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斷≫에 말하였다.
" 광무제가 천명을 받는다는 符書에 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皇室을다시 일으켰는데, 昆陽에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그 武勇에 감복하였고, 司隷로 洛陽에 들어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度量에 감복하였고, 符節을 잡고黃河를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그 德에 탄복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중흥의근본이다. 그러므로 宗廟 社稷을 다시 수복하여 옛 물건을 고치지 않은 것이다. 즉위한 뒤에는 맨 먼저 卓茂를 太傅로 삼아 德侯에 봉해서 당대에 循吏가 많았고, 천하가 대략 평정되자 즉시 太學을 일으키고 친히 왕림하여 시찰해서 東都(洛陽)에 儒學이 성하였고, 세 處士(周黨,王良,王成)를 불러말년에 선비가 많았으니, 漢나라를 제사하여 하늘에 配해서 2백 년의 기업을 드리운 것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사랑으로 皇后와 太子를 폐하고, 참소하는 말을 따라서 息侯(馬援)의 印綬를 거두고, 도참을 믿어서 끝내 봉선을 일삼았으니, 이 세 가지는 盛德의 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폐출한 皇后의 母子와 친당에 은혜를 가함에 이르러서는또 후세의 임금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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