의 원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 속에서 죽음과 부패를 마시는 중독된 단면이지만, 동시에 화해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실상 스스로 나쁜 것을 밝혀내고 그 속에서 악을 추방한다." - P193

사실 죄란 주관화된 아브젝시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자유 의지로 그로부터 분리될 운명을 가진, 언제나그리고 이미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ad unum) 존재인 인간은 율법에 대해 자발적 불복종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죄를 정신화시키고 주관화시키면서 논리의 과잉으로 몰고 가, 죄의 논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진미를 앗아가 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의 전락 이야기(아담의 최초 전향에 대해 우리가 명명한 것)부터, 즉 힘은 죄와 공존한 인식의 자유와 논리의 필연성을 제기하고 발전시킨 성 토마스아퀴나스를 재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의지와 판단에 의한 행위로서의 죄 여기에 결정적으로 논리와 언어 속에 아브젝시옹이 흡수된 결과가 있는 것이다. - P194

가학적 시련인가, 환희인가? 어쨌든 과오가 행복해질 기회를 잡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죄 (felix culpa)는 언술화 현상의 다른 말인 것이다. 교회사의 모든 암흑은 단죄, 잔인한검열, 징벌이 언술화 현상의 실행에 대한 일반적인 현실이었음을증언한다. 왜냐하면 비교의 가장자리나 드문 경우에는 종교 재판의 운명에 대한 균형추로서 이같은 언술화 현상이 교회당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유일신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해 고백하는 행위는 유럽에 대한 사소한 위반은 될지언정 밀고는 아니다. 모든 교회의 천장마다 빛나는 예술 작품이 귀착하는 곳은 바로 행복한 죄로서의,즉 고백된 죄라는 가장자리의 가능성 내에서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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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성으로 가는 길에서 죄의 양의성 그 한쪽에는 육체와 연결된 탐욕의 이질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내면의 탐욕이 밖으로 투사되어 판단하는 의식이 될 때 종교가 지닌 성스러움의 특징은 도덕과 응보의 논리로 전환된다.

아브젝시옹의 신비적 특성은 무한한 희열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희열은 신비가 말해짐으로써 가능하다. 꿈과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주체는 절대 타자인 신과 타자들과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담론 속에서 이 희열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긋지긋한 종교 재판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예술은 죄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내면으로부터 삶의 기회를 부여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환희의 표적으로서 예술의 넘쳐남이 그림·음악·말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유대 사회가 금한 부정한 것과 연관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음식물에 대한 터부를 범한다든가, 이교도와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문둥병 환자에게 말을 붙이거나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공격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적은 한편으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의미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아브젝시옹이 더 이상 외부가 아님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아브젝시옹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 속에서 재배치된다.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거부된 아브젝시옹을 내부로 내면화한다.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율법주의와 외식하는 행동을 질책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율법을 따른다면, 위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부정한 것은 이제 마음속에 있는 까닭이다.

유대 사회에서 이교도적인 다산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 관계를 여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도정시키는 체계의 시작이 어머니와 음식물에 대한 개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암시적인 근거는 마가복음의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친 사건이다. 음식물을 매개로, 딸과 그 어머니를 화해시킨 후에 그리스도가 행한 행적은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마가복음 7:33~35)

마음속의 더러움 곧, 내면화된 아브젝시옹은 정신분석 과정 중에 있는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데가 있다. 그 핵심은 분열과 투사이다.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 생의 초기부터 유아는 대상들을 지각하고 그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좋은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그렇게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나쁜 것’은 자신의 세계에서 제거하고 자신 바깥에 위치시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방출 행위는 내면화된 대상들을 내쫓는 동시에 그것들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 따라서 외부 곧, 바깥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아브젝트로서 추방된 주체가 아브젝시옹을 내재화시켜 말하는 주체로 서게 되는 메커니즘을 성서에서 찾아 풀어 말하면, 부정한 음식에 대한 두려움의 기원에는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최초 대상(나쁜 젖가슴)에 의한 공포가 있다. 그 최초 대상의 결핍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은 그 대상을 삼키고 없애버리려는 구강기 충동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좋은 젖가슴에 의한 만족은 자아의 파괴적 본능을 잠재울 수 있다. 원초적 환상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젖가슴이라는 구강적인 만족이 죽음 충동을 극복하게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음식물 대신 기호가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브젝트의 정신화, 내재화와 연결된다. 종국에는 자아 속의 욕구 불만과 타자를 향한 살해 본능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먹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위(성찬식) 기호 속에 녹아든다. 찢기고 삼켜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나의 육신도 소멸하면서 아브젝시옹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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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莽은 漢나라의 承平(太平)한 基業과 府庫·百官의 풍부함을 인습하여여러 오랑캐들이 복종하고 천하가 편안하였다. 이 하루아침에 이를 소유하니, 그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여 漢나라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기고는다시 크게 넓히고자 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에 한 지아비가 백 묘를 경작하고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나라가 넉넉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는데, 秦나라가 聖人의 제도를 파괴하여 井田法을폐지하니, 이 때문에 한 사람이 田地를 兼하는 폐단이 일어나며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서, 강한 자는 전답을 소유한 것이 千으로 헤아리고약한 자는 일찍이 송곳을 꽂을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漢나라는 농지의 조세를 경감하여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항상 그 밖에 다시 걷는 세금이 있어서 늙고 병든 자들이 모두 나오고, 豪族들이 침해하고 능멸해서 가난한 자들은 부자의 전답을 부쳐 먹고 부자는 도지세를 받아가니, 명목상으로는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나 실제는 10분의 5를 세금으로 거두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개와 말에게 곡식과 콩을 먹이고도 남아서 교만 - P181

하여 간사한 짓을 하고, 가난한 자는 술지게미와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해서곤궁하여 간악한 짓을 하여, 모두 죄에 빠져서 형벌이 이 때문에 폐지되지못하였다. 지금 천하의 田地를 명칭을 바꾸어 王田이라 하고 노비를 私屬이라 하여 모두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숫자가 여덟 명 미만이면서 田地가 1井(9百畝)을 넘는 자는 남는 토지를 나누어 주어 九族과 隣里와 鄕黨에 주게 하며, 감히 聖人의 제도인 井田法을 비난하여 법을 무시하고 대중을미혹시키는 자가 있으면 四(사방 먼 곳)로 귀양 보내어 魁魅(도깨비)를 막게 하라."하였다. - ≪漢書 王莽傳≫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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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터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희생물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형될 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이고 싶은 욕망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더 이상 희생제의의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의 성스러움을 혐오의 체계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분리를 유지시키는 혐오체계는 유일신을 유지시키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성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일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성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들과 나머지는 모두 가증스럽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 속에 나타나는 더러움의 전통은 어머니나 여성의 재생산하는 모성적인 기능이 종교사적으로 주체의 동일화 과정 속에 뿌리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타자인 여성과 여성의 수태 능력이 위협적인 힘으로 감지되면서 그 힘을 부정에 집중시켜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여성이 가진 자연적인 힘을 사회질서의 상징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복속시켰다.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삶과 죽음, 식물과 동물, 육체와 피, 건강과 질병, 이질성과 근친상간 같은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러한 대립이 지닌 의미론적 가치에 입각해서 대략 세 가지 혐오스러운 것의 범주를 도출할 수 있다. 1) 음식물에 대한 터부, 2) 육체의 노쇠와 그것의 절정인 죽음, 3) 여성의 육체와 근친상간이다.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터부는 정/부정을 구별하고 그 대립의 여러 형태와 차이들을 만든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나누는 터부를 통해 인간은 성스러운 법칙에 참여하고, 또 그 법칙을 유지시킨다. 일반적으로 터부는 인접하거나 유사한 속성을 차용해 전체를 표현하는 환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방과 마루의 경계인 문지방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밟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때 문지방에 대한 터부는 경계라는 속성이 환유적으로 차용된 것이다. 터부의 환유적인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그로 인해 부정해진 것을 정화하는 것이 희생제의이다. 여기서 희생제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인 의미 사이에서 작용하면서 서로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희생제의는 은유적 방식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부재를 표현하는 비유법인데 가령,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없는 호수를 통해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희생 제물이 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기 때문에 부재를 이용한 은유적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살생하지 말지니라’라는 인간과 신 사이의 최초 계약에 뒤이어 나타난 근본적인 대립(식물/동물, 살/피)이 이후에 논리적 대립체계 전체가 되었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이러한 대립체계는 대홍수 후에 노아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해서 번제로 드리는 것과는 구분되는 혐오체계를 형성한다. 처음에 의미론적으로 삶/죽음의 이분법으로 지배되던 체계는 마침내 차이의 약호code 체계로 바뀐다.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풍요한 여성의 육체나 출산능력에 뒤따르는 혐오와 유사하다. 음식물에 대한 금지는 분리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폐막을 제공한다. 따라서 장소-피lieu-sang라는 장치와 차이들의 말-논리parole-logique라는 장치가 ‘말하는 존재’를 신과 분리되게 할 수 있는 근원은 이 풍요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런 경우 분리란 어머니의 환상적인 힘으로부터의 분리와 같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말하는 주체로 서는 것이다. 이 시원적인 대모신(代母神)은 종교사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신교와 싸우는 한 민족의 상상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 환상적인 어머니에게 속하는 이 심연은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화할 수 있는 독립된 장소lieu와 다른 대상objet을 구축해야 한다. 풀어 말해,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의 비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 어머니를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문둥병에 대한 혐오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 즉, 혼합된 것, 동일성을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과 같은 논리를 취한다. 나아가 출산과 월경을 경험하는 모성적 육체의 오염과 연결된다. 출산의 경험과 관련해서, 육체 내에서 생명을 배태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는 마치 피부에 물질적인 흔적이 계속되는 것과 같이 불결하다. 기한이 차서 몸 밖으로 강제적으로 내보내는 출산 행위에서 태아는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최초 인류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에 아담은 자기 아내에게 ‘하와’(Eve)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의 뜻은 ‘생명(living)’으로,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세기 3:20)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타락 전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에는 이름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저주를 받고 추방되면서 하와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정한 것은 말씀 자체로부터 나온다. 즉, 고유한 자기 동일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면인 부정은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예언서에 나타나는 혐오는, ‘말하는 존재’l’etre parlant의 악마적인 내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은 음식물과 배설물 등의 오물에서 여호와의 말씀 속으로 옮겨간 듯하다. 그러나 레위기서부터 줄곧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브젝트들의 핵심에는 분리되지 않은 모성적 육체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더러움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이 성서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러움에 대한 성서의 첫 번째 관점은 부정(不淨)을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 두 번째 관점은 부정이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2) 이 해석에 따르면,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써 사탄적인 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에는 번제(燔祭) 동안 희생제의와 혐오스러운 것 사이를 벌려 놓기도 하고, 서로 결합시키기도 하는 두 기류가 존재한다. 여기서 혐오스러움과 성스러움, 살생과 희생제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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