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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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바깥, 밤의 불확실함과 미스터리 속 어딘가에, 문지방을 서성이는 형체‘ 의심과 불안은 끝없는 개미 지옥을 경험하게 한다는 생각, 차라리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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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대외 침략과 동방학 변천 - 외무성 관리 ‘동방학’에서 문부성·제국대학 ‘대동아학’까지, 202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도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8
이태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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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역사학은 천황제 파시즘을 키운 온상으로, 그 침략 정책에 가장 큰 희생을 당했던 우리로서는 그 실체 파악에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체제 확립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정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P12)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8권(마지막)은 1권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비판 총서의 시작과 끝을 한 저자의 글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1권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동양사' 개발이 쇼와 시대 도쿠토미 소호를 통해 천황제 황도 파시즘으로 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은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주의에 기반이 되었다.
8권은 쇼와 시대에 외무성이 관리한 동방문화학원 및 산하 도쿄연구소와 교토연구소의 연구, 1939년 문부성 지원으로 도쿄, 교토 두 제국대학 아래 설립된 동양문화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의 연구와 연구 성향을 고찰하였다. 그렇기에 시대적으로도 자연스레 이어지고 일본제국의 대외침략에 따라 진행된 개발 연구 변화를 통해 그들이 침략주의 정당성을 찾은 경위도 살펴볼 수 있다.


1911년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쑨원 정부는 각지의 군벌 세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이 이양된다. 일본제국은 위안스카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1915년 1월 「21개조 요구」 를 통해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동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특수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 동방문화학원은 1920년대 의화단 사건의 결과로 중국에게서 받은 배상금과 「21개조 요구」로 얻어진 수익금을 통해 1929년 외무성 주도로 창설되었다.
동방문화학원은 산하에 도쿄연구소와 교토연구소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도쿄제대와 교토제대 출신 교수들이었다.
도쿄제대의 동양문화 연구소와 교토제대의 인문과학 연구소는 중일전쟁 이후 창설되었으며 지금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단체이다.

1885년 이후 대일본제국헌법, 교육칙어 반포 등으로 천황제 국가주의가 강화되었으나 국가 신도를 비판하다 제국 대학에서 축출되는 교수들도 생겨나는 등 자유 민권 운동의 붐이 일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승리 후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1908년 천황은 「무신조서」를 발표하며 이를 공표하였다.
1912년 호헌운동이 일어나며 정당 정치가 실현되었다. 1차 대전으로 국가주의가 강화되는 듯 했으나 1918년 9월 하라 다카시가 총리로 지명되고 제2차 호헌운동이 일어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가 우익 청년에게 살해되면서 어둠이 드리워졌다.
국제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고 국제연맹 창설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내각도 이에 걸맞는 외교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대외침략 노선과는 갈등이 잠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25년 쇼와 시대가 시작되었고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서면서 대외 팽창 성향이 강해졌다. 3차에 걸친 일본의 산둥반도 출병으로 중국과의 대립은 극화되고 일본 내에는 천황제 국가주의(황도주의)가 부상하였으며 청년 군 장교들의 정당 정치 공격이 잇따랐다. 불만이 가득한 일본의 관동군은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하였고(만주 사변) 뒤이은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는 일본 내 정당 정치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황도 지상주의는 그야말로 교육이 낳은 괴물이었다. 동방문화학원은 천황제 국가주의 사조에 걸맞는 교육을 지향하였다. 만주국 건국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일만문화협회를 구성함으로써 만주 통치의 영구화를 기했고 몽골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를 연구하였다. 이는 일본제국의 서양 세계에 대한 도전과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양의 목표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구미 물질문명의 세가 도도하게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금일 동방 문화의 천명 발양을 도모하는 것은 바로 눈앞의 급무라고 믿는다. 이에 연구에 종사하는 여러 선비가 더욱 연찬의 공을 쌓아 그 업적을 들어 동방 문화의 정화를 세계에 선양하고 그리하여 본 연구소 설립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기를 희망한다. - 동방문화학원 개소식 축사 中 (P98)

1930년대 말 동방문화학원의 주요 지도급 학자들이 고령이 되면서 사망하는 경우가 생겼고 재정난이 발생하였다. 또 중국과의 전면전 와중에 일본 정부가 난징에 친일 화평파인 왕징웨이 정부를 세워 전쟁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일본 지식인층의 기대를 높이면서 교토제대는 1939년 문부성 지원을 받는 제국대학 최초의 '동아인문' 관련 연구소로 인문과학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우리 인문과학연구소는 신동아의 건설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문과학의 종합 연구에 따르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 본 학보가 추구하는 바는 동아의 현상을 밝히고, 또 이에 근거하여 원리 및 정책을 고구함에 있으며, 여러 종류의 지식을 종합하여 여러 연구에 당하여 힘써 (...) 세계사적 전환기에 본 연구소 사명의 일단을 이루는 것을 희망한다. - 1941년 3월 『동아인문학보(저널)』 발간사 中 (P181)

동방문화학원은 근 10년간 존속하면서 제국 일본 정부가 역사학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도쿄제대는 1941년 11월 동양 문화에 관한 종합적 연구를 목적으로 동양문화연구소를 발족하였다. 교토제대 인문과학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문부성 지원으로 제국대학 내에 둔 최초 연구소였다.

지금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도모하여 동양 영원의 평화 기초를 다짐은 우리나라 부동의 방침이므로 이때 특별히 동양 문화를 근본적으로 고구하여 우리 국책의 수행에 이바지함은 실로 긴요한 급무가 되었다. (...) 동아를 중심으로 아세아 대륙 및 남양에 걸쳐 그 문화의 종합적 근본적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국운의 진전과 학술의 발전에 공헌하고자 한다. - 1941년 총장의 '설립 이유' 中 (P189)

교토제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주로 중일전쟁의 점령지를 대상으로 하는 '동아 신질서' 확립 기여를 표방했다면 도쿄제대 동양문화연구소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둘은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었으나 동아학과 대동아학을 주장하며 국가의 대방침인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천황의 지배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뒷받침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인문과학연구소는 '동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동양문화연구소는 '동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동양'은 1894년 나카 미치요가 역사교과서 체제 회의에서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3분으로 나누며 등장하였다. 동양은 천황 지배하의 동아시아 세계를 의미한다. 동아는 일본의 침략전쟁 진행으로 '동양'이란 용어에서 '동방', '동아', '대동아'라는 용어로 파생되었다. 동양문화연구소의 '동양'은 '대동아'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1890년 교육칙어 반포 이래 교육과정이 바뀌며 역사교육은 3분과 체제로 자리를 잡는다. 1902년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중등학교에 배부되는데 이때 조선사는 '일본 역사' 속에 포함되었다. 조선(한국)은 4세기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로 이미 일본에 복속되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제국은 1902년 한국의 역사를 일본사에 편입한 뒤 1910년 강제 병합을 단행하였다.

1925년 쇼와 천황이 등극 후 1929년 발행된 교과서에는 '국체의 정화' 곧 군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내세웠다. 역사교과서가 쇼와 천황의 황도주의 정신에 맞추는 추세로서, 바꾸어 말하면 쇼와 천황 자신이 곧 황도주의 선양의 주체가 되고 있다. (P325)
천황 스스로도 12세 동궁 시절부터 신대 지상주의 역사교육을 받으며 황도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청년 장교들을 배출하는 사관학교의 역사교육은 일반 중등 교육보다 황도주의 색채가 더 짙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해군기관학교에서 발행한 『조칙집』에는 태평양 전쟁 시기에 주요 해전의 함대 사령관에게 작전 명령을 지시하는 칙어가 실려 있다. (P330~331)
① 「일미영 개전에 당하여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8)
② 「하와이 해전의 전첩을 맞아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10)
③ 「말레이해협 해전을 앞두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12)
④ 「홍콩 공략을 앞두고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1.12.27)
⑤ 「싱가포르 공략을 앞두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2.2.16)
⑥ 「동인도제도의 전첩을 맞아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2.3.10)

③~⑥은 적군을 섬멸하라는 출동 명령의 칙어이다.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천황이 출격 명령을 내린 칙유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칙어는 쇼와 천황이 '대동아전쟁'을 직접 지휘, 통솔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P331)

쇼와 천황은 중국 점령으로 확립되는 공간을 '동아'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독려하였다. 만주사변은 '동아'라는 공간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는데 국제연맹이 이에 제동을 걸자 탈퇴를 선언하는 조서에서 일본제국이 목표로 하는 공간에 대한 규정으로 '동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놓은 「기본국책요강」에서는 '동아' 대신 '대동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황국의 국시는 팔굉일우의 조국(肇國) 의 대정신에 기초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가져오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먼저 황국을 핵심으로 하여 일만지(日滿支)의 강고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함에 있다. 이를 위해 황국 스스로 속히 신 사태에 즉각 응하는 흔들림 없는 국가 태세를 확립하여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여 위 국시 구현에 매진한다. - 「기본국책요강」 中 (P313~314)


일본 안에서도 대외 침략 정책에 대한 비판을 주장한 이들이 소수지만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근대화 시책을 담당한 관리였던 가쓰 가이슈(1823~1899)와 일본 인류학,민속학,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도리이 류조(1870~1953)다.
가쓰 가이슈는 청일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일본 미래의 국방체제를 방어적인 형태로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친분이 있었던 사카모토 료마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조슈 세력의 국가주의 성향에 찬동하지 않았다.
도리이 류조는 도쿄제대 인류학교실에 근무하면서 국내외 현장 조사에 임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조사를 통해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근원을 찾는데 전념하였으며, 관부 '동양학' 추구와는 거리를 두었다. 동방문화학원이 출범하면서 연구에 참여하였으나 요대(僚代) 문화 탐구에 열중할 뿐 일만문화협회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의 '잘못된' 역사교육은 무려 반세기 이상 동아시아에 여섯 차례나 큰 전쟁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참극의 역사가 잘못된 역사교육에서 비롯한다면 일본 역사학계는 지금이라도 이를 바로잡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마땅하다. 피해국의 역사학도 그 실체 파악에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바른 규명 없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공존체제를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한중일 3국 역사학계의 반성과 협력관계가 절실한 사항이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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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2-26 0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덟권 다 보셨군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님이 보셔서 알았습니다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한국이라고 역사를 제대로 알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역사학자도 하나가 아니고 여럿으로 나뉘기고 하고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 사람도 있더군요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2-26 09:54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아무래도 학술연구서라 대중역사서처럼 널리 읽힐 수 있는 형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역사서들을 통해서 통용되는 역사 서술을 보충하고 가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라 계속 이런 책들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중일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에밀리 디킨슨 시 읽기 - 그 녀석은 이 왕관을 만질 수 없어
나희경 번역 및 해설 / 동인(이성모)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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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에밀리 디킨슨 시의 세계를 모두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역자의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나처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시들을 접근하기에 좋다. 자연의 묘사는 독특했고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시선에는 동정을 느꼈다. 시인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도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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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킨슨의 시는 읽을 때마다 사물과 사람 세계관이 다르게 보입니다 ㅎㅎ
화가님 디킨스 입문 시작!^^

거리의화가 2022-12-26 09:45   좋아요 1 | URL
디킨슨 어떤 시는 전체가 다 아리송한 것도 있는데 어떤 시는 단어 선택이 기막히게 좋은 것들이 있더라구요. 물론 역자의 해설에 도움이 있어 ‘아~‘한 것이지만...ㅋㅋ
 
The Last Cuentista : Winner of the Newbery Medal (Paperback, 영국판) -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원서, 2022년 뉴베리상 수상작
Donna Barba Higuera / Piccadilly Pres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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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사람이 남았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과거를 들려줄 이들은 사라졌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이를 통해 과거는 전승될 것이고 현재와 미래는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역시 풍경을 묘사한다거나 재치 있는 표현들은 원서로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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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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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없는 맹목성은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을 위태롭게 만든다. 환이와 길상이를 보면서 둘은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았지만 그런 면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김훈장과 강포수, 월선이가 떠나갔다. 이동진의 조국에 대한 고뇌, 아이들의 성장을 보며 세월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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