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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象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있다. 여자는 마주하는 모든 현상을 그저 흘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언젠가는 시각을 상실하게 될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다. 둘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나는 당신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A라고 말했는데 상대는 A’라고 받아들이거나 아예 다른 B나 C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때일까 종종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도 낯선 환경 속에 있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고 또는 불편한 환경에 자리할 때 애써 말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처럼 너무 큰 일을 겪어 충격 속에 스스로 말을 가두는 경우도 존재할 것 같다.
한편 서서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떨까. 가끔 눈앞이 희미해지고 부옇게 보일 때가 있는데 나는 그것만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내 눈이 앞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지난 봄부터 그녀가 밤마다 들이마신 공기 속에 떠돌고 있었을, 호흡기 속으로 무심히 들어와 아직 깜박이고 있을 극미량의 발광체들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세포들의 틈을 희미하게 밝히며, 투명하게 관통하며 떠돌아왔을 원소들을 알지 못한다. 제논과 세슘137. 반감기가 짧아 곧 사라졌을 방사성 요오드131. 혈관 속을 끈질기게 흐르고 있을 뭉클뭉클하고 붉은 피의 입자들을 알지 못한다. 캄캄한 폐와 근육과 장기들을, 세차게 펌프질하는 뜨거운 심장을 알지 못한다.
조각난 기억들이 움직이며 무늬들을 만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한 순간 단호히 합쳐진다.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멈추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냉정한 무희들처럼.
시간이 흐른 기억은 대부분 조각나 있다. 일부는 훼손되고 일부는 잃어버린 채. 그래서 완전한 기억은 있을 수 없다. 그 불완전한 기억이 사로잡는 슬픔이 존재한다.
불완전한 기억의 슬픔을 떠올린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제는 잊혀져버려서 괴로운 슬픔과 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선명한 사진처럼 되짚게 하는 슬픔 말이다.
한강의 작품 중 네 권(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은 꼭 다 읽어내고 싶었는데 이 책을 완독하면서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했다. 개인적으로는 4권 중 <소년이 온다>가 제일 좋았는데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너무 강해서였을지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이 책을 순위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번 내 마음을 훔쳤고 감정이 일렁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와 소설 중간 쯤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가 들어가있기도 하지만 어미의 동어 반복형 문장을 통해서 마치 시를 읊는 듯한 경험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약간은 묘한 것이 맛이 느껴지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대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을 법한 딱딱한 어미를 볼 때가 있어서 그랬다.
앞선 소설들과 비슷하게 교차적 편집 구성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가 바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니다. 문장 자체는 긴 호흡을 가지고 있으나 다음 문장이 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템포 또는 두 템포 있다가 다음 내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매력이 있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