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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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일은 무엇보다도 침묵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이다. 첫째로 나의 언어가 아니라서 들리지 않던 침묵하는 말이 들리게 한다. 번역가는 에코처럼 숲속 깊이 숨어 있어 눈에 보이지 않고 나르키소스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지만, 나르키소스의 혼잣말을 멀리,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한다. 또 번역가는 원저자의 언어만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침묵까지 번역한다. 번역은 언어의 빈틈을 다룬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읽고, 그 의미를 번역된 글의 여백에 눈에 보이지 않게 다시 침묵으로 담는다.

한 분야에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밟아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편이다. 작가는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후 20여 년 넘게 꾸준히 그 일을 해왔다. 그 열정과 노력만으로 이미 대단한데 그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계속 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작가의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어떻게 해서 번역가의 일을 하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주변에 영향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부딪쳤을 때 잡혀갈 뻔한 위기에서 자초지종을 영어로 설명하여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일로 아버지는 오히려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그 시절 아버지의 안목과 혜안이 탁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자구적으로 찾아 나가셨던 것이니까. 아무튼 놀라웠다.

번역가는 유독 호평보다는 혹평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번역이 무난하거나 좋을 때는 별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반대라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번역서에는 번역에 관련된 평이 상당수를 차지하니 번역가들은 다른 번역가나 독자의 의견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가는 늘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고민하며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발터 벤야민 같은 경우는 원문에 대한 직역을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문이 어떤 장르에 속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문학 같은 경우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해야 하는 만큼 독자의 이해에 맞춰 의역 쪽에 가깝게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문학(특히 시)은 직역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근대화를 경험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번역의 원문 충실성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대로 온라인 서점이 성장하면서부터는 독자 리뷰나 블로그 등을 통해 오역 논쟁이 벌어지니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AI번역까지 등장했다. 물론 AI 번역에 대해서는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계 번역은 방대햔 양의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난한 번역은 가능할지 몰라도 특별하고 유일한 번역이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시대에 따라 문화가 변하는 것처럼 언어도 멈춰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번역서도 시대의 요구사항에 따라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지금까지의 번역 연구가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대한 문제로 지적했다. 실제로 식민화 과정에서 번역이 지배자의 세계관이나 통치 체계를 강제하고 식민지의 언어와 문화를 왜곡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역할을 했음에도 번역 연구는 그 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문화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예전처럼 위계에 따른 묘사를 답습한다면 그 번역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어 책이 외국에 번역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가 논쟁에 휘말린 것처럼 과거의 이론이나 가부장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책을 번역할 때는 오늘날에 맞춰 변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번역에 대한 역사(번역의 방법에 대한 차이), 번역가의 입장에 대한 이해 등을 충실히 담고 있다. 번역서를 많이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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